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 공 동 체 라 면?
2013-02
샘가에서 - 황야(荒野)에서의 기도(祈禱)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대쪽 같이 사는 사람은 죽창이 되어서 다른 이들을 찔러댄다. 부드러운 나붓댐은 당겨 안을 수 있는 뒤 끝이 있다. 나는 너스레로 건져 올려 질것 같은 군더더기 보다는, 집게발로 그림 속에서나 시늉 낼 듯한 파이프를 입에 꽉 물고서 몰입을 흡연하듯, 낚시 바늘 갈고리로 할퀴어 들어 허리춤에 꿰차게 되는 퍼내기 같은 펑퍼짐한 생활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일거월저(日居月諸)라는 말이 있다. 그 것은 쉽게는 거저(居諸)라는 말로 그 말을 줄일 수도 있는데, 그 뜻인즉 “쉬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흘러가는 세월인 거저(居諸)를 값을 치루지 않고, 거저 날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겉에 거적대기의 모습으로 덮수럭함에서 탈피할 수가 없다. 오래전에 같은 군내에 계시는 교회단체의 회장님을 역임하셨던, 아이 엄마 오라버니쯤 되시는 목사님에게는 내가 퇴(뻔 때)가 나 보이지 않았던지? “목사님은 왜 양복과 넥타이를 안 하고 다니세요”라고 졸라매는 얘기를 하신 것을 지금 것 기억하고 있다. 조이는 목댕기는 자주 못하더라도, 마음을 위로 거뜬하게 추키고는 꼬리를 뒤로 빼는 진중한 몸가짐으로 한발 한발 떼어놓아 가고 싶다. 이 모습을 어떤 노래하는 그 양반은 “폼 나게 살 거야”라고 말을 했던가? 그러면 그 “폼 나게 사는 모습이 무엇일까?”를 껌을 씹어대 듯 곰곰이 삭혀 본다. 나는 벌말이라고 부르던 이 마을에서, 삼사백 미터 쯤 떨어진 산을 뒤로 두른 안쪽의 작은 마을에서 낳고 잘았다. 그 마을로 들자면 커다란 둥구나무인가? 무슨 나무인가?가 앞을 막고 자리하고 있으며, 나무 밑에는 그 동네 식 표현대로 횟집(회관 집)이 동네의 위용으로 서있듯 하다. 거기를 지나 몇 십 미터를 걸어 들어오면, 동네 한복판에 오십여 집 사람들이 같이 사용하는 우물인 “샘”이 있었다. 그 샘의 길 건너로 나의 먼 친척이 되시는 할머니 댁이 있었는데, 동네 분들은 그 집을 “샴 안집”이라고 입에서 입으로 오르고 내리게 했던 것 같다. “샴 안집”이라고 말하니, 설마 그 할머니 댁이 “샤머니즘”을 따르지는 않았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할머니 댁은 나의 친척집이니까? 그러면서 그 말의 바른 표현 방식은 “샘 안집”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현상적으로는 횟집 앞의 커다란 둥구나무 밑에서나, 그 샘가에서는 앵두나무를 생각해가며 분명히 주술적인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결코 그 푸닥푸닥 했을 모래알 튀겨가는 의성어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고, 그 샘에서 타래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물지게에 덩달아 걸치고 기웃둥기웃둥거리며 저벅저벅 걸었을 수더분하고 무던했기만 했을 그 어르신들이 떠오른다. 나는 자신이 최근 이삼년 동안 진중하지 못했던 몸살이 쳐지는 진절머리의 행태를 벌려왔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안다. 나는 두세 달 사이에 목사로써 어떤 여인네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소싯적에 이 마을의 예배당에를 함께 다녔기에 나에게는 그가 선 낯의 얼굴이 아닌 반가운 얼굴로 다가 들어왔다. 나는 그 집사님을 이 샘 곁으로 함께 데리고 가고 싶다. 문 밖의 취급을 밭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사귐을 갖는 얘기가 성서에서 극적으로 대두가 되어 엮어져들어 오는 곳이 있다. 피곤에 지친 예수께서 생면부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예수께서 그 여인을 툭 치는 얘기를 꺼낸다. “네가 바야흐로 나를 누구인지 알게 되면 도리어 나에게 물을 달라고 졸랐으리라” 예수가 계속해서 하는 말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또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는 말이 있듯이, “그런 물을 나에게 줘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로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네 남편을 데려 오너라”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이 없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있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정말이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조금 후에 이어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라고까지 반응되어지며, 그 여인에게 예수는 밝히 들어 내진다.우물가 수가 성의 여인이, 내 물을 마시면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얘기하는 예수와 동화작용이 되어 큰 에너지가 발생하게 된다(요한복음 4:1-42). 바로 그 분에게 동화되어 미끄러져 들어가듯 딸려 들어가는 것이 기도이다. 내가 어릴 적에 마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각인시켜 주셨던 그 당시의 장 전도사님께서는 기도 가운데 언행심사(言行心事)라는 말씀으로 움츠리듯 읍조리셨던 모습이 연상된다. 기도는 머리에서 몸의 등줄기를 따라서 흘러내리는 식은 땀의 산물이다. 인생에서 식은 죽 먹기로 살아간다면, 그 이마에서 번드름한 빛은 날지 몰라도 신발은 닳지가 않는다. “샴 안집” 혹은 “샘 안집” 하니, 나도 똑같은 사람으로 더 어처구니없는 말을 가져다 대자면 “샴 쌍둥이”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생물 중에서는 분류상 자웅동체(雌雄同體)의 생물과 자웅이체(雌雄異體)의 생물로 구분을 지을 수 있단다. 부부가 자웅을 겨룰 때에는 시세말로 밀고 당기를 잘해가는 “밀당”이 되어야 이길 수 있단다. 그러다가 보면 처음에 얘기했던 그대로, 집게발로 그림 속에서나 시늉 낼 듯한 파이프를 입에 꽉 물고서 몰입을 흡연하듯, 낚시 바늘 갈고리로 할퀴어 들어 허리춤에 꿰차게 되는 퍼내기 같은 펑퍼짐한 생활을 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웅동체라고나 할까? “형제가 연합해서 동거하며 선하고 아름다울 때, 하나님과의 동거로 들어가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이 된다”(시편 133:1-2).
