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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과천사람들의너른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밍크고래
배운 녀자. ‘배우다’와 ‘여자’로 이루어진 이 단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내가 비로소 배우고 있다고 실감하게 된 것과 내 안의 여성성을 실감하게 된 것은 거의 동시였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배운다. 그리고 여자다. 그러므로 배우<는> 녀자다. 그런데 그 첫 배움이 시작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학창 시절, 나는 뭔가를 배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학교란 도리어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못 배우게 방해하는 조직이었다. “화가가 되고 싶어요.”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 말씀 드렸을 때, “그 고달픈 건 뭣 하러?”라고 말씀하신 그 분은 미술 선생님이셨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이란 무엇일까요?” 질문했을 때, “그런 건 시험에 안 나온다” 하신 그 분은 문학 선생님이셨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해 그토록 자조적인 어른들이 한데 모여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간혹 유난히 눈에 생기가 있고 열정적으로 전공과목뿐 아니라 세상을 가르쳐 주려고 하셨던 분들이 계시긴 했지만, 그분들은 ‘전교조’라는 이름과 함께 우수수 학교 밖으로 쓸려나갔다. 결국 사춘기의 내게 학교란 조직적인 채찍질로 진실을 은폐하고, 주입식 사료로 학생들을 살찌워 방출하는 일종의 동물농장이었다.
배워도 배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0교시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교실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창문 밖으로 꽃이 피기 시작하면 나는 숨이 가빴다. 봄이 오는 신비도, 새들이 노래하는 황홀함도, 사지선다형 시험지 속에 눌러 넣기에는 너무 큰 배움이었다. 어느 점심시간, 교정에 핀 꽃을 향해 중얼거렸다. “너 한 송이를 알기에도 끝끝내 힘들 것 같구나.”
막연히 알았다. 배움은 학교 밖, 발 벗고 찾아나서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걸.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채찍질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고, 선생님의 편애라든지 우등생의 특혜 같은 달콤함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다. 나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동물농장에서 방출되었다.
이후 대학에서 전공과목을 ‘배우고’ 직장에서 일을 ‘배웠’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의 배움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두꺼운 원서를 읽거나, 번듯한 기획안을 작성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허기였다. 도서관이나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면, 두터운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모호했고 구둣발소리가 멀었다. 나는 그들이 나의 혼란을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가니까. 내 가장 큰 위로는 그뿐이었으나, 그것이 동시에 가장 큰 기만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졸업과 취업. 인정은 밖에서 주어졌고 자학은 안에서 움텄다.
이제 와 뒤돌아보면, 내가 배우고자 갈망했던 것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 말하자면 생에 대한 ‘지혜’였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만난 대학의 교수들이나 직장상사들은 지혜의 전수자들이라기보다는 지식의 전수자들이었다. 전자는 지식을 직거래해서 월급을 받았고, 후자는 지식을 가공해 팔아서 월급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지식을 돈으로 환원시키는 요령’인 것 같았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도 몇 안 되게 뛰어난 속도로 자본주의를 흡수한 곳이니까. 엄청난 속도로 기술이 바뀌고 바뀐 기술에 따라 물건을 갈아치우며 그것이 발전의 근간이 되는 곳이니까. 그런 곳에서 지혜란 ‘도무지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구닥다리 유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을까? 지식은 머리로 배우지만, 지혜는 마음으로만 배울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 역시 지혜만이 줄 수 있는 지평이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이었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정코스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거기서 ‘행복’이나 ‘마음의 평화’ 같은 단어들은 1+1 행사를 해도 아무도 집어가지 않을 물건이었다. 당시 동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개는 어느 회사에서 얼마를 받는다더라”였다. 그들의 모습은 출발선에서 헐떡대는 경주마 같았다. 나는 동물농장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다만 더 큰 규모의 동물농장으로 자리를 바꿨을 뿐. 대체 이 동물농장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외부의 인정 버리니 내적인 자학이 멈춰
한 가지 가이드라인을 확실히 했다. 마음에 정직하기. 즉, 타협하지 말기. 그러자 외적인 인정을 버릴 수 있었다. 내적인 자학도 멈출 수 있었다. 정직한 마음 하나로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또 다른 경쟁과 돈으로 이어질 뿐인 이 구조의 결말에 대한 허무함과 피로가 뼈에 사무쳐, 일단 내게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배움을 통한 내면의 재충전이란 것 정도를 알고 있었다. 백수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자의식 강한 딸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반목하지 않은 딸이 있을까? 더구나 나의 아버지는 자수성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분이셨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섬유공장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일을 하며 야간대학을 나오셨고, 내가 고등학생일 때―그러니까 내가 학교에서 꽃 한 송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을 즈음― 만학도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이셨다. 당연히 최소한의 용돈만 벌며 책이나 읽겠다는 나의 백수선언을 한심한 반란쯤으로 받아들이셨다. 부녀간의 소모적인 충돌이 계속되는 가운데,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은 군입대를 했고, 나는 계룡산 자락의 군부대 옆에 가서 살았다. 이전에 나를 붙잡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절연이었다.
