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다문화연합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다문화타임즈
최근 수정 시각: 2020-09-30 01:59:15
분류
이문열 李文烈|Yi Mun-yol | ||
본명 | 이열 (李烈) | |
출생 | 1948년 5월 18일 (72세) | |
미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청운동 | ||
국적 | 대한민국 | |
직업 | 소설가 | |
수훈 | 은관문화훈장 (2015년 추서) | |
[ 펼치기 · 접기 ] |
1 . 개요 2 . 생애 3 . 특징 4 . 정치적 성향
4.1 . 2000년대: 젖소부인 논쟁과 분서 4.2 . 2010년대의 극우적 견해
5 . 주요 작품
5.1 . 장편소설 5.2 . 단편소설 5.3 . 평역서
6 . 수상 이력
대한민국의 소설가. 1948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새하곡>이 당선돼 등단했으며, 이후 능란하고 교양적인 문체와 다양한 작품세계를 지닌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60년대에 김승옥, 70년대에 황석영이었다면 80년대의 대표 작가는 명실상부 이문열이었다. 이와 함께 우파 논객으로서의 행보 역시 여러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다.
1948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열(李烈)인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교수이자 공산주의자였으며 해방정국 시기 남로당에서 활동했던 아버지 이원철(李元喆)[1]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는 이문열을 임신하고 있을 적부터 삐라를 돌리는 등 남편을 지원했는데, 그만 경찰에 잡혀서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아버지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는 뱃속에서도 싸워온 열렬한 투사다' 라고 하면서 그에게 '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의 부친 이원철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으며, 이문열은 그 해에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2]으로 이사를 갔다.#
유년기에 이사를 자주 다녔을 뿐만 아니라 정규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중퇴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규교육을 이수한 기간이 도합 8년여에 불과하다. 1953년 안동으로 이사를 가서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1957년 서울로 이사해 종암국민학교로, 1958년 밀양으로 이사해 밀양국민학교로 전학을 가 1961년 졸업했지만 같은 해 진학한 밀양중학교는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별다른 이유 없이 1965년 중퇴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이후 3년간 하는 일 없이 지냈다. 이문열은 젊은 시절 한주먹 했던 작가로 유명한데 다 이 암울한 청소년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중퇴후 한동안 주먹질로 세월을 축내며 떠돌았고 그런 건달 시절을 청산하고 새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 <그해 겨울>이다.
1968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인 1969년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는 한편 이듬해인 1970년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대학교를 중퇴했으나 3번 연속 떨어졌다.
1973년 결혼한 뒤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근무했으며, 1976년 제대하고 나서 곧바로 경상북도 대구시로 이사를 가서 학원 강사로 일하는 중이던 1977년 대구경북지역을 대표하는 언론인 매일신문의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했고, 이듬 해에는 매일신문사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문열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시 신설됐던 중편 부문에 혹해서 써낸 소설 <새하곡>이 당선되면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지 10년 만인 32세의 나이에 드디어 중앙문단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같은 해에 당시 중편소설이었던 <사람의 아들>이 대박을 치면서 순식간에 인기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작품은 애당초 1973년 모 잡지의 신인 모집에 투고되었던 소설이라고 한다. 당시 26살이던 이문열은 군입대를 앞두고 그때까지의 문학 수업을 결산한다는 의미로 1년간 힘을 쏟아 원고지 350여 장의 중편소설을 만들어냈다. 이 소설을 공모에 투고한 뒤 곧바로 입대했는데, 6달 뒤 첫 휴가를 나와 결과를 확인해보니 예심도 통과하지 못했고 이문열은 이 사실을 알고 상당히 낙심했다고 한다.
이후 등단 첫 해인 1979년에 문예지 세계의 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자 이 작품을 다듬어 내밀었는데, 잡지사 측으로부터 그냥 발표할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 측에서 공모하는 오늘의 작가상에 응모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며, 결국 그 상을 수상하고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문열은 등단 첫해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이듬해인 1980년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야말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오랜 습작 기간 동안 쌓인 재고가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습작기에 썼던 작품 중 발표된 것만 중편이 3편, 단편이 9편이었다고 한다. 데뷔한 지 5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들소>, <그해 겨울>, <어둠의 그늘>, <필론과 돼지>, <알 수 없는 일들>, <금시조>, <익명의 섬>, <칼레파 타 칼라> 등의 중단편들을 비롯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80), <젊은 날의 초상>(81), <황제를 위하여>(82), <레테의 연가>(83), <영웅시대>(84) 등의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82년 <금시조>로 동인문학상을, 83년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을, 84년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후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약 3년간 잠시 창작을 쉬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이문열의 작품 연보를 살펴보면 연도별로 작품 수에 있어서의 편중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3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단편 소설 복귀작으로 발표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80년대 후반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도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86년 대하소설 변경을 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1988년에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발표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91년 출간된 장편소설 <시인>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평론가들과 해외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김욱동은 이 작품을 이문열 전성기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기도 했는데, 이는 이후 발표한 <오디세이아 서울>이나 <성년의 오후> 등의 소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그저 그런 편이었기 때문이다.
87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을, 92년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88년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출간해 현재까지 약 1,8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91년에는 이문열 평역 수호지를 출간한다.
