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4. 외국인 역경승에 의한 격의불교의 극복
新道家 한계 넘어 ‘불교적 사유’를 펼치다
구자국 출신 구마라집 중국에 초청받아’혼신의 역경’
대승경전 중심 수백권 번역 ‘불교의 중국화’에 공헌
<사진설명>쿠차 키질석굴 앞에 있는 구마라집스님 동상. 쿠차석굴연구소가 1994년 9월1일 조성한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쯤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사상계의 전면에 등장하여 본격적인 토착화와 발전의 단계로 접어든 것은 동진시대 이후였다. 이 시기의 불교를 격의불교라고 한다.
당시 중국불교인들은 단순히 불교적 개념들을 중국식으로 꿰어 맞추어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격의’시대를 벗어나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신도가의 무(無)에 이해 방식을 반야계 경전에 나타난 공 개념에 적용하여 정립된 6가7종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격의불교의 극복은 도가식 개념 차용을 벗어나 불교식 용어를 정립하고,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6가7종의 이론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요청됐다. 이는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 344~413)과 그의 제자 승조(僧肇, 384~414 또는 374~414)에 이르러 비로소 실현되었다.
중국불교사에서 격의불교의 6가7종에 대한 비판과 극복은 승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구마라집에게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었던 그는 〈부진공론(不眞空論)〉을 지어 격의불교의 대표적인 이론들인 본무의, 심무의, 즉색의를 비판하고, 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함으로써 중국불교의 발전 단계를 한 차원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진시대의 고승 도안이 격의불교를 처음 비판하였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의 본무의는 신도가적인 무(無) 중심의 형이상학과 본체론적 사유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가 비판한 것은 격의불교 자체가 아니라 격의불교의 다른 이론이나 주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승조가 이처럼 이전시대의 불교인들과 달리 신도가적인 사유의 한계를 뛰어넘어 제대로 된 불교적 사유를 펼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스승 구마라집의 역경작업이 있었다.
중국불교는 그 시작부터 외국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에 걸친 꾸준한 번역작업으로 방대한 경전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자국어로 사유하고 저술하고 가르치는 불교의 중국화 작업이 광범위하고 안정되고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처럼 역경승들의 공헌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격의불교의 극복과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어느 역경승들보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사람은 구마라집이다. 구마라집과 현장을 양대 역경승으로 꼽기도 하고, 여기에 진제와 불공 또는 의정을 더하여 4대 역경승으로 꼽기도 하지만, 구마라집은 이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의 구자국 출신으로서 출가한 처음에는 아비달마불교를 공부하였으나 뒤에는 대승불교로 전환하여 공사상에 정통하였다.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떨쳐 고승 도안이 전진 왕 부견에게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을 중국으로 초청하자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견은 장군 여광을 구자국으로 보내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데려오게 하였으나, 오는 도중 전진이 망하고 후진이 들어서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15년 정도를 양주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는 그의 역경작업 기간이 그 만큼 줄어들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경에 반드시 필요한 중국어와 한문을 충분히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401년 장안에 온 구마라집은 41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역경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헌신하였다.
이전의 역경승들과 비교해볼 때 구마라집은 후진의 왕 요흥의 절대적이고 전폭적인 후원과 승조.승계.도생.도융을 비롯한 뛰어난 제자들의 참여와 도움이라는 매우 좋은 조건 속에서 역경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구마라집의 재능과 결합되어 양적 질적으로 훌륭한 역경 성과물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승조, 스승 구마라집 작업 토대로 ‘空’ 새롭게 이해
기존 격의불교 6가7종 논리적 극복…새 지평 열어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의 수량에 대해서는 〈출삼장기집〉에서는 35부 294권, 〈개원석교록〉에서는 74부 384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주요 경전으로는 〈대품반야경〉 〈묘법연화경〉 〈아미타경〉 〈사익경〉 〈불장경〉 〈유마경〉 〈금강경〉 등의 초기 대승경전들과 〈좌선삼매경〉 〈선비요법경〉 〈선법요해〉 등의 선수행에 관한 경전들, 〈십송율〉 〈십송비구계본〉 등의 율전, 〈중론〉 〈백론〉 〈십이문론〉 〈대지도론〉 〈성실론〉 등의 논서들을 들 수 있다.
