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끝) 回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쉽게 여기고 덤비면 백전백패 |
쉽게 여기고 덤비면 백전백패
지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성심 다해야 ... 세종 · 영조도 거듭 강조
“그대는 일찍이 사관(史官)을 지내며 나를 지켜보았으니, 백성의 삶에 대해 근심하는 나의 뜻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대가 갈 고을에는 흉년이 들었다. 무엇보다 백성을 구제하는 대책에 힘쓰도록 하라.” 1427(세종9)년 12월 8일, 세종은 새로 칠원 현감으로 부임해 가는 양봉래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양봉래가 “신이 시골에서 자라 민간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사옵니다만, 제 성품이 워낙 용렬하고 어리석으므로 책임을 완수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라고 걱정했다. 이에 세종이 그를 격려한다. “대개 일을 쉽게 여기고 덤벼들면 실패하나, 그 일을 어렵게 여기고 해나간다면 반드시 성공하는 법이니, 지금 그 마음가짐으로 노력하면 될 것이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
세종은 또 이런 말을 남겼다. “지혜와 노력을 다 쏟아내어 도모했는데도 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운(天運)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도모한 바가 지극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면, 두려운 마음으로 일에 임하되 지모를 내어 일을 성사시키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모할 것은 다 도모했다 말하지 말고 다시 도모하며, 의논할 것은 다 의논했다 말하지 말고 다시 의논하라.” (세종22.6.20).
“옛 사람은 큰일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두려운 마음으로 일에 임하되 힘껏 도모하여 성사시키라 하였다. 일에 임할 때 두려워하라는 것은 심사숙고하고 조심해야 할 바가 있다는 것을 말함이요, 힘껏 도모하여 성사시킨다 함은 두려워하고만 있지 말라는 것이다.” (세종31.9.20).
여기서 세종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두려운 마음으로 일에 임하되 힘껏 도모하여 성사시키라 (臨事而懼 好謀而成)’는 말은 본래 [논어] ‘술이(述而)’편에 나온다. 어느 날 애제자 안회, 자로와 더불어 한담을 나누던 공자가 안회에게 말했다. “등용해주면 나아가 백성을 위한 도(道)를 펼치고, 버림을 당하면 미련 없이 떠나 은둔하는 것, 이는 오직 나와 너만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안회를 높이 평가하는 공자의 말이 서운했던지 자로가 물었다. “선생님, 삼군(三軍)을 통솔하실 일이 있다면 그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자로는 아마도 공자가 그건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용맹과 무예가 뛰어나기로 가장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 바로 자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의 대답은 자로의 기대와 어긋났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 하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와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에 임할 때는 반드시 두려워하되, 힘껏 도모하여 일을 성사시키고 마는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목표를 이루고, 일을 성공시키는 것은 용기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자로와 같이 직선적이고 과격한 사람은 물불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덤비다가 실패하기 쉽다. 공자는 자로에게 행동에 나서기 전에 먼저 사려 깊게 생각할 것,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공자의 가르침 중 ‘힘껏 도모한다’ 는 대목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내가 가진 지혜와 노력을 남김없이 발휘한다는 의미다. 단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여러 사람들의 지혜와 의견, 즉 집단지성을 모은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 영조는 균역법 개혁을 위해 궁궐 밖에 나아가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경청하곤 했는데, 그 때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이미 양역을 변통하기 위한 계획들이 상세하게 검토되었고, 추진할 방향도 어느 정도 정해졌지만 공자가 말하길 ‘일에 임할 때는 두렵게 여기고, 힘껏 도모하여 일을 성취한다’고 하였으니, 두렵게 여긴다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고, 힘껏 도모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모책(지혜)을 모은다는 뜻이다. 지금 삼복 더위에도 내가 또 다시 백성들 앞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부디 그대들은 각자의 생각을 남김없이 다 말하라.” (영조26.7.3).
우리가 일을 성사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들던 것을 완성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목표를 달성하고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여러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방향설정, 주위의 도움, 투입되는 자원과 역량 등이 모두 적절해야 하고 서로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운(運)도 따라주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일에 임하는 나의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우선 그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려워하라는 것은 무조건 일을 어렵게 여기라거나,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세종의 설명대로 그것은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원래 ‘조심(操心)’ 이란 단어에서 ‘조(操)’ 자는 나무 위에 앉은 세 마리의 새(品+木)를 손으로 잡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나무 위에 앉은 새는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 그런 새를 잡으려면 준비를 철저히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천천히, 차분하게 다가서야 한다. 일도 마찬가지다. 그 일을 손쉽게 여기고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시작하다 보면 새가 훌쩍 날아가 버리듯, 일도 금세 틀어져 버린다. 별로 전진하지도 못한 채 중간에 주저앉게 된다. 따라서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말고 신중하라는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따져보고, 예상되는 리스크에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하고 임하라는 뜻에서 공자는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일을 어렵게 여기는 만큼, 또 신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혼신을 다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자신의 지혜와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꾀, ‘모(謀)’를 강조한 이유이다. 이 ‘모’에는 결단력도 포함된다. 조심한다고 주저하면, 일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모든 지혜와 역량을 모으고, 여러 사람들의 중지(衆智)를 모아 그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조심하되 ‘때’를 놓치지 말아야
일찍이 정조는 “넉넉한 기상으로 혼신을 다하되 촉박한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저 빨리 성취하려고만 하다 보니, 지나치게 황급히 일을 처리하려 들어 마침내는 다급하고 불안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일득록)고 경계했다. 어떤 일이든 완벽히 똑같은 일을 두 번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일을 한다는 것은 가지 않은 길을 가보는 것이고, 길이 나지 않은 산을 오르는 것이다. 산 정상을 이정표 삼아 꾸준히 있는 힘껏 올라가되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무 급하게 올라가면 금세 지친다. 함부로 발을 내딛다 보면 헛디디기 쉽다. 심지어 중도에 무서운 산짐승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두려워하되 있는 힘껏 도모하는 것, 조심스럽게 도전하되 내가 가진 모든 꾀와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한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316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끝)] | 2015.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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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부족함보다 고르지 못함을 근심해야 |
균역법에 공자의 가르침 담아 ...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게 리더의 책무
어느 날 노나라의 최고 실권자 계씨(季氏)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염구와 자로가 스승인 공자를 찾아왔다. “계씨가 전유(노나라의 속국)를 쳐서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공자가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혹 너희들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냐? 전유는 이 나라 안에 있으니 곧 나라의 신하다. 어찌 정벌한단 말이냐?” 계씨의 권세가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같은 노 나라 임금의 신하인 전유를 제멋대로 공격한다는 것은 명분도 없을뿐더러 반역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씨께서 하는 것이지, 저희 두 사람은 모두 원치 않았습니다.” 염구가 변명했지만 공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야, 주임(周任)이 말하길 벼슬에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다 펼칠 수 없는 자는 그만두라고 했다. 위태로운데도 붙잡아주지 못하고 넘어지는데도 부축해주지 못한다면 장차 그렇게 보좌하는 신하를 어디에 쓰겠느냐?” 주군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아주지 못하는 참모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어 말했다. “내가 듣건대 나라와 집을 이끌어가는 자는 사람이 적음을 근심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해야 하며, 재물이 부족함을 근심하지 말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고 했다. 계씨는 밖에 있는 전유 땅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내부부터 걱정하며 살펴야 할 것이다.” 국력을 키우겠다며 외부의 인적, 물적 자원을 탐하기 전에 먼저 내부부터 제대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백성이 고르지 못한 것을,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는 결국 실패하고 그 나라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내부를 단속하지 않은 채 전유를 노리다가 가신(家臣) 양호의 역모로 위기에 몰리게 되는 계씨처럼 말이다. 개혁 주도 세력이 정당성의 근거로 활용
논어의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자주 인용됐다. 주로 국가제도와 법이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느냐를 논의할 때 쓰인다. 조선 초기의 공법 제정, 조선 중후기의 대동법 실시, 양역변통(良役變通) 작업 등에서 개혁 주도 세력은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 양역변통에 관한 발언을 보자.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백성이 적어서 군사를 양성하는 일에 온 나라가 총력을 기울이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인데, 그 적은 인구도 신분별로 구분하여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을 차지하고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유독 군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땅과 백성이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며 부족함을 걱정하지 말고 상하가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균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하지 않고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고도 하셨습니다. 지금 군역이 고르지 못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방법이 있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나라가 뒤엎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효종 10.2.11)
조선시대에서 백성들이 졌던 3대 의무(토지세, 신역, 공납) 중 하나인 ‘신역(身役)’은 16~60세 사이의 양인(良人, 천민 이외의 모든 백성) 남성에게 부과되었기 때문에 ‘양역’ 이라고 불렸다. 일정 기간을 군대에 복무하는 ‘군역’ 이 대표적이다. 국가는 현역 복무자인 ‘정군(正軍)’ 외에 국방 경비를 부담하는 ‘보인(保人)’을 두고 매년 군포 2필을 징수했는데, 전쟁과 대기근으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전후 복구와 국방력 확충 등 늘어나는 재정 수요에 대한 부담이 백성들에게 몇 배로 가중된 것이다. 더욱이 양반이나 부유한 평민들은 납세자 대장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군역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양역변통(良役變通) 작업을 추진하게 되는데 영조에 이르러 결실을 맺는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태평하다고 했다. 오늘날 이 나라는 과연 근본이 튼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백성들이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중략)…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는 것은 선대왕들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을 소중히 여겨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자 함이다.”(영조26.7.3). 여기서 ‘균’역법이라는 이름에 앞서 소개한 공자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영조26.5.17).
흔히 국가가 요구하는 조세나 의무가 일부에게만 부과된다면, 그것은 국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평등에 따라 누적된 불만이 공동체의 화합을 저해하게 될 것이다. 왜 나만 세금을 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 흔쾌히 세금을 낼 사람은 없다. 그저 처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자가 강조한 대로, 국가에 대해 짊어지는 의무가 균등하게 배분되고, 국가가 주는 혜택이 고르게 퍼지며, 국가의 법과 시스템이 공정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주자(朱子)는 ‘균등’의 의미에 대해 구성원들이 각기 알맞은 분수를 얻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성들에게는 각자의 역할과 능력에 따라 적합한 자리가 배분되어야 하며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은 가난하지 않고 부족함이 없이 서로 화합할 수 있게 된다.
‘편안함’도 중요하다. 국민은 국가가 전쟁, 범죄, 재해, 질병 등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의 일과 삶에 집중할 수 있길 원한다. 이는 국민의 기대일뿐 아니라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다. 구성원들의 충성도와 소속감을 높이고, 국가의 자산과 역량을 최대화시키려면 구성원들에게 가해지는 내외부의 위협을 해소하고 편안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해야지 부족함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다.
오늘날 국가나 기업, 각종 집단을 이끄는 사람들은 외적 확장에 치중하곤 한다. 규모가 확대되고, 구성원들이 늘어나며, 자본금이 증대되는 것을 성공의 지표로 삼는다. 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만큼 파이는 커져야 한다. 하지만 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옳은 길일까. 장기에 이상이 생기고 혈관이 곳곳에서 막힌다면, 키가 아무리 커지고 체중이 늘어봤자 그는 환자일 뿐이다.
비옥한 땅과 많은 인구가 있어도…
일찍이 율곡 이이는 국가의 진원지기(眞元之氣)라 할 수 있는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도 제 자리를 찾게 된다고 했다. 진원지기가 약한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자질과 성품을 가졌다고 해도 요절하고 말 듯이, 비옥한 땅과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라 해도 진원지기인 백성이 약하다면 오래가지 못한다. 조직이 커지기를 바라기에 앞서 구성원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이다. 구성원들이 균등하고 안전하게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때 비로소 그 조직에게는 한계가 없을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314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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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싸워 이겨야 할 상대는 ‘어제의 나’ |
항상 자기 혁신에 노력해야 ... 숙종 “매일 새롭지 않으면 퇴보”
1693년(숙종19) 5월 13일, 왕은 새로 지은 작은 전각에 이름을 붙이고 직접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무릇 천하의 모든 일은 날마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날마다 퇴보하게 마련이다. 더욱이 군주의 마음가짐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며 만물을 교화하는 근원이니 진실로 그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진작시키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들을 이끌 수 있겠는가…(중략)… 지금 학문이 충실하지 못한 바가 있다면 날마다 새롭게 할 것을 생각하고, 덕이 수양되지 못한 바가 있다면 날마다 새롭게 할 것을 생각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경청함이 넓지 못하다면 날마다 새롭게 할 것을 생각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가 옛날만 못하다면 날마다 새롭게 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중략)… 날마다 새롭게 하는 근본은 반드시 마음속에서 사사로움을 단호히 잘라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사사로운 욕심을 물리쳐서 마음을 태연하게 해야 한다. 그리 되면 덕이 수양되는 것을 바로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리는 성과는 날로 새로워져 이 ‘일신(日新)’이란 이름을 지은 뜻에 거의 어긋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조가 정조에게 “자질에 안주하지 말아야”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옛날 경희궁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일신헌(日新軒)’에 관한 설명이다. 숙종은 [대학(大學)] 전(傳) 2장의 ‘탕왕의 세숫대야에 새겨져 있기를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려거든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라’ 하였다(湯之盤銘 曰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는 구절에서 이 이름을 가져왔다. 우리가 세수를 하며 얼굴에 묻은 더러움을 씻어내듯이 탕 임금은 마음에 묻는 티와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매일같이 수신에 힘썼다. 그는 날마다 자신이 새겨놓은 글을 보며 새로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진보시켰고 어제보다 나은 정치를 펼쳐 성군으로 추앙 받았다. 일신헌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러한 탕 임금을 본받겠다는 숙종의 다짐이 담겨있다.
탕 임금이 남긴 교훈을 중시했던 것은 비단 숙종만이 아니다. 영조도 그의 손자 정조에게 남긴 하교에서 ‘할아비의 나이가 이미 77세가 되었다. 올해도 저물어 가고 내 나이 또한 저물어 가고 있으니, 당부의 말을 남기고자 한다면 지금 해야지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느냐. 내가 비록 노쇠하지만 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깊고도 침착한 도량과 분수를 아는 명철함은 네가 이 할아비보다 낫다. 그러나 두려워해야 할 점이 있으니, 성탕(成湯, 탕왕)의 성스러운 덕은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성인(聖人)도 이와 같으실진데, 하물며 그 아래 경지에 있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겠느냐’ 고 말한다(영조 45.11.27). 정조가 제왕의 자질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를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도록 탕 임금처럼 부단히 새로워지라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어제의 나’ 보다 나은 ‘오늘의 나’ 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올 초 개봉한 영화 [킹스맨]에는 헤밍웨이의 말이 인용됐다. ‘타인보다 우수하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다.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고귀한 것이다.’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를 한계 지우고 나를 나태하게 만드는 적(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 이다. 포기도 다른 사람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하는 것이다.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이유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가 아니다. 그와 가는 방향도 다르고 보폭도, 속도도 다르다. 나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저 나 자신만 체크하면 된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는지, 혹 후퇴하진 않았는지, 어제보다 진보했고 보다 성숙했는지, 그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렇다면 과거의 자신보다 우수해지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제의 나’ 보다 나은 ‘오늘의 나’ 가 되고 ‘오늘의 나’ 보다 나은 ‘내일의 나’ 를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탕왕의 반명(盤銘)처럼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자기 혁신이 필요할 것이다. 공부로써 지식과 능력을 배양하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며, 이전까지의 관행과 습관에서 탈피해 과감히 도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창의적인 안목을 키우고 반성과 성찰로 자신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토대로 ‘나’는 ‘새로운 나’, ‘더 나아진 나’가 되어 끊임없이 발전하는 삶을 열어가게 될 것이다.
조선에서 신하들이 ‘은나라 탕왕의 종시일신(終始日新, 언제나 항상 나날이 새롭게 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경연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그래서다(선조6.9.21; 효종5.1.15 등). 임금은 하루 3차례 경연에 나가 학문을 배우고 정사를 토론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운다. 간언을 들으며 잘못을 고치고 실수를 개선해 나간다. 이러한 정신적 성장 속에서 내공을 다지고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안목과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물론 횟수가 많기도 하고 과연 효율적이냐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지만, 종묘사직과 백성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임금에게 경연은 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도구이자 수련의 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오늘날의 리더들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새롭게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쉽지가 않다.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는 말이 있는데,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엘리스에게 “제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계속 뛰어야 한다” 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어떤 대상이 변화해도 주변 환경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웬만큼 변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에 머물거나 도태된다는 것이다.
계속 뛰어야 그나마 제자리
나를 새롭게 하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만드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내가 새로워질수록 나를 가로막는 내 안의 적도 새로워진다. 내가 새로워질수록 내가 해야 할 일도 새로워지며, 내가 마주하고 감당해야 할 일들은 보다 커지고 복잡해진다. 이 때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올라서 있는 길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이 글 첫머리에서 소개한 숙종의 말처럼 “날마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날마다 퇴보한다” 는 것이다. 그러면 전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노력을 몇 배 더 가중시켜야 할 것이다. 탕왕이 진실로 새로워지려면 ‘하루하루’, 그리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탕왕의 반명은 우리가 새로워지고자 한다면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거듭하고 또 거듭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야 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리더상일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313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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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조선 왕이 말하는 ‘대장부論’ |
인조 ‘무력에 굴복하지 않은 자’, … 세조 ‘뜻은 크지만 기회가 없어 아쉬운 자’
1625년(인조 3년) 3월 12일, 인조는 최명길, 이정구 등과 함께 경연에서 [맹자]를 공부하고 있었다. 등문공장 하편에 이르러 인조가 질문한다. “부유하고 귀해졌는데도 마음이 변질되지 않고, 가난하고 천하게 되었는데도 지조를 꺾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최명길이 대답했다. “부유하고 귀해졌는데도 마음이 변질되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곤궁한 상황에 놓여도 지조를 지킨 사람은 경전이나 역사책에서 간혹 볼 수 있지만, 부귀가 극도에 도달했는데도 방탕하지 않고 마음을 변함없이 지킨 사람은 드뭅니다.” 이정구도 설명을 덧붙였다. “이는 특히 임금께서 주의하셔야 할 바입니다. 무릇 임금은 귀하기로는 하늘의 아들이며,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마음이 쉽게 생길 수 있는 여건인 것이니, 이로 인해 나라를 망치고 몸을 망치는 임금이 많았습니다.” 공왕은 방탕해지기 쉬운 자리
인조가 다시 물었다. “위세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이것을 다른 것에 비해 쉽게 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정구가 대답했다.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강개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과연 어렵기는 합니다만, 순간의 의기가 격동되면 칼날과 형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인조가 고개를 저었다. “흔히 부귀를 하찮게 여겨야 한다고 알고는 있지만 거기에 물들어가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세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더욱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절의를 지켜 목숨을 바치는 자를 많이 볼 수 없었지 않은가?”
이 세 사람의 대화는 맹자가 말한 ‘대장부’론에 관한 것이다.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지만 흔히 포부가 넓고 기개가 있으며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을 일러 대장부라고 부른다.
실록에서도 ‘대장부’란 단어는 대부분 이런 의미로 사용되곤 했는데, 세조는 “대장부란 세상에 뜻을 두며 항상 공을 이룰 만한 기회가 없음을 아쉬워하는 자” 라 했고(세조실록총서1권), 한명회는 “당대에 재능을 인정받아 폐단을 바로잡고 새로운 법을 세우는 사람이 대장부” 라고 규정했다(세조14.6.14). 선조는 “대장부란 큰 공을 세워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후세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 는 말을 남겼다 (선조30.1.24)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불러줄 것인가?’ 라는 남이의 글귀도 유명하다. 대장부는 명예를 얻고 성공을 거둔 사람이란 뉘앙스가 강한 것이다.
하지만 맹자의 생각은 다르다. 당시 열국을 종횡하며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던 공손연과 장의야말로 대장부가 아니겠느냐는 경춘(景春)의 질문에 맹자는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모리배에 불과하다” 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천하의 드넓은 곳에 살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큰 도를 행한다. 뜻을 이루면 이를 뭇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해도 홀로 그 길을 걸어가니, 부유함과 귀함도 그의 마음을 변질시키지 못하고, 가난과 천함도 그의 지조를 꺾지 못하며, 위세와 무력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을 대장부라 부르는 것이다.”
맹자의 말대로라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뒤흔든다고 해서 곧 대장부라 할 순 없다.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다 대장부는 아닌 것이다. 대장부란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그걸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며, 외부환경 때문에 뜻을 바꾸지 않고, 뜻을 이뤘다고 해서 나태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이뤄낸 성과의 크기보다 품었던 꿈의 크기가 더 중요하고 부귀나 명예가 아니라 이상(理想)이 소중하다. 맹자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비로소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종 때 임금이 유생들에게 내린 교지를 봐도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선비의 마음은 부귀로써도 변질시킬 수 없고 선비의 지조는 빈천으로써도 꺾지 못하는 것이니, 곤궁하여 낮은 지위에 있다면 자신의 몸을 수양하여 선하게 만들고, 현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면 천하 사람들을 모두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뜻을 지키는 바가 이처럼 굳건하니 어찌 다른 것들이 여기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유자들은 달라서 성리의 학문을 궁구하지 않고 겉멋든 문장에만 빠져있다. 조촐한 의복을 좋아하기는커녕 옷과 장식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고, 몸의 병통을 살피지 않으며 몸의 아름답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무릇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자라서 실천하고자 함이다. 부디 검소함을 숭상하며, 뜻을 돈독히 가지고 학문에 힘써 세상의 풍속을 맑게 하라.”(중종4.3.12).
사람이 자신만의 뜻, 즉 삶의 목표나 신념을 세우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멋들어진 말 중 하나를 가져다 좌우명으로 삼고, 숭고해 보이는 이상을 내 삶의 목표라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어떤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문제는 목표란 이루기 위해서 정하는 것이고, 신념은 지키기 위해 간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뜻은 그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무의미한 것이다.