드디어, 첫 배움이 시작되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빼곡한 ‘자연’이 그 첫 스승이었다. 서울에서만 나고 자란 도시 촌놈에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봄에는 얼굴이 까매지도록 쑥을 캤다. 가을에는 단풍의 품 안에서 감격하여 울었다. 첫 스승은 과연 위대하여 그간의 피로와 허무를 구석구석 보듬어 씻어 주었다. 그리고 알게 해 주었다. 거대한 자연의 순환과 그 안의 또 다른 자연인 ‘나’에 대해. 복되게도, 나라는 자연은 여성이었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평화롭고 조화롭게 아이를 낳고 키우며 또 한 번 순환되고 사라질 질료였다. 여성임에 감사하며 아이를 갖기 원했다. 아이가 생겼다.
두 번째 배움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두 번째 스승이었다. 젖꼭지가 헐도록 젖을 먹이고, 팔이 빠지도록 아이를 안아 주었다. 나는 대학 나온 여자도 뭣도 아니었다. 개처럼, 고양이처럼, 새끼를 살피는 그저 어미였다. 빨고 또 빨아도 쌓이는 똥 기저귀. 그와 동시에 새순처럼 피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아이의 놀라운 성장. 나는 작지만 위대한 기적 앞에 납작 엎드려 어미의 자리가 요구하는 대로 손이 부르트도록 씻기고 먹이고 치우고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 끝끝내 알지 못할 것 같았던 꽃 한 송이의 비밀을 엿보는 듯 했다. 젖을 한 번 먹을 때마다 더 넓어지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이보다 더 완벽한 보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작고 연약한 아이와 손을 잡고서, 벌레나 풀잎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들을 새로운 감동으로 들여다보았다. 지렁이와 공벌레가 가르쳐 주었다. 너와 나는 유기체이며 더불어 살아야만 지속가능해진다. 그러는 동안 오랜 얼음이 녹듯, 교육과 사회가 강제로 주입시켰던 경쟁과 일류의 코드가 천천히 해체되었다. 가슴에 따뜻한 봄이 돌았다.
세 번째 배움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세 번째 생일을 맞을 즈음, 주변의 엄마들은 아이들 교육 이야기로 밤을 새도 모자란 듯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들의 아이와 내 아이가 동시에 넘어졌을 때, 나는 언제나 그녀들의 아이부터 일으켜 주곤 했다. 내 아이는 그때가 아니라도 일으켜 줄 기회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언제나 자신의 아이부터 일으켜 세웠다. 다른 아이가 넘어지는 건 아예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집에 놀러 오면 곧장 아이 책꽂이로 가 자신의 아이보다 수준 높은 책을 읽고 있는지부터 점검했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든 초조와 불안이었다. 아이라는 해맑은 존재를 통해 자신의 덜 여문 이기심과 승부욕을 여과 없이 투영시킬 수 있다는 것, 참 흉하고 그릇된 일이기도 했다. 한 달 월급에 맞먹는 ‘특별한 유치원’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면, 부동산이나 주식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 그래, 여긴 자본주의가 엄청 잘 먹혀든 대한민국이었지!
