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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457일 째); 단장의 능선 전투-5 오늘의 전황(1951.9.24) * '단장의 능선 지역 전투' 치열, - 양구 북방, 고지 탈환전 반복 계속- * 서부전선, 비교적 평온.
단장의 능선 전투 |
단장의 능선, Timetree 전선 모습, 1951.9.
지금의 휴전선은 이 '단장의 능선'을 확보하면서 동쪽의 '펀치볼'과 거의 같은 라인에 놓인다.
따라서 아군이 '피의 능선'까지 진출하는데 그쳤다면...
동쪽의 '펀치볼'과 서쪽의 라인을 잇는 중간이 '피의 능선'을 향해 남쪽으로 10여㎞ 내려앉는다.
따라서 적의 입장에서 볼 때 이곳은 돌출부(突出部)에 해당한다.
그렇게 전선이 이뤄질 경우 아군은 적으로 하여금 돌출부에 머물면서 우리의 전선 양측을 공격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아군의 전선은 크게 불안정해진다.
그런 점 때문에 적의 돌출부 형성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판단에 따라 미 제2사단은 '피의 능선'에서 전투를 막 마친 병력으로 하여금 다시 북상토록 한다.
미 제2사단은 그런 임무를 예하 제23연대에 부여한다.
1951년 9월 5일 '피의 능선' 983고지를 무혈점령한 제2사단은, 9월 12일까지 강원도 양구군 동면 사태리
인근에 있는 931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곧장 북상하는 길에 올랐다.
쌍방 군대가 만든 '단장의 능선'의 비참한 모습, 1951.
쫓기는 쪽은 북괴군이었다.
그들은 '피의 능선'에서 상당한 인명의 희생을 냈다.
아울러 후방 차단의 위기를 느끼고서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벗어나 급히 북상한 참이었다.
따라서 그런 북괴군이 11㎞ 북방에 있는 '단장의 능선' 일대에 견고한
방어막을 형성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1개 연대 앞세워
공격
그에 따라 선두에는 우선 사단 예하의 제23연대가 섰다.
1개 연대의 병력으로도 우선 등을 보이고 쫓기면서 북상했던 북괴군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봤던 것이다.
나머지 제9연대와 제38연대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부대였던 터라 선공에는 나서지 않았다.
사태리 일대에
있는 '단장의 능선'은 남에서 북을 향해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로 이어진 곳이었다.
미군은 공격을 벌이기 전 이곳에 대한 관측을 통해 고지 일부에만 북괴군이 들어서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따라서 그곳이 주 방어선이 아니라 전초(前哨)에 해당하는 진지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런 미군의 관측과 판단이 사실이었다면 그곳 일대에서는 격전이 벌어질 수 없었다.
미군은 여전히 북괴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강력한 화력과 장비를 보유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군의 관측 및 판단과는 영 다른 현실이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이곳 역시 '피의 능선' 못지않은 인명의 희생이 나왔던 곳이다.
전투 기간으로 볼 때는 오히려 한 달 정도 접전을 벌여야 했던 진지였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미군은 역시 오판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북괴군은 그곳에 '피의 능선'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방어망을 이어 놓은 뒤 아군의 북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의 지휘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실수였다.
들어오는 정보와 관측 자료 등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그 안에는 적의 기만과 은닉에 의한 내용의 오류 등이 들어있을 수 있다.
지휘관은 그런 점을 감안해 늘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내 판단이 맞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방책 또한 많이 품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아무튼 미군은 북괴군의 방어망이 대단치 않으리라는 판단에서 급히 제23연대를 북상시켜
사태리 일대에 있던 험악한 산악 고지인 '단장의 능선'을 향하도록 했다.
북괴군은 9월 5일 '피의 능선' 983고지에서 몰래 빠져 나온 뒤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방어망을 이루도록 했다.
단장의 능선 전투, 아트웍 콘테스트 중에서, 한 작품
휴전회담 진행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전개된 UN군의 제한전쟁은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을 2년여나 더 끌게 했고
이 기간동안 전선은 수 많은 젊은 병사들의 피로 물들여졌다.
- 결과 -
이 전투로 북괴군 2개 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미 제2사단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공산측의 돌출부(突出部)를
제거하여 전선을 정리/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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