맹자 “끝까지 뜻을 지키는 자가 대장부”
더욱이 뜻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물을 만난다. “처음에는 근면하여 노력하지만 갈수록 나태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성종18.11.14)인데다, 맹자가 말한 ‘부유함과 귀함(富貴)’ ‘가난함과 천함(貧賤)’ ‘위세와 무력(威武)’은 끊임없이 그 사람의 뜻과 의지를 시험한다. 힘들게 살다가 갑자기 부와 명예를 얻고, 부족함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가난하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의 변화는 그 사람의 마음을 쉽게 흔들어버린다. 나태하고 방탕해지거나 혹은 움츠러들고 자포자기 하는 것이다. 권력의 협박이나 회유 앞에서 신념을 굽히고 타협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해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뜻을 끝까지 지켜내는 사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뜻을 흔들림 없이 간직한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참된 대장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장부의 정신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가시적인 성취보다는 정신적인 완성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효율과 공리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와 안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의 우직하고 고집스러움은 그를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로 치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공적인 정신,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행동하는 기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자세야 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리더상일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9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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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허물 되풀이 말고 노여움 옮기지 말라 |
공자가 말한 호학(好學)의 조건 … 현종은 화풀이로 비판 받아
동양의 전통사회에서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아온 공자는 생전에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문도의 수가 3000명에 이르고 이 중 유명한 사람이 72명, 특히 탁월했던 제자만 12명이다.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공문십철(孔門十哲)’ 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그렇다면 이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는 누구였을까? 자로, 자공, 자하, 염유, 중궁, 유약 등 여러 제자가 공자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지만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안회(顔回, 안연)다.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체현했다고 하여 ‘복성(復聖)’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 문묘 대성전, 즉 공자 바로 옆 자리에 배향 되었는데 [논어]에는 그에 대한 공자의 칭찬으로 가득하다. 공자는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만 가지고 가난한 마을에 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법인데, 회는 자신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참으로 어질구나, 회여!’(논어, 옹야편), ‘일러주면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은 안회뿐이다’(논어, 자한편)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안회가 젊은 나이에 죽자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며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논어, 선진편). 공자의 최고 제자는 ‘안회’
공자는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일찍 떠나가 버린 안회에게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한번은 노나라의 임금 애공이 “제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안회라는 제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서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有顔回者好學 不遷怒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논어, 옹야편). 안회가 죽은 후에는 그만큼 진정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학문을 좋아한 안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거론하는 ‘불천노(不遷怒)’ 와 ‘불이과(不貳過)’ 다.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다’ 의 두 가지를 ‘호학(好學)’의 결과, 혹은 조건으로 꼽고 있는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이 둘은 사실 매우 힘든 경지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 저지른 잘못을 다시 반복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실수를 거듭하면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잘못이나 실수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고 그것을 통해 배운 바가 없으며, 방심했을 때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여움도 그렇다. 밖에서 화가 난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기분을 집으로까지 들고 와서는 안 된다. 기분이 나쁘다고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머리에만 머문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아, 내가 또 왜 이랬지?” “저번에 그래 놓고 또 그랬네” 라는 말이 익숙하다.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일’은 더욱 잦다. 회사에서 화가 난 채 들어 와 집에서도 화를 내고, 평소 같으면 별 것 아니게 지나갔을 일도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릴 때, 상사에게 업무 보고를 할 때, 먼저 ‘기분이 어떠시나?’ 하고 살피는 것도 그래서다. 기분이 좋으면 안 좋은 일도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넘어가지만, 기분이 안 좋으면 사소한 일도 큰 꾸지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천노’와 관해 일찍이 송시열은 현종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는 “공자께서 안자(顔子,안회)가 학문을 좋아함을 논하면서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현종은 이와 반대로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고 있다” 고 비판했다. 현종이 자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이조의 관리들에게 화를 내다가 승지들에게 화풀이를 했으며, 나아가 대신들에게까지 괜한 트집을 잡은 것에 대해서였다. 이어 송시열은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한 번 노하였고 무왕(武王)이 한 번 노하였다’ 고 했으니, 성인(聖人)이라 하여 어찌 노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화가 날만한 일을 당하면 화를 내되, 다만 그 노여운 마음을 옮기지 않는 것이니, 밝은 거울과 고요하고 맑은 물이 사물의 형체를 비추어주지만, 비추어진 사물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사물에 따른 것일 뿐, 거울이나 물과는 상관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해 마음의 함양이 순일하지 못하게 되면, 노여움은 천둥같이 일어나고 산처럼 치솟아서, 그런 줄을 알아도 또한 스스로 그만 둘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현종개수실록1.7.25). 그는 노여움 자체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학문과 수양을 통해 그것을 직시하고 객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 방치하게 되면 노여움은 다른 곳으로 번지게 되고 이내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불이과’에 대해서는 인조 때 오윤겸의 해설을 보자. 오윤겸은 인조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옛말에 ‘잘못했다가도 제대로 고치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선(善)은 없다’ 고 하였고, 공자께서는 안자가 같은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을 평가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런 마음을 잊지 마시고 안자가 학문을 좋아하듯 하시면 반드시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시게 될 것입니다.” (인조2.9.9). 허물은 무조건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안회가 같은 허물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말은, 안회도 한번은 실수하고 한번쯤은 잘못한 적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학문을 통해 그것을 반성하고 그것에서 교훈을 얻음으로써 다시는 똑같은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허물을 고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것’ 이야말로 참된 훌륭함이라고 평가한다. 개선과 성찰의 노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시행착오에서 배워야
요컨대 ‘불천노 불이과’ 라는 안회의 경지는 학문의 목적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생활 속의 올바름을 구현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중심을 지켜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관계맺음을 잘하고, 시행착오에서 얻은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 기분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고, 같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고, 비록 사소하다 싶은 일에서일지라도 이런 일이 자꾸 쌓이다 보면 결국 내 감정으로 인해 큰일을 그르치고, 내 부주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불천노 불이과’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9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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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인재 발굴의 기본은 객관성 · 공정성 |
추천된 사람도 임금이 직접 확인해야 … 여론 · 인기 · 명성이 진면목 가리기도
국가를 경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인재’다. 어떤 사업을 추진하려면 재원과 관련 법령이 뒷받침돼야겠지만 무엇보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실현시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종도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니, 직무에 가장 적임자인 관원을 선발한다면 모든 일이 다 잘 다스려진다” 고 천명했다(세종5.11.25). 결국 임금이 최고인사책임자
그렇다면 누가 인재이고 누가 적임자인가? 인재를 분별해내는 것은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발을 담당하는 사람의 안목도 깊어야 하고, 인재의 능력과 품성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더욱이 국정 운영에 필요한 인재의 수는 매우 많다. 이를 리더 혼자 일일이 살펴 고를 수는 없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할 전문가 그룹인 전관(銓官)을 양성한 이유이다. 요즘 기업의 HR팀처럼 말이다. 물론 전관이 관련 업무를 위임 받아도 인재 선발에 관한 임금의 책임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임금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하며 현인을 우대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최고인사책임자(CHO)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관들도 이를 본받아 좋은 인재를 찾아내 등용하고자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는 이러한 임금에게 주는 조언이 나온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그를 어질다고 말하더라도 가하다 여기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그를 어질다고 말하더라도 가하다 여기지 말고,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어질다고 말한 연후에야 그를 살펴보아서, (직접) 어짊을 확인한 후에 등용하시 옵소서. 마찬가지로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그를 불가하다 하더라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불가하다 하더라도 듣지 말고,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불가하다고 말한 연후에야 그를 살펴보아서, (직접) 불가한 점을 확인한 후에 버리옵소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비로소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의 의견만으로 그 사람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 것이며, 대다수의 생각이 합치되더라도 자신이 직접 확인한 후에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다. 이 말이 신하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재는 반드시 모든 백성이 다 좋다고 여기는 사람 중에서만 뽑아야 한다거나 간신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다 불가하다고 말할 때까지 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좌우의 신하나 여러 대부들의 말만 듣고 결정하지 말라는 것은 인재 선발이 주관과 사사로움에서 탈피하여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고 해도 바로 따르지 말고 왕이 직접 확인하라는 것은 여론, 인기, 명성 등이 자칫 그 사람의 진면모를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는 임금과 인재 간의 신뢰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단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다거나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뽑는다면, 설령 그가 인재더라도 임금이 그를 믿고 중요한 임무를 맡기기란 쉽지가 않다. 심지어 질시와 의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반면에 추천 받았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임금이 직접 상세히 살펴 등용하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에 대한 율곡 이이의 설명을 보자.
“벼슬을 시키는 것이 단지 은택을 내려 우대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쓰고자 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 그가 가진 능력을 헤아려 직책을 제수해야 할 것입니다. 벼슬에 나서는 사람도 한갓 작위와 녹봉을 받아 호구지책을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과 포부를 펼치고자 하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려 그 명을 받아야 합니다. [맹자]에 ‘좌우가 모두 어질다고 말하더라도 가하다 여기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어질다고 말하더라도 가하다 여기지 말고,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어질다고 말한 연후에야 살펴보아 그 어짊은 확인한 후에 등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좌우 신하와 여러 대부, 백성들이 모두 어질다고 하였는데도 왜 또다시 깊이 살핀 후에 등용하라 했겠습니까. 정성껏 살펴야 그 선택이 정밀해지고, 선택이 정밀해져야 인재를 깊이 파악하게 되고, 인재를 깊이 파악해야 그에 대한 믿음이 돈독해지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이와 같이 한다면 그렇게 뽑힌 인재가 올린 간언이 실천되고 받아들여져 정치의 혜택은 자연 백성들에게 미쳐갈 것입니다.”(명종20.12.7). 인재는 임금이 직접 정밀하게 살피고 숙고하여 선발해야 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쌓인 인재에 대한 믿음이 이후 인재가 올리는 간언과 충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신뢰자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남는다. 임금이 인재를 최종적으로 낙점하는 것은 좋지만, 임금의 검토 대상이 될 인재는 어떻게 추려내야 할까? 백성들 모두가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 누군지 임금이 일일이 대상자를 정해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하위급 관직이야 인사담당관인 전관들이 살펴 적절히 배치한다 해도, 고위급 인재는 어떻게 할까?
‘거주(擧主)’ 란 역할이 등장한 것은 그래서이다. ‘거주’ 는 인재의 추천을 담당하는 신하로 공식적인 관직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좋은 인재를 보는 눈만 있다면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 판서가 맡을 수도, 이미 물러난 원임 재상이 맡을 수도 있다, ‘거주’는 비밀리에 활동했는데 공개될 경우 인사 청탁이 들어갈 것을 우려해서였다. 이와 관련해 세종 때에 다음과 같은 건의가 올라온 바 있다.
“인재등용을 위해서는 먼저 거주(擧主)를 얻는 것만큼 좋은 계책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대신 중에서 거주가 될 만한 사람을 선정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천거하게 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알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천거된 사람에 대해서는 전조(銓曹, 인사업무 총괄부서로 ‘이조’의 별칭)의 의논을 참작하여 현명한지 현명하지 못한지를 시험해 보시고, 과연 현명하다면 자격에 구애됨이 없이 차례를 뛰어넘어 등용하십시오. 이것이 맹자가 이른 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어질다고 말한 연후에야 그 어짊을 확인한 후에 그 사람을 쓴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임용된 사람은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 절개를 더욱 힘쓰게 될 것이고, 임용되지 않은 사람은 또한 더욱 분발하여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세종29.2.1). 인재 식별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을 거주로 임명하고, 그 거주가 임금이 최종 검토할 인재들을 추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청탁 우려해 비밀 인사조직 만들기도
이렇듯 맹자의 조언은 리더가 인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담고 있다. 이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혁신적이고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나라와 기업이 ‘인재전쟁’을 벌이는 시대다. 인재를 찾고 그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실히 인재를 구하는 마음, 그리고 인재를 찾기 위한 성실하고도 치밀한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7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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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나를 위한 학문에 힘써야 |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는 한계 드러나 … 숙종 · 영조의 오만함 · 겉치레 비난 받아
‘내가 들으니, 옛날에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했는데, 지금에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면 성현(聖賢)에 이를 수 있지만, 남을 위한 학문을 하면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나 취하고 녹이나 얻는 것을 꾀할 뿐이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고봉집). 우리는 왜 공부를 할까?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는 목적 그 자체로서의 공부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고 성찰과 수양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공부가 전자라면, 진학이나 취업, 시험 합격 등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후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공부일까? 물론 기본이 되는 공부는 전자지만, 후자라고 해서 꼭 열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후자의 공부가 필요한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이와 같은 공부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 또한 그 목표의 테두리 안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 목표와 다르거나 혹은 목표를 넘어서는 공부는 시간낭비라는 이유로 치부되기도 한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공부할 동인이 사라져버리는 문제점도 있다. 더욱이 공부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자신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 존재할 때, 그것은 외적인 성취, 즉 사회적 성공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가 이것을 목표로 삼고 또 이를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하게 되면 공부를 하는 사람 또한 그것만을 중시하게 된다.
스스로를 위한 공부여야 한계가 없어
서두에서 인용한 고봉 기대승의 말은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자신의 성장에 목표를 두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한계를 만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높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에 맞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들이 부러워하는 수준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수준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저 외형적인 명예나 이익을 얻는 데 그칠 뿐이다. 공부의 목표가 딱 거기까지이고 그것이 곧 그 사람의 한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이에 대해 각각 ‘위기지학(爲己之學)’ 과 ‘위인지학(爲人之學)’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위기지학’ 이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는 것이고, ‘위인지학’ 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하는 것이다.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 ‘위기지학’ 이라면 사회적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부합하고자 공부하는 것이 ‘위인지학’ 이다. 이는 유학의 학문론에서 쓰이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논어] ‘헌문(憲問)’편의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공부한다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는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참된 이유를 생각할 때, 어떤 공부가 좋은 공부인지는 자명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위기지학’ 의 정신은 개개인을 넘어 리더가 명심해야 할 규범이기도 하다. 숙종 때의 학자 김창협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피건대, 전하께서 경연에 임하여 강독하실 때 질문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옛 성현께서 ‘의심이 나는 점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서 밝혀야 한다’고 하셨으니, 대개 학문에는 의심이 가는 바가 없을 수 없고, 의심이 나면 반드시 질문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혹 전하께서는 자신의 학문이 고명하다 생각하시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 시는 것입니까? 중용에 이르기를 순 임금은 큰 지혜를 가지고 있었지만 ‘묻기를 좋아하고 말을 살피길 좋아하였다’ 하였고, 증자는 안연을 일컬어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물었고, 박학다식하면서도 배움이 얕고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물었다’ 하였으니, 순 임금과 안자와 같은 성현도 이와 같았거늘, 어찌 전하께서는 자신의 학문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으십니까?”(숙종9.7.17).
김창협은 숙종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과시하고 싶어서라고 봤다. 의심이 생기는 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임금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김창협은 이러한 숙종의 오만함을 강하게 비판했다. 공부란 끝이 없는 것이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순 임금과 같은 위대한 성현도 질문하고 경청하며 자신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갔는데 하물며 한참 부족한 숙종이 어찌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배움을 소홀히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어 김창협은 숙종으로 하여금 ‘위기지학’에 힘쓸 것을 간곡히 진언했다. “만약 전하께서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심을 두는 경지에 조차 이르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와 같이 한다면 매일 경연에 나아가 공부를 하신들 전하의 학문은 진보하지 못합니다…(중략)… 공자가 말하기를,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하여 학문을 하고, 지금 학자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후세의 학문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이목만 신경 쓸 뿐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는 학자들의 잘못일 뿐만 아니라 군주들이 올바른 모범을 보이지 않아서 입니다.”(숙종9.7.17).
영조 때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수찬 남태량은 “공자가 말하길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고 지금 학자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자 학문을 한다’고 했는데, 전하께서 내리신 비망기를 살펴보니, 경전을 많이 인용하셨고 뜻은 성대한 듯하나, 총명을 내세움이 지나치고 말이 많아 오히려 위엄이 떨어집니다. 정치의 득실은 실체가 없고 문자 사이에서만 맴돌며,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지 않습니다. 혹 전하께서는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크셨던 것은 아닙니까?”(영조10.2.19)라고 했다. 영조의 글이 내용은 없고 겉치레만 가득한데 이것이 혹 신하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무리하게 자신을 과시했기 때문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리더라도 끊임없이 질문해야
무릇 리더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조절해야 하고 자신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야 한다. 조직의 번영과 구성원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리더는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구성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리더로서의 자신을 완성시켜 줄 ‘위기지학’ 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만약 리더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소홀히 하면서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만 치중한다면, 설령 공부를 한다고 해도 좋은 성과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공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만으로는 절대 깊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이런 리더는 얼마 가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5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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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다 |
황후시해 · 을사늑약에도 분노하지 않아 … 조선 스스로 위기 자초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 · 맹자 · 중용 · 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온 나라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 있던 1905년 정월. 고종은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불러들였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고종과는 불편한 관계였지만, 스러져가는 국운을 붙잡기 위해 유림의 존경을 받고 있던 그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어전에 들어선 최익현은 황제에 대한 예를 마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지난 무술년(1898)에 올린 상소에서 모두 밝혔으나 폐하께선 받아들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 올라온 것도 감히 신의 의견이 채택되길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한 어찌 감히 고향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가길 바라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는 위태로운 형세가 목전에 닥쳐 있으니, 폐하께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주시겠다면 신의 생각을 모두 숨김없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익현 ‘근본적 책임은 고종에게’
고종이 허락하자 최익현이 물었다. “지금이 태평한 시대가 아니라 난세임을 폐하께선 알고 계십니까?” 고종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익현은 비통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 지금이 난세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면, 어지럽게 된 원인도 알고 계십니까? 오늘날 민회(民會, 일진회 등을 가리킴)가 정부를 공격하니 이는 극도의 패역이며, 또한 강한 이웃나라(일본)를 끼고서 횡포를 자행하니 그 죄는 처단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민심이 흩어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늘의 명을 섬겨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폐하의 정성이 극진하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관리들이 폐하의 덕을 받들어 나가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닙니까?…(중략)… 저 백성들이 자기의 살점을 씹으면서까지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물론 미련한 일이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관리들이 탐오하고 학대하여 민심을 잃어 그들이 본성을 잃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익현은 바로 고종에게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국가를 정비하고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한 5가지 시무책을 제시한다.
하지만 최익현도 이미 조선이 머지않아 망국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저지하기에 조선은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500년 동안이나 내려온 종묘사직과 삼천리강토가 장차 일본에 의해 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니 어찌 그 죄를 전적으로 저들에게만 돌리겠습니까? 을미년의 큰 참변(을미사변)이 있은 이후부터 우리의 군신 상하 모두가 좀 더 분발하였더라면 오늘날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중략)… 이제는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아무리 훌륭한 계책이 있은들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금에라도 깨닫고 대책을 조금씩 취해나가면서 다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고종42.1.7). 나라의 쇠망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이 되었다 하더라도, 앉아서 멸망을 기다릴 수는 없다.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바침으로써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 천명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익현은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자존감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되어 버린 데는 우리 자신의 잘못이 컸다. 황제와 신하, 백성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하기는커녕, 군주는 무능했고 신하들은 부패하여 권력을 탐하거나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러다 보니 민심도 흩어져 하나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지난 을미년(1895)에, 일본에 의해 나라의 왕후가 무참히 시해되는 참변을 겪었음에도 조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복수를 다짐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태함에 빠졌으며, 힘을 모으기는커녕 서로를 헐뜯기에 바빴다. 일제에 치가 떨리지만 결국 자업자득, 스스로를 멸시하고 스스로를 공격한 우리의 죄라는 것이다. 최익현이 ‘사람이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다’ 는 맹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그래서이다.
이 대목은 본래 〈맹자〉 ‘이루(離婁)’상편에 나온다. ‘사람이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뒤에 남이 업신여기며, 집안은 반드시 스스로 훼손한 뒤에 남이 훼손하며,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공격한 뒤에 남이 공격하는 법이다. ‘태갑(太甲)’에 이르기를 ‘하늘이 주는 재앙은 그래도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멸시를 받고 가정이 훼손되며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외부적 이유가 아닌 내부적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지도자가 올바른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지도층이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이 자기 비하와 체념에 빠진다면 이런 나라는 이내 다른 나라의 먹잇감이 된다. 나라의 역량이 결집될 리 없고, 나라를 지키고자 헌신할 구성원도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최익현은 절박한 우려와 걱정을 담아 이제부터라도 온 조선이 각성하여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랐다. 조선이 스스로를 멸시하는 풍조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굳건한 나라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0개월 후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당했다. 최익현은 이에 항거해 거병했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마도에 연금되었고, 단식 끝에 순국했다. 고종도 헤이그 밀사로 인한 일제의 압력을 받아 퇴위한다.
비극의 역사 되풀이 말아야
얼마 후 개화사상가 유길준(1856~1914)은 관직에 나와 달라는 순종의 요청을 사양하며 앞선 맹자의 말을 다시 거론했다. “맹자의 말에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를 공격한 다음에야 남이 공격하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다음에야 남이 업신여기는 법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자체로 우리의 조국을 지킬 힘이 있고, 자체로 우리의 외교와 내부 정치를 할 지혜와 능력이 있었다면 저 나라가 어찌 감히 이렇게 했겠습니까. 최근에 걸친 두 가지 조약 (을사늑약 과 정미7조약을 말함. 이로 인해 외교권이 박탈되고 고종이 퇴위했으며 인사 행정권을 빼앗겼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은 결국 우리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순종즉위.10.23).
