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교회를 망치는 ‘아첨꾼과 충성꾼’
하느님의 ‘의로움’
인사조직연구소 소장 최동석은 유튜브 ‘열린공감TV’(2022.1.7. 방송)에서 ‘아첨과 충성’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첨은 궁극적으로 타인을 속이는 행위다. 충성은 이것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든 말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충성한다는 사람일수록 위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반드시 배신한다.”라고 말한다. “아첨할 필요도 없고, 충성할 필요도 없고, 남을 속일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갈릴래아 카나’라는 마을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졌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는데 ‘포도주’가 바닥난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마침 혼인 잔치에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께서 참석하셨는데, 이때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하신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신다.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라니? 게다가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대체 무슨 영문일까? 당황스럽다. 많은 군중을 몰고 다니시던 예수님과 제자들, 어느덧 해가 저물어 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기에는 이미 늦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하셨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한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당황스럽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정작 그분이 하신 일은 기적이 아닌 하느님의 ‘의로움’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무엇일까? ‘누군가 곤경에 처할 때, 외면해서는 안 된다.’ ‘죄 없는 자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은 안 된다.’ ‘없는 이와는 나누어야 하고, 배고픈 이에게는 빵을, 목마른 이에게는 물을 줘야 한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신랑, 신부를 도와주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준 것이다. 이제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하신 말씀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성전에 봉헌된 소년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없었다. 그의 부모는 하룻길을 간 뒤에야 예수님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찾아 나선다. 급기야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서야 성전에서 아들을 찾은 어머니 마리아는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루카 2,48) 한다. 이에 소년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신다. 어머니 마리아보다 옆에서 보는 우리가 더 당황스럽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여인이시여!’라고 하실 때도 당황스러웠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마리아도 이를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신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한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또 베드로는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마르 9,5. 9,33) 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계명으로서 하느님과 동일시하였다. 그들은 ‘율법’에 충성을 다 바친다. 아주 작은 율법의 계율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자신의 태도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어떠한 하느님이라도 그토록 율법을 준수하는 자신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어땠는가? 그들은 율법 학자만큼은 아니어도 ‘율법’에 충실한 사람임을 드러내야 했다. 마치 아첨꾼이 아부하듯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인다. 성구 갑을 만들어 옷에 달고 다니고(마태 23,5)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마태 23,14) 등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태16,5) 하신다.
본당, 교구마다 아첨꾼과 충성 꾼들이 있다. 그래서 본당신부가 바뀔 때마다 본당 신자들의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열심히 했던 신자가 냉담을 하고, 냉담했던 신자가 열심히 하는 신자로 돌변한다. 최고 권력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들끓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권력’이라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떨어진 포도주로 당황할 신랑, 신부를 보았고,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불안의 깊은 내면을 보셨다. 어머니의 청이었지만 예수님은 거기에 휩쓸리지 않으시고 단호히 ‘경계선’을 그으신다. ‘여인이시여.’라는 매우 당혹스러운 이 표현으로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혼탁하게 흐를 수 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일순 제거하신다. 베드로가 걸려 넘어지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걸려 넘어졌던 그것들, 지금도 숱한 신앙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뚜렷하게 제거하신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어쩌면 당황스러울 수 있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이었지만 마리아 역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하고 화답하신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랑이어라!’.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는 마리아의 신앙고백과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첫 번째 기적이 카나에서 이루어진다.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11사도는 바오로를 사도로 존중한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사도라는 권위에 안주하지 않고 더 멀리 떠나 이방인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리사이의 누룩’을 피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 길을 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 못지않게 바오로 사도를 추앙한다.
‘Freedom’, 자유(自由). 아첨하지도 말고, 충성하지도 말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태 10,38) 자신의 길을 살아가는 것, 하느님의 ‘의로움’이 아닐까?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