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멈췄다.
도준은 눈을 떴다. 잠든 적이 없었으므로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새벽이 되어 있었다.
그는 벽에 붙인 다섯 개의 메모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메모 — *사라진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의 아래에 손가락으로 선을 긋듯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고태민.
39세. 감리사. 내부 고발자. 실종자.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사건의 살아있는 열쇠.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살아있어야 한다.*
오전 6시. 제주시 외곽.
도준은 고태민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를 직접 걸었다.
태양광 단지 북쪽 외곽 도로. 가로등 하나 없는 2차선 도로. 양옆으로 감귤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새벽안개가 무릎 높이까지 차올라 있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목격자는 인근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스물두 살. 이름은 양지호.
도준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호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그날 밤 기억하십니까? 방화 미수 사건 당일."
"네. 경찰 아저씨들한테 이미 얘기했는데요."
"다시 한번 들어도 될까요?"
지호는 컵라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밤 11시쯤이었어요. 검은 점퍼 입은 남자가 들어와서 생수 두 병이랑 초코바 사 갔어요. 근데 좀 이상했어요."
"뭐가요?"
"손이 떨리고 있었어요. 계산할 때. 그리고 자꾸 뒤를 돌아봤어요. 뭔가 쫓기는 것 같았달까요."
"얼굴은 봤습니까?"
"마스크 쓰고 있었어요. 근데 눈이... 무섭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겁에 질린 눈이었어요."
도준은 편의점 CCTV를 요청했다.
"그날 거 저장 안 됐어요. 저장 장치가 그 전날부터 오류가 났거든요."
*또다시 지워진 눈.*
그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편의점을 나왔다.
주차된 차 앞에서 멈췄다.
생수 두 병. 초코바.
혼자 있는 사람이 준비하는 양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였다.*
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태민 주변 인물 중 방화 미수 사건 전후로 갑자기 잠적하거나 연락이 끊긴 사람 있어?"
키보드 소리가 빠르게 들렸다.
"있어요. 한 명."
"이름은?"
"박수인. 31세 여성. 고태민이랑 같은 시공사에서 일했어요. 직책은 회계 담당. 역시 같은 시기에 해고됐고요. 이후 행적 없음."
"주소는?"
"마지막 등록 주소가 제주시 이도동이에요."
도준은 차에 탔다.
이도동의 빌라는 4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302호.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한 번 더 눌렀다.
그때 옆집 문이 열렸다. 50대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 한 달 넘게 아무도 없어요. 근데 가끔 불은 켜져요. 밤에."
도준은 귀가 번쩍 뜨였다.
"가끔요?"
"불규칙하게요. 며칠에 한 번씩. 새벽에."
그는 건물 관리자를 찾아 마스터키를 빌렸다. 형사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302호 문이 열렸다.
빈 방이었다. 가구는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비어 있었다. 쓰레기통을 들여다봤다. 비닐 봉지 하나. 안에 생수병 두 개와 초코바 포장지가 들어 있었다.
*여기 있었다.*
그것도 최근에.
도준은 방 안을 천천히 걸었다. 창가에 멈췄다.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쓴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습기가 맺혔다 마르면서 생긴 자국이었다.
숫자였다.
**37.4892 / 126.4512**
좌표였다.
위도 37.4892. 경도 126.4512.
나연이 5분 만에 위치를 찾아냈다.
"인천이에요. 영종도 북단. 폐쇄된 군 통신 시설 인근이에요. 민간인 출입 제한 구역이고요."
"제한 구역 안입니까?"
"경계선 바로 바깥이에요. 거기 폐어선 야적장이 있어요. 오래전에 쓰던 거 방치한 것들이요."
도준은 지도를 바라보았다.
인천. 항구. 차병철을 처음 만난 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우연이 아니다.*
그는 즉시 인천으로 향했다.
영종도 북단 야적장.
썩어가는 어선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녹슨 선체에 바닷새들이 앉아 있다가 도준이 다가서자 일제히 날아올랐다.
세 번째 어선.
선명 없음. 유리창에 시커먼 그을음. 갑판에 낡은 타이어들이 쌓여 있었다.
도준은 조심스럽게 갑판에 올랐다.
선실 문은 안에서 걸려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고태민 씨. 강도준입니다. 형사입니다.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침묵.
"고태민 씨 어머니 고순희 씨가 보냈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빗장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나왔다.
한 명은 30대 후반 남자였다. 말라 있었다. 눈 아래 깊은 그늘. 하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또 한 명은 30대 초반 여자였다. 박수인이었다.
고태민이 말했다.
"얼마나 걸렸어요, 여기까지 오는 데."
"닷새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선실 안은 비좁고 냉기가 돌았다. 낡은 담요 두 장. 손전등 하나. 비상식량 몇 봉지.
고태민은 무릎에 손을 얹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태양광 단지 설계 초기부터 이상했어요. 지반 조사 데이터가 실제 현장이랑 달랐어요. 제가 현장에서 직접 측정한 수치와 보고서 수치가 20퍼센트 이상 차이가 났어요."
"보고 했습니까?"
