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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5일 금요일 <상사병, 프로 제자, 소경인 인간>
[김용호] [오전 6:07] 굿모닝입니다~^^ 주님 안에서 멋지게 한 주간을 마무리 지읍시다!
오늘 저녁에는 한휘석 형제님 아버님 빈소에 조문을 갑니다. 함께 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부친상을 당한 휘석형제님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제 수다 중 나온 기여냐 이용이냐 활용이냐는 참 중요한 대화였습니다. 제자들의 수다를 통해 조직신학이 정리되어가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열심히 수다를 떱시다~!! 수다도 사명이다~!!! ^^
무슨 일이든 하기 나름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목숨을 걸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수시로 오락가락 하는 것이 사실 큰 문제지요 항상 깨어있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고 서로 열심히 깨워줍시다~^^)
[김용호] [오전 11:57] 우리의 강점은 한번 우리와 함께 했던 사람은 비록 우리를 떠나도 다른 교회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거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돌아와도 좋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도 좋고~~
[정진호] [오후 12:00] 그 말은 우리의 조직신학과 성경해석에는 맞다고 동의한다는 것으로 봐야 할거 같아요.
[김용호] [오후 12:00] 그렇지요. 중요한 것은 다시는 서구기독교의 관념의 유희에 넘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관념의 유희의 현장에서 위장을 하고 고군분투하시는 예레미야님 화이팅입니다.
[예레미야] [오후 12:08] 화이팅입니다. 저도 박준길 형제님께 댓글 쓰겠습니다.
[정진호] [오후 12:09] 그것도 좋겠네요.
[김용호] [오후 12:10] 우리의 댓글이 마치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같군요. 예전에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었다는~^^ 제 별명이 김칼이었지만 속에는 뜨거운 감성도 있었답니다. ㅎㅎㅎ
한 죄수가 수감생활을 마칠 때가 되어 아내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만약 지금도 이 못난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면 마을 앞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하나 달아주구려. 출소해서 마을 앞을 지날 때 리본이 보이면 당신에게 갈 테고 안 보이면 그냥 지나가며 당신이 행복하기만을 빌겠소.”
그 사람이 출소 후 마을 앞에 갔을 때 참나무에 수천 개의 노란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는~~ ㅜ.ㅜ
[정진호] [오후 12:16] 실제 가사 내용이에요?
[김용호] [오후 12:16] 예 ㅜ.ㅜ
[정진호] [오후 12:17] 부인이 심부름 센타에 용역을 주었군요. ㅋㅋㅋ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텐데...
[김용호] [오후 12:18] 헉~!! 쿨한 집사님~^^ 눈물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할게요.
며칠 전 허사장님께서 봄옷을 하나 인터넷에서 주문했습니다. (새 옷을 우리는 새 전투복이라고 부릅니다.^^)
옷이 택배로 왔는데 팔뚝이 굵어 보인다고 사장님이 참 속상해 하시더라구요. (우리 사장님이 배구선수 출신이라 좀 굵어요.^~^)
막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가 해결해줄 수도 없는 문제고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ㅜ.ㅜ
[정진호] [오후 12:24] 진짜로 눈물을요?
[김용호] [오후 12:24] 남편의 그런 주책스러운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
“아니 뭐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어요?”
그러시면서 사장님도 눈물이 뚝~ ㅜ.ㅜ 우리 그러고 살아요. ㅋㅋ 하나님은 우리의 독한 마음도 쓰시고 여린 마음도 쓰신다고 생각합니다. 쿨하게 독하고 쿨하게 여린 마음으로 만드신 다음에요~^^
조금 보충 설명이 필요할 듯싶네요. 허전도사가 만약 자신의 멋을 내는 일에 굵은 팔뚝이 방해가 되어 속상해 했다면 아마 제가 독한 모드로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허전도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느라 튼튼영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여린 모드가 나간 거지요. 그리고 그 주책스러운 눈물방울이 우리를 더 한 마음으로 만들었지요.
모든 일은 어떤 것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푯대를 향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선하고 푯대를 향하지 않고 있으면 모든 것이 악하지요.