이후 1994년에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원작인 장막 희곡 <여우 사냥>과 <이문열 중단편전집>을 비롯해 소설집 <아우와의 만남> 등을 발표했으며, 1997년에는 장편소설 <선택>을 출간해 여성주의 진영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94년부터 97년까지는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1998년 <변경>이 전 12권으로 완간되었고 같은 해엔 부악문원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 98년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문학상을, 99년 <변경>으로 호암예술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는 장편소설로 <아가>(00)[3], <호모 엑세쿠탄스>(06), <초한지>(08), <불멸>(10), <리투아니아 여인>(11)과 소설집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01)[4] 등을 출간했다.
2001년에는 한 칼럼에서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에 비유한 것으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결국 책 장례식까지 당하는 일이 일어났지만 이후에도 보수 성향의 발언들을 계속해나갔다. 2003년에는 당시 위기에 빠져 있었던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리투아니아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김유신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인 <대왕 떠나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했다.
2017년, 작가로서는 실로 오랜 침묵 끝에 1980년대[5]를 다룬 소설인 <둔주곡 80년대>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문열은 80년대를 전성기로 보냈다. 80년대 그의 유명세와 다양한 작품세계, 판매량을 따라갈 다른 작가는 없었다. 각종 정치적 논쟁에 휩쓸렸던 90년대 이후의 작품은 전성기보다 비교적 저평가되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한편 이문열의 소설들 중에선 안 뜬 작품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장편의 경우 <미로의 날들>(84),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89), <오디세이아 서울>(93), 그리고 출간도 안 된 소설 <성년의 오후>(93~94)가 대표적이다.
보수적 정치성향을 보여 왔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때 여당 민주정의당의 국회의원 공천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다만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한 경력은 있다. 그리고 1990년 무렵 한때 장기표, 이우재 등의 재야세력이 주축이 된 민중당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민중당이 망하고 이재오, 김문수 등과 같은 거물들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이문열이 민중당에 참여했던 것은 그가 딱히 좌파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재오와 같은 재령 이씨, 심지어 같은 마을 출신이라는 인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좌파 진영에 대한 거부감은 오래전부터 밝히고 있다. 그의 초기작들에서도 그런 기색이 엿보여서 좌파 문단세력으로부터 반동 취급을 받는다. 특히 문단계에서는 다소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보니 따돌림과 비판도 많이 받았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인문대학의 석좌교수로 임용돼 세계문학에 대한 강의를 했고, 같은 해 출범된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2018년 미투운동으로 성추행 사실이 폭로된 고은의 행적을 연상케 하는 소설 사로잡힌 악령이 주목받고 있다. 해당 항목 참조.
같은 해에 모바일게임 삼국지M의 홍보모델로 발탁됐다. 평역 삼국지가 워낙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나이 칠순의 고령인 데다 보수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보. 아무래도 후술할 고은 사건과 관련하여 새롭게 주목받은 것...과 관련된 것은 아니고 그냥 이문열 삼국지의 명성에 묻어가려는 것 같다. 광고에 이문열 삼국지 작가로 소개되어있고 영상에 해당 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다.[6]
2019년 40년간 함께한 민음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2020년 알에이치코리아와 계약, 삼국지를 시작으로 90여권의 책을 다시 낼 예정이다.
이문열은 소설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영웅"을 모색하려 했다.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의 소설 속에서 영웅은 일그러진 존재다. 완전무결해 보이지만 실상 컴플렉스와 이루지 못한 욕망에 허덕이는 일그러진 존재들이다. 그 몰락은 누구 할 것 없이 처참하다. 그들은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몰락한다. 역설적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문열은 묻고 있다.
소설에서 내보이는 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영웅 찬가다. 소설 속에 묘사되는 사회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역사를 만드는 영웅과 말만 많은 지식인, 그리고 이들에게 휩쓸려 움직이는 대중으로 이루어졌다.
소설(대표적으로 <영웅시대>)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경우, 주로 빨치산을 하다가 사살당하거나 월북한 걸로 나온다. 이는 작가의 가족사 때문인데, 이문열의 아버지 이원철은 수리학의 권위자로서 한국전쟁 때 전시점령 서울대 농대 학장으로 임시 임명되어 북한정권에 협조하고 월북하였다. 물론 진짜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의 피난과 함께 이동하여 1951년까지 부산에 임시캠퍼스를 차렸다.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대는 말 그대로 괴뢰 국립대학. 따라서 서울대는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대를 완전히 부정한다.
이문열의 아버지는 한때 북한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년엔 조그만 농장의 일꾼으로 초라하게 살았다고. 이문열은 "가족 다 버리고 북에 갔으면 거기서 잘 살기라도 할 것이지..."라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문열은 젊은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포함한 처자식을 버리게 했던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1960년대에 아버지가 북한에서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처자식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그곳에 간 사람을 힘든 상황에 몰아넣은 북한이 용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사찰을 당하고, 이웃에게서 멸시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게 동네에 소문나면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이사한 동네에서 또 들통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하는 통에 그는 젊은 시절 전국 곳곳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떠돌던 삶이 재령 이씨로서 상당한 양반 가문에 대한 집착과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다. 모진 고통 속에 살았던 이문열의 모친은 남편이 북에서 새장가를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과거를 겪은 그의 삶과 문학 속에서 좌파에 대한 혐오감이 발견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터.[7] 하지만 배고픈 시절을 겪어본 사람답게 천민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해서도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이다.(영웅시대와 그 연작 변경 시리즈를 참조). 재미있는 점은 이문열의 작품에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를 비판했던 평론가 김명인이, 90년대에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정치적 속성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정치적 행보와 얽히어 진보 진영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소설가 황석영과는 대조적으로 보수 진영을 상징하는 문인으로서 서로 대립항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서로 꺼리낌 없이 지내는 듯하다. 황석영은 2017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수인1: 경계를 넘다》에서 본인이 이문열과 겪은 한 일화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회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문열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대구에서였다. 당시에 고은 시인이 광주항쟁 이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연루자로서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다. 사건은 별게 아니었지만 일반면회가 금지되어 있던 당시에 동료를 격려한다는 차원에서 문인들과 언론인, 교수 등이 어울려 대구에 몰려갔다.