똑같이 맹자를 인용했지만 거기에 작은 불씨나마 희망을 담았던 최익현의 말이 2년 후 유길준에 이르러선 체념과 절망의 말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비극은 그저 역사 속의 이야기일 뿐일까? 혹시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4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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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아무리 성군이라도 독단은 금물 |
“감히 왕에게…” 는 삼가야 할 말 … 종국엔 간신만 남아
“만일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덕이 없는 임금이니 따르지 않겠다” “정승 1000명이 말한다 해도 들어줄 수 없다” “날 신하들의 제재를 받는 임금으로 만들어 홀로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하게 하는가” “대신의 말도 듣지 않았는데 너희의 말을 들을 것 같은가” “너희들이 나를 위협하려 드는 것인가”….
“감히 왕에게…” 는 삼가야 할 말 ... 종국엔 간신만 남아
여기서 퀴즈. 이 말을 한 왕은 누구일까? 폭군으로 악명이 높았던 연산군? 아니면 독선적인 성격이 강했던 태종? 의외지만 정답은 세종이다. 1448년(세종30) 7월 17일, 불당(佛堂) 설치 지시에 대해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치자, 세종은 위와 같은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물론 당시 세종은 시력을 거의 잃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아들 평원대군과 광평대군, 부인 소헌왕후가 연이어 사망하는 등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다. 하여 불교를 통해 종교적 위안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세종 “나를 위협하려 드는가”
하지만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이 불당을 짓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불교는 척결해야 할 이단에 불과했다. 영의정 황희를 위시하여 하급 관료, 젊은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 같이 세종의 뜻에 맞선 이유다. 세종 입장에서야 병든 임금의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않는 신하들이 각박하게 느껴졌겠지만, 당시로서는 체제질서와 국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세종은 끝내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불당(佛堂) 설치를 강행하고야 만다. 물론 이 문제가 세종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거나, 세종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강압적으로 여론을 묵살하고, 자신의 뜻만 고집한 세종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가 올린 상소는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일찍이 공자는 정공(定公)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임금 노릇한다고 해서 즐거운 것은 없지만, 오직 아무도 내 말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 이가 있는데, 만약 임금의 말이 옳지 못한데도 이를 거역하는 이가 없다면, 이 한마디 말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라 하였고, 자사(子思)는 위후(衛侯)에게 ‘임금이 자신의 말을 스스로 옳게 여기면 신하들 중에 그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 이가 없을 것이니, 그 임금의 정치는 갈수록 잘못될 것입니다’ 라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잘 다스려지느냐 못하느냐,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조짐은 임금이 신하의 간언을 따르느냐 거절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결정되어 왔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중략)…지금 신하들이 간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나, 전하께선 거절하기를 더욱 굳게 하시니, 스스로를 옳게 여기심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크게 그릇된 것을 고집하시어 간언을 물리치심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는 종사의 크나큰 불행입니다.” (세종30.7.20).
여기서 신석조가 인용한 공자의 말은 [논어] ‘자로(子路)’ 편에 나온다. 노나라의 임금 정공이 공자에게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말만 가지고 그와 같은 효과를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만, 사람들의 말에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고 신하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움을 안다면, 이 한마디 말로서 나라를 흥하게 함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다시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러한 것이 있습니까?” 라 묻자, 공자가 다시 답한다. “말만 가지고 그렇게 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의 말에 ‘나는 임금 노릇이 즐겁지 않지만, 내가 말을 하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 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임금의 말이 선한데 아무도 거역하는 이가 없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임금의 말이 선하지 못한데도 이를 거역하는 이가 없다면, 바로 이것이 한마디 말이 나라를 잃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이 중에서 특히 자주 인용되는 것은 뒷부분인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은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임금이 오로지 자기의 말대로만 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절대 이를 어기지 못하도록 한다면 아첨하는 무리들은 거짓된 미사여구로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니, 정치에 있어 잘못된 점과 인재 등용에서의 실수 등에 대한 비판을 모두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도 임금이 알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곧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종1.7.7).
그러나 임금으로서는 사람들이 반대하더라도 ‘왕이 돼서 이거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느냐’ 는 마음을 갖기가 쉽다. ‘감히 왕의 말을 거역하려 하느냐’ 는 불쾌감도 생겨난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고, 역정을 내며 신하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잦는데 현종 때 박세당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삼사(三司)의 간언을 대부분 물리치셨지,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신하들이 모두 충직하지 못해 국가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단지 신하들이 아뢰는 말이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이라면, 전하께선 간언을 막고 스스로를 어질게 여겨 ‘내 말을 사람들이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 는 공자의 경계를 크게 범하고 계신 것입니다. 더욱이 전하께서 매번 노여운 음성으로 신하들의 말을 꺾으시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무릇 일의 가부는 이치에 달려 있을 뿐이지 목소리가 크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계집).
물론 임금이 “내 말을 거역하지 말라” “내 말에 토를 달지 말라” 고 했다 하여 이 말로 인해 바로 나라가 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고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임금이 과연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을까?
내 장점이 내 눈을 가린다
무릇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의 생각이 항상 옳고 그의 판단이 무조건 맞는 것은 아니다. 흔히 지위가 높고, 경험과 연륜이 많은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갖기가 쉽다. 하지만 그 지위나 경험, 연륜이 오히려 편견이 되고 선입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 장점이 오히려 내 눈을 가리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늘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실수를 고치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더 좋은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듣기 싫은 소리라 하여 귀를 닫아버리고, 내 뜻에 거슬린다 해서 역정을 낸다면 그 사람은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게 된다. 그는 점점 더 편협해질 뿐이며, 올바른 길로부터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3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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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비루한 자와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야 |
권력만 노리는 사대부 비판 … 서로를 간신으로 몰기도
춘추시대의 첫 패자 제환공(齊桓公)에게는 세 명의 간신이 있었다. 요리사 역아는 자신의 아들을 죽여 그 고기를 환공에게 올렸고, 환관 수조는 임금의 신임을 얻고자 스스로 거세했다. 개방은 부모를 저버린 채 환공의 환심을 사는 일에만 매달렸다. 관중은 이 셋을 멀리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환공이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 “역아는 아들을 죽여서까지 임금의 총애를 구한 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식을 사랑하는 법인데, 자식까지 죽일 정도라면 장차 임금께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수조는 스스로를 거세하면서까지 임금의 사랑을 얻으려 한 자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몸을 아끼는 법인데, 자기 몸을 불구로까지 만들 정도라면 장차 임금께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개방도 그렇습니다. 그는 부친이 죽어도 상을 치르러 가지 않았으니, 장차 임금께는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이 세 사람은 권세를 차지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자 사람으로서는 해선 안 될 만행을 저질렀으니, 앞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임금에게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환공은 관중의 조언을 무시했고, 결국 그는 이 세 사람에 의해 유폐되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자리를 탐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여,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자. 이런 사람을 간신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백성이나 국가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 없다. 오직 자신이 가질 있는 부귀와 권력, 이익만 중요할 뿐이다. ‘환득환실(患得患失)’ 이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이러한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논어] ‘양화(陽貨)’ 편의 ‘비루한 사람과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얻기 전에는 얻으려 근심하고, 이미 얻은 다음에는 그것을 잃을까 걱정하니, 만일 잃을 것을 근심하게 되면 이르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鄙夫 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되었다. 비루한 소인들은 자리를 탐하고 이익을 추구하여 권세를 얻고자 아등바등하며, 얻은 후에는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못하는 짓이 없다는 것이다.
간신에게 죽임 당한 제환공
이 ‘환득환실’이란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출현한다. 선조 38년 홍문관은 상소를 올려 사대부의 타락을 비판했다. ‘요즘 유생들은 구두법을 알면 바로 과문(科文, 과거 시험용 문체)을 공부하고, 15세가 넘으면 벌써 명리(名利)를 도모하여,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풍습을 이루었고 박정하고 불성실함은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벼슬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무너졌으니 벼슬 한 뒤의 모습은 가히 상상할 만합니다. 나쁜 습속에 물들어 벼슬이 높아질수록 절조 있는 행동은 찾을 길이 없어지고, 바른 생각은 펼쳐지지 못한 채 염치가 땅에 떨어져 탐욕스런 풍조가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 참람하기 그지없습니다.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근심하고 얻은 후에는 어떻게 하면 잃을까만 걱정하며,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선조38.7.27).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영중추부사 이덕형도 당시 사대부간의 극심한 권력투쟁을 우려했다. ‘근래 환득환실한 선비들은 좋은 벼슬만을 탐하고, 불학무식한 자들은 시론(時論)에 따르는 것만을 옳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체면과 염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권세가 있는 곳을 향해 앞다투어 나가면서 밀치고 박차고 싸우는 것을 공으로 삼으니, 이로 인해 조정이 더럽혀지고 있습니다’(광해즉위년.4.1). 그는 나라의 장래를 도외시 한 채 오로지 권세를 좇고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조정을 가득 채우고 있다며, 왕이 이들의 농간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진언한다. 두 상소 모두 사사로운 이익 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세태를 경고하며 ‘환득환실’을 인용했다.
이 밖에도 ‘환득환실’은 탄핵이나 정적을 공격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자리를 탐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는 평가를 덧씌우는 것만큼 매서운 칼날도 없을 테니 말이다. 가령 성종 때 대사간 성현은 “벼슬자리에 오른 지 30여년이 되었고, 현재의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는데도 여진여퇴 (旅進旅退, 주관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만 함)하고 환득환실하며, 한가지도 나라에 보탬이 없으니, 시위소찬(尸位素餐,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아먹음)함 또한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진실로 소인이며 취렴하는 신하라고 할 수 있으므로, 올바른 시대라면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라며 양성지를 공격했다(성종10.4.29). 중종 16년에는 조광조를 지지했던 대신들이 ‘환득환실한 자들’이라는 죄목으로 제거되었다(중종16.10.18 外). 영조 초기 노론과 소론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던 시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환득환실한 마음을 가졌다’고 비난했다(영조3.10.6 外).
임금이 신하들을 처벌하며 ‘환득환실’을 명분으로 내걸기도 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등극을 반대했던 세력을 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왕(영조)께서는 신성한 자질을 타고 나시어 80의 노령을 누리셨다. 그런데 저 불령한 무리들이 감히 선왕의 귀를 흐리고자, 처음에는 환득환실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결국은 동궁(사도세자)을 원수처럼 여기기에 이르러, 세자의 자리를 핍박하여 위태롭게 하였다” (정조즉위년.7.3/1.3.29).
하지만 공자가 말한 본래의 취지는 결코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선 ‘환득환실’은 임금이 인재를 구별하는 소중한 기준이다. 성호 이익의 말이다. “충신은 관직에 나아가길 어려워한다. 그 직임이 무겁고 커서 혹시라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소인은 쉽게 나선다. 거리낌 없이 자리를 탐하거나 아니면 경박하여 일을 함부로 알기 때문이다. 요즘 임금이 취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환득환실한 것은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드는 자들에게만 벼슬을 주어서다.” 그는 자리를 얻고자 매달리는 사람, 자리를 잃지 않고자 필사적인 사람을 중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대신에 관직에 나서길 두려워하고 큰 임무 앞에서 조심스러운 사람을 발탁하라는 것이다.
실록에 다양하게 쓰인 ‘환득환실’ (患得患失)
아울러 ‘환득환실’은 관직에 나선 사람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성찰의 질문이기도 하다. 흔히 무언가를 바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다 보면 변질되게 된다. 내가 관직이 주는 순수한 소명에 충실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가 가져다 주는 힘과 이익을 누리고 싶은 것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해야 한다. ‘환득환실’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고갤 들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할 때, 비로소 그는 맡겨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2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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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자식은 더 강하게 신하는 더 엄하게 |
‘사랑은 수고를 동반하는 일’ … 왕들의 자녀 교육에 인용
북송시대의 대문장가 소동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하기만 하고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수(禽獸)가 그의 새끼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충성한다면서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이는 부시(婦寺, 궁녀나 환관)의 순종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수고롭게 할 줄 아는 것인 즉 그 사랑이 깊은 것이며, 충성하면서 깨우쳐 줄줄 아는 것인 즉 그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이다.”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편들어주고, 대신 해주고, 막아주고, 이는 의존심만 키워줄 뿐 종국엔 그 사람을 망쳐버린다. 마찬가지로 진정 그에게 충성한다면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말로 깨우쳐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공자가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말이다.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맹목적 사랑은 ‘금수(禽獸)’의 새끼 사랑
이 대목은 역사 속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세조는 이렇게 천명했다. “주공(周公)이 말하길 ‘먼저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고, 공자가 이르길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내가 대군청(大君廳) 북쪽에 집을 한 채 짓고 세자로 하여금 여기에 나가 있게 하여, 항상 백성들과 만나고 세상일을 알게 하려 한다.” 세자(훗날 예종)가 깊은 궁궐 안에서만 성장하여 백성의 삶을 모르니 직접 듣고 겪어볼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세조10.3.27).
세조가 [맹자]의 말을 인용해 “하늘이 장차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땐, 반드시 먼저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그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니, 이는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감정을 참아 내게 함으로써 하지 못했던 일들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라며 밤낮으로 세자를 가르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세조13.1.29). 그는 직접 [훈사(訓辭)] 10장을 지어 세자에게 내리기도 했는데 (세조4.10.8), 지나치게 엄격하다 할 정도로 세자를 단련시켰다.
이에 비해 그의 손자인 성종은 세자(훗날 연산군)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그 자신은 신하들이 경연(經筵) 중단을 건의할 정도로 철저한 모범생이었지만, 세자의 서연(書筵)은 자주 중지시켜 줬다. 한번은 날씨가 덥다며 서연을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하자 대간을 비롯한 신하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삼가 살피건대, 세자의 나이가 아직 약관이 되지 아니 하였으니,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도야하는 공부는 잠시라도 중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근래에 심한 더위로 인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중지하도록 명하셨는데, 춘방(春坊,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과 사헌부에서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전하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 등은 전하께서 세자를 아끼시는 마음에, 혹시라도 세자가 더위를 먹어 건강을 잃게 될까 걱정하여 그렇게 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기를 ‘어려서 이룬 것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은 자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학문의 성취를 중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굳이 먼 옛날을 거울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초년에 매일 세번씩 경연에 나아가시어 아무리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중지하신 적이 없으니, 성상(聖上)의 학문이 고명하심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세자를 사랑하심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심보다 더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심이 고식적인 것이지 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니, 신 등은 적이 의아스럽습니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생각한다면 올바른 길을 일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 하셨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서연을 다시 처음과 같이 하도록 명하소서.” 세자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세자가 장차 훌륭한 왕이 되길 바란다면 엄격하게 훈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자는 본래 기질이 허약한데다 지금 또 더위를 앓고 있으므로 내가 중지하도록 명한 것이다. 여름철에는 종친들도 방학을 하지 않는가?” 신하들이 “세자의 공부는 종친과 다르므로, 비록 더운 여름이라 해도 중단할 수 없습니다” 라며 반대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성종 23.6.23).
요컨대 세조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내가 세자를 사랑하니 수고롭게 만들겠다’ 고 실천한데 비해 성종은 그러질 못해 ‘세자를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만들어야 한다’ 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비록 요절하긴 했지만 예종은 임금으로서 명철한 자질을 보였고,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로 남게 된 이유 중 하나를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진 않을까?
두 번째 구절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도 그 의미는 같다. ‘충(忠)’이라는 글자로 인해 주로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예컨대 영조 때 서종섭은 이 대목을 이렇게 부연했다. “충성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은 그 깨우쳐 주는 것이 바로 충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로지 명령을 받들어 지키며 아첨하는 것을 주로 하면서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고 보필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이를 어찌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충성에는 그릇된 것과 바른 것이 있으니, 보필하며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 바른 것이고, 명령을 받들어 지키며 아첨하는 것이 그릇된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1.1.24).
그러나 이것을 ‘충성’ 이라고만 표현하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충’은 비단 임금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대상이 누구든 그에 대한 공정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공자의 이 말도 ‘(누군가에게) 충성한다면’보다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되어야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연산군에 지나치게 관대했던 성종
흔히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더 강하게 키우고, 아끼는 부하일수록 더 엄하게 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벼랑 끝으로 자기 자식을 내몬다는 맹수처럼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자질을 갖추며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객관적인 판단을 가로막기도 하고, 그 사람을 엄하게 대하다 혹시라도 서먹해질까 지레 물러서기도 한다. 이럴 땐, 내가 대상으로부터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그 사람의 미래와 가능성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길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수고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깨우쳐주어야 한다. 공자의 말처럼 말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301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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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동료의 신뢰 없으면 윗사람의 신임도 없다 |
조선 사대부 관직생활의 지침 … 공자의 말을 [맹자]에도 인용
'동료의 의심을 샀으니 관직에서 물러나겠사옵니다.' 조선시대 인조 재위 시 좌의정이었던 김류는 <맹자>를 언급하며 인조에게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고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했다. 당대 지식인들의 선택과 결단의 기준이 됐던 사서(四書). 이 사서가 현재 우리에게는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가. 이코노미스트는 '실록으로 읽는 사서(四書)' 시리즈를 연재한다.
아래는 이코노미스트 기사 전문 =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 맹자 · 중용 · 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인조 8년, 당시 좌의정이었던 김류가 상소를 올렸다. ‘신이 최명길의 풍수이론을 논변하던 중 우연히 희릉(禧陵,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의 일을 인용하게 되었습니다만, 결코 김안로를 언급한 적은 없습니다. 신이 김안로와 같은 일을 의도하여 은밀히 사람을 무함(誣陷)할 계책을 품었다고 한다면 신은 억울하여 만 번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신이 음험하고 간특한 마음을 품고서 실제 다른 이를 무함하고자 했더라도 밖으로 표출한 바가 없는데, 어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미리 헤아려 신을 지레 의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맹자가 ‘친구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고 하였는 바,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동료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하여 이처럼 씻기 어려운 오명을 남기게 되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의 반열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인조 8.8.17).
‘동료의 의심 샀으니 관직에서 물러나겠다’
이 상소가 있기 며칠 전, 김류는 목릉(穆陵, 선조와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능)을 이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최명길과 논쟁을 벌이면서 희릉의 일을 거론했다. 중종 때 척신으로 전횡을 휘둘렀던 김안로는 불길한 땅에 희릉을 모신 죄를 묻겠다며 정적을 제거한 바 있는데, 최명길 또한 그럴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자 최명길이 분노하여 조정에서 당장 물러나겠다고 선언했고, 다른 신하들은 오히려 김류가 김안로의 일을 재현시키려는 것이 아니냐며 비판했다. 이에 김류가 자신의 말을 변명하고자 상소를 올린 것이다.
김류의 상소는 다소 궁색한 감이 있다. 조선에서 ‘희릉의 일’은 김안로의 음험한 계략을 의미하는 관용어처럼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안로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으로, 김류가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여하튼 김류는 같은 반정 1등공신인 최명길이 자신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의 신임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다. 이 때 그는 ‘친구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 (不信於友 弗獲於上矣)’ 는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이 구절은 [맹자] ‘이루(離婁)’ 하편뿐만 아니라 [중용] 제 20장에도 거의 비슷하게 수록되어 있다. 원래 공자가 한 말인 것이다. 중용을 기준으로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친구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다. 친구의 믿음을 얻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효순(孝順)하지 않으면 친구로부터도 믿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버이에게 효순하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효순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성실하기 위한 도리가 있으니, 선(善)함에 밝지 못하면 스스로를 성실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중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성실하게 한다’ 는 대목을 설명하며 “예를 들어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는 것은 반드시 실제로 그러한 효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만약 겉으로는 효도의 일을 행하면서 속에서는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성실하지 못한 것” 이라고 했다. 성실함이란 마음과 행동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설령 부모님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드리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겉치레일 뿐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님께 실망을 안기게 된다.
이러한 성실한 마음은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우정은 친구에게 무조건 잘해주거나, 친구가 하자는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부모를 섬기는 그 마음처럼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뿐이다. 간혹 부모에게는 효도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의 믿음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성공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위선이다. 더욱이 어버이에게 불효하는 사람을 친구로서 신뢰할 이는 없을 것이다.
친구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한다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리가 없다. 동료들과 소통을 하지 못하고 협력을 하지 못하는 데 업무를 잘할 턱이 없고, 친구들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그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 윗사람에게 필요한 인재일 리가 없다. 가식이나 아첨으로 잠시 잘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사람의 실체는 금세 드러나기 마련이다. 요컨대, 올바르고 선한 마음을 갖고 그 마음을 실천하여 안으로는 부모를 섬기고, 밖으로는 친구의 믿음을 얻어야, 사회생활을 하며 윗사람의 인정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조선 사대부들이 관직생활을 하는 중요한 지침이 되기도 했다. 특히 동료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반성하며,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신은 본래 어리석어 형세를 살피는 능력이 부족한데도 여러 번 상소를 올렸다가 곧바로 여론이 꺼리는 바에 저촉되어 선비들이 마음으로 따라주지 않습니다. 이제 신은 고립되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지금 한차례 소요가 일어난 것도 모두 신이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기 때문으로, 사람들이 신을 모함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신은 일찍이 붕우에게 신뢰받지 못했는데 윗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선조수정실록16.10.1). 율곡 이이의 상소다. 당시 이이에게 쏟아진 비난은 당쟁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이이는 그것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렸다. 자신이 더 진심을 다했다면, 자신이 보다 성실했더라면 그런 비난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밖에 우암 송시열도 자신의 취지가 친구인 박세채의 오해를 사자 이 말을 인용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숙종9.3.5).