이제 첫 사회생활을 할 아이에게도, 만 삼 년 간 강도 높은 육아를 끝낸 나에게도 호흡조절이 필요했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경쟁보다 화합을 우선시하는 나라의 이야기를, 물질보다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 것들이 존재하는 땅의 이야기를. 그런 곳이 이 지구상 어딘가에 있기만 하다면. 많지 않은 적금을 깨 아이와 단둘이 터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이 내게 어떤 배움을 줄지, 당시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만 세 살 남자아이와 엄마의 아장아장 걷는 느린 여행. 우리는 느리기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머물기에 현지인들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여행 속에 다양한 사람들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심지어 개미와 조각배도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을 글로 옮겼고 그것이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다. 후다닥 다니며 정보를 전달하는 기존 여행기와 달랐기 때문인지 많은 독자들이 사랑해 주었다. 떠나고 돌아와 글을 쓰는 일이 계속되었다.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이 ‘사람 여행’이란 것을 알았다. 저마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인 사람들. 그들이 웃으며 흐느끼며 나지막이 속삭이며 나누어 준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지혜가 내 성긴 곳을 채워 주고 있었다.
첫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뺨이 발그레한 미얀마의 소녀 엄마들, 여덟 번째 아이에게 다시 너덜너덜해진 젖을 물리는 탄자니아의 늙은 엄마들, 에이즈에 걸리고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우간다의 가장, 하루 1달러를 벌면서도 “행복하다, 감사하다” 말하는 에티오피아의 커피 파는 여인, 구루병에 걸린 다리로 묵묵히 일하는 태국의 할머니, 가난을 피해 절로 공부하러 들어온 라오스의 소년 승려,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콜롬비아의 창녀……. 모두가 스승이었다.
경쟁보다 화합을, 물질보다 항구적인 것을 좇는 땅의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더 가지려는 자는 불행했고 나누려는 자는 쉽게 차올랐다. 나는 오랜 갈증을 해갈하는 사람처럼 귀 기울였고 엎드린 채 마음으로 받아 적었다. 매년 두세 달씩, 어린 것이 딸린 어미였으므로 어린 것을 데리고 제3세계의 험한 길을 걸었다. 그 사이 아이가 자랐다. 나도 자랐다. 다섯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네 번째 배움이 시작되었다.
여행이 전기를 맞았다. 라오스에서 우연히 만난 거지 아이들 덕분이었다. 그날 그 아이들과 아들이 축구를 하는 동안 나는 따로 할 일도 없어 곁에 머물렀다. 아이들의 머릿니를 잡아 주거나 상처에 약을 발라 주면서. 그런데 한 아이의 셔츠가 다 떨어져 젖꼭지가 보일 지경이란 것을 알아챘다. 그 아이가 항상 셔츠를 붙잡고 놀며,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몹시 수치스러워한다는 것도. 다시 살펴보니 다른 아이들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에 가 옷을 사 입혔다.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근처 사찰에 들어가더니 깨끗하게 씻고 ―선물처럼― 제일 먼저 내 앞에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멀끔하고 단정한, 막 수치스러움에서 벗어나 환해진 얼굴. 순간,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진 딱 그만큼 세상에 불이 켜진다는 것을 배웠다.