마침 대구에는 영남대학교를 비롯해 계명대 경북대 등지에서 교수직을 하는 지인들과 문인들도 많아서 형식적인 재판이 끝난 뒤에 술집에 모여보니 삼십 명이 넘었다. 나도 광주에서 송기숙과 함께 갔었고 마침 석방되어 있던 김지하와 이시영, 조태일,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김종철 등등 여럿이 있었다. 이튿날까지 술자리가 계속되었는데 오후 뒤늦게 이문열이 대구의 기자들과 함께 찾아왔다.
나는 그가 민음사에서 '사람의 아들'을 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활발한 창작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문단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있었는데 이문열 청년이 술이 올라서 김지하와 더불어 이야기를 했다. 이문열은 '삼국사기의 역사적 관점이 글렀다고 그러는데 문장은 고문 중에서 가장 좋다'라고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 들으면 대충 뜻을 알 만한 말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서예 얘기를 나누다가 이문열이 '이완용은 매국노였지만 당대의 명필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듣다못하여 나도 취한 김에 '야 이 사람아 그러면 일본군 총 맞아 죽은 동학농민군 돌쇠가 죽으면서 이완용은 명필이다 외치고 죽겠냐' 그랬던 기억이 난다. 김지하가 '니가 서예에 대하여 뭘 아냐'고 하자 나는 홧김에 '니가 배웠다는 미학이 경성제대 창설 이래 가장 쓰잘데기없는 학문이라는 건 안다'고 대꾸했고 술자리는 파장이 되었다.
나는 이문열에게 '이제 시작하는 모양인데 모든 건 자기 선택의 문제' 라고 말했다. 나는 애초에 논쟁적인 사람이 아니다. 공격받고 오해되는 일이 있어도 그냥 흘려버리고 잊는다. 이문열이 80년대 이래로 치열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체제의 편에 서서 여러 가지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다. 솔직히 게을러서 그의 작품들은 거의 읽을 인연도 없었다.
내가 방북하고 베를린 거쳐서 뉴욕에 체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마도 1992년이었다. 어느날 이문열이 뉴욕에 왔다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외롭던 시절이고 문인이 해외에서 나를 찾은 것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그래서 부근에 사는 동창에게 천 불을 꿔가지고 맨해튼으로 나갔다. 아무리 망명자 신세라지만 내가 선배이니 마땅히 술은 내가 한잔 사야겠다는 허세였다. 술이 몇 잔 돌아간 뒤에 이문열이 언제 귀국할 거냐고 물어 왔고 나는 그냥 때를 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문열은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북한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격렬하게 얘기를 꺼냈다. 나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나도 이형과 같은 생각이라고 대꾸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멀어졌고 실상 군사파시즘의 모습을 띄는 독재체제라고.
이문열이 물었다. 그럼 왜 방북했냐고.
나는 언제나처럼 '민주화와 통일은 한몸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성숙되는 것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힘이 되며 그것이 평화적 통일의 길이다' 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피차 술이 좀 취하고 나서 이문열이 문득 월북한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나에게 북한을 통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나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언제 뉴욕에 다시 오느냐고 물었더니 일주일 뒤에 온다고 했다. 그럼 그때 연락하라고 일어둔 뒤 뉴욕 UN으로 파견된 북한대표부에 전화를 걸어 이문열 부친의 월북 시기와 인적사항을 적어서 팩스를 넣었다. 좀 기다려보라더니 사흘 뒤에 답변하는 팩스와 전화가 차례로 왔다. 팩스에는 이문열 부친의 간단한 이력과 가족관계가 적혀 있었고 생존해 있는 현주소도 나와 있었다. 일주일 후에 이문열이 뉴욕에 왔을 때 그 팩스를 보여 주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이문열의 부친 이원철은 북한에 가서 전공을 농업경제사가 아닌 수리공학으로 바꿨다. 그는 남로당에 대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지식인이었다. 원산의 어느 공업대학에 직을 얻었고 재혼하여 오 남매를 두었다. 종이에는 이문열의 배 다른 아우들 이름과 직업과 나이가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문열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무너지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처절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여 고개를 돌리고 눈시울을 닦았다. 한참 뒤에 격정의 파도가 가라앉고 이문열은 술 한 잔을 넘기고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감쟁이, 우리 어머니는 진작 당신이 재혼할 줄 알고 있습디다' 나는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오면 아버지와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낚시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에 우리측 영사 인물이 힐난조로 '황선생, 그러다가 어떻게 귀국하려고 그럽니까. 왜 월북 권유를 하고 다니쇼?'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일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니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이 모든 분단의 억압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문학에 대한 노심초사도 벗어버리고 익명의 망명자로 살아가고픈 생각도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의 망명 권유를 마다하고 무국적자로 체류하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 이문열의 모든 상처와 그늘은 내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누가 의도적으로 이문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게 물으면 나는 대답했다. '그는 전쟁 때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거리에서 손을 놓친 아우 같다' 라고.
