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격시조의 발전과 저변 확대에 각고면려하는 함세린 시조시인은 “문학이란 상상적, 심미적 언어활동을 통해 인간의 체험, 생각, 느낌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시조는 우리 민족의 숨결이 담겨 있는 문학 장르이며 형식과 품격이 명확히 어울려야 된다. 우리 민족 고유 박자이자 조상들의 숨결인 3⦁4⦁5를 기준으로 조상의 얼도 지키면서 전통 음수율인 초장 3⦁4⦁3⦁4, 중장 3⦁4⦁3⦁4, 종장 3⦁5⦁4⦁3만을 기준으로 단 한 자도 가감 없이 지켜내는, 정격(定格)이 아닌 정격(正格) 시조로만 작품이 구성된, 진정 반듯한” 시조를 정격시조라고 정의했다. 합치면 총 43자다. 중국에는 한시, 일본에는 와카(31자)와 하이쿠(17자)가 있다. 단 한 자도 가감할 수 없다. 그 형식의 집에서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 정격시조도 그렇다.
제5회 청명시조문학상 응모작은 총 291편이다. 그중에서 응모자격으로 공지된 규정을 벗어난 작품 45편과 출품 수(1인당 3편) 초과 1편은 제외하고 총 245편을 심사대상으로 했다. 예심심사위원들의 1차 블라인드 심사를 거쳐 비회원 41편(문학상), 회원 13편(작가상)을 대상으로 2차 블라인드 심사를 통해 중복 추천 1편을 제외하고 본선에 넘어온 작품들은 객원심사위원 추천 7편을 포함해서 모두 13편이다.
시조인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현대시조의 특성을 되새김하면서 문을 열고자 한다. 주된 표현기법은 비유와 상징이며 함축적 시어와 이미지를 중시한다. 또한 가장 정통성이 있는 단시조와 종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기본적 특성을 잘 살린 ‘풀벌레(김옥중)’는 비천상이 되어 독자들 가슴 뜰에 국화 향기 가득한 범종 하나를 올려놓는다.
늦가을 국화 향기 한두 필 끊어다가
비천상 공후 소리 악보로 그려 놓고
상원사 처처마다에 불심들을 깨운다
('풀벌레' 전문)
늦가을 정취와 풀벌레 소리를 상원사 동종 비천상의 공후 소리로 형상화하여 만물의 오감을 깨우는 듯한 깊고 잔잔한 울림이 함께 어우러져 향기가 된 작품이다. 마흔석 자 속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다는 단시조의 진수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금상 수상작인 '은갈치(김완수)'는 소재와 종장의 참신성이 갓 잡은 은갈치처럼 파닥인다.
“맛있고 살이 꽉 찬 갈치가 왔습니다!”
낮잠을 들깨우는 확성기 소리 있자
불현듯 내 머리맡에 성산포가 놓인다
심해를 칼춤 추듯 살아온 은갈치들
나 또한 세상에서 비린 꿈 꾼 적 있어
성산포 은갈치처럼 몸을 번뜩 빛낸다
지금껏 비늘 없이 맞받은 하루하루
물살에 밀릴수록 꼿꼿이 서 왔으니
꿈꾸는 내 몸뚱이에 은빛 날개 돋겠다
('은갈치' 전문)
초장을 우리 생활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확성기 소리에서 찾았다. 평범한 소재를 개성 있는 시상의 포충망으로 잡아올려 꿈과 희망으로 잘 엮어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다만 2연에서 같은 시어(은갈치)가 중복된 것이 아쉽지만, '불현듯 내 머리맡에 성산포가 놓인다'처럼 반짝이는 감성이 생생하여 예심위원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었던 작품이다.
해 묵은 그리움은 눈물 빛 꽃이 되어
추억을 품어 안고 하얗게 피어나고
꽃물 든 오월 종소리 향기 담아 울린다
('아카시아' 전문)
은상 수상작인 ‘아카시아(이남숙)’는 가만히 소리 내어 읽으면 마치 맑고 고운 찻상에 정갈한 시 한 수가 올려져 있는 듯한 은은한 향기에 미소가 절로 피는 작품이다. 단시조의 매력을 아카시아꽃으로 잘 승화시킨 작품이다. ‘아카시아’라는 제목의 평이성과 띄어쓰기가 어색한 시어(해 묵은)가 있지만, 종장에서 시각적 이미지(꽃물)를 청각적 이미지(종소리)와 후각적 이미지(향기)로 맛깔나게 비벼대는 공감각적 이미지 요리가 일품이다.
다음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상 수상작품이다.