[정진호] [오후 12:34] 동의합니다.
[김용호] [오후 12:35] 그리고 순간순간의 결과도 현실에서 달라집니다. 그날 우리 부부가 만약 푯대를 향하지 않고 있었다면 아마 이런 대화가~~
“당신 팔뚝 굵은 거 몰랐어? 주책 떨지 말고 반품해!”
“아이고~ 남편이란 사람이 말하는 것 하고는!!!”
또는,
“어머? 무슨 남자가 그 모양이에요?”
“뭐라고? 지금 나를 비웃는 거야?”
[정진호] [오후 12:38] ㅎㅎㅎ
[김용호] [오후 12:38] ㅋㅋㅋ 뻔하지요, 뭐~~ 이건 인격 문제가 아니거든요. 사랑의 문제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부의 바람직한 사랑은 신혼시절로 끝나기 때문이지요. 여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뇌과학에서 주장하는 이론인데 남녀 간의 사랑을 관장하는 호르몬인 페닐에틸아민, 도파민, 엔돌핀, 노르에피네프린 등은 동일한 상대방을 향해 분비되는 기간이 맥시멈 3년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답니다. 심지어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강박증을 치료하는 홀몬 억제제를 투여하면 그 즉시 사랑이 식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이성 간의 사랑의 감정은 인간의 번식을 위해 하나님께서 꼼꼼하게 설계하신 유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제가 그날 허전도사를 보면서 떨군 눈물은 부부애라기보다는 동지애에서 비롯된 눈물의 성격이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상사병이지요. 우리 모두 쿨한 울보가 됩시다! 서로를 위해 언제든 눈물을 쏟을 수 있는 중증 상사병 환자들이 됩시다.~^^
[정진호] [오후 12:49] 아멘. 3년 동안 호르몬이 분비됨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그 기간에 많다고 하던데 얼마나 상대에 대한 미움이 컸겠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지가 짐작이 되네요.
[김용호] [오후 12:53] 그렇네요.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지요. 워낙 밑빠진 독이 커서~~ 그러면서 차차 무관심으로 변해가지요. 소 닭 보듯. 증오마저 식어버린 최악의 관계지요.
다석 유영모가 50 초반에 해혼이란 걸 했어요. 혼인관계를 해지한 거지요. 도대체 성경을 어디로 읽은 것인지 답답합니다. 무슨 꿍꿍이인가 해서 찾아보았더니 해혼이 인도 상류층의 오랜 관습이라는군요.
[정진호] [오후 12:59] 굳이 그런 걸 왜 했을까 싶네요.
[김용호] [오후 1:00] 애들을 키워 혼인까지 시키고 나면 부부의 관계라는 결속에서 벗어나 피차 자유롭게 살려는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결혼이란 번식을 위한 피치 못할 의무라는 생각인 모양인데 참 천박하군요.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는 더 천박한 모습을 보입니다. 바로 남성들의 동성애입니다. 그리스 상류층 남성들은 아내든 누구든 여성과의 성적인 결합을 수치스럽게 여겨 같은 상류층 남성과의 동성애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고결하다는 이유로요. (얼씨구~^^) 그게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의 유래라고 합니다.
[임지웅] [오후 1:05] 네. 고대 그리스에서의 동성애는 고급취미였으니까요.
[김용호] [오후 1:07] 고급한 탐욕을 좇든 저급한 탐욕을 좇든 인간은 탐욕을 좇을 수밖에 없고 이런 궁리 저런 궁리 내보아야 해결은 되지 않는 거지요. 결혼을 해도 해결이 안 되고 결혼을 안 해도 해결이 안 되고 동성애를 해도 해결이 안 되고....
[임지웅] [오후 1:09] 바닷물을 마시듯 타는 목마름만을 더해갈 뿐이죠. 결코 해갈에 이를 수 없는~
[김용호] [오후 1:09] 오직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상사병 환자가 되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요. 그것도 한 개인이 상사병 환자가 되는 것은 측은한 일일 뿐이고 상사병 환자들이 반드시 모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개인 영성? 풉~^^ 개인 영성이란 개념 자체가 오류입니다. 개인 영성은 필연적으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늪에 빠지고 말지요. 아니면 기껏 잘 되어봐야 추종자들의 왕 노릇하는 쾌락의 늪에 빠지든지요.