아, 그리고 나는 뉴욕에서 이문열과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이제는 당신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그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뻘이었고 훨씬 미숙했던 젊은이었다고.
내가 한국에 와서 구속되었을 때 이문열은 나의 석방 촉구 성명서에 서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회에 나와 연설하는 일에도 흔쾌히 나서 주었다. 이문열이 그러한 종류의 일에 동참한 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이문열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책들을 한 아름씩 들여주고 갔었다. 그래서 나는 그제서야 이문열의 작품들을 읽었다.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영웅 시대 등.
내가 석방된 뒤에 이문열은 논객이 되어 좌충우돌 논쟁을 벌이고 홍위병 사건으로 그의 책들이 화형대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분노하여 반문화적 처사라고 입장을 밝혔지만 그래도 이문열에게 전화를 걸어 정치 칼럼은 그만 쓰고 소설만 쓰자고 했다. 언제부턴가 언론에서는 진보 보수를 갈라서 선정적으로 이문열과 나를 나란히 올려서 상징화했다. 나는 그것이 불편했고 이문열과 정치적인 맞수로 취급당하는 게 싫었다. 나는 이문열이 그놈의 물귀신 같은 '이념의 덫'에서 놓여나 자유롭게 휴머니즘의 대 벽화를 완성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나름대로 한 시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우리가 누린 모든 영욕도 그들이 준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문열의 관념 과잉인 듯한 계열의 작품들보다는 그의 자전적 요소가 엿보이는 '하구' 같은 성장소설에 끌린다. 솔직하고 풋풋하며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소설의 '인생파'다운 수수함이 여운을 길게 남긴다. 언제나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순정하고 비틀리지 않은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읽고 싶다.
이문열은 원래 그런 사람일 것이다.[8]
읽기 쉬우면서도 맛깔나는 문체로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만연체인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글의 리듬감이 좋아서 잘 읽힌다. 이문열의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문열은 글쓰기에 악마적인 재주를 가졌다"며 이 점만큼은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책의 제목을 짓는 센스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90년대 이후 나온 그의 작품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만서도 제목을 짓는 센스만큼은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이문열이 자신의 정치적 보수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로 결심한 까닭으로 언급한 것은 '몫과 균형의 문제'였다. 80년대 당시 진보진영의 주장들이 대두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그것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유행처럼 번져 하나의 시각만이 사회 전체에서 너무 큰 크기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반발했기 때문에 다른 입장의 의견을 내세우는 이들의 존재도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문열은 특히 지식인 층에서 이런 쏠림이 있음을 지적했다. "지난 6번의 대선에서 일반 유권자의 지지 형태는 어느 쪽을 여야로 하든 55대 45의 비율 안에서 움직여왔는데, 작가들의 지지 형태는 9대 1 혹은 10대 0으로 보일 만큼 한 정파에 쏠려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왜 진보진영의 허점에 대해서는 신랄하면서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미온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이들이 그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언급이 잘 되지 않은 것들을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단 이문열이 간혹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에 반감을 표하는 등 상당한 엘리트주의적 견해를 드러냈다는 한계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저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이념마저도 '너무 큰 크기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불만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문열은 어느 정도는 실제로 그랬다. 이문열의 보수적 성향이 단순히 균형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이문열이 보수적 견해를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 담론(실제로는 보수-진보가 아니라 민주주의-반민주주의일 수도 있는)의 균형에 민감했다는 인식이 더 적절할 것이다. 특히 이문열의 문학에서 초월적이고 강한 지도자가 자주 숭앙되는 것이나, 기타 강한 정치권력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발언들을 보면 사상적으로는 아무래도 보수 지지층의 스펙트럼에 가까운 인물이다.
1990년대 중반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집필 논란 때 신문칼럼에 마광수의 작품을 비판하였으며,# 마광수 교수가 체포 당시 법원의 결과에 칭찬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책에 관해 적었던 '읽고 난 뒤 내가 먼저 느껴야 했던 것은 구역질이었고, 내뱉고 싶던 것은 욕지기였다'라는 직설적인 발언이 알려진 까닭에 작가에 대해서만 공격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해당 문구의 바로 뒷부분에서 '그런데 그로부터 사흘도 안 돼 두 번째의 구역질과 욕지기가 첫 번째의 그것들을 잊게 했다. 검찰이 이례적으로 시퍼렇게 칼을 빼들고 그 책의 저자와 발행인을 구속했다는 보도였다.'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검찰의 처사 또한 함께 비판했음을 알 수 있다.[9]
역사관적으로 노론 음모론을 믿고 있고 노론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조상은 영남 출신의 퇴계학파의 권위자이자 남인이었던 갈암 이현일이었다. 이현일은 숙종의 환국정치의 희생양으로, 역적이라는 억울한 오명까지 쓰면서 정계에서 퇴출당했다. 숙종이 판을 깔아놓은 탓에 집권당인 노론은 이현일을 역적으로 몰아 비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탓에 이현일의 학파나 가문 측에서 노론을 증오하게 된 것이 이문열의 대에까지도 이른 것이다. 이현일이 퇴계학의 권위자라 영남 유생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서인의 학문의 조상인 율곡 이이를 심하게 비판한 까닭에, 조선 말에 들어 이현일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는 하나 노론 입장에서는 노론대로 여전히 껄끄러운 인물이었으니 오늘날까지도 이현일의 후손들과 막역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는 셈. 이문열은 작가이지 역사학자는 아니다 보니 ㅇ
그의 정치적 견해와 별개로, 논객으로서 역량이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으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2000년대에 여러 논쟁을 촉발시킨 그의 칼럼들에서도 알 수 있듯, 이문열은 정연하고 엄밀한 논증을 시도하기보다는 과격한 언사를 필두로 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선에서 그치곤 했으며, 그 과정에서 특정한 대상을 홍위병이나 나치당원이 연상된다며 음모론적인 인상비평에 의존하는 모습도 잦았다. 그 탓에 2000년대의 유명한 젖소부인 논쟁에서는 진중권에게 크게 패하는 등 전적이 좋지 않았다.
