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곳은 공산성이다.
금강 바로 옆 가파르고 낮은 산에 세워진 공산성은 아기자기한 재미와 다정한 느낌을 준다.
한성에서 내려온 문주왕이 이 협소한 곳에 궁을 지어야 했던 심정은 비장하고
비참하였을 것이지만, 오늘날의 공산성은 그저 예뻐보이는 것이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진
소꿉놀이세트를 보는 것 같다.
금강 북단에서 금강교를 건너오면 공산성이 보인다.
공산성을 찾아갈 때는 시내를 거치는 것 보다 강을 건너는 편이 훨씬 성에 들어가는
분위기가 잡힌다.
주차장과 매표소가 있는 곳이 성의 서문인 금서루이다.
지난번 방문엔 벚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는데, 금서루 앞에 영산홍이 활짝 피어
달력그림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금서루는 성의 낮은 곳에 있는 문이어서 양편으로 오르는 성벽이 무척 가파르다.
토요일의 방문객을 위한 행사라도 하려는 것일까. 성벽에는 깃발이 꽂혀있고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군복을 챙겨 입고 있었다.
서북쪽에서 동쪽으로 성벽에 올라 공북루로 향하면 잔잔한 금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봄이 피오르는 강변 풍경은 간질간질 아롱아롱...포근하다.
공북루 앞 금강에는 오래된 다리 금강교가 있고 그 바로 옆으로는 훨씬 더 오래된 옛날 다리가
흔적만 남겨 놓고 있다.
일방통행이 되어버린 늙은 다리 금강교가 강물 위에 그림자를 던지면
이제는 뼈만 남은 옛 다리가 그 그림자를 받아 물 위의 다리를 만든다.
수면에 뜬 저 다리 위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가, 그림자다리가 살짝이 흔들린다.
금강에 어른대는 봄빛에 취해 성벽을 내려오니 공산성에서 유일하게 유명세를 타는 곳
만하루가 나타난다.
만하루는 북으로 금강을 두르고 남으로는 연못을 두고 있어 풍취가 남다른 곳이다.
계단식으로 돌을 쌓은 깊은 연못은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이다.
만하루와 연지를 가운데 두고 성벽은 두 갈래로 나뉘어 안팎으로 감싸며 쌓여있다.
만하루 앞에는 영은사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영은사 마당에서 연지에 이르는 좁은 길이
성벽 밑으로 남아있다.
성벽 한쪽에는 만하루의 영화를 지켜보았을 고목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공산성에서 치세를 했던 백제의 왕들은 전쟁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과연 이런 낭만적인
풍취를 즐겨보기나 했을런지...
만하루의 달밤은 정말 근사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공산은 가장 높은 곳이 110m 정도인 아주 낮은 산이다. 하지만 산세는 상당히 가파른 편이어서
왕이 거하기에 적당한 성이었을 것이다.
만하루에서 동쪽으로 오르는 성벽은 설치된 계단을 오르기만해도 숨이 차는 경사를 가졌다.
워낙에 경사가 심한 곳에 쌓은 성곽이라 실제 축조한 높이는 높지않지만 경사를 이용한 성곽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공산성은 성 안쪽으로도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성곽과 안쪽 길을 전부다 돌아봐야 비로소
성의 전체 윤곽이 잡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이층으로 화려하게 지어진 임류각이다.
임류각은 웅진백제의 부흥을 꿈꾸었던 동성왕이 지은 누각으로 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하는 연회장소이다. 그러니까 경복궁의 경회루쯤 되는 것.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왕일수록 말년에는 거만하여지고 사치를 일삼게 되는데, 동성왕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신하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이 누각을 지어 원성을 받게된다.
그리고 결국 신하의 손에 살해 당하는데...
오늘날 권력자들의 사치풍조를 생각하면 기분이 오묘해진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사치를 한들요즘 세상에서야 그토록 지탄을 받겠는가.
하물며 왕권국가에서, 영토회복을 위해 평생 노력한 왕이었는데도 말이지...
임류각에 오르면 멀리 금강 상류까지 훤히 내려 보인다.
혼란하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전쟁으로 얼룩진 손에 술잔을 들고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던
동성왕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신하의 손에 죽음을 당하던 동성왕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조금은 안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훗날의 무력한 군주들에 비하면 그래도 훌륭한 왕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말끔하게 복원된 동문루.
임류각에서 동문에 이르는 길은 백제시대에 축성한 토성이 남아있는 구간이다.
본래 웅진성은 흙으로 쌓은 성이었는데 임진왜란을 전후로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피난한 곳이 공산성이니 인조가 머물던 당시 건축한
건물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백제의 토성축조술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삼국시대 이후로 축성되지 않은 토성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대부분 백제인들이 쌓은 것들인 걸 보면... 대단한 백제인들이다.
동문루에서 남문인 진남루를 지나 약간 올라간 곳에 백제왕궁터로 추정하는 왕궁지가 있다.
사실 공산성은 너무나 협소하고 경사가 심하여서 이곳에 과연 궁이 있었을까 의심을 하게되는데
이 추정왕궁지는 참으로 아담한 궁을 연상하게 한다.
남쪽으로 멀리 계룡산 자락이 보이는 자리이니 명당은 명당이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백제왕가의 여인들은 좁고 답답한 성안에서 어떻게 하루를 보냈을까.
그들의 동선을 생각해보니 한숨이 나왔다.
아무리 금강의 풍광이 아름답고 성에서 사방으로 보이는 전망이 넓다고는 하여도 긴긴 날을
보내기엔 너무 좁았을 것 같다.
백제 부흥의 꽃을 피운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것은 그런 이유가 컸을 것이다.
국력이 신장되어 더 이상 요새같은 웅진성에 웅크리고 있을 필요가 없었을테니까.
왕궁지 남쪽 끝에는 아주 늙은 벚나무 세그루가 꽃잎을 떨구고 있었다.
수령은 짐작하지 못하겠으나 뒤틀린 가지의 형태로 보아 몹시 오래되어 보였는데, 그
럼에도 훌륭하게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된 벚나무는 처음보았다. 분명 벚꽃의 정령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나무였다.
벚나무 서쪽에는 원형의 연못이 남아있다.
둥그런 왕궁연지는 밑으로 내려갈 수록 폭이 좁아지게 자연석을 쌓았는데
크기나 형태가 굉장히 우아하여서 백제항아리를 보는 것 같았다. 늙은 벚나무가 꽃잎을 떨구어
물 없는 빈연못에 띠를 둘러 놓았다.
여기에 물이 가득 담기면 얼마나 아름다우랴...생각하다가 그 깊이를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워졌다.
우물처럼 좁지 않으니 충분히 헤엄을 칠 수 있겠지만...
차라리 바닥이 보이는 편이 조형미도 돋보이고
안무서운 것 같네...라고 생각 급변경.^^;
왕궁지에서 금서루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장난아니다.
아까 보았던 어설픈 병사들이 깃발을 손에 들고 성벽에 늘어서 있다.
불쌍한 것이, 날은 초여름 날씨처럼 더웠고 관광객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저들은 무력한 병사처럼 보였고 머리에 쓴 투구며 갑옷이 너무 무거워보였다.
공산성은 겨울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던데...
이 가파른 길에 눈이 쌓이면 어떻게 오른단 말이냐.
낙엽만 쌓여도 미끄러워서 위험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도 눈에 묻힌 공산성을 한번은 보고싶다.
첫댓글 40대 청주에 근무하면서 가 보았는데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