*경종 10타
<개회> 사회자
<법신불전 헌배> 일어서서 대례
[기도]
<입정>
<영주>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기원문>
<심고>
<독경>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법어봉독>:698쪽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제15 유촉편(遺囑編) 16~17장
유촉편(遺囑編) 16장
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한 사람이 "양류천사록(楊柳千絲綠) 도화만점홍(桃花萬點紅)" 이라는 글귀를 지어 놓고 스스로 만족하거늘, 그 스승이 보고 말하되 "양류가 어찌 천실 뿐이며, 도화가 어찌 만점 뿐이리요. 양류사사록(楊柳絲絲綠) 도화점점홍(桃花點點紅)이라 하라" 하여 그 글을 크게 살렸다 하나니, 법문을 기록하고 편찬하는 이의 크게 유의할 이야기니라.]
유촉편(遺囑編) 17장
병상에서 학인들의 성가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내 어려서 천어처럼 생각되기를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리라"하였더니 옛 성인도 "풍기를 바루고 시속을 바꾸는 데에는 풍류 같음이 없다"하셨나니라. 성가를 일종의 노래로만 알지 말라. 그 속에 진리가 들어 있나니, 그 가사를 새기며 경건히 부르라.]
< 일상수행의 요법 대조> (p54)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성가>
28장: 구름이 가리어도
<설법> 창산 김진성 교무
돼지사육과 산 경전 / 이동안 선진
이동안[李東安, 1892~1941]
주요약력
본명은 형천(亨天). 법호는 도산(道山). 법훈은 대봉도. 1892년 12월 22일에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경현(景玄)과 모친 김남일화(金南日華)의 5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 1923년(원기8) 10월 1일 출가. 불법연구회 농업ㆍ상조ㆍ산업부장ㆍ보화당(대표이사)ㆍ수위단원 역임, 법랍 18년.
생애 및 활동
이동안은 어려서부터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수학했으며 천성이 인자하고 세밀하여 타인의 세정을 잘 알아주었고 감화력과 포용력이 풍부했다. 누구보다도 사업역량이 뛰어났던 이동안은 농촌운동가로서 향리인 신흥마을에 야학을 실시하여 문맹퇴치에 힘썼다. 26세되던 1917년(원기2)에 이동안은 8촌 형인 이재철(一山李載喆)의 인도로 영산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사은에 관한 법설을 듣고 출가 수행할 뜻을 세웠다. 이동안은 1920년(원기5) 3월에 소태산의 지시에 따라 신천리에 묘량수신조합(守信組合)을 설립하고 신흥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1923년(원기8) 10월에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당시 교단은 생활대책이 없어 엿장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동리 아이들에게 먼저 엿을 몇 개 주고 ‘엿 사시오’를 대신 부르게 한 뒤 엿을 팔았던 일은 후일 감동 깊은 일화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서중안이 경영하는 김제의 ‘한약방’에서 한약방 운영의 실무를 익히기도 했다. 1927년(원기12)에는 신천리 ‘수신조합’을 해체하여 총부재단에 편입시키고 총부건설에 온 힘을 다했다. 이동안은 1928년(원기13)에 총부 서무부장으로 시작하여 농업부장ㆍ상조부장ㆍ육영부장ㆍ보화당(대표이사)ㆍ산업부장의 중책을 역임하면서 교단창립 과정에 있어서 사업계의 큰 공적을 남겼다.
1934년(원기19) 8월에 창설된 ‘보화당 한약방’은 이동안의 노력이 절대적인 역할이 되었다. 보화당은 소자본으로 경영하게 되어 미미한 기업체였으나 나날이 발전하여 많은 이익을 내어 익산 군내에서 건재 약국으로는 단연 왕좌를 차지했다. 1937년(원기22) 8월 1일자 ‘조선일보’는 논평하기를 ‘보화당에서는 1년 이상이 지난 일체의 약재를 버리고 항상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치료에 백발백중할 뿐만 아니라 일반 빈민에게는 무료시술을 하기 때문에 발전하며 이는 45세된 이동안 대표(주무)의 공익을 위한 희생적 분투와 지덕이 겸비한 노력의 대가(代價)’라고 했다.
이동안은 빈약한 자본을 가지고도 근검절약과 용의주도한 경영으로 하는 일마다 번창했다. 1930년(원기25)에는 산업부장으로 있으면서 삼례에 7만여 평의 기지를 확보하고 삼례과원(현 수계농원)을 만들었다. 산업부장으로 재직 시 일하러 온 인부들에게 그냥 일만 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근기에 맞게 법문을 쉽고 적절하게 이야기해주어 일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했다. 사업상의 외교를 할 때에는 상대방을 오직 성실과 덕으로 감화시켰다. 근심과 괴로움을 가진 후진을 보면 새 힘과 용기가 나도록 격려했으며, 아랫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여 쓸 줄 알았다.