2000년에는 '홍위병 발언'으로 논란이 일어났고, 진중권과 지면상으로 '젖소부인' 논쟁을 벌였다.# # # 이 논쟁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거의 모든 면에서 이문열의 완패라고 할 수 있었다. 이문열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지만, 그러한 정치적 성향의 표현이 결과적으로 추하게 끝났다는 것도 놀랍다. 2020년 지금에야 이문열이 작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2000년에는 문단의 원로이자 현역 작가로 존중을 받던 대문인이었다. 그런데도 그 논리구조가 정밀하지 못한데다 다분히 감정적이어서, 그의 칼럼이 실패작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문열의 기고문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서 소동 등이 그토록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것은 그만큼 이문열의 패배가 비참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2000년의 젖소부인 논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도 이문열의 '밑천이 드러난' 상황이었던 것이다.
논쟁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두고 벌어졌다. 이문열은 총선시민연대가 여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관제단체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며 총선시민연대를 홍위병에 비유하였다.[10] 여기에 진중권은 이문열 자신의 칼럼을 바로 인용하여[11] 총선시민연대와 홍위병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이문열이라고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는 음모론을 던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같은 논리라면 '에로영화 스타 젖소부인과 소설가 이문열의 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관계다.'라는 진술이 기사에 실려도 된다며 이문열의 발언을 그대로 돌려보낸다.[12]
이 다음에는 소설가 박경범이 이문열을 변호하지만, 그 논리가 영 궁색하다. 총선시민연대의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체제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며 퉁치고 넘어가는 한편 진중권이 언어폭력을 행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중권은 박경범의 견해들 인신공격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첫 번째 논쟁에서 했던 수법대로, 상대의 말을 그대로 차용하여 논리 구조에는 변화 없이 내용만을 변주함으로써 역공을 하는 것이다. 즉 진중권이 이문열을 젖소부인과 관계가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같은 이치에서 이문열이 홍위병을 들먹이는 것 역시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문열이 직접 나오지 않고 대신 다른 사람이 나와 논쟁을 벌인 것 역시 까고 있는데, 이것 역시도 '박경범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문열과 관계가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며 박경범과 이문열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를 붕괴시킨다.
이문열의 논객 커리어를 통틀어서도 특히 추한(...) 흑역사 중 하나가 바로 이 시점에서 등장한다. 공자의 말을 인용해 세태를 비판하는데, 겉으로는 공자의 도가 오늘날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진중권과 같은 논객들을 명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정치가 대부에게 있지 않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서민들이 정치를 비판하지 않는다",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니 두려워하지 않고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같은 논어 구절을 인용하고, "참으로 세상이 뒤집혀도 어찌 이리 뒤집혔을꼬."와 같은 표현을 써 가면서 시민들이 정치에 왈가왈부하려는 것, 그리고 진중권이 대인에 해당하는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에둘러서 한탄하고 있다.[13] 물론 이와 같은 이문열의 주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중권은 "이 말의 밑바탕에는 정치가 시민들의 것이 아니라는 발상법이 깔려 있다."는 점을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이문열의 말이 이문열 본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다시 지적했다. 즉 이문열이 보기에 권력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현대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주제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문열이라고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인 것이다. 오히려 이문열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같은 시민사회의 일원인 것을 모르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착각을 한다는 인상을 주는 오만무례한 발언이었다.