여름이 손 흔들며 떠나간 자리에는
말없이 고개 떨군 갈잎이 가득하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 잊은 듯이 가려고
('나뭇잎' 전문)
‘정혜작가상’ 수상작인 ‘나뭇잎(장영화)’은 잎이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하나둘 떨어지는 갈잎을 보면서 삶의 무상과 이별을 순리로 받아들이며 그 빈자리를 첫눈처럼 하얗게 채우고 싶다는 작가 자신의 시심이 차분하게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초장과 중장은 평이한 표현이지만 종장에서 ‘첫눈이 내리는 날에 잊은 듯이’ 떠나겠다는 시상의 반전이 심사위원들의 정서적 촉수를 슬프게 훑고 지나갔다.
쉬어라 숨을 쉬면 어느새 살만하니
망초(亡草)라 누명 써도 기어코 꽃 피우며
통꽃에 혀꽃 조화로 뚝심 있게 살아라
무덤가 설워 마라 하늘이 창연한데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서 무엇하나
해넘이 한해살이도 이슥토록 예쁜데
('개망초' 전문)
‘연담작가상’인 ‘개망초(사이채)’는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으로
예쁜 꽃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 소박한 개망초꽃의 진가를 발견하여 개성 넘치는 시상 전개로 토닥이며 용기와 위안을 주는 작품이다. 감상할수록 가슴 건너편에 하얀 꽃이 핀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 돌부처에
떼쟁이 햇살과 비 하늘과 바람과 새
온 산을 먹여 살리는 산벚나무 화신들
애증이 눌러앉은 과거와 할미 보살
여우비 벌떼 구름 수시로 엿듣는가
절 밖을 흘러가는 중 익지 않은 불씨들
애고를 끌어안고 세간을 맑히느라
산중의 염불소리 풍경이 어지럽다
산벚꽃 흐느끼면서 절간 한 채 들인다.
(‘산벚꽃 지는 것을 묻지 마라’ 전문)
늘봄작가상인 ‘산벚꽃 지는 것을 묻지 마라(여량정혜)’는 제목부터 참신하다. 작품을 읽기 전에 이미 심사위원들 마음에 산벚꽃이 핀다. 마치 해지기 전에 해로 들어가는 노을과 같다.
시조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사람의 신체 부위로는 얼굴에 해당한다. 얼굴은 그 사람을 대표한다.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작품의 제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면 이름에 해당한다.
불도에 정진하는 수행자의 마음 그릇에 세속에서 놓지 못한 자신의 에고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얻으려는 작가의 치열함이 작품 속에 잘 녹아 있다. 번뇌가 일어나는 마음을 3연 종장 ‘절간 한 채 들인다.’로 형상화해서 작가의 내공이 쌓아 올린 탄탄한 시조탑 한 채를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읽는 이들에게 ‘산벚꽃 흐느끼면서 절간 한 채’ 들이는 독경과 목탁 소리가 의림지 푸른 물결에 실려 속세의 들판을 넉넉히 적시는, 시조의 공양을 베푼다.
심사하기 위해 수많은 시조를 읽는다는 것은 선자들에겐 큰 행운이자 축복이다. 좋은 작품들을 만나면 울림이 범종보다 깊게 파고든다. 져도 좋다. 부럽다는 심정을 안고 다시 어떻게 시조를 써야 하는가 하는, 깊은 성찰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운 사람과 추억만이 아니다. 시조 쓸 때 알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 바느질할 때 바늘과 실이 필요하듯이 시조 짤 때 필요한 도구들을 잊지 않아야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 두드림이 될 것이다.
하시 최길하 시인이 카페 방에 올린 기본 원칙은, 글자수만 맞춘다고 시조가 되는 것이 아님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1. 철학이 들어가야 한다
1. 원심력이 아닌 구심력으로 표현해라
1. 주제를 확실하게 해라
1. 주제를 표현할 땐 간접화법으로 하고 (비유 은유) 되도록 3가지 이내로 해서 초점이 흐려지게 하지 마라
1. 활줄을 당기듯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라
1. 제목은 얼굴이다. 카피처럼 주제를 암시하라
1. 기름끼를 빼고 건조하게 표현해라 (미사여구나 감정은 드러내지 마라)
끝으로, 이번 제5회 청명시조문학상에 응모한 모든 분들의 관심과 성원에 고개 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아울러 수상하신 분들께도 심사위원들을 대신해서 따뜻한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시조가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건강하시길 소망합니다.
(청풍명월정격시조문학회 회장 김종식, 고문 안태영)
첫댓글 수상의 영광을 축하드립니다. 수상하신 작품들 모두 감동입니다.
심사평을 읽으며
또 하나의 훌륭한
시조집을 만난듯 합니다
수상하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심사위원단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