배움을 나눔으로
그때부터 ‘이기적인 가방’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나는 여행자로서 그 나라에 손님으로 가는데, 더구나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커다란 마음의 선물을 받아 돌아오는데, 가방 속에는 언제나 아이와 나를 위한 물건밖에 없었으니까. 라오스에서 돌아오자마자 블로그 이웃분들과 함께 옷과 학용품을 모아 라오스에 보냈다. 나머지는 주렁주렁 짊어지고서 미얀마의 극빈층 마을을 찾았다. 과감하게 ‘이기적인 가방’ 속 물건을 들어냈다. 제3세계의 사람들에게 조금도 시각적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을 법한 낡은 셔츠 두 개만 넣고 가서 열심히 빨아 입고 다녔다. 필요한 물건이 가방 속에 없으면 이 대신 잇몸으로 대신했다. 아직도 공동체적인 삶을 사는 현지인들이 적절한 순간에 내가 ‘잇몸’을 잘 쓸 수 있도록 조언해 주었다.
전기조차 없는 오지에 갈 때에도 가방의 절반은 선물 보따리였다. 헌옷 하나, 연필 한 자루가 오지에서 갖는 쓰임새를 생각하면 내 가방에 든 선물이 보물처럼 소중해서 하나라도 더 담았다. 여행자용 버스는 타지 않았다. 언제나 붐비는, 가장 서민적인 탈것에 올라타 엉덩이가 찌그러지도록 끼어 다녔다. 푸성귀와 꼬꼬닭을 잔뜩 싣고 집으로 돌아가는 현지인들은 아이까지 딸린 외국인 여자가 자신들 한가운데에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앉아 있는 모습에 성큼 다가와 미소를 건네주었다. 계산하고 재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나 필요한 일, 낮은 자리에서는 그렇듯 쉽게 마음이 열리고 친구가 되었다.
이제 여행코스에는 고아원과 기숙학교가 반드시 포함되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노래나 영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했다. 내가 가르치는 동안, 어린 아들은 동네 유아들과 어울려 놀았다. 아들은 가는 곳마다 산처럼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였다. 텔레비전이나 닌텐도가 없는 곳의 아이들은 언제나 놀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이므로.
아들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부터 레퍼토리는 좀 더 다양해졌다. 아들이 그동안 배운 바이올린 연주가 곁들여진 것이다. 길거리이든 고아원이든 농장이든, 아이는 생전 처음 바이올린을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작은 연주회를 열었다. 때로 사람들이 바이올린 케이스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그걸 모아 옆자리의 노숙 할아버지에게 빵을 사드리고 떠났다. 우리는 마치 보헤미안으로 구성된 2인조 NGO처럼 다녔다.
다섯 번째 배움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였다. 고만고만한 나눔 행위에 자족하던 내게 아프리카가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나뭇가지처럼 빼빼 말라비틀어진 아이들이 노란 석유통을 들고 물을 찾아 하염없이 먼지 속을 걷는 곳. 어미들이 취한 남편에게 맞아가면서 주렁주렁 아이를 키우고 밭일을 하는 곳. 에이즈에 걸린 여성이 감자 한 바구니에 다시 몸을 파는 곳. 그곳에서 서구열강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달콤한 부위에 이를 박아 넣고 뱀파이어처럼 피를 빨아대고 있었고, 국민을 돌보지 않는 부패한 권력층은 뱀파이어의 등에 올라탄 흡혈박쥐처럼 그 피를 나눠 먹고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자연의 황폐화였다. 선진국의 무모한 에너지 소비 때문에, 정작 에너지라고는 사용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애써 일군 밭이 사막이 되어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가난이 일상을 짓누르는 그곳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고아원’을 찾아다니는 일은 세상의 끝을 경험하는 일이었다. 고아원 원장은 고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고 성을 착취했다. 그런 고아원이 오 분 거리로 마을 전역에 깔려 있는 곳도 있었다. 내전이 있던 곳이 특히 그러했다.
