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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길
wy3974@hanmail.net
경남 산청출생
남강문학 수필 등단
남강문학협회 운영위원
진등재문학회 회원
전)경남 통영교육장(정년퇴임)
전)창원중앙고등학교장 역임
전)한국국제대학교 외래 교수
<수상 소감>
고향, 그리움의 원천
박태길
운동 삼아 매일 광려천 둘레길을 걷습니다. 광려천에는 야생화도 예쁘지만 돌 틈 사이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참 정답게 들립니다. 어제는 이 길에서 “에세이스트 115호 신인상 수상작”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들뜬 마음에 시냇물 소리 들으며 진종일 꽃비를 맞았습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 남사예담촌을 찾았습니다. 남사예담촌은 꿈속에도 찾아 헤매는 내 그리움의 원천입니다. 어린 시절 뛰놀던 산과 들, 멱감고 물놀이하던 시냇가, 징거미 퉁사리 잡던 그 어느 하나도 내게는 예사로울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오늘따라 한평생 고향 떠나 살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뭇생각으로 새삼스레 눈시울이 젖습니다.
봄이면 고향 마을 남사예담촌에는 매화 구경 온 사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나도 그 행렬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슬쩍 끼어들었습니다. 이를 눈치라도 챈 것일까요. 돌담장 너머 ‘원정매’가 이 마을이 품은 전설을 다소곳한 연분홍 풍경화로 그려줍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마을 전경을 살피려 이구산 위 ‘망추정’에 오릅니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경호강 강가에는 성철스님의 생가와 ‘겁외사’도 보입니다. 저 멀리 당산 자락 아래 삼백헌(三白軒) 정자 옆으로 눈을 돌리면 내 아호(雅号)와 관련한 북바위(鼓巌)가 얼굴을 보여줍니다. 북바위를 보고 있노라면 불현듯 ‘사수천’을 건너던 초등학교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철부지 소녀와 나누었던 옛이야기가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풋내나던 그때 추억이 아롱다롱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사수천은 넓은 대지를 휘돌아 마을을 따라 흐릅니다. 이 그림 같은 풍경은 정지용의 詩 「향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나도 이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백남오 교수님, 함께 공부하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문우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한 가족으로 품어주신 문학지 『에세이스트』 사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두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당선작품>
북바위
박태길
이구산(尼丘山) 선영, 성묫길이다. 지리산 천왕봉 줄기인 웅석봉이 품어 내린 이구산은 그 이름만 들어도 푸근한 사랑이 느껴진다. 늦가을 저녁노을에 비친 고향 풍경은 정겨워 옛 시절 그대로다.
아내와 함께 야트막한 산자락을 오르는데, 오늘따라 조심스럽고 힘이 든다. ‘세월은 그냥 흐르지 않는다’라고 툭 던진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왔나 보다. 가까스로 올라온 선영에는 조상님들이 옹기종기 이웃으로 잠들어 계신다. 이곳은 언젠가는 내가 잠들 안식처이면서 후대까지 이어질 영혼의 터전이다. 발아래 황금 들녘에는 벼 이삭이 다소곳이 영글어 가고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물결로 한결 넉넉해진 산과 들이 풍성한 가을을 말해준다.
오늘은 성묘하고 가는 길에 당산자락에 있는 북바위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북바위는 내 호(号)인 고암(鼓巌)과 관계가 있을뿐더러, 의미 있는 전설을 품고 있다. 성묘를 마치고 조심스럽게 이구산을 내려오는데, 발 앞에 탐스러운 밤 한 톨이 툭 떨어진다. 황혼의 우리 부부에게는 은혜롭기만 하다. 일 년 내내 비바람으로 가꾸고 서리 내려 다듬은 알찬 밤톨이다. 자연이 내려준 신비로운 선물 아닌가 싶어 몇 톨을 주워서 손에 들고 보니 그저 푸근하고 고맙기만 하다. 까막까치들이 머리 위를 바삐 돌며 까~악까~악 노래한다. 잘 가라는 작별 인사인가 보다. 어쩌면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가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당산자락을 오른다.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동차들이 국도 20호선으로 미끄러지듯 달린다. 옛날에는 흙먼지가 뿌옇게 날리던 좁은 길이었지만, 어느새 아스팔트 길로 변해있다. 근방에 북바위가 보이고, 너럭바위 위에 얹혀있는 노거송(老巨松)이 듬직한 자태를 뽐낸다. 까마득한 철부지 시절에는 범상치 않은 저 북바위와 노거송 앞에서 남몰래 꿈을 키웠다. 그런가 하면 놀이에 빠져 해 저무는 줄 몰랐던 악동들이 어둠을 타고 둥둥둥 울리는 듯한 북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한 적도 많았다. 북소리는 마치 귀신이 우는 소리 같아 세상 무엇보다도 두렵고 무서웠다. 그럴 때는 오금이 저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집으로 내달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웅∼웅 거리는 북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은 저 북바위를 ‘북바구’라 불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북바위의 북 자가 타악기인 북(鼓)의 북 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월 대보름이면 농악 놀이패가 이웃을 돌며 시끌벅적하게 북 치고 장구 치고 요란했지만, 그 소리가 북바위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다만, 이 마을에서 경사가 나기 전에 북바위가 크게 울렸는데, 그럴 때마다 어느 양반집 자손이 큰 벼슬을 받았다는 전설만 귀에 담고 자랐을 뿐이다.
