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가리 청동기 유적지를 답사하고 다케오로 향했습니다. 다케오는 1300년 전통의 온천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원래는 다케오에서 규슈 올레길을 조금 걸어보고 온천을 할 계획이었으나 종일 비를 맞으며 낯선 곳을 돌아다니느라 힘들었고 시간도 늦어서 걸을 수가 없어서 바로 온천으로 직행했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동네 목욕탕과 흡사합니다. 탕도 조그만하고.. 그래도 온천욕을 하고 나오니 피로가 말끔하게 가시더군요. ^^ 다시 기운을 차려 사가로 가서 예약된 호텔에 찾아가 답사의 첫날밤을 지냈습니다.
둘째날은 아리타로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리타는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마을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막부시기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일본을 유럽에 알리게된 명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러한 발전에 중심적인 공로를 세운 이는 정유재란 때 붇들려가서 일본에 도자기를 처음으로 만들어준 조선 도공 이삼평과 이름 모를 수천 명의 조선 도공들입니다.
아리타의 지역 유지들은 아리타 도자기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조선 도공 이삼평을 도잔신사에 모셨고, 그의 기념비를 신사 위의 산 위에 우뚝 세웠습니다.
아리타역사. 아주 조그마한 시골역이다.
아리타역에서 안내지도 한장과 자전거를 빌려서 도잔신사로 향했다. ^^
월요일 아침 거리는 한산하고 왕래하는 차도 뜸했다.
아리타역에서 15분쯤 달리자 철로변에 '도잔신사'(도잔= 도자기의 산)가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가서 철로를 건너면~
도잔신사. '스에야마 진자'라고도 하고, 훈독하여 '도잔 진자'라고도 하는데, 유홍준 교수는 도산신사로 표기했다. 350년 연륜이 쌓인 고색창연한 신사로 사라야마산 중턱에 있어 진입로가 매우 가파르다. 역시 도리이가 굳게 서있어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고 있다.
도잔신사 주제신은 응신(오진)천황이고, 상전신은 이삼평공이라고 적혀있다. 일본은 위대한 인물이 죽으면 신으로 받드는 '신도' 사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본에는 수많은 신이 있고, 이들을 모시는 수많은 신사가 자리잡고 있다. ㅋ~
도자기 신을 모신곳인지라 여기저기 도자기 작품들이 널려 있다.
다시 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제당이 나온다.
도자기로 만든 거대한 도리이가 위압적으로 우리를 마중한다. 19세기말 히에코바 마을의 유지들이 기증한 것인데, 일본 도자기 산업이 정점에 달해 우리나라에서도 왜사기라는 이름으로 도자시장을 석권해갈 때여서 이런 장대한 도자기 도리이를 세울 수 있었다고 유홍준 교수는 추정하고 있다. 1956년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4년 후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했다.
데미즈야. 경배하기 전에 손과 입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도잔 신전. 여기는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신관만이 들어갈 수 있다. 1658년 건립되어 사가번의 초대 번주인 니베시마 나오시게와 도조 이삼평을 기존의 오진(응신)천황과 모시면서 '도잔 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좌우 석등 아래로 '고마이누'가 있다. 고마이누는 수호신으로 당사자처럼 생겼는데 한자로는 고려견이라 쓰기도 하여 고려에서 영향받았다는 설도 있다.
1917년 이 지역 유지인 후카가와 로쿠스케가 아리타 요업 30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삼평을 도조(도자기의 조상)로 추앙하고 주민의 동의를 얻어 오진천왕과 사가번주와 함께 도조 이삼평을 신사로 모시게 되었고, 이름도 '도잔 신사'로 바꾸었다.
가운데 주신이 오진천황이고 왼편이 이삼평인듯하다. 그 앞에는 술 이외에도 도자기가 많이 놓여 있었다. 일본 신사에는 매년 정초에 새로 빚은 술을 헌상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신사 뒤로 언덕을 올라가면 '도조 이삼평비'가 나온다. 이곳을 '도조의 언덕'이라고 한다.
그 앞에서 우리 가족은 묵념을 올렸다. 수천리 머나먼 타국땅으로 끌려와 숱한 고초를 겪으며 도자기를 만들었을 이삼평공을 기리며...
'도조 이삼평 비'는 1917년 도잔신사에서 신위를 모시면서 함께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매년 4월말에서 5월초 5일간 '아리타 도자기 시장'이 열리며 5월 4일에는 '도조제'를 지내고 있다. 일본 자기의 세게를 연 조선 도공 이삼평에 대한 고마움을 아리타 사람들이 이렇게 기리고 있다. 일본 이름 가나가에 산페이 대신에 본명 이삼평을 되찾아 주었고 그르 도조로 추앙하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특히 1910년대는 조선을 점령한 일본이 어떻게든 조선을 깎아내리려던 시절인데 이곳 아리타에선 반대로 이삼평이라는 조선 이름을 되찾아 사용했으니...(이상은 유홍준 교수의 책에서 인용)
"이삼평은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휘하로 전쟁에 참여한 히젠국 사가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끌려 이곳에 왔다. 나베시마의 가신이자 사위인 다쿠 야스토시에게 맡겨졌으며 금강도 출신이라서 가나가에 산페이라는 일본명을 얻는다. 다쿠 밑에서 18년간 도자기를 만들면서 지내다가 1616년경 아리타 이즈미야마에서 최상급 원료인 백토광을 발견하였고, 일족 18명을 데리고 가미시라카와 덴구다니로 옮겨 백자를 만들었다." (유홍준, 142쪽)
도조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아리타 마을.
