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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는 1932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현재 볼로냐 대학의 기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에코는 아퀴나스 철학과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부터 기호학 이론과 현대의 대중문화 그리고 가상현실에 대한 담론에 이르기까지 기호, 문학, 예술에 걸친 다양한 이론과 실천의 경계들을 넘나들며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바우돌리노>, <전날의 섬>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들과 <대중의 슈퍼맨>, <해석의 한계>, <소설 속의 독자>, <기호와 현대예술>, <해석이란 무엇인가>, <중세의 미와 예술> 등 많은 이론서들이 있다. ) -----------------------------------------------------------------------------------------------------------------
친애하는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우리가 3개월마다 벌이는 토론의 때가 돌아왔습니다. 이 서신 대화의 목적은 비신앙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함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문제들의 논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 지난번에도 밝혔드렸듯이, 당신은 교회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지성적인 신앙인으로서 발언하시는 것이고요. 그러나 나는 우리의 목적이 꼭 공통점을 찾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형 제도나 종족 학살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묻고 몇몇 가치들에 대해서 서로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일까요? 대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어떠한 합의도 존재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비신앙인은 가톨릭 신자와 달리 성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그것이 몰이해의 근원이 되기보다는 서로의 신앙에 대한 존중으로 받아 들여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어떤 물질의 액상과 기상의 경계가 소실되어 하나의 상으로 공존하게 되는 임계점 같은 것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의 임계점은 바로 서로의 의견이 엇갈리는 곳, 그 불일치가 더 깊은 대립과 몰이해를 낳고 그것이 다시 정치 사회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임신 중절에 대한 법률에 맞서 생명의 가치에 호소하는 것도 그런 임계점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중요한 문제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일체의 애매함을 피하기 위해 솔직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자기가 어떤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지, 그리고 상대방에게서 듣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 관점을 먼저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임신을 했다고 주장하는 어떤 여자에게 인공 유산을 종용한 적도 없고 인공 유산을 하겠다는 여자에게 동의를 해준 적도 없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저에게 일어났다면, 저는 무슨 수를 써서든 여자를 설득해서 아이를 낳게 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녀와 제가 함께 치러야 할 대가가 아무리 혹독하다 해도 괘의치 않고 말입니다. 그럴 만큼 저는 한 아기의 출생을 경이로운 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자연의 기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든 저의 윤리적인 입장 - 감성적인 성향이든 지적인 신념이든 - 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자기의 육체, 자기의 감정, 자기의 미래와 고나련하여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여성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런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혹한 시간들에 대해서는 당신이나 저나 아는 바가 전혀 없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여인의 권리에 맞서 생명권을 들고 나옵니다. 생명권에 비추어 살인이나 자살 - 저는 정당방위의 한계에 관한 토론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 을 허용할 수 없듯이, 이미 시작된 생명을 중절시킬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당신의 답변에 대한 저의 바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당신이나 가톨릭 교회 최고 지도자의 공식적인 의견을 밝히라고 요구할 계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제가 제시하는 몇 가지 견해에 대해서 비평해 주시고, 교계의 논의가 현재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생명의 깃발을 흔들어 대면, 그 앞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특히 가장 <신앙주의적인> 무신론자들을 포함한 비신앙인들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떤 초자연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대신에, 생명이라는 관념, 생명에 대한 감정에서 유일한 윤리의 근원을 찾습니다. 하지만, 생명이라는 개념만큼 모호하고 뉘앙스가 많은 개념도 없습니다. 아마 오늘날의 논리학자들이 즐겨 쓰는 <퍼지 fuzzy ; 사물을 흑이나 백, 또는 참과 거짓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존재를 수학적으로 파악하려는 집합 이론>라는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개념이 바로 이 생명일 것입니다. 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아주 넓습니다. 일찍이 고대인들이 주장한 것처럼, 사람들은 지적인 영혼이 발현되는 곳에서는 물론이고 감각적인 영혼이나 식물적인 영혼이 나타나는 곳에서도 생명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급진적인 환경 보호론자로 규정하면서, 산이며 화산을 포함하여 어머니이신 대지에 생명이 위태로워진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류가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가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의 생명 존중하기를 포기하는 채식주의자들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삼키고 파괴하지 않도록 자기들의 입을 함부로 벌리지 않는 동방의 금욕주의자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열린 한 학술 대회에서 아프리카의 인류학자 해리스 메멜포트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자연에 대한 서방 세계의 일반적인 태도는 지금가지 코스모파기아(그리스어 코스모스;우주, 파게인;먹다) - 그럴듯한 신조어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우주를 먹어 치우는 성향이 있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가요 - 였다. 이제 서방 세계는 몇몇 다른 문명이 이미 했던 것처럼 어떤 형태로든 <<협상>>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과 자연의 생존을 위해서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해서는 안될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협상을 한다는 것은 아직 정해진 규칙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규칙을 세우기 위해서 협상을 하는 것이니까요. 어쨌거나, 우리는 굳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생명 존중이라는 개념을 놓고 끊임없이 - 대체로 지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방식으로 - 협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 중의 대다수는 돼지 멱따는 걸 생각할 대는 몸서리를 치지만, 햄을 먹을 때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저는 풀밭의 지네를 밟아 죽일 생각이 없지만, 모기들에 대해서는 난폭하게 굽니다. 