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고모님은 몇년전 돌아기시면서 "내 귀한 종갓집 장손.내서공이"하시면서 운명하셨고.둘째 고모님은 명륜동에서 자식들의 오열속에 돌아가셨고 넷째 할머니의 소생인 막내 고모는 안산에 사시면서 지금도 날씨 좋으면 제부도 바닷가에 나가 굴과 조개를 따오신다. "놀면 뭣해? 이렇게 나가서 일하면 하루 오만원은 번다."고씨들의 특유한 독립적이고도 자립심 강한 모습으로 생활 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도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다.
종갓집 장손인 내가 1978년 감사원을 그만두자 " 고씨 문중에 울 쓰러젔다"고 실망하셨던 문중 어른들은 내가 마을 회관 건립시 또.어른들 해외여행 가실 때에 꾸준히 기부도 하고,뿐만 아니라 친인척들을 취직도 시켜주자 실망이 어느정도 희망으로 바뀌었다.2006년 어머니 묘를 고향 문중선산으로 이장히면서 밭 2천여평을 문중에 기증 하여 당시의 묘지면적을 배이상 넓혀주자 "결국 석홍이가 종갓집 장손답게 문중에 큰 일을 해주었다"고 면서 비석을 세워주겠다고 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정말 큰 족적을 이룬 이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고 섬에서 태어나 문중을 위한 작은 일이지만 그분들에게는 큰 것이었다. 내가 해야할 최소한의 도리였고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2-3년에 한번씩 고향에 가서 어머니 산소에 절을 하며 평소 좋아 하시던 술한잔과 담배를 올러드린다. 그리고 몇명 남지 않은 고향벗들과 옛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