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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 지안대종사 법문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을 ‘해가 뜬 것과 같다.’고 비유해 말합니다. 해가 뜨면 낮이 되지요. 온 세상이 훤히 밝아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출현하셔서 중생세계의 어둠을 없애고 광명의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부처님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뜻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정토신앙에서 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데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에서 ‘南無(나무)’는 ‘귀의한다’는 말이고 ‘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無量壽·無量光(무량수·무량광)’이라는 뜻으로 ‘한량 없는 목숨·한량 없는 빛’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영원한 생명· 영원한 빛’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빛을 상징하는 교조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생은 부처님과 상대적인 말로 쓰이는데 중생을 쉽게 말하자면,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번뇌를 가지고 사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번뇌가 없는 존재 - 다르게 말할 때는 중생은 나고 죽는 生死(생사)의 운명 속에 항상 살고 있는 존재인데 반해 부처님은 生死(생사)를 벗어났기 때문에 생사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여기서 나온 말이 解脫(해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근본 사상을 예로부터 사자성어로 말해온 말이 있는데, ‘生死解脫(생사해탈)’이라 합니다. 生死解脫(생사해탈)이 불교의 근본 사상이며, 다르게 말하면 불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참선 수행을 해서 얻는 것이나 혹은 예로부터 큰 스님들이 도를 이룬 경계를 解脫(해탈)의 경지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과 다르게 해탈한 사람은 어땠느냐? 돌아가실 때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신 고승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坐脫(좌탈)’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선 채로 돌아가신 고승들도 있었는데 이것을 ‘立亡(입망)’또는 ‘立脫(입탈)’이라고 합니다. 전설적으로는 僧璨(승찬)대사가 선 채로 입적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 죽는 자세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누워서 죽기 때문에 ‘坐脫(좌탈)’이니 ‘立亡(입망)’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生死解脫(생사해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죽음의 모습을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 본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 경계는 우리가 今生(금생)의 내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今生(금생)에 내가 고향 어느 곳에서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해 두 해 나이가 많아지도록 현재까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이 ‘나’라는 현실적인 그런 존재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사실 ‘나’는 前生(전생)에도 있었다는 것이고, 來生(내생)에도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보통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없지요. 내가 죽고 나면 그만인데 무슨 來生(내생)에 내가 어디 있으며 前生(전생)에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今生(금생)도 어릴 때는 기억이 안 나죠. 돌 지나고 젖 먹고 할 때의 아기 시절은 대부분 성인이 돼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래서 태어난 이후부터 언제까지 이 세상에 육신이 살아 존재하는 기간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랄까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 말씀을 통해서 볼 때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斷見(단견) - 끊어서 생각하는 견해라 하는데 일반적인 말로 바꾸어 말하면은 偏見(편견) - 편협한 소견, 또 한쪽에만 치우쳐 있는 소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바로 알게 해주고 바로 깨닫게 해 준 종교가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양 종교는 영성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죠. 신의 은총을 받아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신앙 위주로 이런 말을 해오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본래 의미가 이 세상, 한 세상 산 것으로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데에서 나오는 것으로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쓰여져 나옵니다. 『法華經(법화경)』 「如來壽量品(여래수량품)」같은 데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적이 없었다는 말이 나옵니다.(自從是來 我實成佛已來 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然善男子 我實成佛已來 久遠若斯 我常住於此 不以方便 現有滅度) 이것이 久遠成佛論(구원성불론)입니다. 우리는 언젠가의 시점 - 태어난 생년월일이 결정된 날이 있죠.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날씨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시점을 가지고 말하는데 대승경전 가운데 『法華經(법화경)』이 가장 부처님의 실상의 법을 고차원적으로 설해 놓은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태어난 적도 없고 성불한 적도 없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생사가 없는 부처님에게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것이므로 어느 시점에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보통 사람들이 처음 들을 때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法華經(법화경)』 「如來壽量品(여래수량품)」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사람들은 부처라고 하면 오늘이 석가모니 부처님 생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난 특정 개인이 본래 부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성불이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가 아니고 구원겁(久遠劫) 전에 성불했다 합니다. 다만 우리가 쓰고 있는 불기(佛紀)가 있지만 이것은 화신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자취를 두고 시간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西紀(서기)와 다르게 佛紀(불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해를 원년으로 해서 계산한 해입니다. 西紀(서기)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듯이 우리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佛紀(불기)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를 기준으로 하니까 부처님이 80세에 열반에 드셨으니까 태어난 해는 80년 전이 되어 올해가 佛紀(불기) 2,570년이므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해는 2,650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의 실상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法華經(법화경)』 경문의 대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도를 이루시고 중생을 교화하시다가 열반에 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부처를 이루신 것도 오랜 겁 전이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니까, 부처님 오신 날의 문제를 우리는 세속법의 기준에서 봉축을 하고 또 행사를 하지만 실제 불교의 진리 안에서 생각해 볼 때 부처님은 태어난 바가 없다고 돌아가신 바도 없는 법신 부처님이 참부처라 합니다.