저는 꿀벌과 말벌을 구별할 줄 압니다. 둘 다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저는 꿀벌의 좋은 점은 인정하고 말벌의 좋은 점은 인정하지 않는 편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모호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생명이라는 개념은 내포와 외연이 분명하다고 단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그 문제를 놓고 오랜 세월 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적절하게 훈련을 시켰거나 유전자에 조작을 가한 특별한 원숭이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만약 그 원숭이가 비록 사람처럼 말을 하는 건 아닐지라도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조리 있는 명제들을 만들어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고, 감정과 기억을 드러내며 수학 문제를 풀고 동일률이나 배중률 같은 논리 법칙에 반응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면, 우리는 그 원숭이를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할까요? 그 원숭이에게도 시민권이 있음을 인정하게 될까요? 또, 그 원숭이가 생각하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를 사람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사실, 어떤 존재든 사랑을 할 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사람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미가 새끼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물들을 죽이니까요?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비롯합니까? 사람은 언어와 사고를 습득하고 교양을 통해 인류에 입문하여야만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언어나 사고와 같은 외부적인 우우성으로부터 이성, 곧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종차 중의 하나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주장이 도를 넘으면, 갓 태어난 존재, 그래서 말을 하지 못하는 자, 즉 <인판스infans ; 말을 하지 못하는 자를 뜻하는 라틴어-영어 인펀트, 프랑스어 앙팡이 여기서 나옴>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고대 스파르타인들의 관습으로 되돌아간다면 모를까, 아무리 신앙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오늘날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아직 탯줄에 연결되어 있는 신생아를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요? 만일 인간의 생명이 이미 정액 속애 - 나아가 유전자의 프로그램 속에 - 있는 거라면, 유정이나 몽정도 살인이나 다름없는 범죄가 되는 건가요? 어떤 사춘기 소년이 수음의 유혹에 굴복한 뒤 그 사실을 고백하더라도, 너그러운 신부라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성서 역시 그것을 살인과 맞먹는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카인의 죄는 하나님의 명백한 저주를 통해 처단됩니다. 그에 반해서, 오난(창세기에 나오는 유다의 둘째 아들로 형 에르가 죽자 수혼제의 율법에 따라 형수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잠자리에 들었을 때 정액을 바닥에 흘려 후손을 남기지 않은 죄로 야훼의 눈 밖에 나서 죽었다)의 경우는 <정액을 바닥에 흘린 죄>로 저주를 받은 거라기보다 후사를 남기는 의무를 저버린 탓에 자연사의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건 저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실 얘기겠지만, 카르타고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이 원죄와 함께 정액을 통해서 전해진다는 영혼 전이설을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정신적인> 영혼 전이설의 형태로 그것을 완화시키려고 했지만, 점차로 창조설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영혼은 태아가 잉태되는 순간에 하느님이 직접 태아 속에 불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렇게 되는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정교한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태아가 순전한 식물성의 단계와 감각의 단계를 거쳐서 현실태의 지적인 영혼을 받게 되는 과정에 관한 아주 긴 논문이 나오게 되었지요 - 저는 조금 전에 <신학대전>과 <對이교도대전>에서 그런 문제와 관련된 명문들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인간화>가 임신의 어느 단계에서 일어나는가에 관한 장황한 토론을 여기에서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현재의 신학이 그 문제를 여전히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 생명의 문턱에 관한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가설이자 배자(胚子), 아직 모체에 연결되어 있던 어둠 속의 생명체, 땅속에서 꽃이 되려고 애쓰는 식물의 씨앗처럼 빛을 향한 놀라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존재가 어느 순간 <이성을 가진 동물>로 인정받게 되는 그 문턱을 가려낸다는것은 참으로 미묘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단 가톨릭 신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한낱 가설에 지나지 않는 그 최초의 존재에서 한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인정하고자 하는 비신앙인에게도 그 문제는 제기되니까요. 저는 신학자도 아니고 생물학자도 아니라서, 그 문턱과 관련하여 감히 어떤 단정을 내릴 생각도 없고 그런 문턱이 정말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수학 이론 중에 어떤 불연속적인 체계나 과정을 경험적으로 관찰하여 그것을 토대로 연속적인 동태 모델을 세우는 <파국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어느 파국 이론도 돌연한 폭발이나 붕괴가 일어나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어떤 분기점이 존재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과정의 결과로 갓난아기의 출생이라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그 과정을 중단시킬 권리가 있는 시기와 우리의 개입이 더 이상 적법하지 않게 되는 시기의 문제는 분명히 밝혀질 수도 없고 토론될 수도 없다는 것 정도일 겁니다. 따라서, 그 문턱과 관련해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결정이 내려지는 게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고, 그 위험은 하느님 앞에서든 자기 양심이나 인류의 심판 앞에서든 오르지 어머니만이 떠맡게 될 테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당신의 판결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호 인정의 토대를 이루는 그 문제를 놓고 신학계는 수세기에 걸쳐 치열한 논의를 전개해 왔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논의에 관해서 비평과 설명을 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맞서 싸우지 않고 현대 실험 과학의 확실성 - 그리고 비확실성! - 과 겨루고 있는 오늘날, 그 주제에 관한 신학계의 토론은 어디까지 와 있는지요? 잘 아시다시피, 그 문제들은 단지 인공 유산에 관한 반성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유전자 공학과 같은 일련의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생명의 발생에 관한 이론이 신앙인이건 아니건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당신은 잘 아실 겁니다. 오늘날의 신학자는 전통적인 창조설에 맞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요?
생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생명이 바야흐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리거니와, 그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은 저에게도 버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도덕적이고 지적이고 감성적인 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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