산과 산사이의 보잘 것 없는 산간 마을이 도조 이삼평의 덕택으로 세계 굴지의 도자기 마을이 되었다.
1650년 일본 도자기 145개 나가사키에서 해외로 수출됨. 1659년 네덜란드와 56,700개의 도자기 게약 체결. 1672년 가마 180개소 대성황.
도산
눈 아래 가옥들은 즐비하게 늘어 있고
가마의 연기는 발 아래 일어나네
솔바람이 그것을 떨어뜨리듯이
도조 이삼평은 도산에 눌러 계시네
(1918년 이곳 군수가 지은 5언 절구)(유홍준, 139)
도조 이삼평비를 건립한 아리타 마을 유지들
도잔신사 사무소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부적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도잔신사와 도조이삼평비를 답사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아리타역까지 내려오면서 거리에 즐비한 도자기 가게를 구경하였다. 좀 마음에 든다 싶으면 가격이 엄청나서 구입할 수가 없다. 그냥 눈요기만 하고 가장 싼 것 몇 가지 기념으로 사들고 왔다.
아리타관 안에 전시된 명인들의 작품
이 가게에 들어가 접시 한 점을 샀다.
화장실 변기도 도자기 마을답게 독특하다. ㅋㅋ~
유교수는 '사가현립 규슈 도자문화관'을 꼭 들러보라고 했지만 마침 월요일 휴관이라서 안타깝게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게에 내놓은 상품만으로도 화려하고 섬세하며 은은한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아리타에는 이즈미야마 자석장, 석장신사, 여자도공 백파선, 이마리야키 등등 더많은 유적지가 소개되었으나 오후에는 나가사키로 내려가기로 계획이 되어 있어서 아쉽지만 여기까지만 보았다.
이삼평의 가문은 5대까지 가업이 이어져 오다가 12대까지 근 200년간 가마 작업을 하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 13대손이 열차 기관사를 정년하고 다시 가마를 열었다고 한다. 유 교수는 10년전 이 분을 만났고 가게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쓸쓸히 제작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아리타. 이곳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으나, 요시노가리가 벼농사와 청동기 문화를 전해준 유적지라면, 아리타는 비록 전쟁의 희생양으로 적국에 끌려와 살았지만 조선 도공(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의 기술과 정렬을 다바쳐서 일본 아리타 도자기 산업의 토대를 굳건하게 마련하였고, 그 뒤로 300년이 지나자 마을 주민들에게도 공로가 인정되어 '도조 이삼평'으로 존경을 받게된 역시 한일 관계사의 가슴아프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아리타에 올때마다 비가 오고 이삼평을 찾는 한국인들도 없어서 쓸쓸했다고 한다. 우리 역시 쓸쓸한 거리를 외롭게 걸었다. 인천공항에서 300여인 동승해서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지만 요시노가리에서도 이곳 아리타에서도 한국인들은 없었다.(아, 딱 두 분의 여성을 만났다 ^^::) 아마도 이날은 규슈도자문화관이 휴관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ㅎㅎㅎ
앞으로 밀리언셀러 작가 유홍준 교수의 능력이 이곳 규슈의 아리타와 요시노가리에도 미칠 수 있기를 .. 그리하여 수많은 한국 관광객이 이곳을 찾기를 기원한다. ^^
"아리타에서 이들의 번성한 도자문화를 보면 나는 은근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우리가 갖고 있던 기술로, 그것도 무명 도공들이 일본에 와서 이렇게 도자기 혁명을 일으킬 때 우린 무얼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는 역사의 회한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장인을 존중할 줄 알라는 교훈으로 다가온다." (유홍준, 175쪽)
첫댓글 아드님과 어쩜 형님, 동생 같은 느낌이 드네요. 거기에 엄마까지. 삼남매 같아요.
조선 도공 '이삼평'이 신의 반열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슬픈 과거사로 애잔하지만, 그래도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선 얼마나 대우와 존경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하네요.
인도의 힌두교도 시바신을 믿는데, 시바신은 어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일본 신사를 떠올렸답니다.
좋은 답사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동학의 가르침대로 사람을 하늘처럼 존중하면 절로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란 후에도 20년이 되도록 조선 정부는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을 쇄환시키는 일을 하였지만 차차 정착한 재일 조선인들은 귀국을 꺼려 하였고, 어렵게 귀국시킨 다음에는 전혀 돌보지 않았답니다, 그에 비하여 기술자를 우대하는 일본의 정책에 조선 도공들은 서서히 일본화되어 갔다고 합니다.
삼남매! 어울리는 표현이네요~
저도 아리타에 두번인가 갔었지요. 인상깊었던 도자기거리입니다.
올리신 사진을 보니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아하~ 이 교수님도 아리타 다녀오셨군요.
다시 가면 이마리까지 보고 이곳에서 하루 묵으며 지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더군요. ^^
이마리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