사람 대하는 ‘진심’ 이 중요
그런데 사대부들이 친구의 신뢰를 얻고, 자신의 진심을 오해 받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평판을 따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다만 ‘타인으로부터의 신뢰’ 가 나 자신의 수양의 결과를 보여준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가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올바름을 실천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왔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 설령 당장은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해도 그 진심을 믿고 기다려줄 것이다. 반면에 선한 일을 해도 어떤 저의가 있는지 의심받고, 바른 말을 해도 오해를 산다면 이는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이다. 스스로를 깊이 반성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글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7 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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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조세제도는 백성의 상황·능력 반영해야 |
세종은 공법의 장단점 놓고 고민 … ‘연분9등법, 전분6등법’ 등장
‘듣건대, 좋은 정치를 완성하기 위한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를 정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 중에서 토지조세와 공물, 부역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데, 토지조세의 경우 관리를 뽑아 여러 도에 내려 보내 (농사작황에 따른) 손실을 직접 조사하여 백성들의 상황을 알맞게 헤아릴 수 있도록 진행해왔다…(중략)… 하지만 파견된 관리 중에는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의 여하에 따라 손실을 마음대로 조사하고, 이에 따른 세액도 자의적으로 가감하여 백성들이 그 피해를 입고 있으니, 이 폐단을 구제하려면 마땅히 공법(貢法)이나 조법(助法)에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법의 경우 반드시 정전제(井田制)가 전제되어야 시행할 수 있으므로…(중략)… (공법을 도입하고자 하는데) 공법의 도입에 따른 문제점을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과거시험 문제로 제도 개혁 아이디어 모아
세종 9년(1427년) 3월 16일, 세종은 위와 같이 과거시험 문제를 출제했다. 기존 농지소출에 대한 징세방법인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은 농사가 평년작 미만일 경우 그 손실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 주는 방식이다. 매년 백성들의 개별 농사작황 상태를 반영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는 점에서 나름 괜찮은 제도였다. 하지만 담당실무자의 재량권이 지나치게 강해 손실을 파악하기 위한 농지실사조사 과정에 청탁과 부정이 개입되고, 불필요한 비용이 남발되는 등 폐해가 많았다. 개인 소유 토지의 경우, 수조권자인 토지주인이 직접 작황을 조사한 후 경작자에게 세액을 고지하곤 했는데, 소작료를 비싸게 받기 위해 고의로 손실을 축소시키는 식의 문제가 심각했다.
세종은 토지소유주의 답험권한을 국가가 회수하고, 세금 징수액을 정액제로 전환함으로써 징세과정에서의 사적인 개입을 방지하고자 한다. 애덤 스미스의 [조세 부과의 4원칙] 중 세금의 납세 방법·금액을 납세자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하고, 징세자의 사사로운 개입에 의해 이와 같은 사실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조세 확실의 원칙’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과거시험 문제를 통해 도입을 천명한 ‘공법’은 바로 이를 위한 정책법안이었다.
그런데 공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공법은 중국 고대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만든 제도로 [맹자]의 ‘등문공’ 상편에 소개되어 있다. 맹자에 따르면 이 공법은 백성에게 분배된 토지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에서 나오는 소출을 세금으로 징수한다. 그런데 매년 실제 소출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해의 수확을 평균으로 계산하여 결정한다. 내야 할 세금 액수가 정해져 있어 사적인 개입이 차단되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농사의 상황에 따라 연소득이 달라져도 세액은 계속 고정되어 있으므로, 흉년이 들었을 경우에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맹자도 용자(중국 고대의 현인)의 말을 인용해 공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땅을 다스리는 데는 조법보다 좋은 것이 없고, 공법보다 나쁜 것이 없으니, 공(貢)은 몇 년의 중간치를 비교하여 일정한 수를 내게 하는 것이다. 풍년에는 곡식이 이리저리 넉넉하게 축적되어 있어 (국가에서) 많이 취해가 더라도 포악함이 되지 않지만 (공법은) 적게 취하고, 흉년에는 토지의 곡식이 배를 채우기에도 부족한데 (공법은) 반드시 일정액을 채운다 (治地莫善於助 莫不善於貢, 貢者校數歲之中, 以爲常, 樂歲粒米狼戾, 多取之而不爲虐, 則寡取之, 凶年糞其田而不足, 則必取盈焉).”
[맹자]의 이 구절은 공법을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모두가 신경 쓸 수밖에 없었는데, 유교정치의 핵심 이념인 ‘인정(仁政)’론이 전개되어 있는 장이기 때문이다. 유교정치사상론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정(仁政)은 토지의 경계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든가 ‘항산(恒産)이 있는 자에게 항심(恒心)이 있다’라는 구절 모두 같은 장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공법을 부정적으로 본 대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반대 진영에게는 훌륭한 반대의 근거가 되고, 찬성 진영에는 절박한 해명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공법 반대론자들은 맹자를 인용해 공법을 비판했다. “비옥한 전지는 열에 한 둘에 불과하고, 척박한 전지는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니 (공법이 시행된다면) 좋은 전답을 경작하는 자는 다행스런 일이겠지만, 나쁜 전답을 경작하는 자에게는 불행한 일로서, 실로 고르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더욱이 공법의 폐단은 용자(龍子)가 자세히 논한 바 있으니, 풍년이라 할지라도 군대에 편입되었다든가, 병에 걸려 농사를 하지 못할 경우가 있을 텐데, 이 때 그 농사작황을 확인하지 않고 정해진 액수대로 조세를 거둘 경우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장차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세종12.8.10). 한 마디로 백성들의 상황을 고려해주지 않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타당한 것으로, 공법 찬성론자들의 입장에서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법의 문제점을 거론한 맹자의 구절을 해명할 수 있는 논리도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조세전문가이자 우찬성이었던 하연은 해당 맹자의 구절에 대한 주자의 주석과 세주(細註, 주자 외에 다른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주석)를 인용해 ‘용자(龍子)’의 우려는 후대의 제후들이 공법을 잘못 운용한 것에 대한 것임을 밝혔다. 농지등급에 따른 정액세에 농사의 상황을 반영하여 세액을 가감해주는 방식을 결합하자고도 주장한다. 이것이 곧 우임금이 처음 공법을 만든 정신이라는 것이다. 공법을 유지하면서도 답험손실법의 장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낸 것이다. 풍작과 흉작의 정도,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국의 농지를 54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세금을 부과한 ‘연분9등법 전분6등법’은 바로 이러한 논쟁 과정을 거쳐 확립된 것이다(세종26.11.13)
‘맹자’ 구절 놓고 열띤 토론
흔히 국가가 어지럽고 민생이 혼란한 시기를 살펴보면 조세제도 또한 문란해 있다. 세금은 납세자인 백성과 징세자인 국가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세금을 거두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는 데에 따른 최소한의 비용을 청구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조세제도는 간단하고 명확해야 한다. 징세자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개입에 따라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조세제도는 백성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백성의 담세능력을 반영하는 가운데 성립되어야 한다. 공법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맹자의 구절은 국가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뜻한다. 이 정신을 살려 조세제도를 완성한 세종의 공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6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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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나라를 다스리는 9가지 도리 |
군주와 신하 · 백성 · 친척 · 이민자의 관계 ... 노나라 임금 질문에 공자가 대답
1801년, 순조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발표했다. ‘[중용]에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도리(九經)가 담겨있다. 그 여섯 번째 항목에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이를 해석하기를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여 보살핀다는 뜻으로…(중략)… 어버이가 그 자식을 양육할 때 병에 걸리면 반드시 구원하는 법이니, 임금도 이와 같이 백성을 간곡히 어루만져주고 구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순조는 전격적으로 공노비 해방을 선언한다. ‘왕이 백성을 대할 때는 신분의 귀천이나 내외를 가리지 않고 고루 균등하게 자식처럼 여겨야 한다. 노비라 하여 따로 구분하는 것은 모든 백성을 동포로 여기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 과인은 왕실에 소속된 노비 3만6974명과 각 관청에 소속된 노비 2만9093명을 모두 해방하여 양민으로 삼을 것이다. 승정원은 노비문서를 거두어 들여 돈화문 앞에서 불태우도록 하라.’(순조1.1.28). 부모가 자식이 고통 받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 것처럼, 노비라 하여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더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순조는 9경 인용해 ‘공노비 해방’
여기서 순조가 언급한 ‘구경(九經)’은 중용 제20장에 나오는 개념으로, 유교정치사상에서 매우 중요시된다. 노나라의 임금 애공이 공자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큰 나라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도리가 있으니 ①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②어진 이를 존경하며 ③가까운 이를 살피고 ④대신을 공경하며 ⑤뭇 신하들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고 ⑥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⑦온갖 기술자들이 몰려들게 하고 ⑧이민자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며 ⑨제후들을 회유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애공이 다시 왜 그래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임금이 수신을 해야 나라의 도가 바로 서고, 어진 이를 존경해야 미혹됨이 없으며, 가까운 이를 잘 살펴야 원망을 사지 않고, 대신을 공경해야 간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신하를 내 몸처럼 여겨야 그들이 나라를 위해 보답을 하고, 백성을 내 자식처럼 사랑해야 백성들이 근면할 것입니다. 온갖 기술자들을 모으면 나라의 재정이 풍족해질 것이요, 이민자들을 부드럽게 포용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회유한다면 천하는 모두 노나라를 경외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구경에 관한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우선 임금이 수신(修身)을 해야 ‘밝게 보고 공정하게 들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성종24.8.22). “수신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구별하고 쓸 만하고 버릴 만한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은 없다.” (성종2.윤9.27). “수신을 통해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힘도 갖출 수 있게 된다.”(연산3.8.1). 수신은 마음의 중심을 확립하고,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도덕성을 확보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권위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존현(尊賢)은 인재 등용과 관련된 부분이다. 무릇 나라는 임금 혼자서 다스릴 수 없다. 각 직임에 걸맞은 최고의 인재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라가 번영하고 정치와 학문이 흥하게 되는 여부는 모두 존현에 달려 있으니,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퇴출시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숙종14.12.2)임금이 어진 이를 존경하고 우대하면 너도 나도 자신의 포부와 능력을 펼치고자 조정에 출사할 것이다. 반대로 임금이 어진 이를 홀대하고 간신을 선호하면, 인재들은 조정에 실망하고 낙향하여 숨어버리게 된다.
친친(親親)은 친인척 관리와 관련된 부분이다. “살피고 돌보아주되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성종18.6.10). 임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전횡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경대신(敬大臣)은 원로 대신들의 경륜과 지혜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세종은 즉위 후 아버지 태종의 신하인 황희와 허조, 맹사성을 모두 중용했다. 세조도 자주 세자를 불러 재상들과 인사시키며 대신들을 공경하라고 당부한다(세조13.8.3). 왕이 국정을 맡아 처리하는 데 있어 대신들의 경험과 전문적인 조언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체군신(體群臣)은 군신 간의 신뢰 문제이다. 신하가 탐탁지 않으면 애초에 그 직책을 맡겨서는 안 된다. 이왕 직임을 맡겼다면 임금은 신하를 자기 몸처럼 믿고 아껴야 한다. 다른 일을 걱정하지 않고 생활에 부족함이 없이 오로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주어야 한다. 임금이 나를 정말 위해준다고 생각해야 신하도 임금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법이다(중종23.3.7).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자서민(子庶民)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식을 보살피듯 임금은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운 점을 살피고 헤아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백성도 임금을 믿고 복종하며, 임금이 이끄는 대로 따라오게 된다.
도를 미리 준비하면 곤궁하지 않아
이 밖에 내백공(來百工)은 기술자를 우대하라는 뜻이다. “공인(工人)은 자기의 몸을 수고롭게 하여 천하가 편리하도록 만들어 주는 자로 그 공이 크니, 대우를 알맞게 하고 노고를 보상하여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한다.” (중종18.윤4.18). 유원인(柔遠人)은 이 나라를 찾아오는 자들을 잘 대해줌으로써 국가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넓히라는 가르침이다. 이민자를 융합하여 발휘되는 다양성의 힘은 국가의 인적 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다. 끝으로 회제후(懷諸候)는 이웃국가와 화합하는 것이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리스크를 줄이고, 국가 간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9가지 도리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염두에 두고 꾸준히 노력하며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구경’ 바로 뒤에 이어지는 중용의 구절이 경계하는 바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이룰 수 있고, 준비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말할 바를 미리 준비하면 차질이 없고, 일할 것을 미리 준비하면 어려움이 없고, 행할 것을 미리 준비하면 결함이 없고, 도를 미리 준비하면 곤궁하지 않을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5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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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몸으로 가르치는 자를 따른다 |
몸으로 가르치는 자를 따른다
1881년,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 송병선(훗날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은 고종에게 부국강병을 위한 8가지 방책을 담아 ‘신사봉사(辛巳封事)’ 를 올렸다. 이 중 제 3조의 내용을 소개한다.
‘셋째, 세자를 보좌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적통을 승계할 아들을 가르치는 절차는 세 가지가 있으니, 교훈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덕과 의리로 보좌하는 것이며, 신체를 보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옛 말에 이르길 ‘말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지고 몸으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른다’ 하였으니, 모든 것을 가르칠 때 항상 전하께서 솔선수범하시어 직접 보여주는 것을 중시하시옵소서’ 이다 (고종18.11.30). 영조 때 호조판서 이태좌도 효장세자의 관례와 혼례를 축하하며 “말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지고 몸으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른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학문을 더욱 부지런히 하고 아랫사람을 더욱 정성스럽게 대하여 몸소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소서” 라고 진언했다 (승정원일기 영조3.10.3).
군자의 덕은 바람, 소인의 덕은 풀
요컨대 장차 나라를 다스릴 왕세자를 훈육함에 있어 아버지인 임금이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부모가 본인들이 하지 않고 있는 것, 본인들의 행동과 어긋나는 것을 자식에게 요구한다면 자식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에게 따지고 반발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책을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자식에게는 책을 읽지 않는다고 야단친다면 과연 그 가르침에 무게가 실릴 수 있을까? 이는 위선이다. 자식이 변하길 바라고, 자식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다면 부모가 먼저 그 모습대로 행동해야 한다. 가르침이 말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 될 때 비로소 자식은 그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송병선과 이태좌가 인용한 위의 구절은 [논어집주(論語集註)] ‘안연’ 편에 나온다. 공자의 말로 잘못 사용되기도 하지만 (숙종32.10.17) 정확히는 주자가 붙인 주석이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제가 만일 무도한 자를 죽여 도를 실현하겠다면 이는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그대가 정치를 하면서 어찌 죽이는 일을 하려 합니까? 그대가 선(善)하고자 하면 백성들도 선해지는 것이니, 군자의 덕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지는 법입니다.” 주자가 이 글귀에 주석으로 ‘죽인다는 말이 어찌 윗사람이 할 말인가? 몸으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르고 말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지는 법이다’ 라는 윤돈(북송 때 학자)의 말을 인용해 첨부했다. 리더가 자신이 직접 모범을 보이며 뭇사람들을 올바로 이끌 생각은 하지 않고, 폭력적인 수단을 가지고도를 이루겠다는 잘못된 말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비단 부모-자식 사이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리더가 조직을 운영할 때도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덕목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따르라고 명령하려면, 설령 그가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외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솔선수범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철저히 실천하고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야 그 지시에 진정한 권위가 실리는 법이다.
명종 때 사치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너도 나도 비싼 수입품을 찾다 보니 밀거래가 성행하고 재물의 낭비도 심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간원은 지도층부터 검약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사치가 유행을 이루어, 중국 물품을 즐겨 사용하는데, 심지어 의복까지도 전적으로 중국 비단을 씁니다. 이 습성 자체를 바로잡지 않는 한 무역을 통제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겠습니까? 비록 법전(法典)에 비단옷을 입어도 된다고 되어 있으나, 선조(先祖) 때에는 재상이라도 전혀 입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당상관만 되도 모두가 비단옷을 만들어 입고 있으니, (비단을 구하기 위해) 역관과 결탁하게 되고, 역관 또한 그 청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몸으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순종하지만 말로 가르치는 자에게는 따진다’ 고 했듯이 위에서 먼저 절약과 검소를 실천한 후에야 비로소 사치의 풍습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실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물건과, 약재, 서책, 궁각(弓角) 외에는 일체의 무역을 금지하고 비단으로 만든 의복은 가의(嘉義, 종2품) 이하로는 착용하지 못하도록 하시옵소서” (명종7.4.20).
이와 관련해서는 세종 때에도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종은 그 자체로 성군(聖君)이었다. 소통과 경청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런 세종조차 만년에는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이즈음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켰고 지병이 심화되어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와 사랑하는 두 아들이 연이어 죽어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해 있었다. 세종이 불교를 통해 종교적인 위안을 찾으려 했던 이유다.
그런데 세종이 불사(佛事)를 행하려 하자 신하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이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불사는 대단히 불가한 것이니, 위에서 이를 행하면 어떻게 백성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몸으로 가르치는 자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보고 본받는 것은 모두 임금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 의리가 아닌 것을 행하시니, 이후 다른 사람이 그른 일을 한다 해도 어찌 이를 금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단(異端) 배척에 앞장서야 할 임금이 도리어 이단을 좇으니, 장차 백성들이 이단을 따르지 않도록 어떻게 교도하겠냐는 것이다. 또한, 임금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백성들의 잘못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냐는 힐문이었다 (세종 30.7.19). 이에 대해 세종은 “경들의 간언을 심히 아름답게 여기지만, 내가 만일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부덕한 임금이기 때문에 경들의 말을 따를 수가 없다” 며 거부했다.
나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무릇 ‘말’ 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말에 감동했다면, 그것은 말이 좋고 멋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의 행동이 말과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배우고 싶고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리더도 마찬가지다. 구성원들을 이끌고 구성원들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리더가 몸소 실천하고, 솔선수범할 때 그것이 바로 구성원들에게 전하는 최고의 ‘메시지’가 된다. 그래야 리더의 지시에 도덕적 권위가 생기고 구성원들도 리더를 믿고 따르게 된다. 나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엄격한 리더를 우리는 따르지 않는다. 자신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이를 요구하는 리더를 우리는 믿지 않는다. 말이 아닌 행동이 핵심인 것이다.
글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4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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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만물이 서로 다름은 자연의 당연한 이치 |
같은 물건도 품질 · 수요에 따라 가격 달라 … 세종은 토지에 따라 세금 달리 걷어
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보아오(博鰲) 포럼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만물이 제각기 다른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夫物之不齊 物之情也)’는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문명 사이에 우열은 없고 오직 특색의 차이가 있을 뿐” 이라고 부연 했다. 각각의 문명, 나라들이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의 장점을 배우며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맹자] ‘등문공’편에 나오는 이 말은 시장에서 물건의 가격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를 두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맹자의 제자 진상은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허자(許子, 제자백가 중 農家의 한 사람)의 학설을 따른다면, 시장의 물건 값은 싸고 비싼 구별이 없고, 나라 안에 속이는 행위가 없어질 것입니다. 설령 어린아이를 시장에 보낸다 하더라도 그를 속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베와 비단의 길이가 같으면 값이 서로 같고, 굵은 베와 가는 베 또는 비단실과 무명실의 무게가 같으면 값이 서로 같고, 오곡의 수량이 같으면 값이 서로 같고, 신발의 크기가 같으면 값이 서로 같을 것입니다.” 모든 물건의 기준가격을 동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건 값이 균일하여 예측이 가능하게 되면 백성들은 더욱 편리하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진핑 “문명과 국가에 따른 차이 존중해야”
맹자는 반박했다. “무릇 만물이 제각기 다른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어떤 물건의 가격은 차이가 배 또는 다섯 배가 되고, 어떤 물건은 차이가 열 배, 백 배나 되며, 또 어떤 물건은 차이가 천 배, 만 배나 된다. 그런데 그대는 모든 물건의 값을 똑같이 하려 하니, 이는 천하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굵고 거칠게 삼은 신과 가늘고 세밀하게 삼은 신의 값을 똑같이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 하러 힘들여 가늘고 세밀한 신을 만들려 하겠는가? 허자의 학설을 따르는 것은 천하 사람들을 거느리고 허황하고 거짓된 곳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물건마다 종류가 다르고 품질도 다르다. 희소성도 다르고 값어치도 다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가격을 획일화한다면 시장질서는 교란되고, 양질의 물건도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게 맹자의 판단이다.
이 문제는 조선 조정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물건 간의 가격획일화가 아니라 특정 물건의 가격고정화를 논의한다. 1795(정조19)년, 좌의정 유언호는 이렇게 건의한다. “분기마다 조정에서 방출하는 미곡이 1만여석이 넘는데 여전히 시장의 가격은 조금도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부유한 상인들이 사재기를 하여 미곡의 유통을 막고 이익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방출한 곡식들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늘 가격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격을 조작하도록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속히 평시서(平市署) 제조(提調)로 하여금 민정을 자세히 살피고 시장의 폐단을 널리 자문하게 한 다음, 이를 참작하여 지난 몇 년 동안의 평균 가격을 토대로 획일적으로 가격을 정하도록 하소서.” 가격고정을 통한 곡식가격안정화 조치를 주장한 것이다.
정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말은 좋은 말이다. 그러나 관에서 가격을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물이 제각기 다른 것이야말로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사꾼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인데 (가격고정화로 인해) 도성 시장에서 이익을 얻지 못하겠다고 판단한다면 싣고 오던 물자를 들고 배를 돌려 다른 데로 가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정조19.2.10). 물가는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되어야지 정부에서 획일적으로 고정시켜놓아서는 안 된다. 이는 결국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처사이다. 정조는 대신 매점매석을 통해 가격을 조작하려는 움직임을 엄단하고, 물자의 원활한 시장공급을 지원하는 일에 치중했다.
물건의 개별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는 인식은 조세문제에도 반영됐다. 세종 때 영의정 황희는 토지세 부과와 관련해 “지금 비록 고을마다 토지를 9등급으로 나누고자 하나, 만물이 제각기 다른 것은 자연의 이치인 까닭으로 같은 고을이라 해도 같은 등급으로 정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며 보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세종22.7.13) 토지등급의 선정을 고을 단위로 적용했는데, 같은 고을의 토지라 해도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획일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이를 보완하여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의 정도에 따라 9등급, 총 54개의 등급으로 부과기준을 세분화했다. 세종 26년부터 시행된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이 바로 그것이다.