시간이 시작이 없고 끝이 없는 그 자체를 불교에서 覺(각)이라 하는 겁니다. 『楞嚴經(능엄경)』에는 "허공이 어디서 생겼느냐"는 내용의 경문이 나옵니다.(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有漏微塵國 皆依空所生 漚滅空本無 況復諸三有) 과학적으로는 옛날에 Big Bang(빅뱅)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이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주라는 것이 중생의 마음 안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나옵니다. 覺(각) - 깨달음의 진리가 없었으면 생겨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楞嚴經(능엄경)』 경문 속에 한 구절을 소개하면 ‘空生大覺中(공생대각중)’이라 하여 큰 깨달음 - 우리 마음이 본래는 大覺(대각)이에요. 부처를 마음으로도 표현합니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이라는 말씀이 『華嚴經(화엄경)』「夜摩天宮品(야마천궁품)」에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라는 것은 부피가 없는 겁니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므로 공간적인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고 영국의 천재물리학자 Stephen Hawking이 한 이야기 아닙니까? 아무리 우주가 지금 팽창하고 있다 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아득히 먼 어디에서 또 빅뱅이 일어난다고도 하더라도 중생의 마음 자체가 부처님의 깨달음인 覺(각)의 자리인데 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을 『楞嚴經(능엄경)』 이라는 경문 속에서 허공이 대각 가운데서 생긴 것이 큰 바다, 태평양이라고 예를 들어 말하면 태평양 넓은 바다에 그 수면에 파도가 일어났기 때문에 거품 하나가 생긴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 허공은 큰 깨달음 가운데 생겨난 것이니, 마치 큰 바다에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우주 자체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계속 팽창하기 때문에 한정된 범위랄까 부피가 없는 것인데 경전 속에서는 거품에 비유해서 말해 놓기도 했습니다.
불교는 왜 깨달음을 추구하느냐? 왜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느냐? 불교는 그런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 현상에 나타나는 인연소생법, 이것을 넘어선 배후의 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부처와 상대되는 말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이라는 말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알고 들으시면 참 좋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소생이다. 이런 뜻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인연이 衆(중)은 많은 수를 뜻하는 글자지요. 수많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겁니다. 사람이나 사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개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衆(중)이에요. 많은 것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것으로 인연이 수없이 많은 거예요. 비근한 예를 들어 말하면 이 만통전 법당 하나만 해도 수많은 인연에 의해서 법당이 지어지고 또 참석해 있는 대부분 거사님이나 신도님들이 이 법당 짓는데 인연이 맺어졌고 협조했기 때문에 지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성태 회장님이나 그 밖의 많은 분들이 보시를 해주신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하여 衆生(중생)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거듭 거듭 - 世世生生(세세생생)이라는 뜻이에요. 지금 우리 今生(금생)은 일생입니다. 오늘 하루와 같은 겁니다. 어제는 지나간 하루로 前(전) 하루고 내일은 미래가 되죠. 그렇듯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면서 세월이 엮어지고 만들어지듯이 인생은 世世生生(세세생생)을 계속 이어가면서 엮어가는 존재라는 거예요. 前生(전생)·今生(금생)·來生(내생)이 계속 이어간다는 겁니다. 어제·오늘·내일, 지난달·이번달·내달, 작년·금년·내년이 계속 이어지면서 엮어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衆生(중생)이라는 말 뜻이 그 뜻입니다.