원불교가 수도하면서 일하는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동안과 같은 헌신적 봉공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안은 1926년(원기11) 35세시 박세철의 열반으로 인하여 정수위단원에 보선되었다. 평소 염불과 사색을 즐기며 《대학(大學)》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애송했다. 이동안은 권위의식이나 상하의 차별이 없이 누구를 대해도 그 사람의 성격과 특기를 알아서 기국을 터서 열어 주고 특성을 살려주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운 사업도 능히 이루어졌고 모든 사람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포근한 자비의 화신이었다.
자비ㆍ지혜ㆍ용단ㆍ지조가 겸비했던 이동안은 대하는 사람마다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무출신의 가정이 잘되어야 공사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 하여 틈틈이 전무출신 사가를 보살펴 주었고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교단의 일은 막중하고 아직 앞길이 창창한 49세에 감기처럼 시작한 이동안의 병세는 깊어져 위독해졌다. 한ㆍ양방으로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약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941년(원기26) 5월 8일에 열반에 들었다. 그 유가족과 동지들의 통곡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동안이 열반하매 대종사 한참동안 묵념하신 후 눈물을 흘리시는 지라 제자들이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하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까지 상하기야 하리요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도다. 이 사람은 초창 당시에 나의 뜻을 전적으로 받들어 신앙 줄을 바로잡았으며, 그 후 모든 공사를 할 때에도 직위에 조금도 계교가 없었나니라”(《대종경》 실시품33) 했다. 이처럼 이동안은 소태산의 사랑과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다.
소태산의 법문처럼 직위에 끌리는 일이 없어, 총부의 부장이나 지부의 부장이나 보화당이나 산업부의 일이나 기타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복종했으며, 시골이나 도회지나 지방의 좋고 나쁜 곳도 택하는 일이 없는 모범적인 전무출신이었다. 이동안은 당시의 여러 선진들처럼 문필을 통한 작품을 남긴 것도 별로 없고 각 교당을 순회하며 설교 강연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오직 교단의 두 방향인 공부와 사업 중 사업발전에 일생을 바쳤으나 자신의 수행에도 철저했다.
이동안은 교단 초창기에 입참하여 견실한 신심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후일 친자녀인 정만, 광오, 성신, 철행이 전무출신했으며, 신천리 함평이씨 가운데 수십 명이 출가하여 교단 초석이 되는 바탕을 만들었다. 1964년(원기49) 10월 제9회 수위단회에서는 이동안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韓正釋〉
대종경(大宗經)
제4 인도품(人道品)2727
대종사 산업부에 가시니 목장의 돼지가 퍽 야위었는지라 그 연유를 물으시매, 이 동안(李東安)이 사뢰기를 [금년 장마에 약간의 상한 보리를 사료로 주는 동안에는 살이 날마다 불어 오르더니, 얼마 전부터 다시 겨를 주기 시작 하였삽더니 그 동안 습관들인 구미를 졸지에 고치지 못하여 잘 먹지 아니하고 저 모양으로 점점 야위어 가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곧 산 경전이로다. 잘 살던 사람이 졸지에 가난해져서 받는 고통이나, 권세 잡았던 사람이 졸지에 위를 잃고 받는 고통이 이와 다를 것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이 인간 부귀를 심상시하여 부귀가 온다고 그다지 기뻐하지도 아니하고 부귀가 간다고 그다지 근심하지도 아니하였나니, 옛날 순임금은 밭 갈고 질그릇 굽는 천역을 하던 사람으로서 천자의 위를 받았으나 거기에 조금도 넘치심이 없으셨고, 서가세존께서는 돌아오는 왕위도 버리시고 유성 출가하셨으나 거기에 조금도 애착됨이 없으셨나니, 이 분들의 부귀에 대한 태도가 그 얼마나 담박하였으며 고락을 초월하는 힘이 그 얼마나 장하였는가. 그런즉, 그대들도 도에 뜻하고 성현을 배우려거든 우선 편하고 우선 즐겁고, 우선 권세 잡는 데에 눈이 어둡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사양하며, 설사 부득이 그러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고 타락하지도 말라. 그러면 참으로 영원한 안락, 영원한 명예, 영원한 권위를 누리게 되리라.]
<성가>
134장: 둥그신 임의 광명
<공고>
<생활결의 구호>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성가>
102장 : 저희들이 이 불사로(回向의 노래)
<폐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대력을 얻어 성불제중(成佛濟衆)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