"했죠. 팀장한테. 팀장은 이틀 뒤에 저를 불러서 말했어요. '수치는 이미 확정됐다. 네가 틀린 거다.' 하지만 저는 틀리지 않았어요."
박수인이 이어받았다.
"저는 회계 쪽에서 이상한 자금 흐름을 발견했어요. 설계 감리 비용이 이중으로 청구되고 있었어요. 받는 쪽은 에너지특별위원회 위원장 이름으로 된 유령 법인이었고요."
도준은 1권부터 이어진 실들이 하나로 수렴하는 것을 느꼈다.
"방화는요?"
고태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였어요."
침묵.
"발화를 시도한 게 아니에요. 막으려 했어요. 누군가 먼저 인화성 물질을 설치해 뒀더라고요. 제가 발견하고 가방째 집어들고 나오다가 경비원한테 목격된 거예요. 저는 불을 지르러 간 게 아니라 불이 나지 않게 하려고 간 거예요."
도준은 눈을 감았다.
*방화범은 피해자가 맞습니다.*
사진 뒤에 쓰인 그 메모. 할머니가 알고 있었다.
"그럼 실제로 불을 지르려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태민과 박수인이 동시에 같은 이름을 말했다.
**"권태성."**
도준은 두 사람을 차에 태웠다.
고태민은 조수석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 달 넘게 숨어 지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무서웠겠군요."
도준이 조용히 말했다.
"무섭기보다..." 고태민은 잠시 생각했다. "억울했어요. 제가 발견한 건 진짜였거든요. 그 지반으로 완공하면 5년 안에 시설 일부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그 아래 마을이 있어요. 사람들이 살아요."
도준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박수인이 뒷좌석에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요. 숨어 있는 동안 정리했어요. 회계 장부 원본 사본이랑 자금 이동 내역이에요. 유령 법인 등기 서류도요."
도준은 룸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박수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근데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누구요?"
"위원장이랑 권태성이요."
도준은 앞을 보며 말했다.
"그건 이제 제 일입니다."
서울. 오후 4시.
도준은 권태성의 법률사무소 문을 다시 열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나연이 옆에 섰고, 뒤에는 검찰 수사관 두 명이 따라 들어왔다.
권태성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번엔 눈빛이 달랐다.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고태민 씨를 찾았습니다."
권태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수인 씨의 회계 자료도 확보했고요. 유령 법인 등기도요."
그래도 침묵이었다.
도준은 한 발짝 다가섰다.
"방화 시도를 지시한 사람이 당신입니까?"
긴 침묵 끝에 권태성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예상보다 작았다.
"나는... 누군가를 해치려 한 게 아닙니다."
"그럼 뭘 하려 했습니까?"
"막으려 했어요."
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엇을요?"
권태성은 소파에 천천히 다시 앉았다. 마치 오랫동안 서 있다가 처음 쉬는 사람처럼.
"그 시설이 완공되기 전에 결함이 드러나면... 사업 전체가 뒤집히고 위원장이 무너지고, 배후까지 다 드러나요. 나는 그걸 원했어요. 그런데 방법을 잘못 선택했어요."
도준은 그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옳은 목적으로 잘못된 방법을 선택할 때,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재판관의 몫이었다.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그날 밤.
도준은 인천 항구로 다시 내려갔다.
차병철은 같은 창고,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움직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권태성이 잡혔군."
도준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권태성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왜 진작 알리지 않았습니까?"
차병철은 창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증거가 없으면 말은 소음에 불과해. 권태성은 3년 동안 조용히 움직였어. 나는 그가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
"그 사이에 고태민은 한 달을 도망 다녔습니다."
"알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차병철은 처음으로 도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용납 못 해. 나 자신을."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자네한테 봉투를 준 거야. 내가 직접 움직이면 또 다른 사람이 다쳐. 그래서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했어. 계산 없이 움직이는 사람."
도준은 천천히 일어섰다.
"차 수석님도 진술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차병철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창고 문을 나섰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짠 바람이었다. 항구의 크레인이 새벽빛 아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 사흘 뒤.
도준은 사무실 창가에 섰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에너지특별위원회 위원장 긴급 체포... 태양광 단지 비리 수사 착수... 내부 고발자 고태민 씨 혐의 없음 처분...*
그는 뉴스를 끄고 벽의 메모지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 *잘린 곳에 진실이 있다.*
> *소음 뒤에 진짜 총성이 있다.*
> *역사의 상처는 정파의 언어로 봉합되지 않는다.*
> *불을 지르는 자도, 불을 끄는 자도 때로는 같은 이유를 품는다.*
> *사라진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다섯 장의 메모지.
그는 그것들을 모아 서랍에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전화가 울렸다. 나연이었다.
"형사님. 새 파일 왔어요."
"무슨 파일?"
"녹취록 잘린 13분이요. 전체 원본이 익명으로 검찰에 제출됐대요."
도준은 잠시 생각했다.
*차병철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
"알겠어."
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하늘이 오랜만에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끝까지 파랬다.
안개는 걷혔다.
적어도 오늘은.
그리고 도준은 알고 있었다. 안개는 언제나 다시 온다는 것을. 다른 이름으로, 다른 얼굴로, 다른 골목에서.
그래서 자신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고.
그는 코트를 걸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새 파일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