이들 목록을 통해 볼 때 구마라집이 집중적으로 번역하였던 분야는 대승불교 가운데에서도 반야경 계통의 경전들과 중관학파의 논서들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논서의 번역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불교내적 교리체계와 불교사상사적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구마라집 자신이 단순한 역경승에 그치지 않고 중관학에 정통한 논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승조가 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 조건으로 작용하여, 격의불교를 비판.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설명> 중국 서안 초당사. 401년 장안에 도착한 구마라집스님은 서명각과 소요원(현 초당사에 머물며 1000여 명의 스님들과 함께 역경에 몰두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렇다면 구마라집의 역경작업이 지니는 의의는 어떤 것인가.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번역한 경전의 양이나 번역의 질과 기술과 정확성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구마라집의 역경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좋은 예는 〈십주경〉의 번역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이 경전은 구마라집이 직접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그 만큼 이 경전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마라집은 원본을 받은 뒤에도 1개월 동안이나 미루어두었다가 불타야사를 초청하여 이 경전의 가르침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번역에 들어갔다.
이미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경전을 다시 번역할 경우에는 옛 번역본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한 다음 번역에 들어갔다. 번역 용어를 선택하거나 잘못된 곳을 고치거나 할 경우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충분히 상의하여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다시 번역된 경전이 13종이나 되니, 이 두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구마라집의 번역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승조는 구마라집의 번역의 특성과 우수성에 대하여 ‘정본을 교정하고 고찰하여 그 뜻이 다시 통하게 만들었고 논지를 힘써 보존하였으며 질박하나 거칠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깊은 뜻이 있으니 종지가 분명해져서 잘못된 점이 없다(백론서 가운데)’고 평가하였다. 즉 화려함 대신 질박함을 취하고, 번쇄함 대신 간결함을 취하였으면서도 경전의 뜻은 왜곡하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구마라집은 단지 옛 번역본의 오류만을 교정한 것이 아니라, 원본의 오류에 대한 교정도 과감하게 진행하였는데, ‘서역의 음이 틀린 곳은 인도어로 고쳐야 했고, 중국어가 틀린 곳은 글자의 뜻을 교정하였으며,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기록하고, 다른 이름은 올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의 음이 반 이상이다(대품경서 가운데)’라고 한 승예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에는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여 정확한 번역이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대품경) 번역은 그해 12월15일에 끝났고, 교정하고 검토하는 일은 다음해 4월23일까지 걸렸다. 문장이 거칠게 교정되었으므로 〈석론〉 〈대지도론〉으로 검증하였는데, 상세하지 않은 곳이 많아 〈논〉에 나오는 근거를 좇아 올바르게 교정하였다. 〈석론〉과의 대조를 끝마친 뒤에야 문장이 완성되었다(승예 ‘대품경서’)’는 말을 통해서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구마라집의 역경작업은 세속권력의 전폭적인 후원과 뛰어난 인재들이 참여 속에 이처럼 체계적이고 신중하게 정치하게 진행되어 중국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주로 도가계열의 개념들을 빌려쓰던 불교 개념들이 분명한 불교적 사유 맥락 속에서 새롭게 정립되었으며, 논서들을 통하여 경전에서 말하는 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를 통하여 유교 뿐만 아니라 도가와도 전혀 다른 불교만의 세계관과 인간관 수행론 등이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진제와 현장이 번역한 유식계 경론이나, 불공이 번역한 밀교계 경론들이 제 가치를 맘껏 발휘할 수 있는 토대가 구마라집의 번역작업을 통해 마련되었다.
이처럼 구마라집의 역경작업은 단순히 경전의 번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다시는 그 이전과 같아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국불교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일대 쾌거였다. 그리고 승조의 〈부진공론〉은 격의불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불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황순일/ 동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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