그래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조는 최악의 구조가 되는 것이지요. 더 넓게는 리더와 추종자의 구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일입니다. 리더만 추종자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추종자들도 리더를 이용하기 위해 모인 것이지요. 이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허비해 어린 자들을 자신들처럼 큰 자들로 성장시키고, 큰 자들이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만이 지상에서 유일한 해답입니다. 바로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삶, 현세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삶이지요. 그 외에는 모두~~~ 뻥입니다!! ^^
[김용호] [오후 2:11] 허사장님이 팔뚝 이야기를 공개한 것에 잠시 당황하시더니 그 의도를 아시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ㅋㅋ 그리고는 이어서 배구 선수 시절의 혹독한 훈련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수다거리가 또 나와서 이제 시작합니다. (이거 아무래도 수다 중독인듯~)
몇 년 전에 한 케이블 방송이 전국 길거리 농구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스무살 청년이 우승을 했습니다. 거의 농구의 신~~~ 그런데 이 친구가 프로농구팀에 덜컥 스카우트가 되었지요. 그리고는 두세 달 후에 팀을 탈출해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프로농구팀 벤치를 지키는 후보 선수들까지 밥먹듯하는 훈련을 이 농구의 신이 견디어낼 수가 없었던 거지요. 이것이 바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직업이냐 취미냐의 차이지요. 취미로 하는 사람은 옆에서 보기에 마치 그 일에 미친 것처럼 열심히 한다 해도 직업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도 그 삶이 미친 듯 좋아서 하는 아마추어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프로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추어는 그 일을 하다가 잘 안 되면 다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프로는 그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히든카드가 없는 것이지요.
아직 자신이 아마추어 제자라고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이 기회에 이를 악물고 프로의 세계로 빨리 들어갑시다. 하나님의 역사로 히든카드를 모두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프로 팀에 끌려 들어오게 되면 그 청년처럼 처지가 안타깝게 됩니다.
하나 더~~
허사장님이 배구 선수를 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답니다. ‘애개~’가 아닙니다. 들어보세요.^^
대학 때 여러 대학이 어울린 동아리 모임에서 배구대회를 하게 되었답니다. 첫 서브를 허사장님이 넣게 되었는데 결과는~~??? 15대0 ~ 헉!!! 서브 에이스 15개로 게임 끝!! 물론 남학생들도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입니다. 우리 모두 빨리 프로가 됩시다.~ 모두들 피가 끓어오르시지요? ㅋㅋ 훈련 때 비록 삼수갑산을 갔다 올지언정 일단 갑시다~!!
또 하나 있습니다.
친척 동생 아이가 고등학교 때 축구 선수를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 분명 축구 장학생으로 들어갔는데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일반학과로 진학했어요. 첫 축제에서 과 대항 축구시합을 하게 되었는데 전반전을 뛰고 나서 과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너는 국가대표 가야 돼. 도대체 너 같은 축구의 신을 국가대표로 안 뽑다니 말도 안 돼.”
친구들이 보기에 완전 축구의 신이지요. 프로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그 아이가 친척들 모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지막에 한 말은 고등학교 때 자기 팀 주전으로도 못 뛴 실력이었다고~~ ^^
일반인이 보기에 신과 같은 프로도 그 안에서는 급이 있습니다. 우리는 프로가 되는 것이 마지막 목표가 아닙니다. 프로 중에서도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축구로 치자면 박주영 급이 아니라 메시 급이어야 합니다. 한국대표팀 급이 아니라 독일 대표팀이나 브라질 대표팀 급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승리에 환장해서가 아니라 다른 팀들이 모두 엉뚱한 삽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고 있는 훈련이 특수한 훈련이고 우리 팀의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목표로 제시하신 수준이 기존의 팀들과는 전혀 다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팀이 앞으로 세상에 보여줄 수준은 우리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세상 모든 팀들의 수준을 우리처럼 바꾸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선수인 우리는 그 사명을 걸머진 자들입니다. 승리의 사명 정도가 아닌 것이지요. 죽기까지 감독이신 우리 하나님게 순종하고 목숨을 바쳐 훈련을 받읍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비장함이 필요 없는 이유는 훈련과정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것~~~ 단 감독이신 하나님께 고개만 쳐들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임지웅] [오후 3:42] 저는 전도사님 말씀을 직접 체험해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야구를 하고 있는데요, 아마야구에도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간혹 대학교까지 뛰었던 선수출신들이 와서 운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말씀처럼 후보였던 애들도 클라스가 다릅니다. 저희들은 그런 친구들을 쟁이라고 부르죠. 중쟁이 고쟁이 등으로요.
