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사동(譚嗣同)인학(仁學)
청말, 담사동이 1896년경에 저술한 책, 사상
1899년 1월에 간행된 〈청의보(淸議報)〉 제2책(第二冊) 이하에 연재된 인(仁)과 학(學)에 대해 논설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인이란 묵자(墨子)의 겸애(兼愛), 불교의 자비(慈悲), 기독교의 사랑과 동일한 것이며, 그 본체는 바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에테르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仁)은 에테르의 용(用)인 반면에, 에테르는 인의 체(體)라 한다.
이 ‘에테르=인’이야말로 법계(法界)·자연계·인간계의 근본 원리인 것이다.
더욱이 인의 제일의 (第一義)는 ‘통(通)’, ―
그 이상(理想)으로서 남녀통(男女通, 남녀의 평등)·상하통(上下通, 임금과 신하, 아비와아들 등의 상하관계의 타파)·중외통(中外通, 중국과 외국과의 자유통상 즉 세계주의)·인아통(人我通, 피아의 구별의 부정)의 4자(四者)가 거론된다
그 목표는 평등이다. 따라서 통을 방해하는 ‘망라(網羅)’는 ‘충결(衝決)’되어야만 한다.
그는 망라의 구체적인 예를 명교(名敎) 즉 전통적인 윤리도덕이라 지적한다. 때문에 여기서부터 명교의 배제·부정이라고 하는 혁신 의도가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인학》의 주장은 공양학을 중핵으로 하는 유교와 화엄종을 주체로 하는 불교, 거기에다 기독교와 서양 근대과학의 지식을 상호 결합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불교를 최우위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그 주장은 강한 반만의식(反滿意識)을 깔고 있어, 이러한 점에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의 개혁론보다도 한층 급진적인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은 무력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어야만 했다. 심각한 민족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강유위,담사동 , 양계초 등을 대표로 하는 유신파(維新派)들은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과 같은 변법유신운동(变法維新运动)을 일으켜 국가를 부흥시키고 중국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유신파들은 전통적인 군주전제(君主專制) 대신에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실시할 것과, 유가경전(儒家經典)의 반복을 내용으로 하는 팔고문(八股文) 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서방의 정치사회학설과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 학교 공장 철도 광산 상업을 부흥시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것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여러 차례의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주장을 조정에 진술하였다.
유신파의 주장은 청 정부내에서 광서황제를 필두로 하는 일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898년 6월 11일 광서황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 조서를 반포하여 변법의 결심을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9월 21일 변법이 실패로 끝나기까지 약 100일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역사상에서는 이를 '백일유신(百日維新)'이라 일컫는다.
또 중국의 전통적인 간지(干支) 기년(紀年)에 의하면 그 해가 무술년(戊戌年)이기 때문에 '무술변법(戊戌变法)'이라고도 한다. '백일유신' 기간에 광서황제는 100여 조항의 변법 조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무술변법' 운동은 청 정부내에서 자희태후를 비롯한 봉건수구파들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았다. 당시 청 정부의 권력은 실제로 자희태후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자희태후는 9월 21일 명령을 내려 광서황제를 구금하였다. 보수파의 잔혹한 진압하에서 무술변법운동은 불과 100일만에 실패로 끝났으며, 유신파의 주요 인물들은 이로 인하여 대부분 피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