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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 5. 부모를 떠나서 6. 한 몸 7. 이혼 증서
마 19: 5. 부모를 떠나서 -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주께서는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셨다.
사람이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결혼이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뜻함을 보인다.
1]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창 2: 24에서의 이 말(for this reason, NIV)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은 짝으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임'을 아담이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남자와 여자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관계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본 구절은 창 1: 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合)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2]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남녀 한 쌍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구 조건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淸算)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 창 2: 24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3] 아내에게 합하여(*, 콜레데세타이)
이는 '아교로 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지닌 원어 '콜라오'(*)의 단수 미래 수동태이다. '완전히 달라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다. 영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이다.
4]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 씨릍스)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 몸'이란 결혼을 단순히 정신적인 결합(한 정신)으로 봄으로써 구체성(육체의 합일)을 상실한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 자체, 곧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영혼이 전제되지 않는 육체는 순전히 쾌락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한 몸'이란 육체를 근간으로 한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을 뜻한다.
바비에리(Louis A. Barbieri Jr.)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였다.
마 19: 6. 한 몸 -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
주께서는 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심으로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라는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들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1]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한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다.
맥네일(A. H. McNeile)은 말하기를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남자)과 아내를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는 그 어떠한 분열 의사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반(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셔서 결혼시키셨다. 결혼은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제도이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라는 말은 결혼이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뜻함을 보인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심으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부부간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심지어 부, 자식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여기서 '짝지어주다'란 말은 '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는 말의 헬라어 '쉬쥬그뉘미'(*)가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는 부정 과거형 직설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 번의 과거 사실이라는 의미가 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이미 발생되어 버린 일이므로 어떤 사람도 그 연합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는 무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짝지어 주신 그 일이 영원히 진리(眞理)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하는 말에는 관계대명사 '호'(*)의 중성 단수형이 사용됨으로써 부부는 벌써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단수 관계대명사 '호'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확히 짝지어 주신 '것'(What)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입법(立法)하신 결혼법을 말하는 동시에 그 법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녀의 결혼 관계에 적용됨을 암시하고 있다.
3]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당위론적인 진술이다.
이혼이란 인간의 사악한 의지의 반영일 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유대 용어로 결혼을 나타내는 말은 '키두신'(*)이다. 이 말은 성별(性別), 헌신의 의미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쳐진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W. Barclay).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이요 계속해서 헌신해야 할 대상이다. 서로에게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키두신'이다.
헌신된 제물로서의 부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둘로 나뉜 '키두신'은 이미 '키두신'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 분리된 부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정죄를 받는다.
예수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은 어느 날 이혼에 대한 모세의 율법을 들고와서 예수를 시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들고 온 모세의 율법은 그들이 생각하고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본문은 바리새인들의 오해와 시험,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기록한 말씀이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1) 시험하는 자
① 그들은 넘어뜨리는 자다.
예수께 나아와 질문하는 그들의 진의는 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닌 예수를 넘어뜨리려는 올무였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를 향한 사랑이나 희생이 아닌 시험이었다.
사탄의 자녀가 행하는 시험은 오직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사탄이 인류의 조상 아담을 시험하여 넘어뜨렸듯이 그들의 시험은 언제나 세우기 위한 시험이 아닌 실족하기 위한 시험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은 다르다.
그분의 시험은 넘어뜨리는 시험이 아니라 세우는 시험이며, 저주로 이끄는 시험이 아니라 축복으로 이끄는 시험이다. 그분의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더 큰 믿음과 신뢰로 인도하는 연단이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과 하나님의 시험의 근본적인 차이다.
② 그들은 잘못된 사고를 진리로 가장한다.
마치 진리로 가장한 사탄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하는 사탄처럼 그들은 거짓을 진리로 위장하며,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체 위장한다.
* 마 4: 6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양의 탈을 쓰고 나아오는 이리와 같다. 달콤함을 가지고 나오지만 그 결국은 죽음이다. 이처럼 시험하는 자의 특징은 위선이다.
성도는 이러한 위선을 분별할 줄 아는 영안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 15)
(2)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다.
①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진리를 나타내셨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배운다. 또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도 알게 된다.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사실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섭리임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그리고 우주의 질서를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의 질서를 거스리지 않고 순응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부합되는 것을 깨달아 헛된 망상이나 노력하지 않고 얻는 결심, 그리고 자연을 역행하는 인위적 생각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② 하나님은 특별하고도 긴급한 경우에는 자연 법칙을 따르지 않고 역사하신다.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야 할 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그 주제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그 열매로 하고 있다. 이러한 기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구하고 행하는 기적과 다르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해 주심으로써 기적으로 위장한 시험하는 자의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다.
③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다.
이러한 계시 위에 있는 계시, 가장 확실하고도 완전한 계시가 곧 말씀이다. 그 말씀은 만고 불변의 진리로 우리 옆에 있다.
그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진리요, 꼭 이루어지는 진리다. 그 진리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요 생명을 부여하는 진리다.
그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있고 온전한 기쁨이 있으며, 온전한 주의 형상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고 그 진리를 의지한다면 시험하는 자의 유혹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미풍에 불과하게 된다.
(3) 우리는 진리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진리는 역설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 가령 진리는 살고자 하면 죽게 되고 높고자 하면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 그 예이다. 이처럼 진리는 인간적 사고에 역행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러한 진리대로 행해야 하는 것은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생각과 진리의 가르침이 다르고 진리가 우리에게 상상 밖의 일을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말씀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이요 최고의 가치임을 성도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마 19: 7. 이혼 증서 -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있는 이혼의 규정을 들어 다시 물었다.
신명기 24: 1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라고 규정하였다.
1]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신 24: 1을 들어 예수께 공격하였다.
율법주의자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 가치 기준이며 원리였다.
모든 유대인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 22, 28, 32)라고 하심으로써 모세에 대해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하며 율법 정신을 왜곡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셨다.
구속사의 전개상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실체(實體)이신 예수의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며 그분의 말씀도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어리석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최소한의 규정을 담고 있는 모세 율법을 핑계 삼아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으로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에서 모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아니었다.
2]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당시 히브리인 남편들은 구두로 아내와의 이혼을 합법화할 수 없었다.
이혼 사유가 발생하면 신 24: 1-4의 율법 조문에 근거하여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줌으로써 이혼을 공식화할 수 있었다.
이혼 사실에 대한 공적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간 이혼 사실을 공중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신 24: 1-4 –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이처럼 이혼을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실제적인 목적은
(1) 합리적 이유를 들어 아내 버리기를 쉽게 생각하는 남편의 방종을 예방한다.
(2) 신실치 못한 아내에 대한 자비의 수단,
즉 그 아내에게 미칠 각종 불이익과 공개적 형벌을 미리 예방하고 아내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려는 데 있었다.
당시만 해도 법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던 남자가 이혼 증서를 준비할 권한과 그 약정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혼의 허용은 점차 이혼의 남용(濫用)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유대의 어떤 랍비는 성전의 제단 앞에서 초혼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를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 법에서 ‘수치되는 일’(some uncleanness, 에르왓 다바르 ר ת)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삼마이 파는 그것을 부부관계의 불성실, 즉 외도(外道)와 음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르게 해석하였으나, 힐렐 파는 그것이 남편 마음에 상하거나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였다고 한다. 후자에 의하면, 아주 하찮은 구실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