그 지옥 한가운데서 열 살 고아 소녀, 바바라를 만났다. 미소를 지으며 자신보다 큰 무쇠솥을 닦고, 미소를 지으며 구박과 잔소리를 삼키고, 미소를 지으며 벼룩이 문 자리를 어루만지던, 착하디착하고 곱디곱던 바바라. 그애가 있던 고아원에는 아이들이 진작 만들어 두었으나 닭을 살 돈이 없어 내내 비어있던 닭장이 있었다. 내가 아이들 수만큼 닭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자, 원장이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아이들이 자기 닭의 달걀을 팔아 학용품을 사고 용돈을 마련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다음 날 오후, 일곱 마리의 닭은 서로 닭을 차지하려는 고아원 원장과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한바탕 거짓말과 분열과 증오를 부려 놓고 말았다. 소동의 한가운데에서, GNP 2만 불짜리 나라에서 온 나는 사건을 해결해 보겠다며 우왕좌왕했으나, 절대적인 결핍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수룩하고 순진하며 뼛속까지 무기력한가를 깨닫게 될 뿐이었다. 바바라는 그 모든 것에 초월한 듯 다시 미소를 지을 뿐이었고, 난 결국 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프리카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 사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시험이 되고,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시험에 듦으로써 거듭 날 기회를 제공하는 곳. 부자 나라의 보헤미안은 이제 지속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지구라는 하나의 집, 그 집의 가난한 방에 든 아이들의 더 큰 미래와 그것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다시 배움은 전염이 되고
돌아와 아프리카 여행기를 출간하고,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과 함께 <하쿠나마타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책 인세의 절반과 독자들의 성금으로 제3세계에 청소년 도서관을 마련하는 일이다. 희망의 부재와 노동에 지친 어린이들이 잠시 쉬면서 책을 통해 닫힌 세상의 문을 열고 더불어 꿈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행하고 있다. 각계각층에서 책을 협찬 받으며, 특히 독자들은 성금과 책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날한시에 모여 책을 포장하고 제3세계로 보내는 궂은일까지 도맡아 거들어 주신다.
우리는 첫 도서관을 ‘닭 사건’이 벌어진 우간다에 세웠다. 그곳 아이들이 도서관 개관을 축하하며 아프리칸 특유의 힘찬 비트로 춤추고 노래하는 동영상을 보내왔을 때, 프로젝트에 함께 한 이들은 모두 가슴이 뭉클하였다. 두 번째 도서관은 라오스에 마련했다. 내 여행에 큰 전기를 마련해 준 낡은 옷의 아이들을 만났던 바로 그곳에. 이제 에티오피아에 세 번째 도서관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나는 늘 도와주고 함께 해 주는 독자들이 고맙기만 한데, 그들은 또 내게 도와주고 함께 할 기회를 제공해 주어 고맙다 한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나눔’의 신비일 것이다.
이제 여섯 번째 배움을 기다린다.
이 배움은 ‘더 적극적으로’ 전염성이 있는 것이기를 염원한다. 바로 며칠 전 나를 찾아온 그 엄마처럼. 그녀는 장기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여행을 계획한 전후사정을 들어 보니 일이나 가정사에 있어 앞뒤가 막다른, 그야말로 변화가 절실한 시점인 듯 보였다. 말하자면, 이 여행은 그녀의 다가올 생을 위한 커다란 투자이자 그간의 노고에 대한 위무의 행위가 될 터였다. 홈스쿨링을 준비하는 아들도 같이 할 예정이어서 누구보다 치밀하게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위축되어 있었다. 이유는 “평생 한 것 없이 애만 키우는 아줌마로만 살아왔기에……”였다.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친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젊은 남자이거나, 딸린 애가 없거나, 경험이나 돈이 많거나 하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예로 들며 그녀는 불안해했다.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그러니까 올킬이지. 우리 아줌마들 말고 누가 내면의 불길을 다스리며 똥기저귀를 천 장도 넘게 빨아봤겠어요? 누가 그렇게 헌신적으로 자신을 열고 내던져 봤겠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체험과 공부를 하신 거예요. 이제 넓은 곳으로 가시거든, 지금껏 한 것처럼 자신을 열고 내던져 보세요. 깜짝 놀랄 거예요, 막상 닥치면 너무 잘하는 아줌마 파워에.” 그녀가 또렷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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