맹자의 이 정신은 나아가 모든 개별자들이 갖고 있는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 확대된다. 순조가 즉위하자 재상들은 연명으로 군주의 도리에 대해 진언했는데, 그중 한 구절이다. “만물이 제각기 다른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때문에 위에 있는 이의 말과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을 열고 힘을 합칠 수 있도록 조율하며 올바른 정치를 이끄셔야 합니다”(순조 즉위년.8.1).
백성들은 제각기 다르다. 살아온 과정도 다르고 살고 있는 환경도 다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도 다르다. 따라서 모든 이의 역량을 모아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획일화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별성이 발휘되는 가운데 하나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재상들은 백성의 ‘제각기 다름을 존중하고 조율하는’ 임금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차이에 대한 존중’은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다. 앞에서 사례로 든 물가의 자율조정이나 수요자 맞춤형 정부정책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국가 간 교류확대, 글로벌 기업의 성장, 다문화사회의 확장 등 변화된 환경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모든 면에서 ‘다양성’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 사유의 기저 속에는 아직도 ‘다름’과 ‘차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와는 다르거나 우리와는 다른 타자에 대해 ‘구별’하고, ‘분리’하여 불편한 시선으로 대한다. 우열의 잣대를 적용하고 심지어 배척하기까지 한다. ‘만물이 서로 다름은 자연의 당연한 이치’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 “물가는 시장에서 결정”
우리는 나의 주관적인 잣대로, 혹은 우리만의 잣대로 타자를 평가하거나 획일화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로마, 몽골, 고구려와 같이 역사 속의 강대국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민족을 융합시키고 그 문화를 포괄해 낸 다양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차이를 존중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만물이 다름’을 전제하고 그에 맞춰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3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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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매번 유념하겠다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
신하 만류에도 위험한 여가 즐긴 태종 … 경청만하고 흘린 성종
태종 6년, 사간원에서 상소를 올렸다. “임금의 거둥은 법도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는 법인데, 지난 10일에 전하께서는 교외에 나가 말을 타고 마음대로 달리셨습니다. 만에 하나 험한 흙탕길에 말이 놀라 거꾸러졌다면 어찌 됐겠습니까? 참담한 일이 벌어졌을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스스로의 몸을 가벼이 여기시니 장차 종묘와 사직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어 신 등이 상소를 올렸을 때, 전하께서는 앞으로 하지 않겠다는 윤음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사냥놀이를 나가 이리 하시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기뻐하면서도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면서도 고치지 아니한다’가 바로 이것이옵니다.”(태종6.2.12).
최고 리더가 위험천만한 레포츠를 즐기는 것은 요즘도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대통령이나 그룹 총수가 카레이싱을 하다 사고가 나서 목숨을 잃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리 위기대응 체계와 후계승계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더라도 권력의 유고는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태종도 마찬가지다. 사냥과 승마를 좋아했던 태종은 안전조치 없이 전속력으로 말 달리는 일을 즐겼다. 이는 임금이 지켜야 할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고가 날 우려도 크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와 같은 행동을 중단하고 조심할 것을 요청한 것이고, 태종도 유의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어기고 태종은 또다시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신하들은 이러한 태종의 태도를 비판하며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공자는 [논어]의 ‘자한(子罕)’편에서 ‘법도에 맞는 말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완곡하게 타일러주는 말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 何也已矣)’ 고 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은 듣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그대로 실천에 옮길 줄 알아야 한다.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말은 고마워하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귀로는 듣고 고마워하면서도 스스로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후 실록에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성종 때 대간은 “대저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어서 기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이미 기뻐하였다면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어렵지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 등의 말을 기뻐하며 이를 높이 평가하시면서도 정작 그 말을 채택하여 적용하진 않으십니다. 이는 이른바 ‘기뻐하면서도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면서도 고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라며 임금을 비판했다(성종24.8.28).
리더의 갑작스런 유고는 조직에 최악의 리스크
성종은 일종의 ‘모범생 강박관념’이 있던 임금이었다. 본인의 어진 성품에 엄격한 모후(母后)의 훈계, 어려서부터 부여된 철저한 제왕학 교육이 합쳐져 훌륭한 군주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성군(聖君)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다. 그래서 때로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간언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성군이 되기 위해 마지못해 따르는 적도 있었다. 이런 경우 아무래도 표가 나기 마련인데 대간의 비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신하의 간언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전혀 반영을 하지 않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힐난이다.
성종과 같은 평균 이상의 군주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이 지적은, 다른 보통의 임금들에게는 더더욱 예외가 아니었다. 명종은 이런 간언을 받았다. “법도에 맞는 말은 따르면서도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고 완곡하게 해주는 말은 기뻐하면서도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전하께서 따르되 고치지 않으시고, 기뻐하되 되새겨 보지 않으시어, 신들이 애타게 드리는 이 중요한 말들을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신다면 만백성의 커다란 희망은 여기서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명종21.5.12). 광해군은 이런 비판을 받았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근래에 전하께서는 매번 ‘유념하겠다’는 하교를 내리시지만, 실제로 채용하시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간에서 올리는 논의를 따르지 않으시고, 충심에서 드리는 상소도 겉으로만 기뻐하실 뿐 되새겨보질 않으십니다” (광해2.윤3.29).
이상의 상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임금의 무성의한 태도다. 신하들의 의견이나 충언을 형식적으로 수용하고 경청하는 ‘척’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임금이 ‘기뻐하기만 하고 실마리를 찾지 않고, 따르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 면 나라를 위한 좋은 말을 사장시킬 뿐만 아니라, 임금 개인 또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임금은 위선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임금과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 저하된다. 하나하나의 상황에서 보면 사소한 문제인 것 같아도 종국엔 나라 전체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국정에 혼란
더욱이 이런 임금은 어떤 의미에서 더 위험하다. 훌륭한 말에 귀를 닫고, 바로잡아 주는 말을 싫어하는 임금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잘못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그를 버리거나 축출하면 된다. 내면과 외면이 모두 그릇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악하다고 치부해버리면 된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겉으로 열심히 경청하는 임금은 다르다.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이 없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수용하는 척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경청’은 비단 리더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올바른 리더십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른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의무 조건’으로 강조되니 마음에도 없이 듣는 척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자리에서는 ‘좋은 의견이니 명심하겠다’ ‘깨우쳐주어서 고맙다’고 말을 하지만 반성하지도, 실천하지도 않는다. 그저 ‘경청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본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청’은 단순히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성껏 듣고, 말한 사람과 공감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내면과 외면이 합치되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2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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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능히 사랑하면서 그의 나쁜 점도 알라 |
감정에 치우치면 판단력 잃어 … 호불호 탓에 그릇된 선택하는 군주 많아
국 위나라에는 미자하(彌子瑕)라는 소년이 살았다. 빼어나게 잘생겼던 그는 궁궐에 살며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미자하는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엄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중죄였지만 왕은 그의 효성이 지극하다며 용서해준다. 미자하는 자기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임금에게 먹어보라 권한 적도 있었다. 그의 발칙한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지만, 왕은 오히려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기특하다며 그를 칭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자하가 나이를 먹자 상황은 달라졌다. 그의 아름다움이 사그라지면서 임금의 총애 또한 시들해진 것이다. 점점 그에게서 마음이 떠난 왕은 어느날 갑작스레 미자하에게 벌을 내린다. 죄목은 과거 자신이 칭찬해마지 않았던 앞의 두 사건이었다.
숙종은 한 당파를 전멸시키기도
어떤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관대해질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잘못마저 예뻐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치우친 감정에서 비롯된 태도라는 점이다. 감정의 편중이 상대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방해하고 균형 있는 인식을 가로막아 상대를 올바로 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상대방에 대한 판단과 태도 역시 감정이 바뀌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것이 된다. 이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런 상황은 비단 좋고 싫음, 사랑과 미움 같은 감정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두려움 · 연민 · 슬픔 · 존경 · 게으름 등의 감정들도 쉽게 내 마음을 왜곡시키고 또 치우치게 만들 수 있다. [대학(大學)] 傳 8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친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두렵고 공경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편벽되며, 오만하고 게으른 데에서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아름다운 면을 아는 사람은 (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者) 세상에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이것이 감정 자체를 부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에 휩쓸림으로써 다른 판단까지 마비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감정에 의해 가려지게 될 지도 모를 객관적인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사회에서 이 문제는 왕에게 더욱 강조됐다. 숙종 때 열린 경연에서 김만기(金萬基)는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사람들은 보통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비록 과오가 있더라도 애정이 가려서 그 과오를 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자에게는 비록 죄가 없더라도 살펴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심정(心情)입니다. 그래서 원한을 품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인데, 군주의 경우에는 이 좋아함과 미워함으로 인한 결과가 너무나 큽니다. 진실로 능히 사랑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운 점을 알아서, 사람의 죄 있음과 없음을 살펴 명철하게 분별해낼 수 있다면 미혹됨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마음을 덮게 되면 비록 많이 공부한 자라도 그 공(功)을 이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군주이겠습니까?” (숙종1.4.16).
그러나 숙종은 이를 잘 지키지 못했고 그때그때의 상황과 호불호에 따라 한 당파를 전멸시키는 환국(換局)을 단행했다. 정국은 극단적인 대결양상을 보이게 됐다. 정치에 주관적인 마음을 많이 개입시킨 것은 선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신하들에 대한 감정을 도드라지게 드러낸 왕이었다. 선조는 “호오(好惡)가 일정하지 않다” 는 비판을 받았는데, 즉 자신의 감정에 따라 신하를 좋아하고 싫어하며, 그조차 기준 없이 자주 뒤바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조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 “한 사람의 몸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다. 미워하면서도 그 선한 바를 알고 좋아하면서도 그 나쁜 바를 알아,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는 것은 바로 호오(好惡)의 천리(天理)인 것으로 임금이라 해서 사사로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조17.7.1).
물론 왕도 사람인 이상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신하가 있을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은 덮어주고 싫어하는 사람의 장점은 외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왕이 이런 주관적인 호불호에 따라 관직을 등용하거나 공적인 판단을 내리게 되면, 원칙과 시스템은 흔들릴 것이다. 나라에는 절실히 필요한 인재이지만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아 배척당하는 사람이 나오고, 임금의 밑에는 그의 심기만 살피며 아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불만이 팽배하며 정치는 투명함을 잃게 된다. 단순히 일을 그르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국가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대학의 가르침처럼 ‘좋아해도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해도 아름다운 점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비로소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다.
대학의 이 구절은 집단에게도 적용된다. 흔히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잘못은 덮어주고 오판은 합리화한다. 내재된 문제점들도 올바로 직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상대편 집단에게는 엄격하다. 잘못은 어떻게든 끄집어내어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상대의 좋은 점도 외면해버린다. 이로 인해 이쪽은 무조건 옳고 저쪽은 무조건 그르다는 도식이 세워지는데, 이 속에서 양자의 갈등이 심화된다. 조선 후기 ‘붕당’의 격화가 바로 그 예다. 영조는 “만약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좋은 면을 안다면 어찌 당습(黨習, 붕당으로 인한 폐습)이 있겠는가?” 라고 한탄한 바 있다(영조36.11.1). 나의 나쁜 점을 알고, 상대의 좋은 점을 안다면 비록 어느 정도의 대립은 있었을지언정 협력과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심한 대결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대목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만 관대하기도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의 쏠림에 빠져드는 것은 인간이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학을 지은 증자(曾子)도 이를 극복해내는 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탄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맹목적인 감정이 나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고, 일에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던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을 것이다. 대상은 변함이 없지만,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짐으로 인해 마음고생을 해 본적도 있을 것이다. 감정을 느끼더라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까닭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그 감정에 충실할 수 있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1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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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인재는 있다 |
인사를 통해 리더의 수준 가늠 … 인재를 통해 구성원의 자발적 복종 유도
지난 내용에서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훌륭한 인재를 찾아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 비로소 조직의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고,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리더십 또한 권위를 갖출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런 인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주위에서 ‘사람이 없다’ ‘인재 찾기가 힘들다’라는 말을 쉽게 하고, 또 듣는다. 적임자를 자리에 앉히고 싶어도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인재 육성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다, 있다 하더라도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혹은 ‘일이 너무 어렵고 대우가 좋지 않아서’ 기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적당한 인재가 없을까?
세종 “인재는 항상 있지만 몰라서 못 쓰는 것”
공자는 논어의 〈공야장(公冶長)〉편에서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의가 있는 자가 있다(十室之邑必有忠信)’고 했다. 인재는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조 때 우참찬을 지낸 황경언에 따르면 ‘그럼에도 인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인재를 선발하는 사람이 자신의 편견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노나라의 열 집 밖에 안 되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왕의 땅이 천리인 나라(조선)야 두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후로 아직 어진 선비를 한 사람이라도 초빙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라며, 이는 왕이 주관적 잣대와 선입관을 가지고 인재를 등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정조1.1.11). 그 관직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으려 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인재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인재를 찾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지 않아서다. 세종은 “언제나 인재는 있어왔지만 다만 몰라서 쓰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세종20.4.28). 그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대저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있는 법이거늘, 하물며 온 나라 안에 어찌 사람이 없음을 걱정할 것인가. 다만 구하기를 정성껏 못하고, 천거하기를 조심하지 않았는지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세종20.3.12). 좋은 인재를 찾기 위해 임금은 항상 진심과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임금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성종은 “옛날부터 제왕은 어진 신하를 구하기 위해 수고로웠으니, 어진 사람을 얻어야 비로소 편안해 질 수 있다” 고 설명한 바 있다(성종15.11.10).
하지만 좋은 인재를 가려낸다는 것은 요순과 같은 성군들도 어려워한 일이었다. 더욱이 임금 혼자서 수많은 사람을 모두 관찰하고 평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임금 개인의 주관이나 편견이 작용하며 상황을 왜곡시킬 수 있다. 성종이 인재 선발을 담당하는 전조(銓曹, 이조)의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한 까닭이다.
그런데 인재를 찾아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성종이 인재를 “자격 요건에 구애되지 말고 서열을 뛰어넘어 쓰라”고 지시한 것은 그래서이다(성종15.11.10). 인종 때 송인수도 ‘하늘은 그 시대의 일을 감당하기에 넉넉하도록 사람을 내지만, 그 인재들의 재능을 남김없이 다 쓰지 못하므로 제대로 다스려지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절차만 지키고 자격에 따라서만 임용하려 드니, 그러고서 어찌 잘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라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며 인재 등용 방법의 혁신을 주장했다(인종1.4.13). 선조 때에도 “인재 선발 방식을 과거(科擧)로 국한시키고 혹은 자급(資級)으로 제한하여 관례에 따라 빈자리를 메우며 순서만 따르게 하니, 비록 세상에 드문 현명한 사람이나 출중한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모두 쓰일 수 있겠느냐” 며 정형화된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인재를 선발, 배치하라는 요구가 나왔다(선조29.7.2). 인사제도의 형식과 절차를 고집하다가는 자칫 좋은 인재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도 일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인데 인사 규정에 따른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탈락시키고, 업무능력과 성과가 탁월한데 연공서열로 인해 승진이 누락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이런 곳에서 인재는 결코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지 않는다. 미련 없이 떠날 수도 있다. 이는 인재 자신을 위해서나 조직 전체를 위해서나 매우 불행한 일이다.
끝으로, 인재는 어느 곳에든 존재한다는 공자의 말이 ‘완벽한 인재’가 무조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분야에 탁월한 인재가 많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특출한 능력을 가졌거나, 좋은 인재가 될 잠재력을 보유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모든 것을 겸비한 자를 꼭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니, 비록 한 가지 기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마땅히 구하여서 써야 한다”(성종24.11.11). 또 인재를 발견하는 것 못지않게 ‘인재 후보군’을 발탁해 육성하는 일도 중요하다. 중종 때 김구(金絿)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성품은 본디 착하나 기질이 아름답고 나쁘고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지(上智, 태어나면서부터 최고 수준의 재능과 지혜를 갖춘 사람)는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지만 얻기가 쉽지 않고, 중지(中智, 교육에 의해 재능과 지혜를 개발하는 사람)는 임금이 어떻게 배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중종13.10.28) 인재 육성을 위한 리더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중요
박지원이 쓴 [허생전(許生傳)]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었습니까? 졸수재 조성기 같은 사람은 적국(敵國)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재였지만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반계거사 유형원 같은 사람은 군량을 총괄할 만한 재능이 있지만 바닷가나 거닐지 않았습니까? 지금 집정자들의 수준을 가히 알 만 합니다.’ 탁월한 인재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불행하게 생을 마쳐야 한다면, 이는 공동체 전체에도 크나큰 불행이다. 리더는 “인재를 구하되 혹시나 내가 놓치는 인재가 없을까 늘 두려워해야 하고, 인재를 등용하되 과연 적합한 사람인가를 항상 염려해야 한다.”(중종5.12.19). 그리하여 자신의 조직 안에 조성기나 유형원처럼 능력을 사장시키고 있는 인재는 없는지, 리더는 항상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다.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일지라도 인재는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90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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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곧은 사람 들이고, 굽은 사람 버려라 |
인사를 통해 리더의 수준 가늠 … 인재를 통해 구성원의 자발적 복종 유도
1623년 3월 13일, 조선에서는 두 번째 반정(反正)이 일어났다. 인륜을 무너뜨리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죄목으로 광해군이 폐위 당하면서 정국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대놓고 폭정을 일삼았던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죄’는 대부분 백성의 삶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를 동정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고, 반정은 지배계층의 권력다툼일 뿐이라는 인식도 팽배했다.
그런데 3일 후, 새로 영의정에 임명된 이원익이 한양 도성 문을 들어서자 민심은 빠르게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입성하던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인조1.3.16). 백성들은 ‘이원익이 지지한 반정이니 옳을 것이고’, ‘이원익이 재상이 되었으니 이제 좋은 정치가 펼쳐지리라’ 기대하며 인조 정권 지지로 돌아선다.
이원익이 지지한 반정이니…
이처럼 훌륭한 인재는 비록 한 사람에 불과할 지라도 공동체의 여론을 좌우하고, 구성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누가 CEO가 되느냐에 따라 그 회사의 주가가 오르고, 누가 경제정책의 수장을 맡느냐에 따라 시장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논어] ‘위정(爲政)’편에 등장하는 공자의 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송나라 애공(哀公)이 “어떻게 해야 백성이 복종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곧은 사람을 들어 쓰고 굽은 사람을 버리면 백성이 복종하고, 굽은 사람을 들어 쓰고 곧은 사람을 버리면 백성이 불복한다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고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임금이 국가를 통치하고 CEO가 기업을 경영하는 과정은 강제를 수반한다. 구성원의 이익과 공동체의 목표 달성을 위해 위에서 지시와 명령을 내리면, 아래에서는 그것을 따라 이행해야 한다. 이 때 강제성을 가진 ‘지시와 명령’이 정당화되고 효과를 발휘하려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다. 인재는 바로 그 권위를 채워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훌륭한 인재’가 내리는 판단과 결정은 구성원들로부터 쉽게 지지를 받는데, 이는 해당 업무의 최적임자라는 위상에 더하여 그가 축적해 놓은 신뢰자본 때문이다. 덕분에 리더는 인재를 통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도 인재를 통해 리더의 수준을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인재를 취사선택하는 리더의 안목을 보며, 그가 과연 구성원들을 이끌고 공동체를 경영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서 논어의 이 구절을 거론할 때는 주로 이 부분에 강조점이 찍혔다.
조선 중기의 학자 정경세는 이렇게 설명했다. “백성들이 임금 마음속의 사악함과 바름, 공(公)과 사(私)를 직접 알 순 없지만, 이처럼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을 살펴 관찰하게 되면 그 속마음을 환히 볼 수 있게 됩니다. 백성들은 늘 이것으로써 임금을 따르거나 아니면 돌아서는 것입니다.”(광해군즉위년.5.2). 백성들이 임금의 생각과 내면을 바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임금이 어떤 사람을 선호하고 배척하는지를 보면 그의 가치관과 내면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정경세는 이를 가지고 백성들이 임금에게 복종할 것인지, 불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영조 때 나학천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사람을 쓰거나 버릴 적에 굽은 사람과 곧은 사람을 잘못 구분한다고 해도 그것이 민심의 향배와는 직접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공자께서 이에 따라 민심이 복종하고 불복하는 것이 결정된다고 하셨으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대개 선(善)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함은 사람들의 타고난 본성으로, 선은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이 좋아하는 바이고, 악은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이 싫어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임금이 싫어하는 바와 좋아하는 바가 뭇 사람들의 마음과 같아지면, 굳이 민심이 복종하기를 꾀하지 않아도 자연 복종하는 법입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거나 버림이 민정(民情)에 거슬리면 민정은 절로 불쾌하게 될 것이니, 이는 당연한 천리(天理)이고 필연적인 일입니다. [대학]에서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해야 하니, 이를 백성의 부모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영조 6.1.12).
이 말이 리더가 무조건 다수 대중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재 선발의 내용을 통해 리더가 올바른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공동체나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보편정신을 이해하고 있는지, 구성원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리더는 스스로 내가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인재를 찾아 등용했는지, 혹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 기호에 맞는 사람만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라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게 되어, 구성원들의 이반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결국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그래서 숙종 때의 재상 박세채는 여기에 실패한 임금을 ‘무도(無道)’하다고 규정한 바 있다(숙종 9.7.6).
