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64〉아집이 만든 어리석음에 상대 참 본성 못봐
佛心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
밖에서 불러온 고뇌 많지 않아
내부에서 만든 번뇌가 갉아먹어
몇 주전 원고에서 소동파에 대해 언급하였다. 송나라 때, 소동파(1037~1101)는 당송 8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1091)의 법맥을 받은 사람이다. 소동파에 대해 중국 선사들에게 여담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동파거사는 운문종 오조사계(五祖師戒, 운문문언의 손자뻘 제자)의 후신(後身)이라고 한다.
소동파가 어느 날 도반처럼 지내는 불인요원(佛印了元, 1020~1086) 선사를 찾아갔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좌선을 하였는데, 동파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라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제가 좌선하는 자세가 어떻습니까?”
“부처님 같습니다.”
소동파는 선사의 말에 의기양양해졌다. 이번에는 선사가 동파에게 물었다.
“그럼 자네가 보기에 내 자세는 어떠한가?”
“스님께서 앉아 있는 자세는 마치 한 무더기 소의 똥 덩어리 같습니다.”
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동파거사에게 합장하였다.
소동파는 집에 돌아와 여동생에게 낮에 선사와 좌선하면서 대화했던 내용을 들려주며 어깨까지 으쓱거렸다. 여동생이 가만히 다 듣고 나서 태연스럽게 말했다.
“오늘 오라버니는 선사에게 비참히 패하신 겁니다. 선사는 마음속에 늘 부처 마음만 품고 있으니 오빠 같은 중생을 보더라도 부처님처럼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빠는 늘 마음속에 탐욕스런 마음만 품고 있으니, 6근이 청정한 선사를 보더라도 똥 덩어리로 본 것이네요.”
이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나라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를 주인공으로 널리 회자되어 있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글쎄? 누가 원조인지는 시대적으로 계산해보면 금방 드러나지만 굳이 진위여부를 가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느 나라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요, 내용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의 이야기처럼 상대방을 보는 데는 자신의 관점과 자신이 키워온 업(業, 습기, 한편 수행력도 포함)으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자신의 견해대로 상대를 평가하고, 자신의 잣대대로 상대방을 저울질한다. 끝모를 탐욕심을 갖고 있으니 상대방이 탐욕자로 보이는 것이요, 청정한 수행자에게는 상대방이 부처님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염불에 ‘불심(佛心)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라고 하였다. 늘 부처님 마음만 품고 있으면, 모든 세상은 정토 세계요, 사람들이 부처로 보이지만,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세상도 지옥이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해치는 적으로 여긴다. 그러니 현재 주위에 미운 사람이나 적이 많으면 자신에게 미운 성품이 많은 것이요,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곧 상대방을 평가하는 자신의 관점과 사고가 문제라는 것이다. 밖에서 불러오는 고뇌는 결코 많지 않다.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번뇌가 자신의 인생을 갉아먹는다. 특히 아집과 아상이 만들어낸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상대가 참 본성을 지닌 부처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실은 부처는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이 없는 것이다. 즉 부처에게는 옳고 그름, 부처와 중생, 깨끗하고 더러움, 밉고 곱다라고 하는 이분법적 차별심이 없다. 바로 이런 마음이 불심인 것이다.
청정한 자성자리에서 보면, 옳고 그름이 어디 있을 것이며, 더럽고 깨끗함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근본 자리를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그대를 힘겹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두고, 어찌 ‘중생이니, 부처이니?’라고 시비분별 할 것인가? 그대의 부족한 수행력을 탓해야 하리라.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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