북바위 바로 위에는 삼백헌(三白軒) 정자가 있다. 정자 기문(記文)에는 사촌(沙村) 박규호 선생을 칭송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모래도 희고 달도 희고 그 사람도 희다’라는 글인데 사촌 선생의 고결한 성품을 존경한 면우 곽종석 선생이 썼다고 한다. 두 분은 어릴 때부터 이 마을에 살았고, 3·1 운동을 함께 하면서 막역한 지기가 되었다. 이후 나이가 들어서는 이름 대신 서로 자(字)나 호(号)를 불러가며 친밀한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당시는 사대부 자녀들이 결혼 후 청년기에 자를 지어 이름을 대신하여 부르고, 중년을 넘어설 때부터는 호를 지어 불렀다. 두 분 역시 서로 존중하는 뜻을 담아 호칭하면서 두터운 교분을 쌓지 않았나 싶다.
나는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이름 대신, 호(号)나 자(字)를 만들어 부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예순을 넘기고 일흔이 되어갈 무렵, 삼백헌 정자에 와서 두 분 선생에 관한 내력을 읽고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 아닌, 다른 호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세월에 걸맞은 호칭은 이름보다 호라고 여겼던 때문이었다. 이후 고암(鼓巌)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이 호를 갖고자 또 수년을 고심했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나는 이구산 선영을 내 뿌리로 생각하며 자랐고, 삼백헌과 북바위는 내 꿈을 키운 동산이라 여겨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학설은 아니지만, 북바위의 신묘한 전설에 끌렸던 게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스며있는 내 안의 이미지가 그대로 각인되지 않았나 싶다.
고암이라는 호를 가진 후부터 나는 이구산 선영이나 고향의 혈연과도 뗄 수 없는 끈끈한 인연으로 묶였다고 생각하였다. 또 내 호인 고암(鼓巌)이 나의 본향이며 꿈의 동산이었던 북바위의 전설을 후대까지 장구히 이어주기를 바랐다.
오늘 북바위를 다시 찾아와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제 내게 바람이 있다면 여생은 후손들에게 놀이터가 되어주고 꿈을 심어주는 또 다른 듬직한 북바위로 살고 싶다.
<심사평>
박태길의 「북바위」
박태길이 응모한 작품 중에서 「북바위」를 신인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이름 대신 호(号)나 자(字)를 만들어 부른다는 걸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일흔이 되어갈 무렵에서야 고향의 삼백헌 정자에 서린 전설을 듣고 다른 호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후 북바위를 한자음으로 한 고암(鼓巌)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까마득한 철부지 시절에는 범상치 않은 저 북바위와 노거송 앞에서 남몰래 꿈을 키웠다. 그런가 하면 놀이에 빠져 해 저무는 줄 몰랐던 악동들이 어둠을 타고 둥둥둥 울리는 듯한 북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한 적도 많았다. 북소리는 마치 귀신이 우는 소리 같아 세상 무엇보다도 두렵고 무서웠다. (중략)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은 저 북바위를 ‘북바구’라 불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북바위의 북 자가 타악기인 북(鼓)의 북 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월 대보름이면 농악 놀이패가 이웃을 돌며 시끌벅적하게 북 치고 장구 치고 요란했지만, 그 소리가 북바위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다만, 이 마을에서 경사가 나기 전에 북바위가 크게 울렸는데, 그럴 때마다 어느 양반집 자손이 큰 벼슬을 받았다는 전설만 귀에 담고 자랐을 뿐이다.
화자에게 북바위는 젊은 시절에는 꿈의 상징이었고 장년기에는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현재는 후손들에게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 물려주고 싶은 소망이 되었다. 결국 화자에게 북바위는 평생을 지켜온 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화자의 고향은 지리산 천왕봉 줄기인 웅석봉이 품어 내린 이구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다. 이구산 선영을 뿌리로 생각하며 자랐고, 북바위는 꿈을 키운 동산이라 여기며 자랑스러워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학설은 아니지만, 북바위의 신묘한 전설을 믿고 또 믿었다. 어릴 때부터 내면 깊이 스며든 이미지가 체화된 것이다. 더구나 고암이라는 호를 가진 후부터는 고향의 혈연과는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였다는 생각을 좌우명처럼 간직하게 되었다. 이제는 화자의 호가 된 고암(鼓巌) 북바위의 전설이 후대까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많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수필에서 체험이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소재의 나열만으로는 안 된다. 그 소재를 해석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문장이 젊고 서정적이며 단단하다. 모든 문학작품에서 문장은 가장 기본이다. 작가에게 문장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박태길은 문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마지막으로 문학에 대한 강한 열정이 느껴진다. 화자는 이 작품 한 편을 쓰기 위하여 산을 오르고 또 오르며, 고향을 몇 번씩이나 방문하고 전설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끝없는 독서와 공부에 매진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가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들이다.
평자는 박태길 선생의 문학 입문에서부터 지금까지 가장 가까이서 줄곧 지켜보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늦게 시작한 문학에 몰입하는 모습이 매우 감동적이다. 특히나 교육계에서는 최고의 지위까지 오르고 퇴직했지만, 일체의 권위 의식을 버리고 젊은 작가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노력하고 소통하는 모습에서 또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다. 작가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진취적인 덕목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과거에 매달려 귀중한 오늘을 낭비하는 숱한 사람들도 있다고 본다면 이는 매우 선각자적인 자세이다.
박태길 작가의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자부심을 잃지 마시고 전국의 무대에서 작가의 꿈을 마음껏 펼치시길 바라고 응원한다.
* 심사평/ 백남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