인사와 소통에 실패한 임금은 무도(無道)하다
아울러 정조 때 ‘작은 퇴계(小退溪)’로 불렸던 대학자 이상정은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곧은 것과 굽은 것은 서로 그 길이 달라서 함께 뒤섞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청렴한 사람을 상주면서 탐욕스러운 자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청렴한 사람이 수치스런 마음을 지니게 되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기용하면서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충성스런 사람이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도리에 어긋나게 하여 탐욕스럽고 아첨하는 자들을 충성스럽고 청렴한 사람이라 여긴다면 옳고 그름이 뒤집히고, 사람을 취하고 버리는 일이 어긋날 것이니,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정조5.7.3). 바르고 훌륭한 인재와 그렇지 못 한 함량 미달인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도리에 맞게 이들을 등용 혹은 배척하지 못한다면 결국 좋은 인재들이 떠나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이 간신을 충신이라 생각하고, 소인배를 뛰어난 인재라 여긴다면 이는 임금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 공동체의 존망까지 뒤흔들게 된다.
요컨대, 인재는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나 리더 개인을 위해서나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사람의 자질보다는, 얼마나 리더에게 잘 순종하고 부합하는 지를 등용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런 리더의 인사(人事)는 당장은 자신의 뜻대로 행사되더라도, 민심의 지지를 상실하고 구성원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공동체의 힘을 결집 시키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곧은 사람은 들어 쓰고 굽은 사람을 버리라’는 공자의 말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9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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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먼저 의심하고 지레 억측하지 말라 |
섣불리 예단해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는 왕 많아 … 선입견 버려야
“이경(정종)이 병을 이유로 아우(태종)에게 왕위를 사양한 것이 과연 진심에서 나온 행동인가? 그 아우가 형에게 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기 때문은 아닌가? 아니면 나라 안에 내란이 벌어져서이거나, 혹 (명나라) 조정을 얕보고 희롱하려는 뜻은 아닌가? 공자는 나를 속이리라 미리 의심하지 말고, 나를 믿지 않으리라 억측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먼저 깨닫는 것이 현명함이라고 했다. 짐이 비록 정성과 신의로 사람을 대접하고자 하나 경솔히 고명(誥命, 황제가 제후국의 새 국왕을 인준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 (태종1.3.6).
1401년, 왕위에 오른 태종이 고명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위와 같은 황제의 질문이 포함된 자문(咨文,외교서한)을 보내왔다. 정종에서 태종으로의 양위 과정이 투명하지 않으므로 승인을 유보하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재차 해명 사신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의 책봉을 받아낼 수 있었다.(태종1.6.12).
‘왜=간사’ 선입견이 왜변 불렀다 지적도
여기서 황제가 인용한 공자의 말은 [논어] ‘헌문(憲問)’편에 나온다. 공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속일 거라 먼저 의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나를 믿지 않을 거라 미리 억측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먼저 깨달을 수 있다면, 이것이 현명한 것이다 (不逆詐 不億不信 抑亦先覺者 是賢乎)” 라고 했다. 상대방에게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속일 거라 예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면 처음부터 선입견을 갖고 상대를 바라보게 되므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상대방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도움이나 기회도 차단되고 만다. 나와 상대 사이의 신뢰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종 때 윤희성은 경연석상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나라 명제(明帝)를 예로 든다. “이른바 임금의 총명이라는 것은 사방을 다 살피고 사방의 일을 다 듣기 위하여, 언로를 넓혀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총명이 가리어지는 폐단을 없애고 상하(上下) 모든 이들의 실상과 정황이 통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논어에 ‘속이리라 먼저 의심하지 말고 믿지 않으리라 지레 억측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명제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아랫사람들이 속일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이를 지적하며 적발해내는 것을 총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임금이 갖추어야 할 총명이 못됩니다. 지나치게 자세하고 조급한 총명일 뿐입니다.” (중종37.2.3).
명제는 후한의 전성기를 이룩한 군주로 평가 되지만 성격이 까다롭고 작은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는 특히 속단하길 좋아했다. 신하가 실제로 그러지 않았는데도 이러저러하게 황제를 속였거나, 속일 것이라고 멋대로 판단했다.
조선의 인조도 비슷하다. 해서 인조는 이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이치로써 사물을 관찰하시지 않고, 오로지 억측과 미리 의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명철하다 생각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신하들이 억울하고 애매한 죄를 입지만 감히 아뢰지 못하니 이 원통함을 어찌 하겠습니까!”(인조24.10.15).
이 두 군주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먼저 의심함으로써 억울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총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춰진 속마음까지 읽어냈으며, 미리미리 문제를 파악해 리스크를 제거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다 보면 남이 나를 속이는 일도 있고, 남이 나를 믿지 않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를 방치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배신을 당해 큰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공자도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깨달아야 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이 나를 속일까 미리 짐작하고,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억측하는 것은 이치상으로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모두 적중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실정을 넘어서는 의심을 하게 된다.” (효종7.윤5.23). 섣부른 예단은 금물인 것이다.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할지 알 수 없는 일인데도 자신의 생각만으로 속단하고 대응하면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된다. 상대에게 원한을 남길 수도 있다. 더욱이 리더라면 매우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명종 때 퇴계 이황은 왜와 교섭하는 문제를 두고 이렇게 진언했다. “왕도(王道)란 탕탕평평한 것이어서 속일 것을 예측하지 않고 불신(不信)할 것을 억측하지 않는 법입니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왜노를 거절하려는 것은 필시 ‘저들의 죄가 큰데 성급하게 화해하게 되면 그들의 악을 징계하기는 고사하고 수모를 받는 후회만 있을 것이다’고 여겨서 일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중략)… 한나라의 여러 제왕들이 흉노의 죄가 큰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과 급히 화의를 맺은 것은 백성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때 태종은 돌궐과 화친을 체결했고, 송나라 때 진종은 거란과 화의를 맺었습니다. 태종과 진종인들 이를 경솔히 허락하면 악을 징계할 수 없고 장차 배신을 당해 수모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흉하고 위험한 전쟁을 막고 사직을 지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명종즉위 년.7.27).
퇴계는 왜가 간사하여 늘 우리를 속여 왔기 때문에 분명 또다시 우리를 속일 것이니 화친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류 입장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왜가 어떻게 행동할 지와 상관없이 국경의 안보를 빈틈없이 강화해야 하는 국가 본연의 책무를 다하면, 왜가 다시 침입해 오더라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 따라서 왜가 우리를 속일 거라 속단하여 화친을 무산시키지 말고,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수용해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퇴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묵살됐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종 대에만 해도 을묘왜변 등 끊임없는 왜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 훗날 임진왜란이야 동북아 정치구도의 변화에 따른 전쟁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명종 대의 왜변 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속일 생각하지 말라’는 위험한 리더십
요컨대 먼저 의심하지 말고 미리 억측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주관적이고 섣부른 예단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를 경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함부로 넘겨짚고 의심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요즘도 ‘나를 속일 생각을 하지 마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지적하고 의심하고 적발하길 좋아하는 이들 부류의 사람은 자신이 똑똑해서 그런 거라고 착각하곤 한다. 리더가 이런 성향을 보일 경우 문제가 심각한데, 자칫 리더 자신 뿐 아니라 조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순진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일이 전개되어갈 수 있는 방향과 다양한 가능성을 헤아리고 대응전략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리스크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공자가 말한 참된 ‘현명함’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8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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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 |
유학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 … 군주들의 필수덕목
지난해 온라인에서는 ‘중용 23장’이 핫 키워드에 오른적이 있다. 어려운 고전으로 인식되는 〈중용(中庸)〉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어느 영화에 인용되면서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의역이 있긴 하지만 이 대사가 바로 중용 23장으로, 여기서 강조하는 ‘정성(誠, 혹은 성실)’은 중용을 비롯해 유학사상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다. 유학에서는 하늘이 만물에게 동일한 본성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에, 만약 정성을 다해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구현해 낸다면 만물이 각자의 본성을 발휘하도록 도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본다.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유학은 이 ‘정성’이라는 과제를 특히 군주에게 강조한다. 군주는 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구성원들이 각자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성’은 그 책임을 완수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자세이다.
지도자의 책무를 완수하게 하는 기본 마음자세
아울러 정성은 ‘만물의 처음과 끝이니 정성되지 못하면 만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때문에 사‘ 람의 마음에 한 순간이라도 정성되지 못함이 있으면 비록 행하는 바가 있더라도 또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중용 25장). 정성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남김없이 그리고 올바르게 발현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해준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온전히 인식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내가 정성을 다해 대상을 대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대상(사람이든 만물이든)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이 없으면 만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고, 한 순간이라도 정성되지 못한 순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지성무식(至誠不息,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이라는 중용 26장의 격언은 그래서 나왔는데, 이는 군주들에게 거듭 강조된 규율이었다.
회재 이언적은 중종에게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성을 지극하게 하여 쉼이 없어야 임금의 덕이 무궁해지고 임금이 세운 공업도 광대해집니다. 무릇 쉼이 없어야 함은 하늘의 도리입니다. 임금은 하늘의 명을 받아 그 자리에 서는 것이니, 진실로 지극히 정성스러운 덕이 위아래에 미치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의 도리를 따라 하늘이 주신 직책을 수행하고,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본성대로 육성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습니까.”(중종34.10.20). 임금에게 주어진 크고 무거운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쉼 없이 정성을 다해야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27년 2월 20일, 우의정 심상규도 대리청정의 첫 집무를 시작한 효명세자에게 비슷한 진언을 올렸다. “나라는 오직 정성과 근면으로써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하는 대조(大朝, 순조)께서 부탁하신 중책을 맡으셔서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고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셨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근면하지 않으시면, 하루에도 만 가지 기무를 처리해야 하는 중책을 맡을 수 없고 그 번잡함도 제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중략)… 탕왕이 이른 새벽부터 밝은 정치를 위해 고심한 것과 문왕이 밥을 먹을 겨를조차 없다고 한 것, 이는 모두 오늘날 저하께서 따라야 할 일들입니다. 정치와 명령을 시행하고 조치함에 있어서 어찌 한 순간이라도 근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근면하는 도리는 억지로 하는 것과 진실 되게 하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억지로 근면하다 보면 종종 중도에 끊어지고마니, 처음과 끝을 한결같게 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엄숙하고 공경하라는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용》에서 ‘지극한 정성은 그침이 없다’고 말한 것처럼, 진정한 근면이 유구무강(悠久無疆)한 왕업을 이루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울러 정성이 없으면 만물도 없는 것이니, 근면하되 정성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헛된 수고만 할 뿐이며 한갓 번거로울 뿐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정성으로 정사에 임해야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고, 그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아무리 훌륭한 마음가짐을 갖고 굳은 결심을 했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행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에겐 매우 힘든 과제이다. 효종 때 신천익도 바로 이 문제를 지적했다. “신이 생각하건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근본입니다. 임금이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면 말과 행동도 모두 바르게 될 것이고, 어떤 일을 언제 어디에 시행한들 바르게 되지 않는바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정(時政)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 조정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 내외(內外)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은 더 이상 근심할 것이 못 그런데 이처럼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임을 알았으니, 누구나 다 부지런히 정심(正心)에 힘쓸 것 같아도 다만 처음에는 부지런하다 나중에는 게을러져 끝내 마음을 바르게 만들지 못하는 임금들이 많았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 송나라의 여러 군주들 중에 마음을 바르게 하여 시종 한결 같았던 이는 드물었습니다. 아! 이는 결국 정성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부디 마음에 새기소서.”(효종즉위년.10.15).
처음에는 정성스럽다가도 갈수록 나태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따라서 본래 계획했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점점 더 흐트러지는 마음을 붙잡고 처음의 뜻과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역사를 보면 초반에는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이내 오만과 독선에 빠지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들어, 인재를 분간하는 눈을 잃어버린 군주들이 있었다. 크게 엇나가지 않더라도 처음에만 반짝하고 종국에는 무기력하거나 범범한 군주로 남은 경우는 부지기수다. 바로 정성이 지극하지 못했고 그 정성에 멈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나태해지는 건 인지상정
무릇 정성은 개인의 삶이 마주하고 경주해야 할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전 분야에서, 그 일이 성공하고 완성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핵심 요소이다. 이 정성은 자신의 진심과 노력을 꾸준하고도 남김없이 투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쉽진 않다. 하지만 서두에서 인용한 중용 23장의 구절처럼 더 나은 나를 만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이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맹자의 말을 빌리자면 정성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삶은 아름답고 위대할 수 있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이 멈춤이 없어야 하는 이유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7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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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말은 행동을,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 |
언행일치 되지 않아 비판 받은 성종과 고종 … 신뢰받는 리더십과 직결
중국 송나라 때의 일이다. 젊은 학자 유안세(劉安世)가 당대의 석학 사마광([자치통감]의 저자)에게 질문했다. “수만 개의 한자 중에서 가장 새겨야 할 글자는 무엇입니까?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실천해야 할 글자를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사마광이 대답했다. “정성 성(誠)자 일세.” 유안세가 다시 물었다. “정성을 다하려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사마광이 답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네.” 속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지 말고 일단 꺼낸 말은 행동과 일치시키라는 것이다. 유안세는 처음 이것이 매우 쉬운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평소의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바로잡으려고 보니 서로 맞지 않고 모순되는 것이 많았다. 해서 힘껏 노력한 지 7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겉과 속이 하나로 호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언행일치에 7년 걸린 유안세
효종 5년 6월 17일, 사헌부는 유안세의 이 일화를 거론하며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저 유안세는 그저 한 사람의 선비일 따름입니다. 교유하는 사람이라야 집안의 친척, 한 동네 사람들, 그리고 비슷한 위치에 있는 관리들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니 서로 방해되고 모순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과연 어떻겠습니까. 크나큰 나라와 많고 많은 백성을 상대하며, 날마다 갖가지 변화무쌍한 일을 만나고 온갖 사무를 처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마주해야 하니, 말에 실수가 없으려 해도 어찌 쉽게 되겠습니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평범한 개인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임금의 경우 더욱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마광의 말처럼 성실하기 위해서인가?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보다 절실한 이유는 신뢰의 문제가 직결돼 있어서다. 무릇 실천하지 않는 말은 공허하고, 말과 어긋나는 행동은 힘을 잃는 법이다. 입으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훌륭한 말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말처럼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에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속이는 것이다. 전에는 그렇게 말했으면서 지금은 반대로 행동하고 자기는 이렇게 행동했으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다르게 행동하라고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중용] 13장에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言顧行 行顧言)’는 구절이 나오고, 맹자가 ‘진심(盡心)’ 하편에서 ‘말은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성인의 가르침을 내세우고 거창한 대의를 말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말을 꺼내면 이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고 행동을 하면 그것이 말과 부합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할 말을 이야기하고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 된다. 한번은 성종이 간언을 잘 듣겠다고 말해놓고 간언이 올라오자 이를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무령군 유자광이 곧바로 비판했다. “전하께서 지난 번 사간원의 차자(箚子)에 비답하시길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 된다 하니 내 일찍이 이 말을 세 번 반복해 되새겼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민(臣民)이 모두 기뻐 경하한 지 이제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지금 전하께서 대간(臺諫)의 말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는 도리에 비춰볼 때 과연 어떻습니까?”(성종8.8.23). 왜 앞서 한 말을 지키지 못하냐는 것이다. 고종은 신하들로부터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할 바에야 말씀을 하시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라는 핀잔을 들었다(고종41.7.15). 이처럼 말과 행동을 하나로 만들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다른 유교 경전에서도 빈번하게 거론됐다. [대대예기(大戴禮記)] ‘증자입사(曾子立事)’편에 보면 ‘사람은 반드시 그 말을 믿을 수 있어야 하니 그래야 그 말을 따라 행할 수가 있다. 사람은 반드시 그 행을 믿을 수 있어야 하니 그래야 그 행동을 따라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대목이 나오고, [예기] ‘치의(緇衣)’편에는 ‘말만 하고 행하지 못할 것이라면 군자는 말하지 않는다. 행하기만 하고 말하지 못할 것은 군자는 행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논어] ‘위정(爲政)’편의 ‘그 말을 먼저 행동으로 보이고 그런 다음 말이 행동을 따르게 하라’, ‘이인(里仁)’편의 ‘옛 선현들이 말을 쉽게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실천이 이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헌문(憲問)’편의 ‘군자는 말이 행동에 앞서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문장도 같은 맥락이다. 모두 말과 실천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앞에도 언급했듯이, 신뢰의 구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리더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 멜 깁슨이 주연한 전쟁영화 [위 워 솔저스]에서 부대를 이끄는 멜 깁슨은 이렇게 말한다. “전투에 투입되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릴 때 내가 제일 먼저 적진을 밟을 것이고, 맨 마지막에 적진에서 나올 것이며, 단 한 명도 내 뒤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의 이 말은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단순히 말이 멋있어서가 아니다. 주인공이 항상 그렇게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말, 책임질 줄 아는 말을 했기에 그와 같은 힘이 발휘된 것이다.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에게 수많은 백성이 모여들고 그의 단호한 말에 감명 받았다. “전선(戰船)이 비록 적다고 할지라도 신이 죽지 않은 이상 왜적들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이 말에 선조가 수군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철회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순신 장군은 항상 행동으로써 자신의 말을 입증해왔기 때문에 비록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변함없는 신뢰를 받은 것이다.
행동하기 힘들면 차라리 침묵하라
흔히 리더십은 신뢰자본(trust capital)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신뢰는 조직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접착제이면서 리더와 구성원을 잇는 연결고리이다. 구성원이 리더의 비전을 따라 리더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리더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리더를 신뢰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믿고 그 사람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뢰를 확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의 말과 행동이다. 사소한 것에서까지 리더의 언행이 일치될 때 구성원들은 리더를 믿게 된다. 리더가 진심 어린 말을 하고 그 말을 반드시 실천하며 그 행동에 책임을 질 때 신뢰자본이 쌓이는 것이다. 리더의 말과 행동이 서로 일관되는 모범을 보일 때 리더십은 비로소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6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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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마실 때 마시고 절제할 때 절제하라 |
효종 “절제 힘드니 아예 끊어라” … 정조 “적당히 마실 수 있어야”
“술로 인한 해독은 참으로 크다. 어찌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는 일 뿐이겠는가. 술은 안으로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손상시키고 밖으로는 몸가짐을 흐트러지게 만든다. 술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술로 인해 남녀의 분별이 문란해지니, 그 해악은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하게 만들며 작게는 성품을 파괴시키고 생명을 상실케 한다. 술로 인해 강상이 더럽혀지고 풍속이 퇴폐하게 되는 예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1433년 10월 28일. 세종은 술의 폐해를 경계하는 교서를 특별히 지어 반포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본래의 취지를 잊고 남용해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사회윤리를 무너뜨리며, 스스로의 정신건강마저 해치는 등 피해가 심각하다는 인식에서였다. 평소 세종은 조정의 중책을 맡아야 할 능력 있는 신하들이 술로 인해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아끼는 신하인 윤회(尹淮)에게 “경이 술을 마시다가 도를 지나친 것이 한 차례가 아니었고, 내가 경에게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지시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량을 생각해서 한 두 잔쯤 마시는 데 그친다면 그토록 정신이 없고 체면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겠는가. 이제부터 부디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 따르지 않으면 죄를 물을 것이다.” 세종은 또 “술을 삼가라는 명령이 대체 따르기가 무에 그리 어렵단 말인가! 도리를 알 만한 선비도 이러하니 무식한 소인의 무리야 더 말할 것도 없겠구나”며 탄식하기도 했다(세종12.12.22).
세종 “의지로 주량을 조절할 수 있다”
세종은 술을 삼가는 일이 뭐가 어렵느냐고 말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그것은 사실 만만치 않은 과제다. ‘첫 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둘째 잔은 술이 술을 마시며, 셋째 잔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옛 말처럼 일단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술에 취해 통제력을 잃게 된다. 술에 중독되어 시도 때도 없이 술을 찾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논어(論語)] ‘향당(鄕黨)’편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공자의 음식 습관을 소개하는 말 중에 ‘술의 양에는 한정이 없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를 두고 공자의 주량이 대단해서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보다는 술을 미리 몇 잔 마시겠다고 양을 한정해 놓진 않되 몸가짐이 흐트러지기 전에 멈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구절은 실록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효종의 말이다. “요즘 젊은 신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잘 마셔야 칭찬을 하고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비웃는다고 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주량에 한정이 없어도 취해 흐트러지지 않음은 공자 같은 성인(聖人)이나 가능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한 번 술잔을 들면 반드시 어지러워지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마셔대니, 반드시 삼갈 줄 알아야 한다. 평소에 술을 즐기더라도 마음으로 굳게 결심한다면 술을 끊는 일이 뭐가 어렵겠는가! 내가 세자가 된 다음부터 술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 술 생각이 저절로 없어졌다. 이를 보면 술을 끊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효종3.8.19). 공자처럼 술을 마셔도 어지럽게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보통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경지가 못되니 아예 술을 끊으라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나 효종은 송시열로부터 아직도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효종이 그렇다고 하자 송시열은 “그러나 그 마음은 순식간에 방종해지기 쉬운 것이니 시종 경계하여 삼가도록 하소서” 라고 말한다. 술의 중독성은 매우 심하기 때문에 끊은 지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효종은 “경의 말이 옳다. 술을 잘 마시는 사대부들이 모두 나와 같이 술을 끊는다면 다행이겠다” 고 대답했다(효종9.11.21). 숙종도 [심경(心經)]의 ‘술을 마실 때는 그 양을 한정하지 않으나 흐트러지는 데 이르러서는 안 되는 것이니, 흐트러지게 되면 안으로 심지(心志)를 어둡게 하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해치게 된다(앞에서 소개한 공자의 말에 대한 해설)’는 구절을 거론하며 “예나 지금이나 가산을 탕진하고 몸을 망치는 것은 모두 술 때문이니 깊이 경계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숙종9.9.2).