위와 같은 세 차례의 논쟁에서 진중권은 이문열의 주장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데 성공했고, 반대로 이문열과 박경범은 진중권에게 한 차례도 유의미한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세 번째 논쟁의 경우는 실은 논증이라 할 만한 유의미한 언사도 없어서, 자신이 잔뜩 뿔나 있는 늙은 시대착오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 것 말고 도무지 성과가 없는 말싸움이었다. 이문열은 전문 논설가는 아니었으므로 진중권과의 논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그의 커리어에서 큰 결함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때 지식인으로 여겨졌던 이문열이 상당한 논리적 허점을 드러내고,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반복하며 꼰대 같은 언사를 하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이 때부터 이문열은 본격적으로 우파 논쟁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세 번째 논쟁에서의 이문열의 견해는, 민주주의의 정의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극우적인 견해를 드러낼 것은 어느 정도는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2000년대에 이문열이 드러내는 정치적 의견들은 '시론에 대한 보수적 견해'쯤으로 비교적 온화하게 드러나 있거나 그렇게 인식되고는 하나,[14] 이미 그 근본에서는 한계가 뚜렷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안티조선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문열과 사상적으로 대조되는 위치에 있던 논객 강준만은 이문열이 진중권이라는 임자를 만났다고까지 풍자하였는데, 논쟁의 전개를 살펴보면 강준만의 평가가 매우 솔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2001년에 '홍위병 발언'으로 논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책 장례식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건의 발단은 7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문열은 조선일보에 당시 정부의 언론 세무조사를 비판하는 내용의 시론을 썼다.# 여기 실린 발언에 대해 추미애 의원이 곡학아세라는 표현을 쓰는 등 해당 시론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를 둘러싸고 설전이 벌어졌다. 동시에 이문열의 홈페이지에서는 며칠 사이에 3,000여 개의 글이 쇄도하는 등 네티즌의 글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중 '콜리산'이라는 ID를 가진 네티즌은 "당신의 태도에 실망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 20여 권을 반송할 테니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했고 이문열은 "반송해 주시면 책값은 현행법상 최고 이율을 붙여 반환하겠습니다. 아울러 부탁하는 바는 어디 가서 내 책을 읽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다소 감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이와 관련해서 자신에게도 책값을 반환해달라는 요구가 올라오고 책값 반환에 대한 글들이 게시판을 채우는 등 논쟁이 격화되자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감정이 다소 격앙된 상태에서 내 글을 이해 못 하는 특정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값을 반환해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것이 확대 해석된 것"이며 "책값 반환 문제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밝혔다.# # 결국 7월 6일 홈페이지는 잠정적으로 폐쇄되기까지 했고, 9일에는 책값 반환 발언에 대한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런데 7월 8일 이문열은 안티조선운동을 벌이는 일부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하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써서 또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항의하는 독자들이 모여 11월 4일 이문열이 살던 부악문원을 찾아가 책을 반환하려 했지만 이문열 측은 이 책들의 인수를 거부하였고, 반환하려던 측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책 장례식'을 치른 뒤 책을 거둬가 고물상에 팔았다. 3달 뒤에는 옥천군에서 이문열의 책들을 풍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문열이 그들의 고향을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15] [16] 이 인터뷰에서 이문열은 자신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패를 아쉬워했다느니, 한일합방은 합법이라고 했다느니 하는 등의 소문이 와전된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문열은 이 일을 회고하면서 "그 사건 이후 담배를 끊은 이유가 '살아남아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사실 작가의 정치적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부인하고, 또 그런 내용의 퍼포먼스를 그것도 작가가 생활하는 공간 바로 앞에서 벌인다는 건 문화인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일이고, 당시 여러 다른 작가들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완전히 정치적 견해가 다른 황석영 작가도 비판에 합류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문인의 작품들을 태우는 행동은 정치적 견해를 떠나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17] 이 사건으로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이문열은 얼마 동안 한국을 떠나 있기도 했다. 책 장례식 사건이 있은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홍위병 발언 등을 두고 안티조선 측에서 이문열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신기남의 조상이 친일파 그것도 국가 헌병대 오장이라는 게 드러나자 당시 친일청산 아젠다의 형평성과 신기남을 저격하는 내용인 「겜뻬이 고쬬와 오니 게이부」라는 외부칼럼을 중앙일보에 투고, 김대중 정부 당시의 '홍위병 발언' 필화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칼럼도 많은 구설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던 전력도 있다. 다만 TV 방송에서 임수경에게 육두문자를 날렸다는 것은 오보로 이문열은 그에 대해서 사과까지 받았다.
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 前 국무총리, 정호용 前 국방장관, 박재완 前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주호영 現 대구 수성구 갑 국회의원, 강재섭 前 한나라당 대표, 심대평 前 충남지사, 윤상현 現 인천 동구·미추홀구 을 국회의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가수 이미자, 국내 최고령 유튜버인 김동길 등이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작한 촛불시위에 대해 12월 2일자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 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라고 언급했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매스컴이 바람 잡아 사람들을 불러 모은 숫자"라 말했다. 그리고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김일성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축제)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라며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며 제3자 의견을 에둘러 전했다.
원래 그는 탄핵을 지지했다고 하지만 촛불집회를 보면서 탄핵을 찬성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 촛불광장 민심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를 말하고 정권교체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촛불집회를 과거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당시 촛불집회,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당시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탄핵을 지지한 이유는 헌법 재판소 판결을 겸허히 기다리면 자연히 촛불은 꺼질 줄 알았는데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헌재가 차분하게 판결할 수 없고 촛불이 헌재로 옮기게 되면,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결과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0년대 이후 이문열이 쓴 칼럼들에서는 감정적이고 과격한 언어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져, 그가 온건한 보수가 아니라 극우에 가까운 인사가 아닌가 하는 비판의 여지를 생기게 만들었다.[18] 위에서 언급된 조선일보에 올라온 글만 보더라도 '국세청이 언론기업의 탈세혐의를 검찰에 고발하는 것을 3개뿐인 방송사가 모두 생중계하고 종일 그 뉴스로 화면을 뒤덮는 걸 보면,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나치 독일의 대국민 선전 선동을 연상시킨다.'고 쓰는 등 상당히 강한 논조였다.
2018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직을 사임하면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에서 날선 발언을 쏟아냈다.# [19] 최근에는 문화계 전반에 퍼진 좌파 일색의 헤게모니에 대해 비판했는데, 심상치 않은 극우적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Q 보수 우파가 헤게모니 장악에 실패한 이유는?