[김용호] [오후 3:43] 쟁이~ 정확한 개념이군.^^
[임지웅] [오후 3:43] 완전 달라요. 아무리 아마에서 센스 좋고 잘한다는 친구라고 해도 상대가 안 되죠. 이른바 기본기라는 부분에서부터 차이가 나거든요. 그 친구들의 기본기는 어찌 보면 불쌍할 수도 있는데 수많은 반복으로 몸이 상황별로 대응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고 있죠. 그 친구들에게는 그게 그냥 자연스러운 겁니다.
[김용호] [오후 3:44] 체질이 달라진 거로군^^ 우리의 경우 본능이 달라지듯이~
[임지웅] [오후 3:45] 넵. 그렇습니다. 새사람이 되면 다른 이들은 변화된 자를 보며 어떻게 그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느냐며 반문하겠지만 변화된 자들에게는 그게 그냥 자연스러운 거죠.
[김용호] [오후 3:46] 아멘~!! 바람처럼 자유로운~~^^
[임지웅] [오후 3:46] 제가 전도사님이나 집사님들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삶의 모양들 속에서 주시는 깨달음이 조금씩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성정으로만 대하던 것을 자꾸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김용호] [오후 3:50] 성경의 계시는 진리이되 극히 현실적인 진리이지. 고담준론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진리~~!!
[임지웅] [오후 3:51] 저는 사실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이 못되거든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지X맞다고...--;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들이 “형, 왜케 착해졌어요” 이런 야기들을 하더라구요. 물론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인 시선들 때문에 스스로 통제하고 참는 부분이 있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것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더라구요.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만져 주시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체질상 착한 척 할 성격도 못되거든요.
[김용호] [오후 3:53] 으음~ 그 둘은 내면이 다르지. 그 착함이 지체들을 향한 종노릇으로 자리를 잡아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위한 참함으로 후퇴할 수 있지. 하나님 앞에서의 착함도 자기를 위한 착함과 뒤섞일 수 있거든~
[임지웅] [오후 3:55] 네. 그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난 내 속사람이 그닥 변한 것 같지 않은데 왜 남들은 그렇게 볼까... 결국 그 둘은 다르다는 거죠. 양의 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니까요.
[김용호] [오후 3:56] 흐음~ ~ 좀 더 듣고 싶군.
[임지웅] [오후 3:57]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그 나이에 맞게 사회적으로 원하는 수준이나 뭐 이런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라도 겉으로라도 사람들이 봤을 때 좋은 사람이 되어보자고 노력을 했었죠.
그런데 다른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만족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정작 제 자신은 불편한 마음이 그대로 이더군요.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 게 옛사람이 모습을 가지고 내가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에 한 것이니까요.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이유가 변해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리 제가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면 뭐하겠습니까. 제 속은 옛사람의 갈증으로 계속 저를 속이고 저 자신을 위하는 삶만을 사눈 것이겠죠.
[김용호] [오후 4:01] 그렇지. 그와 관련된 성경 해석의 오류 하나를 들려줄게. 화펑케 하는 자에 대한 해석인데 서구 기독교가 peace maker로 번역하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peace deliverer야. 사람 사이를 평화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심령의 평강을 전달하는 자인 거지. 자네 표현을 빌리자면 실존의 갈증을 해결시켜주는 자.