그런데 정조 때에 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정조는 술에 취해 궁궐 담 아래에서 자다가 통행금지 위반으로 체포된 진사 이정용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건 유생이건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술값으로 쌀 한 포대를 내려주도록 하라.” (정조20.4.12). 임금이 나서서 음주를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조도 공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소위 ‘주량(酒量)이 있다’는 자가 술에 의해 부림을 당하여 절주(節酒)를 하고자 하면서도 절주를 하지 못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 중에서도 심한 경우가 아닌가. 절주를 해야 할 때는 절주를 해서 비록 반 잔의 술이라도 입에 대지 않고,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마시되 비록 열 말의 술이라 할지라도 마치 고래가 바닷물을 들이켜 마시듯 해야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주량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술의 양에는 한정이 없다’고 하셨으니, 여기서 ‘한정이 없는 술’이란 곧 ‘술을 한정 있게 마신다’는 의미이다.” (홍재전서178권). 정조가 생각하기에 술을 아예 안 마시는 것도, 술에 취해 흐트러지는 것도 둘 다 좋지 못하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할 때는 마시지 않고, 마셔야 할 때는 맘껏 가득 마시며 스스로를 잘 컨트롤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는 공자가 주는 교훈 또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지나친 음주는 경계
요컨대 술을 무조건 금지할 필요는 없다. 세종도 인정했던 것처럼 제사를 지내고 손님과 벗을 접대하며 어른을 섬기는 일에 술이 없어서는 안 된다. 술은 인간관계의 윤활유가 되고 건강을 위한 약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제는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것이고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 술에 취해 부적절한 말이나 행동을 하다가 논란이 된 사람들은 ‘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고 핑계를 대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제어하지도 못할 술을 마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마시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마실 수 있고 술도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5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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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사람이 못났다고 말까지 못났을까 |
공자는 도덕적 결함 있는 왕의 말도 인용 … 인품 · 능력보다 의견 자체로 평가해야
[대학(大學)]의 ‘전(傳) 10장’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진서(秦誓)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비록 특출한 능력은 없지만 마음이 진실하고 참으로 아름다워 다른 이들을 포용하는 도량을 갖추었다고 하자. 그는 다른 사람이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가진 것처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의 훌륭함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칭찬하며 수용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라에 이익이 되고 우리의 백성과 자손들을 지켜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가진 뛰어난 재주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른 사람들의 훌륭함에 어깃장을 놓고 통용되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고 백성과 자손들도 지켜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좋은 말에 담긴 교훈만 받아들이면 그만
여기서 ‘진서’란 원래 [서경(書經)] ‘주서(周書)’편에 수록된 글로, 진(晉)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실패를 반성하고 좋은 정치를 펼쳐가겠다는 진(秦)나라의 임금, 목공(穆公)의 다짐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공자가 진 목공의 말을 서경에 기록하고 증자가 다시 대학에서 이를 거론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 목공이 비록 백리해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뤘지만 후대 왕들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성군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도덕적 결함이 있었고 과오도 많았다.
명종 때 저명한 학자였던 주세붕은 바로 이 문제를 거론했다. “신이 [대학]을 읽다가 유독 ‘진서’를 97자나 길게 인용한 것을 보고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비중을 높게 해놓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목공은 ‘서쪽 오랑캐(西戎)’의 임금으로 옛 성군(聖君)들에 미치지 못하고 오패(五伯, 춘추시대에 패업을 이룬 다섯 제후)보다도 열등한데 공자께서는 어찌 목공의 말을 삭제해버리지 않고 기어이 취해 [서경]에 편제시켜 놓으셨는지 참으로 괴이했습니다…(중략)… ‘진서’는 넉넉하고 포용하며 선(善)을 즐기는 군자의 도량과 시샘하고 미워하며 선을 싫어 하는 소인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말이 지극히 훌륭하기에 목공이 비록 선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공자께서는 그로 인해 말을 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명종2.2.7).
진 목공에게 부족한 점이 있긴 해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진서’의 가르침은 정치에 있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도리가 담긴 것으로, 문제가 있는 진 목공의 말이라 하여 폐기할 수는 없다. 좋은 말 자체에 담긴 교훈만 기억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그 말을 삭제하지 않고 서경에 남긴 것이라고 주세붕은 판단한다.
이러한 공자의 가치 기준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의 ‘사람으로 인해서 말을 폐하지 않는다(不以人廢言)’는 구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좋은 말을 한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수준에 미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이 모두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말까지 무시하고 배척하다 보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중한 말까지 놓치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흔히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수용하곤 한다. 말을 한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좋은 말도 고깝게 듣고, 그 사람이 좋으면 불편한 말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지위나 학식이 높은 사람의 말은 존중하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현종 9년 7월 27일, 어전회의에 풍기군수 어상준이 올린 상소가 의제로 올라왔다. 임금이 내용을 검토해 처리하도록 지시하자 영의정 정태화는 “상준은 사람됨이 부족해서 취할 만한 말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라며 논의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좌의정 허적도 “상준은 인물과 문장이 모두 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며 동조했다. 어상준의 인품과 능력이 모두 변변치 못하니 그가 올린 상소문도 수준미달일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조참판 민정중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반박했다. “사람이 못났다고 해서 그 말까지 폐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상준이 한 말이라도 그것이 진정 좋은 말이라면 어찌 버릴 수 있겠나이까.” 그 사람의 자질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제대로 헤아려보지도 않고 폐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그 사람의 말이 가져다 줄지도 모를 긍정적인 변화를 시작도 하지 않고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고 정치의 관행이 되면 많은 이들의 말이 사장되고 만다. 백성들의 생각이나 의견은 위로 전달되기 힘들어진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말이므로 아예 고려하지도 않을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선은 경청하고, 그 말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의 득실은 말을 한 사람을 보고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자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사례도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효종 8년 4월 29일, 경연에서 시강관 이만웅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지금 사람들은 진언을 하고 싶어도 그 때마다 전하께서 당리당략을 위한 의견이 아니냐, 혹은 정직한 체 하며 명예를 탐하려는 것이 아니냐며 질책하는 교서를 내리시니, 뜻을 의심하고 억누름이 너무 심하여 아예 말을 하지 말자고 생각한다 하옵니다…(중략)…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겉으로만 바르고 곧은 체하는 자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자들의 마음은 매우 가증스럽지만 그렇다 해도 그 말 또한 모두 폐기할만한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취할 만한 말이 어찌 하나도 없겠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도 지레 불순한 의도일 것이라고 단정하며 신하들의 기를 꺾지 마시옵소서. 옛 사람이 ‘사람으로 인해 말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단순히 싫어하고 자신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나쁜 마음을 가진 가증스러운 사람의 말에서까지도 배우고 취할 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접하는 말이 풍성해야 다양한 아이디어 만나
무릇 내가 접하는 말이 다채롭고 풍성해야 그 속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나게 된다. 사람을 가려가며 이러저러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한 말에 아예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이는 특히 리더에게 중요한데, 만약 CEO가 말단 직원의 말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면 구성원들은 너도 나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CEO가 싫어하고 꺼리는 사람의 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경영에 반영한다면 좋은 아이디어들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는 CEO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사람으로 인해서 말을 폐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3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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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스승으로 삼을 신하를 둬라 |
누구도 완벽할 수 없어 … 영조 · 정조도 ‘독단적이다’ 비판 받아
과거에는 군주를 ‘군사(君師)’라고 불렀다. 임금은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과 이에 기반을 둔 선한 삶을 중시한 전통사회에서 임금은 현실 정치뿐만 아니라 백성을 교화시키는 일도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 스승이 되어 뭇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구성원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능력과 자질이 없으면서 남을 가르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스승의 지위’가 임금의 권위를 더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약으로 작동한 이유다. 신하들은 만백성의 스승이 될 수 있도록 더 반성하고 더 노력하라며 임금을 옥죄려 들었다.
그렇다면 충분히 스승의 자격을 갖춘 임금이 등장했을 때는 어찌될까. 군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일까. 조선시대에 군사를 자처했던 군왕은 영조와 정조가 대표적이다. 이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탁월했기 때문에 신하들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더욱이 영조는 재위기간이 오래되면서 나이와 경험 면에서도 신하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들뻘인 재상, 손자 뻘인 대간들은 모두 영조의 기세에 눌려버렸다. 영조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와 경험에서 신하 압도한 영조
영조 45년 2월 3일. 응교 김익은 상소를 통해 이러한 영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하께서 목표하시는 바는 높고 숭상할 만하지만 스스로를 성(聖)스럽게 여기시어 방원(方圓)을 규구(規矩)에서 구하지 않고 경중(輕重)을 형석(衡石)에서 살피지 않으시며(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에서 본받지 않고 마음대로 한다는 뜻)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하시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신하 삼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조금이라도 전하의 과실을 지적하는 논의를 하면 거슬려 하시며 이를 꺾어버리고, 그것도 부족하게 여겨 벌을 내리시고, 그것도 부족하게 여겨 지나친 전교까지 내리시니 처분이 올바르지 않고 거조가 공평함을 잃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정에서는 전하의 비위에 거슬릴 까봐 감히 진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성상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자리를 보전하는 데만 급급하여 무엇이 의로움인지, 어떻게 해야 충절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조는 대노한다. 그는 신하들에게 “무엇 때문에 김익을 절도안치(絶島安置,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 보내는 것) 하도록 청하지 않는가?” 라 힐난하고 김익을 언관으로 뽑은 인사담당자도 파직시켜 다시는 관직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신하들이 조치를 완화시켜달라고 간청하자 “경들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나를 임금으로 섬기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며 궁궐을 나가겠다고 말한다. 식사도 거부했다. 결국 나중에는 영조가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독선을 보인 것이다.
정조에게도 비슷한 상소가 올라온 적이 있다. 장령 오익환(吳翼煥)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시고 학문도 고명하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도를 온전히 깨우치지 못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계신 것은 지혜가 뛰어나다 보니 신하들을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만기에 두루 능통해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총명을 믿으면 도리어 자만하게 되고 참과 거짓을 지나치게 따지다 보면 억측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가르칠 수 있는 상대를 신하로 삼길 좋아하시어 위엄으로 기를 꺾고 윽박지르심이 간관들에게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대신이나 근신들에까지 박대하고 업신여기시는 뜻이 드러나며,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도 부족하십니다. 이로 인해 대신들은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에만 힘쓰고, 관료들은 임금의 명 앞에 순종하기만을 일삼느라 자신의 지조를 돌아보지 않고 아첨이 풍습이 되어 충직한 신하는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진언했다 (정조12.1.23).
이 두 상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신하로 삼는 것을 좋아한다’는 구절은 [맹자] ‘공손추(公孫丑)’ 하편에 나온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일을 한 군주에게는 반드시 함부로 부르지 않는 신하가 있었다. 상의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임금이 직접 신하를 찾았으니, 덕(德)을 높이고 도(道)를 즐거워함이 이와 같지 않으면 일을 훌륭히 해낼 수가 없다. 탕왕은 이윤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으셨기에 수고롭지 않게 임금 노릇을 하셨고, 환공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패자가 된 것이다.’
임금이 존경하여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고, 임금을 반성하게 할 만큼 직언과 충언을 할 수 있으며, 임금이 몸소 찾아가 의견을 물을 정도로 덕과 지혜가 높은 신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임금은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항상 성찰하며 신중한 정치를 펼치게 된다. 맹자가 바로 뒤이어서 ‘지금 여러 나라들의 영토가 비슷하고 덕의 수준도 비슷해서 더 나은이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임금이 자기가 가르칠 만한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가르침을 받을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 까닭이다.
임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임금이 모든 일에 다 능통할 수는 없다.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가르침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스승으로 자처하면서 신하를 훈계하려고만 하는 임금은, 자신은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고 자신의 수준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이런 임금은 결코 좋은 정치를 펼칠 수가 없다.[맹자] ‘이루(離婁)’ 상편에 보면 ‘사람의 병통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는 말이 나온다. 평범한 사람들도 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만 하려 들면 이런저런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물며 완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임금이 성장의 기회를 차단하고 귀를 닫아버린다면 이는 자신 뿐 아니라 국가에도 큰 불행이 될 것이다.
기꺼이 배우고 실수 바로 잡아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아랫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접고 부하의 조언을 받아들이면 체면이 손상된다거나 권위가 실추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해 봐서 알아’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이런 말이 우리에겐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지위가 높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 또한 그만큼 높은 것은 아니다. 과거의 성공과 경험이 아직도 유효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나는 아직 부족하며 나의 결정은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속에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기꺼이 배우고 실수를 바로잡으며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올바른 방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주는 교훈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1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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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감정 조절 못하면 政事 그르친다 |
분노 탓에 판단력 흐려질까 단죄 유보한 정조 … 감정적 판단으로 입지 좁아진 현종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정사(政事)는 올바름을 얻지 못한다. 나는 사람을 등용하고 해임하며 배치할 때 결코 이 뜻을 잊어본 적이 없다. 엊그제 이은에게 죄를 줄 때 우선 파직에 그친 것도 그래서이다. 혹시나 내가 노여움 때문에 이치에서 벗어난 결정을 하지는 않을까 하여 다시 한 번 숙고해보고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해서 지난 이 삼일 동안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니 엊그제 내린 처분은 결코 내 일시적인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죄를 너무 가볍게 물어 조정의 기강이 흔들리고 신하가 분수를 어겨 임금을 능멸할 우려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777(정조 1)년 6월 26일, 정조는 며칠 전 파직한 전임 영중추 부사 이은을 귀양 보냈다. 군무(軍務)로 어영대장 구선복과 심하게 다툰 그를 질책했더니 반성하기는커녕 임금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정조는 매우 언짢았지만 처벌에 대한 최종 결정을 며칠 늦춘다. 화가 났을 때는 판단력이 흐려져 올바름을 잃기 쉽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정치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는데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정사는 올바름을 얻을 수 없다’는 메시지는 그래서 나왔다. 이 말의 출처는 〈대학(大學)〉, ‘전(傳) 7장’이다. ‘이른바 몸을 수양한다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일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노여움이 있으면 올바름을 얻을 수가 없고, 두려움이 있으면 올바름을 얻을 수 없으며, 좋아함이 있으면 올바름을 얻을 수 없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올바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글의 전문이다.
노여움 · 두려움 · 호감 · 걱정 모두 경계해야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감정 조절은 임금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공동체와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하루에도 수없이 내려야 하는 임금은 반드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바르게 헤아리고 옳게 판단할 수 있다. 좋아하고 즐기는 감정에 취해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두려움이나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쳐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노여움으로 인해 판단이 흐려지게 되면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노여움은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사람은 분노에 휩싸이게 되면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현종이 보여준 사례가 대표적이다. 1664(현종5)년 4월. 갈수록 심화되는 당쟁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던 현종이 폭발했다. 이조에서 지나칠 정도로 당파에 치우친 인사서류를 올린 것이다. 화가 난 현종은 인사 안을 180도 뒤집고 담당 관리를 모두 파직했다. 대간이 이를 비판하자 자기 붕당만 위한다며 지방관으로 쫓아냈다. 재상 정태화가 극구 만류했지만 “요즘 보면 하는 짓들이 너무 속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벌을 내린 것이다” 며 철회하지 않았다(현종5.4.20). 더욱이 해당 붕당의 관료들이 업무를 거부하고 성균관 ‘공관(空館, 동맹휴업)’을 하는 등 반발하자 현종은 더욱 진노하며 강경 조치를 취한다. 당사자를 해임하고 공개 탄핵했으며 유생들의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정지시켰다. 성균관의 빈자리도 반대 붕당의 유생들로 채우게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살펴 달라”고 신하들이 거듭 요청했지만 현종은 “오로지 자기 당류를 두둔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려고 한다” 며(同.4.21) “그대들이 비록 일만 번 시끄럽게 굴어도 끝내 이익 될 게 없을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요지부동이었다(同.4.22).
이 사태는 시간이 흘러 현종의 분노가 잦아들면서 진정되어 갔지만, 현종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만약 현종이 신하들의 잘못을 냉정하게 지적하고 대의와 원칙에 따라 이를 징계했다면 신하들은 감히 반발하지 못했을 것이고, 현종은 정국의 주도권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를 조절하지 못해 절차를 무시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간언을 억압하고 선비를 함부로 대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송준길은 이런 현종에게 잘못을 인정하라고 진언한다. ‘성상께서 이런 분부를 내리신 것은 안타깝게도 분노로 인해 올바름을 얻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요즘 화가 난 마음에서 하신 명령들, 이를테면 인사담당 관리를 파직하고 직첩을 회수한 것, 대각의 신하를 지방관으로 내보낸 것, 관학 유생들을 부황하고 정거시킨 일 등에 대해서 모두 밝게 성찰하신 후 도로 거두어 들여 후회하고 사과하는 뜻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리 되면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것과 같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현종5.5.10). 송준길 또한 현종이 문책하고자 한 당파에 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한 점이 있었겠지만, 그의 상소를 받은 현종은 오래도록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과하라는 송준길의 요구가 불만스럽더라도 자신 역시 도가 지나쳤으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종은 ‘노여운 감정’ 자체를 가지면 안 됐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정자(程子)는 〈대학〉의 ‘전 7장’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여움(忿 )·두려움(恐懼)·호감(好樂)·걱정(憂患)의 네 가지 감정은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살피지 못해 욕심이 동하고 정이 치우쳐 올바름을 잃게 되는 것이다.” 명종 때 남언경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하께서는 마음을 허공처럼 담담하고 맑게 가지시어 이 감정이 마음속에 먼저 와 있도록 하지 마시고 그저 사물이 접근해 올 때에 따라 응하게 하셔야 합니다. 사물이 접근하여 감정이 일어날 때에는 치우치고 있진 않은가를 생각하시고 그것이 지나간 뒤에는 마음에 머물러 있지 말게 하시옵소서.’(명종21.9.12).
바른 마음이라고 해서 감정의 작용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외물(外物, 마음에 접촉되는 객관세계의 모든 대상)’이 내게 오면서 그에 따라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런 감정을 미리 내 안에 쌓아놓고 있다가 외물을 핑계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나의 편향된 집착으로 인해 감정을 심화시키거나 왜곡시키는 것도 옳지 않다. 아울러 감정에 흔들려서도 안 되며, 외물이 떠나면 그 감정을 깨끗이 잊을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감정을 없앨 게 아니라, 외물에 얽매이고 감정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나는 내 마음의 동요를 막으라는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80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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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만사 미리 헤아리고 준비해야 |
국가 안보 강조하며 자주 인용 … 위기대응 역량 평소 강화해야
세종 12년 4월 13일 병조참의 박안신이 상소를 올렸다. “왜적을 막기 위해서는 육군 수십만이 방어하는 것보다 병선(兵船) 수척으로 제어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병선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나무를 재목으로 써야 하는데, 백 년 이상을 자란 소나무가 수백 주는 있어야 배 한 척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중략)… 만일 재목이 부족하여 전함(戰艦)을 만들 수가 없다면 왜적이 우리 백성을 죽이고 해안을 노략질하던 전일의 화가 다시 반복될 것이옵니다. 어린 나무들을 잘 가꾸고 화재를 방지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인 이유입니다…(중략)… 공자께선 ‘사람이 멀리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근심이 생긴다(人無遠慮, 必有近憂)’고 하셨고, 맹자도 말하기를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할 때에, 진실로 지금이라도 쑥을 구해 묵히지 않으면 종신토록 3년 묵은 쑥을 얻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미리 후환을 염려할 줄 모르면 일을 당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음을 경계한 것입니다.”
심모원려의 자세 필요
상소에 등장한 공자의 말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것으로 주로 안보태세를 강조하면서 인용된다. 세종 31년 3월 16일 함길도 최전방 지역을 담당하는 경흥부사 김약회가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 시스템 개선을 요청할 때, 성종 19년 6월 4일 유자광이 국경 의주성의 수축을 건의할 때 모두 이말을 거론한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전쟁의 위기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멀리 내다보고 미리 준비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단 국가 안보뿐만이 아니다. 순조는 “사람이 멀리 보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근심이 있게 마련이다. 만일 나라에 저축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있겠는가? 다른 일도 그렇다. 미리 준비하면 모든 일이 다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다”라고 말한다(순조 9.12.12). 발생 가능한 것을 예측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는 생각한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측은 빗나가게 마련이다. 그래도 ‘준비’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정조는 “경들에게는 큰 병폐가 있다. 일이 있을 때에는 허둥대다 일이 없으면 이내 안주하고 만다. 세상일이란 끝없이 변화한다. 비록 어떤 일을 정확히 예측하여 강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일이 없을 때에도 언제나 일이 있을 때처럼 생각한다면 실제 일이 닥쳤을 때 이를 해결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허둥대는 지경엔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당부했다.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하며 앞날을 대비하는 그 과정 속에서, 내공이 쌓이고 위기대응 역량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옛날 사람들은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작았기 때문에 쉽게 처리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일이 자신의 능력보다 크기 때문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바둑에 비유하면 수법이 높을수록 바둑알을 더욱 작게 보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바둑에는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이라는 말이 있는데, 큰 국면을 헤아릴 수 있으면 한 수 한 수도 제대로 둘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키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서두에서 등장한 맹자의 말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맹자] ‘이루(離婁)’ 장에 나오는 ‘7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도 3년 말린 쑥을 찾으러 다닌다(七年之病 求三年之艾)’는 구절은 미리 준비하지 않는 잘못을 지적한다. 병을 7년째 앓았다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3년 말린 쑥을 마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쑥을 찾겠다고 동분서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준비를 안 한 상태에서 일이 닥쳤을 때 그저 자신만을 탓하며 체념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종 47년 2월 12일, 함경도 관찰사 신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현실을 개탄하며 상소를 올린다. “외교권이 모두 이웃 나라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을 늦게야 관보(官報)를 통해 접했습니다. 이는 지난 역사에 없었던 일로 우리나라가 처음 당한 치욕입니다. 이 형세는 장차 외교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 무슨 변괴란 말입니까! 성상(聖上, 고종)께서 밤낮으로 걱정하고 충신들이 목숨을 바치며 뭇 사람들의 울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끝내 그 조약을 폐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대세가 이미 기울어 다시 말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도 다시 중흥시킬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지금은 종묘와 사직이 아직 안전하고 황실이 건재하며 강토와 백성이 의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변란이 생기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단시일 내에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깊이 성찰하여 반성하고 원인을 바로잡는다면 변란을 그치게 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치욕을 씻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상하가 굳게 결심하고 죽을 힘을 다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정말로 부유해지고 군사가 정말로 강해지면 세계의 각 나라들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비록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일을 시행한다면 공효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란 없습니다.”