A “이는 뼈저린 반성을 요하는 것이다. 내 짐작으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런 진지전(陣地戰, War of Position)에 관심조차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이는 오히려 자신도 학창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몇 달 감옥 갔다 온 걸 은근히 내세우고 싶어 하는 데마저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껏 어릿한 초등학교 반장이 적어낸 불량학생 명단보다 더 애매한 블랙리스트 같은 걸로 애꿎은 각료들이 감옥이나 들락거리게 했다.[20] ‘민주화’의 탈을 쓴 좌파들이 음험한 진지전을 이미 30년이나 수행해 온 터라 심각하게 대처할 방안을 강구해야 했는데도 두 전직 대통령 모두 너무 소홀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전 대통령에게는 한 번 진지하게 말할 기회가 있었으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고, 박 전 대통령은 아예 만나 본 적조차 없었다. 그렇게 넋 놓고 9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사이 한층 고도화되고 기민해진 저들의 전략에 진지가 다시 탈환당하면서, 뒤이어 밀어닥친 기동전(機動戰, Mobile Warfare)에서도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21] #
2019년에 들어선 광화문에 나타나 연설을 하기도 하며#, 친이,비박,친홍 인사들이 모인 국민통합연대를 만드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이전]
자세한 내용은 이문열/작품 목록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사람의 아들 (1979)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1980)
젊은 날의 초상 (1979~1981)
황제를 위하여 (1980~1982)
대륙의 한 (1981~1986)
영웅시대 (1982~1984)[23]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987)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26] (1984~1989)
시인 (1990)
변경 (1986~1998)
오디세이아 서울 (1992)
선택 (1996~1997)
아가 (2000)
호모 엑세쿠탄스 (2006)
리투아니아 여인 (2010~2011)
새하곡 (1979)
들소 (1979)
그해 겨울 (1979)
어둠의 그늘 (1980)
필론과 돼지 (1980)
금시조 (1981)
사과와 다섯 병정 (1981)
익명의 섬 (1982)
칼레파 타 칼라 (1982)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87)
시인과 도둑 (1992)
사로잡힌 악령 (1994)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 (1998)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 (2001)
제15회 동인문학상 수상 | ||||
전상국 (1980) | → | 이문열, 오정희 금시조 동경 (1982) | → | 김원일 (1984) |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 | ||||
최일남 (1986) | → |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1987) | → | 임철우 한승원 (1988) |
제37회 현대문학상 수상 | ||||
한수산 (1991) | → | 이문열 시인과 도둑 (1992) | → | 박완서 (1993) |
[1]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제 2회 브나로드 운동 에 계몽대원으로 참여한 바 있을 정도로 당시에 의식 있는 인텔리였다.1932년 7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2]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3] 대중적인 성공을 한 것도 아니었고 평자들의 반응도 심드렁한 편이지만 작가인 이문열은 만족하는 작품 중 하나로 꼽기도 하는 소설이다.[4] 이 책이 출간된 2001년 이후에는 중단편을 아직 1편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5] 시기상으로 <변경>의 다음 부분에 해당하며, 여러 차례 이 시기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6] 그가 삼국지M 홍보모델로 나온다는 소식을 접한 삼국지 컨텐츠 젊은 층 대다수는 아무렇지 않게 묻어간다며 학을 뗐다.[7] 그러나 가족이 월북을 했다고 모두 극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월북을 했어도 여전히 진보계에 몸을 담고 진보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문열의 반 좌파 성향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 중 하나로는 그가 아버지의 월북 문제 이전에 그저 권력을 갖고 싶어 안달하는 소시민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8] 참고로 이문열은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라면?: "'가장'이란 말을 덧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여럿 있다. 하지만 거명하기는 조심스럽다. 살아있는 사람을 거론하면 줄 세우는 꼴이 될 수도 있고, 원로가 빠지면 섭섭해 할 수도 있고.(웃음).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황석영 선배가 다양성이나 기교의 화려함이나 독특한 안목, 모든 면에서 우뚝하다. 진지하게 파고 드는 걸로는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 선생은 지겨울 정도로 세밀하게 살피고 이모저모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웃음) 최인훈 선생도 거대담론적 사고로 가공해 내는 것을 보면 언제나 감탄스럽다. 이병주 선생의 글도 그 풍려(豐麗)와 우미(優美)를 좋아한다. 특히 '지리산'은 압권이다. 자발없는 표절 시비로 상처를 입긴 했지만, 한길사에서 나온 걸 최근에 다시 봤는데 정말 잘 쓴 글이었다. 그밖에도 우리 문단은 풍성한 자산이 있다."[9] 마광수는 이에 앞서 이문열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근본적 원인이 독자들의 교양주의 선호 현상에 있다고 이문열을 비판한 바 있다. 이문열은 물론 대한민국 작가를 통틀어서도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고 할 만한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성공비결이 대학의 논술전형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는 평가이다. 이로 인해 마광수와 이문열은 서로에게 아주 적대적이었다.[10] 이 밖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 그레샴의 법칙 을 잘못 인용하여 악화(악화惡化)가 양화(良化)를 쫓아낸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11] "끊임없이 나도는 음모설(陰謀說)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정부나 여당이 총선연대의 조직과 활동에 개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시민단체의 선의(善意)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 그런데도 총선연대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면 자꾸 홍위병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는 부분을 인용했다. 