나는 그 책을 못 보았는데, 제목만 여기에 훌터다 놓는다.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자격증까지 가졌다는 조영남 씨가 지은 책이라고 하는데, 그 책의 제목이 퍽 재미가 있다.『예수의 샅바를 잡다』라는 책이란다. 나는 순진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막판에 몰려 천사와 샅바를 잡고 씨름을 하다가, 샅바를 걸은 허벅다리뼈가 불어지고 나서야 천사를 맨땅에 눞일수 있었던 야욕이 들끓었던 풍운아 야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였다(창세기 32:13-32). 그렇게 하듯 예수탐닉에 모든 것을 내걸은 그와 같은 책일 줄 알았더니 그것은 아니고, 내가 얼핏 보기에는 조 선생님이 열두 가지 제주를 부린다는 화투장을 물감으로 옮겨 놓기를 좋아하는 식으로 예수를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하는 식의 찢어 붙이고, 같다 붙이고 하는 식의 신변잡기(身邊雜記)책이 아닌, 더 나아가서 말 그대로 그가 추종하는 귀신들이 득실대는 신변잡귀(神變雜鬼) 책인 것 같다. 그래서 테레비에서 가끔 보았던 문학평론가 김갑수 씨가 그 책에 관하여 평가하기를 “가수 조영남의 책을 읽는데 왠지 자꾸만 시인 최승자의 싯귀절이 생각이 난다” 바로 나의 관심은 최승자 시인의『올 여름의 인생 공부』이다.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송창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서유석)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나는 지난여름에 땡볕의 날씨 가운데 상용가(常用價)가 그레인즈격인 친구 박이 자가용(自家用)으로(?), 아니 수작업을 곁들여가며 예배당을 짓는다고 하기에 낯 모르는 에니팡 대신에 그런 얘기를 날려 보내고, 그에게서 날라 들어왔다. “교회 건축에 애쓰시네. 마음을 같이같이..... 땡볕에 냉수 한 잔을.....” “감사 감사 정말 더워서 일꾼들이 힘들어하니 기도 같이 해줘요 늘 고마워요” “임마누엘의 그 분께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로다@@@@@”. 그런데 요즈음은 친구가 섬기는 “믿음찬교회”가 나를 따따부따하도록 성가시럽게 한다. 월오리(越五里?) 승호(勝護) 목사 화이팅...... 오늘도 우리 집에 찾아온 그 자매는 나에게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일컬어지는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님의싯귀를 전달하여다 준다.『오늘이 내 날이다』“인생은, 과거에 잘한 것에 교만하기 쉽고, 실패에 낙심하기 쉬우며, 미래로 미루다 일평생 속아 산다. 오늘만이 내 날이요........” 그리고 동광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님의 후계자들이 말했다는 회감반조라는 그 뜻을 문구상으로 알고 싶다. 지난달 공부시간에 배운 것을 어렴풋이 갖다 붙이기식으로 내가 정리 표현한다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인 것 같다(요한일서 4:7-8). 결국 기도(祈禱)라는 것은, 내가 자폭되는 사랑의 분출이라고나 할까? 아이 엄마가 방금 얘기를 들려준다. “여보 얼음이 죽으면 다이(die)빙(氷)이 된데” 다이빙은 고개를 숙이고 물감투를 뒤집어쓰는 하나님 앞에서의 소금 세례식이다. .
공 동 체 소 식
.
☻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지명수 권희숙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충남교향악단 찾아가는 음악회가 2012년 2월 5일 오후에 새터공동체에서 연주회로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충전교회.금성교회.김기홍.정이삭.최영애.라홍채.박종만.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3인).이은주.채윤기(박현실).진명구.양오석.임영호(장재영.고은성).수영교회.그리스도의집(옹인숙.금산파리바게트.4회).조정리교회(이정애.3회).대덕교회.동산교회(윤호철).신평교회.신건태.김용환(최정숙).시민교회(엄재용).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강정숙).김태훈(추부마전).주식회사한밭(권오철).주식회사EG(이광형).금산경찰서수사과지능범죄수사팀(전우암외11인).신평리반석교회(박화태).금산읍교회(김철우).김종성가족.아름다운교회(오은탁외1인).금산군모란회(5인)
(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