갈수록 미래 불확실성 커져
7년째 앓아온 ‘병’을 치료할 수 있는 ‘3년 묵은 쑥’을 미리 준비해놓지는 못했지만 이제라도 쑥을 구해 묵혀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쑥이 묵혀지기까지 3년 동안 더 병을 앓아야 하고 심지어 그 병이 더 심해질 수도 있겠지만, 9년째가 된 해에는 약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 물론 3년 후에는 병이 더 심해져 이 쑥의 약효가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증상을 감경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진작 약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자포자기 하다가는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인류문명의 진보는 역설적으로 갈수록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수많은 변수가 던져진다. 이러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길은 앞에서도 말했듯,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시나리오 플래닝’처럼 예상되는 시나리오들을 도출하고 거기에 맞는 전략적 대응방안을 수립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겠지만, 나 자신의 크기를 키우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마찬가지이다. [손자병법]에는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지 말고, 적이 언제 오더라도 내가 준비되어 있음을 믿어야 한다(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也)’고 했다. 어떤 미래가 올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어떤미래가 오더라도 내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 중앙시사매거진 1279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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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천자의 아버지도 법 앞에 예외 아니다 |
실록서 왕의 측근 처벌에 자주 인용 … 특권계층 생기면 법 기강 흔들려
문종 1년 9월 26일. 사헌부 관리들이 승려에게 칼(枷·형틀)을 씌워 끌고 가는 모습을 목격한 수양대군은 화를 내며 당장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도첩(度牒·신분증)이 없는 승려를 규정에 따라 한양에서 추방하기 위해서라지만,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형틀을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 문제를 보고 받은 문종도 죄가 없는 사람에게 칼을 씌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 신하들은 수양대군을 탄핵했다. 관리의 행위에 잘못이 있다면 절차에 따라 책임을 물을 일이지 해당 업무에 아무런 권한이 없는 수양대군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군이고, 왕의 동생이라도 엄연한 월권행위였다.
효와 법 사이서 갈등한 순 임금
“도응(桃應)이 맹자에게 ‘순(舜)임금이 천자가 되고, 고요(皐陶)가 형벌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고수가 살인을 하였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맹자는 ‘(법을) 집행할 따름이다’ 라 하였습니다. 이번에 수양대군이 사헌부에서 이송하고 있던 중을 탈취하고 칼을 벗기어 데리고 갔으니, 승려를 형틀에 씌워 끌고간 사헌부의 행동이 옳았느냐 잘못됐느냐와 별개로, 관리의 공적인 법 집행을 사사로이 방해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시 되풀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수양대군의 죄를 물으소서.” (문종1.10.4). 사헌부 우정언(右正言) 윤서(尹恕) 등은 “이 일은 비록 사소하지만 사소하다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 될지 그 조짐이 두렵습니다” 라며 수양대군에 대한 견책을 요구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고수(皐陶)는 순(舜) 임금의 아버지다.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는 아들과 달리 성품이 좋지 못했으며 다른 아들과 모의하여 여러 차례 순(舜)을 죽이려 들었다고 [사기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순은 지극한 효성으로 변함없이 고수를 섬긴다. [맹자]의 ‘진심(盡心)’ 장에 보면 순 임금과 고수를 두고 맹자의 제자인 도응이 스승에게 질문을 하는데, 위의 상소에서 인용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답에 이어 도응은 “순 임금이 자신의 아버지를 구속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맹자는 “순 임금이 어찌 금지하시겠는가” 라며 “법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고 답했다. 효성이 깊은 순 임금이 법을 어길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죽는 것을 방관할 수도 없어 천자의 지위를 버리고 몰래 아버지와 도망을 가 숨어 살 것이라는 예측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형벌의 원칙과 위법 여부만을 판단해야지 대상의 지위고하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천자와 같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절대로 사사로이 법을 좌지우지하려 하지 말고 앞장 서 준수하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것이 맹자가 전하는 메시지다.
[맹자]의 이 대목은 실록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법을 어긴 왕족이나 고위직 신하, 왕의 측근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강조하며 인용되었다. 법은 천자의 아버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정종 때 장사정(張思靖)이라는 무신(武臣)이 살인죄로 체포되었지만 개국공신이자 정사공신(定社功臣)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무거운 죄는 없습니다. 더욱이 장사정이 저지른 살인은 매우 잔인하여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공의(公義)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옛적에 함구몽(咸丘蒙, ‘도응’의 잘못)이 맹자에게 순 임금이 천자가 되고 고요가 사(士)로 있는데, 고수가 살인을 했다면 어찌 되겠냐고 물으니 맹자는 마땅히 구속했을 것이라고 답한 바 있습니다. 살인을 하게 되면 설령 천자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체포해 죄를 주는 것인데 하물며 공신이겠습니까? 장사정은 험하고 잔인하고 포학하고 패려하여, 자신이 공신임을 믿고 방자히 백주 대낮 길 한 가운데서 3품관의 아내를 마음대로 죽였고, 이웃 남녀들을 매질하여 임신한 여자가 거의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대체 장사정이란 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까? 법에 반드시 주살(誅殺)하도록 되어 있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정종1.5.21).
태종이 처남 민무회의 죄를 덮어주자 “순 임금은 그 아비에게 혜택을 베풀지 않았고 고요도 천자의 아버지라 하여 법을 폐하지 않았는데, 그저 친척일 뿐인 민무회에게 사적인 은혜를 보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는 비판이 나왔다 (태종15.5.11). 성종 때 왕족 창원군이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위의 구절을 거론하며 “법은 친하고 귀하다 하여 흔들 수 없습니다. 법이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면 어찌 백성이 평안히 살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성군들은 법을 엄격히 준수하였으니, 그래야 법이 신뢰를 받고 조정이 의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중략)… 순 임금이 천자였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지 못한 것은 고수를 체포한 것이 바로 ‘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원군이 비록 전하의 존속이기는 하나 순과 고수의 관계에 비하겠습니까? 순도 아버지를 위해 법을 사사로이 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는 감히 창원군을 위해 법을 사사로이 하고자 하십니까?” 라고 창원군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주청했다 (성종9.3.14).
‘누구에게든 법은 하나’
얼마 전,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는 ‘법은 하나야. 나한테도 당신 한테도’ 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했다. 약자에게는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지도층의 위선을 폭로하는 데 쓰인 이 말은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해야 함을 환기시킨다. 비단 법뿐만이 아니다. 기업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집단에는 많든 적든 조직을 구축하고 운영하기 위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규칙이 불평등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기업의 오너 등 최고 지도부는 규칙을 만들 때부터 아예 자신들을 예외대상으로 만든다. 규칙을 어기더라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징계를 받곤 한다. 같은 구성원이지만 규칙위에 존재하는 특권계층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규칙은 온전히 작동되지 않고 규칙을 근거로 세워진 조직도 흔들리게 된다. 결정적인 단초가 주어진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규칙이 불평등해지면서 그것이 갖는 권위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맹자]에 소개된 순 임금과 고요, 고수의 비유가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 이유다.
- 중앙시사매거진 1278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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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마음이 없지 길이 없진 않다 |
‘불가능하다’는 건 대부분 핑계 … 도전정신 길러야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 어찌 멀다 하겠는가(未之思也 夫何遠之有)’. 1395년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삼봉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함께 새로 창건한 경복궁을 둘러보고 있었다. 전각에 붙일 이름과 그 이름에 담긴 뜻을 하나하나 설명하던 정도전은 근정전 뒤에 위치한 편전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어갔다.
“무릇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만백성에는 슬기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 어진 이와 불초한 이가 뒤섞여 있습니다. 번다한 만사(萬事)에도 옳고 그름, 이롭고 해로움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신다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분하여 처리하고, 사람의 좋고 나쁨을 가려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부터 군주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은 싫어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에 두며 나쁜 일을 꾀해 화를 당하고 패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결국 생각하지 않아서입니다. [시경(詩經)]의 ‘어찌 그대를 생각하지 않으랴만 집이 멀다’라는 구절을 두고 공자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 어찌 멀다 하겠는가!’라 하였으니 생각이란 이처럼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매일 이 전각에서 정무를 보시고 조칙을 내리시매 항상 깊이 생각하셔야 하오니, 신은 이 곳을 사정전(思政殿)이라 부르길 청하옵니다.” (태조4.10.7).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도전이 인용한 공자의 말은 [논어]의 자한(子罕)편에 나온다. ‘산사나무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구나. 내 어찌 그대를 생각하지 않으랴만 집이 너무 멀구나!’라는 시를 읽던 공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않은 것이지 어찌 멀다 하겠는가!(未之思也 夫何遠之有)” 간절히 그리워하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거리가 먼 것쯤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
이 구절이 주는 가르침은 비단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바빠서 시간이 없다, 나와 맞지 않다, 너무 멀다, 이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많다 등등 이러저러한 핑계를 댄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내가 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할 수 없다는 이유가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는 아니었을까? 업무가 많아서 독서할 시간이 없다는 젊은 신하의 말에 정조는 “읽을 생각이 없는 것이지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라고 질책한 적이 있다. 하루에 글 몇 쪽을 읽다 보면 그게 쌓이고 쌓여 수많은 책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인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글 한 쪽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요컨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고, 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다. 귀찮아서, 걱정이 돼서, 혹은 두려워서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의 결과를 예단하고 지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정돈하여 마음을 다잡는다면 상황이나 여건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모든 것은 결국 나 자신의 마음과 의지, 즉 생각에 달려 있다. 절실히 갈망하면 다가오고 진심으로 하고자 하면 이르게 된다. 공자가 “인(仁)이 멀리에 있다고? 내가 인을 바라면 인은 곧 나에게로 다가온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자는 또 “선생님의 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따르기엔 제 힘이 부칩니다” 라는 제자 염구에게 “힘이 부족하다는 것은 힘껏 길을 걷다 중도에 쓰러지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 자네는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마음으로) 한계부터 긋고 있다(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 고 말했다. 어떤 목표를 가졌다면, 무엇이 되길 바란다면 그것을 절실히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힘을 남김없이 쏟아내야 한다. 혹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힘이 다 빠져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도에 쓰러질지언정 힘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시도하지 않고 노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숙종 때의 학자 김창협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세상에 사람이 못해낼 일이란 없습니다. 단지 온 힘을 다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사람이 몸을 움직여 뭇 일들에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중요하니, 진실로 이 마음을 먼저 바르게 세우고 굳건히 잡아 용맹하게 나아간다면 어떤 일이든 해내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역량에는 본래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재능의 정도에도 강하고 약함이 있어서 그 마음을 다했음에도 역량과 재능이 끝내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량과 재능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두 발휘하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대개 하기도 전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서 아예 능력을 시험해 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니, 온 힘을 쏟는다면 필시 못해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자 염구에게 공자는 ‘너는 금을 그어 스스로 못한다고 한계를 짓고 있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근심은 모두 금을 긋는 데서 비롯합니다. 만약 전하께서도 요임금과 순임금의 정치를 (너무 높고 이상적이어서) 행하기 어렵다고 하신다면 이 역시 스스로 금을 긋는 것입니다.” (숙종9.8.5).
물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타고난 자질과 능력의 상한선, 운이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와 같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할 자격은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채웠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길이 보이지 않고 막연하다고 해서, 방법을 모르겠다고 해서, 번거롭고 어렵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것이고 제 손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장시켜버리는 것이다.
구차히 편안해서는 안 된다
어느 기업가는 항상 “해보기나 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의 성공은 주변 여건이나 물질적 투입요소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에 의해 좌우된다. 위기를 극복하고 변화된 기업환경에 대응하는 것,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것, 구성원들의 하나 된 힘을 이끌어내는 것, 이 모두는 결국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서 출발한다.
공자의 노선을 부정적으로 봤던 당시 지식인 중 한 사람은 공자를 가리켜 “불가능한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知其不可爲而爲之)” 이라고 평했다. 헛된 힘을 낭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해서, 어렵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또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성장과 발전은 꼭 결과를 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실한 마음속에서, 절실한 생각 속에서, 불가능에 도전하는 열정과 의지 속에서 우리는 바랐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77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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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
스스로 ‘옳다’ 확신하는 군주 많아 ... 나라 전체가 위기 맞기도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 [논어]의 ‘학이(學而)’편과 ‘자한(子罕)’편에 반복해서 나오는 구절로, [맹자]의 ‘공손추(公孫丑)’ 하편에도 ‘잘못이 있으면 곧 고쳐야 한다(過則改之)’는 유사한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 대해 주자(朱子)는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용감하지 못하면 악(惡)이 나날이 자라나게 되니 잘못을 했거든 신속하게 고쳐야 하며 허물을 바로잡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겨서 구차히 편안해서는 안 된다’ 고 주석을 달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허물을 가지고 있고 과오를 범한다. 군자(君子)와 같은 훌륭한 인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다. 허물이 있더라도 반성을 하고 문제점을 개선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잘못을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고 인격을 수양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잘못을 고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공자가 제자인 안회를 가리켜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不貳過)”고 극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스스로에게 관대하게 마련이다. 허물을 알면서도 두렵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고치지 않아도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면 인간은 결코 진보하지 못한다. 허물을 그대로 두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없고, 원인을 바로잡지 못하니 계속 같은 잘못이 반복되는 것이다. 심지어 잘못 자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합리화, 혹은 왜곡하는 경우까지 나오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잘못을 덧칠하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다.
이 도덕적 규범은 실록에서 왕의 정치적 책무로 등장한다. “대개 사람은 비록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잘못을 하고 나서 능히 고친 뒤에야 진정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탕왕(湯王, 중국 고대의 성군)은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며, 공자도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성종실록 15년 2월 6일).
구차히 편안해서는 안 된다
백성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왕은 완벽해야 한다. 적어도 완벽에 가까워야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허물이 없을 수 없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따라서 그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잘못을 항상 성찰하고, 잘못을 알았을 때 신속히 수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제는 왕처럼 최고의 자리에 오른 리더들은 자기확신과 확증편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고 통치에 자신감이 붙게 되면 자만해서 자신이 무조건 옳고 신하들의 의견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왕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릇된 판단을 고집하다가 공동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조선 중종 때 시강관(侍講官)이었던 김희열(金希說)은 경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거니와 대저 사람이 요임금 · 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하여 잘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잘못이야 고치면 없어지는 것이니 괜찮으나 잘못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듣기 싫어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큰 병통입니다. 더욱이 임금은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을 듣기 좋아하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래에서 숨김없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임금도 잘못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임금께 (간언을) 듣기 좋아하는 정성이 없고 조금이라도 꺼려하는 바가 있다면 누가 천둥과 같은 위엄을 거스르면서 진언하려 하겠습니까?”(중종실록 24년 1월 20일).
홍문관 부제학 구수담(具壽聃)도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간언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간언을 따르는 것은 어렵고, 잘못을 알기는 어렵지 않으나 잘못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간언을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으면 이는 곧 간언을 물리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이는 곧 잘못을 더하는 것이 됩니다.”(중종실록 38년 12월 1일). 스스로 허물을 깨닫고 개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잘못을 지적해주는 신하들의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여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하고 단점을 보완하라는 것이다. 만일 왕이 간언에 불쾌해 하고 간언을 올린 사람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신하들은 임금의 눈치를 보고 비위만 맞추게 된다.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디어나 의견들도 사장되어 버릴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태도는 의례적인 것에서 끝나면 소용이 없다. 리더의 진정성이 뒤따라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왕도 사람인 이상 속으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수긍하고, 간언이 못마땅하면서도 듣는 척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잘못했거든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기꺼운 마음으로 간언을 받아들여라’는 책무 때문에 속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정조(正祖)도 그런 태도를 보였던 적이 있었는데, 재상 채제공(蔡濟恭)은 “지금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이 좋다며 전하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시니, 실상 신들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잘못인 줄 알면서 고치지 않고 좋은 말인 줄 알면서 따르지 않는 것’ 이니, 불행히도 ‘이런 사람에 대해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옛 사람의 훈계에 해당됩니다” (정조실록 18년 4월 28일)라고 지적했다.
진심으로 간언 받아 들여야
[논어]의 ‘자장(子張)’편에 보면 ‘군자의 잘못은 해에 일식(日蝕)이 있고 달에 월식(月蝕)이 있는 것과 같아서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 고 했다. 군자는 소인과 달리 잘못을 덮거나 왜곡하지 않고 스스로 명백히 밝힌다. 그리고 그것을 주저 없이 고치고 용감하게 바로잡기 때문에 어둠에 가렸다 빛을 되찾은 해와 달을 우러르 듯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잘못을 하고 반성하며 이를 바로잡는 과정 속에서 ‘나란 존재’가 완성돼가기 때문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1276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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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四書)' … 우환은 生이요, 안락은 死라 |
위기 때 절망 말고 태평성대 때 긴장해야 … 조선 왕조의 금언
‘우환이 나를 살게 할 것이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生於憂患 死於安樂)’.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땐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고 근골을 수고롭게 만들며,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몸을 궁핍하게 한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게 방해한다.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참을성을 길러줌으로써,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서이다.”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시간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고, 오늘 마주하고 있는 실패가 내일의 성공으로 가는 자산이 될 테니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다시 일어서라는 것이다.
어린 단종에게 경각심 일깨운 박팽년
사람은 대부분 실패한 뒤에야 반성을 하고 단점을 보완한다. 위기가 닥쳐야 비로소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애쓴다. 조심하고, 심사숙고하고, 의지를 다지는 것도 어려운 상황과 마주선 뒤에야 나오는 태도다. 이와 달리 삶이 편안하고 풍족하다면 문제점이 눈에 보이더라도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단점을 외면하고 자신을 계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당장은 우환을 겪는 사람이 불행하고,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행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 그 불행과 행복은 뒤바뀌게 된다. 고난의 시간 자체는 고통스럽겠지만 최선을 다해 극복한다면 훌륭한 삶을 향해 가는 토대가 되고, 안락의 시간 자체는 즐겁겠지만 거기에 취해 안주한다면 나를 파멸로 인도하는 발단이 되는 것이다. 맹자가 우환을 ‘생(生)’에, 안락을 ‘사(死)’에 대응시킨 까닭이다. 물론 일부러 안락에서 벗어나고 억지로 우환을 만들 필요는 없다. 우환을 만났을 때는 절망하지 말고, 안락을 만났을 때는 긴장을 풀지 말라는 것이다. 우환과 안락이 모두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전통사회에서 이 구절은 한 사람의 개인 뿐 아니라 국가의 최고 리더인 군주가 특히 명심해야 할 격언으로 쓰였다. 단종 2년 5월 4일. 이날 열린 경연에서 승지 박팽년은 단종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임금은 숭고하고 부귀한 존재이므로 근심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이르기를 ‘우환이 나를 살게 할 것이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날 성군들은 숭고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항상 근심했고, 부지런히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가다듬는 것을 마음 깊이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셨으니 진실로 아주 잠깐이라도 편안히 즐기려 하시거나 태만하고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임금이 편안히 즐기는 것을 좋아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져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고, 근심하고 삼가는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면 나라가 부흥할 것이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 아니옵니까?” (단종실록).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단종이 종종 경연을 쉬고, 활쏘기 구경(觀射) 등 ‘즐거운 일’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이자 박팽년이 이를 경계한 것이다.
군주가 두려워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방심하거나 나태할 시간이 없다. 연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시행착오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늘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정조가 “올해 풍년이 들었더라도 곧 내년의 농사를 근심한다” 고 말하고, 세종이 “설령 과도하게 수고로워지는 한이 있어도 나태함에 빠지진 않을 것” 이라고 다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군주들은 기대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창업 군주는 자신이 직접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위기는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위기가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신분으로 아무런 고생도 해보지 않은 채 왕위에 오른 후세의 군주들은 다르다. 위기극복의 유전자가 없는데다, 조심하는 마음도 부족해서 자칫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신의 높고 고귀한 지위를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거기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성공을 거둔다고 하더라도 이내 방심하여 스스로 그 성공을 무너뜨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군주의 ‘안일함’인데, 정조는 “너무 안락하면 마음에 중심이 없어지고 기운이 통제 되지가 않으니, 생각은 의당 조심스레 삼갈 줄 알아야 하고 자세는 마땅히 추슬러야 한다” 고 경고했다.
임진왜란 당시, 개전 초기에 이미 임금이 국경의 최북단까지 피신하는 등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조선 조정도 ‘생어우환 사어안락’을 내세우며 재기의 의지를 다진다. “예로부터 어려움 속에서 다시 일어나고, 패배하였다가 다시 회복한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임금과 신하 상하가 합심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징계하고 개과천선하여 정치와 형벌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단합시켰기 때문입니다…(중략)… 맹자가 말한 ‘생어우환 사어안락’이 바로 이것입니다.”(선조실록 27년 10월 17일)
임진왜란 때 재기의 의지 다진 원천
우환과 안락은 영원하지 않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명한 말처럼 머지않아 지나가 버릴 것이며 우환의 뒤에는 안락이, 안락의 뒤에는 우환이 찾아올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둘을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함몰 되어서는 안 된다. 즐겁고 평안한 상황에선 그만큼 여력이 넘치니 미리미리 우환을 대비하고 내공을 키워야 하며, 힘들고 고단한 상황에선 이것이 나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고 단련시키는 기회라 생각하고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리 되면 우환과 안락은 둘 다 소중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 중앙시사매거진 211호 | 글=김준태 [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 201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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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 · 맹자 · 중용 · 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글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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