세 번째는 혼자서는 못 살잖아요. 많은 이가 어울려 살게끔 되어 있다는 겁니다. 본능적인 어떤 생리 구조를 가지고 말하는데 雌雄(자웅)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남의 힘이 내게 미치지 아니하면 난 살 수 없다는 거예요. 물론 나도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이 세상은 共生(공생)의 원리입니다. 심지어 하늘과 땅도 共生(공생)하는 것이라 하여 ‘天地(천지)는 共生(공생)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 にのみや そんとく)라는 사람은 “천지는 공생한다. 하늘과 땅이 항상 설법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국 선사들도 많이 해온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항상 말을 하고 있다. 그걸 들을 줄 알라는 말을 했죠. 어제는 어제의 하늘이 오늘은 오늘의 하늘이 어제는 어제의 땅이 오늘은 오늘의 땅이 나한테 말을 건네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天地(천지)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살아야 된다.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徳, にのみや そんとく)라는 일본의 사상가는 아주 가난하게 태어난 분이었는데 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결국 성공을 해서 나중에는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되었다가 또 학문을 해서 대학자가 되었다고 이렇게 알려진 분입니다. 우리가 부처를 통해서 내 자신 인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좀 더 깊이 또는 넓게 확대해 볼 수 있는 그런 사고방식의 전환도 때로는 필요해요. 사람의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자연히 일어납니다. 어떤 斷見(단견)에 사로잡혀 있던 생각이 바꿔지면 - 轉換(전환)은 결국 달라진다·바꿔진다는 뜻이니까 - 바꿔지면 괴롭던 문제가 안 괴로워져요.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문제가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않아요. 또는 싫어하고 미워하던 것도 안 그렇게 됩니다. 그냥 무심하게 대응하고 넘어갈 수가 있어져요. 또 좋아하는 것도 물론 좋아하는 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냥 무심하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衆生(중생)이란 말 하나가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에 돌아가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만 불교의 기본 교리의 핵심 되는 말이 因緣(인연)이라는 말이고 因緣(인연)을 달리 緣起(연기)라고도 합니다. 緣起(연기)는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거저 생긴 게 아니고 뭔가 생기게끔 도와준 사실이 있어서 그걸 의지해서 이걸 말미암을 由(유)자로 많이 표현하죠. 緣(연)자가 관계 맺는다는 뜻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因緣(인연)할 때 뒷글자가 그래서 말미암아서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미암아서 이루어진 인연 소치를 잘 몰라요. 인연 소치를 잘 아는 게 어렵다고 합니다. 어째서 내게 이런 因緣(인연)이 왔는지 그걸 그 근원을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초기불교 같은 데 나오는 말을 보면, 첫째 因緣所致(인연소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因緣所致(인연소치)라는 것은 어째서 이런 인연이 내게 맺어졌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阿含經(아함경)』 같은 데서 부처님 말씀을 여기저기 다 살펴보면, 결국은 因緣(인연)을 알라는 이야기입니다. 『阿含經(아함경)』 계통의 경전에서는 부처님 자신을 ‘緣起(연기)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緣起(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緣起(연기)를 본다(若見緣起便見法 若見法便見緣起)’는 말씀도 『中阿含經(중아함경)』 「상적유경(象跡喩經)」 계통의 경전에 나옵니다. 연기를 아는 자가 법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法(법)을 달리 말하면 이치를 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緣起(연기)를 모르는 사람은 法(법)을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緣起(연기)를 모르는 사람은 이치를 알 수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게송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올해 부처님 오신 날 부처와 상대되는 말인 衆生(중생)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면서 내 자신의 생각을 좀 변화시키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면서 길을 가는 발걸음이 흘러갈 때 다 방향이 정해집니다. 길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동쪽으로 가는 길인가 서쪽으로 가는 게 방향인데 사람 생각도 방향이 있어요. 정말 정방을 행해서 뭔가 뜻있는 의미를 추구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야 된다고 말하는데 불교를 통해서 우리가 그런 인연의 의미를 잘 생각하면서 좀 더 좋은 因緣(인연)이 맺어져야 겠지요. 因緣(인연)이 나쁘면 禍(화)가 되는 것이고, 因緣(인연)이 좋으면 福(복)이 되는 겁니다. 운이 있다는 거예요. 좋은 因緣(인연)이 내게 다가온다는 얘기입니다. ‘저 사람 운이 있다.’ ‘재수가 있다.’는 뜻으로도 쓰는 말로 좋은 因緣(인연)이 온다는 거예요. 좋은 因緣(인연)은 福(복)이 되고, 나쁜 因緣(인연)은 禍(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因緣(인연)이 좋으면 일이 잘 되는 거 아닙니까? 사업하는데 因緣(인연)이 좋으면 사업이 잘 되는 거예요. 왜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 절하고 기도합니까? 부처님께서 ‘나에게 좋은 因緣(인연)이 맺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세로 구분해서 말할 때는 계속 因緣(인연)이 이어지니까 ‘좋은 因緣(인연)이 내게 한번 맺어지게 해주십시오.’라고 부처님께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간단히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나무 석가모니불~
구원겁전에 성불하셔서 생사가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셨네요.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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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법문을 읽을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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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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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덕분에 큰스님 말씀 되새기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