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타난 "천부경" - 김수로왕은 알고 있었다./ 31세 재춘 입니다.
고려사에 나오듯이 신돈 조상께서 " 고려비기"를 탐독 하셨고 "유본 천부경" 을 직접 지으셨다는 것을 읽고 " 천부경" 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고려의 공민왕 께서 직접 영산의 옥천사를 방문해서 신돈 조상님을 만나서 인사 한 후에 수도 개성의 국가사찰인 " 현화사" 주지로 모셨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잘 아시다 시피 원나라의 노국공주를 왕비로 맞이 했지만 항상 외척인
원나라로 부터 간섭을 끊기위해 노력한 분입니다. 자주 고려의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 왕이 직접 " 확약서" 까지 친히 써가며 신돈 조상을 대 고려의 재상으로 모셨습니다. 도데체 신돈 조상이 어떤 분이길래 그러했을까 하는 생각과 조상님의 " 머리속에 들어 있는 사상" 이 무엇일까 궁금 해 오던 차에 유본 천부경 저자이신 신돈 조상의 " 천부경" 관련 이야기가 같은 고려의 " 삼국 유사" 저자인 " 일연 " 스님의 글에 나오지 않을 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심히 보던 차에 우연한 기회에
북한의 국어 학자( 리상호 )가 번역한 " 북역 삼국 유사 , 1960,초판 ,도서 출판 신서원 " 을 구해 읽어 보았습니다.
저자의 한글 번역 삼국유사중에 p262 "가락국기"를 들여다 보면 ,
가락국의 시조인 " 김수로왕"이 나라를 만들고 이듬해에 나라의 " 수도" 를 정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리상호님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면 ,
( 이땅이 역귀잎 만하게 좁고 적지마는 땅이 청수 하고 범상치 않으니 16라한 부처님이 머물만한 데다. 더군다나
하나로 부터 셋이 생기고 셋에서 일곱이 생기는 원리가 있는 지라 일곱 분의 성인이 머물 만한 데가 여기인듯 싶다 ) 라는 글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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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원문 참조)
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 四望山獄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況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疆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宮禁殿宇及諸有司屋宇·虎庫倉?之地. 事訖還宮 ?徵國內丁壯人夫工匠 以其月二十日資始金湯 ?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候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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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가락국 건립 년도가 후한세조 건무 18년 임인년( 42년), 수도 건립이 다음해 입니다.
국가수도 결정에 " 수로왕"이 이론적 근거로 " 천부경"으로 보이는 것을 쓴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견해 입니다.
국내 번역서에는 아무런 주석없이 "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라고만 번역이 되어있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카페논단에 " 경선" 종인님의 글을 유심히 읽다가 생각이 나서 몇자 올립니다.
관심있는 종인님 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상장군파 31세 재춘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