[임지웅] [오후 4:04]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이자 경험입니다만 저는 지금도 쭈욱 서구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에 속해 있잖아요. 제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나 이해의 부족이 기존 교회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해 잘못된 모델설정을 해놓으니까 끼워 맞추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김용호] [오후 4:06] 인간론의 심각한 오류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과 같아.
[임지웅] [오후 4:07] 개인적으로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일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본질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잘 먹고 잘사는 일에 모든 포커스가 맞추어지니 고민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되어버리죠.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지만 성공이라는 가치에 매몰되어버린 청년들이 제일 안타까워요. 저는 그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이겠죠. 그런데 저는 그 사실만으로는 달라진 것도 더 행복하다는 느낌도 없거든요.
[김용호] [오후 4:10] 시지프스가 받은 형벌이 그것을 상징하고 있지. 젊은 싯다르타 태자가 고민했던 것도 그 지점이고~
[임지웅] [오후 4:10] 가끔 이곳에서 나누는 얘기들-그 수준까지는 안됩니다만-을 할 기회가 있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고민을 하려하지 않아요. 그저 덮어놓고 빌기만 하려고 하죠. 뭐 제게도 물론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변화된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냐 물으시면 자신이 없기도 합니다만^^
[김용호] [오후 4:13] 성경에서 사람들을 소경이라고 규정하시는 이유지. 그 소경들은 설명을 듣고는 눈이 떠지질 않아. 눈이 떠지는 경우는 몇 가지 있어.
1. 극한의 환난
2.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
3. 빛나는 증인들을 목격
[임지웅] [오후 4:15] 극한의 환난에서 오히려 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이들이 더 많은 것 같긴 합니다만^^;
[김용호] [오후 4:15] 맞아. 위 세 경우도 그 자체로는 안 돼.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맞아야 하지. 그래서 증인들이 하나님의 동역자인거야. 증인들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지.
[임지웅] [오후 4:16] 제 경우는 몇 번이 될지 궁금하네요. 흥미진진 ㅋ
[김용호] [오후 4:17] 흥미로운 예를 들어주지. 몇 년 전에 고등학교 여교사 한 분을 만나게 되었어. 이 분이 답답해서 나까지 만나게 된 건데 이분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예수님이 나타나신거야. 크리스찬도 아닌데 말이지. 길을 가는데 이름을 부르시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십자가가 정수리를 뚫고 몸속으로 들어오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다는 거지. 교회도 나가보고 성당도 나가보고 해도 답을 못 찾겠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교회에 한 달 정도 출석하고 개인적으로도 몇 차례 상담도 했는데 그 결과는 꽝~!!!
[임지웅] [오후 4:22] 꽝이라 하심은?
[김용호] [오후 4:22]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던 거지. 내 설명을 듣고 우리 모습을 봐도 답이 보이질 않았던 거야.
[임지웅] [오후 4:23] 아하
[김용호] [오후 4:23] 아무리 엄청난 체험을 하고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소경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그리고 소경 상태에서 벗어나 눈이 떠졌다 해도 훈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야. 그러니 소경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야 정말 비참한 거지. 물론 개중에는 희희낙낙하고 있는 소경도 많지만 그건 오 분 간 휴식일 뿐이지.
눈을 떠야 하는 사람, 눈을 뜬 사람, 푯대를 향해 첫 발을 뗀 사람, 푯대를 향해 제법 진도가 나간 사람 등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각 상황에 맞게 종노릇하며 섬기려면 상대방보다 우리가 한두 발짝이라도 앞서 있어야 하지. 우리가 프로 중에서도 탑클래스의 프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야.
특히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 분들의 위치를 실제로 이동시키는 사명을 받았다는 점이지. 앞에서 떠들기만 한다든지 시범만 보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야.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핵심은 위치의 이동이거든. 깨달음이 아니라 말이야. 물론 깨달음은 푯대의 발견이니까 처음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서구 기독교의 교회론은 소경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이 본질이야. 왜 그게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연설하는 사람도 소경이니까~!! 그러니 소경에게 필요한 것은 연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거지.
그에 반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깨동무하고 함께 위치 이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물론 소경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미 출발점에서 이루어진 일이고~
[임지웅] [오후 4:39] 넵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