이문열은 이 부분에서 근거는 없지만 홍위병이 연상되니 앞으로의 행보를 조심해 보아야 한다는, 신중론을 가장한 일종의 음모론을 제시하고 있다.[12] "이문열 씨는 지금은 존경받는 소설가이지만 앞으로는 모 정당의 대변인이 되거나 그 당의 공천을 받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나도는 야합설에도 불구하고 물론 현재까지 이런 발언을 하는 이문열 씨가 정치권 일각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의를 의심할 근거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행각을 보면 자꾸 나치 친위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의 활동이 이제 시작이며, 정말로 중요한 전개와 변화는 앞날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진중권이 인용한 이문열의 표현을 단어만 바꾸어 역공한 것이다. 만약 이문열이 최초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논리 구조가 동일한 진중권의 공격에도 긍정해야 한다.[13] 이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도 산다'는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실제로 동명의 동명의 책 이 존재했기에 나온 말이다. 2020년 기준으로는 유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유교를 지나치게 폄훼하고 있는 책이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무척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극심하던 국수주의 를 비판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부터 유교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꾸준히 재생산되는 데에는 이 책의 영향이 상당하였다.[14] 여기에는 이문열의 반대측에 선 시민들이 이문열의 작품들을 분서하는 것으로 과격하게 대응한 탓에 이문열 자신은 동정표를 받아간 것도 있다.[15] 그러나 2006년 12월 11일자 경향신문의 기사에서는 이문열이 자신의 소설책 반환운동을 벌인 모 사진작가한테 "당신이나 당신 부모, 혹은 책 반환운동을 하는 자들이 전라도일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16] 아울러 저 첫번째에 링크한 기사는 이문열 본인의 해명(?)일 뿐이며, 2006년 7월 2일자 대학원신문에도 이문열의 전라도 발언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 [17] 다만 이런 '이문열 화형' 퍼포먼스가 너무 자극적이었기에 반발을 산 나머지, 2020년 현재를 기준으로 이문열이 이 당시 드러낸 견해들에는 옹호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논쟁들을 촉발시킨 것은 이문열의 음모론적 언사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18] 사실 좌파=민주화 운동권=빨갱이 식의 등치를 숭상하고 극단적인 혐오와 멸시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문열은 충분히 극우라고 볼 수 있다.[19] 다만 저 기사는 5.18을 부정적으로 보고 전두환을 긍정적으로 보는 내용이라 많은 네티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이문열은 전두환을 세조에 비유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심지어 전두환의 팔순 잔치에도 참가할 만큼 전두환에 너그럽다.# [20] 문화계 블랙리스트보다 더 강력한 대안이 필요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21] 현실 인식도 피해망상적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진지전', '탈환', '기동전'등의 표현을 사용해 정치적 대결을 전쟁에 진지하게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념 문제를 전쟁과 동일시하는 사고 양식은 오히려 그가 경멸해마지않을 NLPDR 내지는 주사파 계열에서도 투쟁과 희생을 미화하며 사용하곤 했던 견해이기 때문. 극과 극이 정말 닮은 꼴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만한 어휘 선정 이다.[이전] 서술에는 전광훈 과 만든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사실 전광훈은 축사하러 온 것이다. 축사 때도 대한민국 망한다 같은 소리를 해대서 좋은 소리는 못들은 편.[23] 2004년 드라마 영웅시대와는 관련 없다. 같은 mbc에서 1980년대에 김종학 연출로 드라마화된 적이 있다. 이문열 아버지를 다룬 소설.[24] 중년교수와 미혼 여기자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의외로 평가가 좋은 작품.[25] 이상주의적인 인텔리 주인공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 위선이 있고 한쪽이 다 옳은 건 아니라는 자각에 이른다는 작품. 이때부터 이문열이 현실에 실망하고 보수로 완전히 전향하는 모습을 보인다.[26] 고종 이 감동적인 연설을 남기고 1919년에 자결하고, 일본 이 냉전 시기 동서로 분열되는 등 일제강점기 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내용을 뒤집어서 표현하고 있다. 서일본은 북한 과, 동일본은 대한민국 과 거의 99% 같은 역사를 밟는다. 하지만 그다지 잘 팔리지 못했으며 헌책방 에서나 가끔 보인다. 인터넷에서 평가도 거의 없는 수준. 대체역사소설 이란 말이 있으나 역사의 중요 장면을 비틀어 봤을 뿐이지 대체역사소설이라고 보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풍자소설이다.[27] 이문열이 2000년대 초반에 미국 에서 체류하는 동안 《사기 》를 읽고 구상한 작품. 평역인 《삼국지》와 다르게 이문열의 오리지널 작품이니, <삼국지>에서처럼 내러티브를 해설로 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된 후 출간되었다. 보통 초한지가 항우 의 자결이나 한신 의 최후에서 끝맺는 경우가 많은데 이문열 초한지는 여후 가 죽고 주발 과 진평 이 여씨 일족을 토벌하고 한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우는 것까지 나온다.[28]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대하여 쓴 소설. 조선일보 에서 연재를 마친 후에 발간되었다. 그의 최근작 중에서 꽤 괜찮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29] 남한의 교수인 화자가 중국 의 북한 접경 지역에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이복 아우를 만난다는 내용으로 유교적 방법론에 의한 남북 화해와 통일을 모색하고 있는 작품이다.[30] 90년대 후일담 문학이 횡행하는 와중에 문학계가 잘 다루지 않았던 운동권의 부정적 실상을 폭로한 작품이다.
맨위로 가기
첫댓글 이문열작가의 파란만장한 인생길
바로 그것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
중1로 중퇴하고
고1로 중퇴하고
대학교도 1년만에 중퇴한 그 파란만장한 인생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