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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 한문학 「남명(南冥)과 유헌(游軒)의 상봉(相逢)」 거제시 고현동>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지금부터 약 470여 년 전에 경남 거제도에서 당시 영호남 유학자의 거두(巨頭)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과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이 상봉(相逢)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이에 그 상봉 사실을 알리고 그 뜻을 새기자는 의미에서, 고전학자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가 지은 칠언고시(七言古詩) 「남명 유헌 상봉 거제(南冥游軒相逢巨濟)」라는 한시를 소개한다.
이 고시(古詩) 내용에 의하면, 계축년(癸丑年) 1553년 가을에 남명(南冥) 선생은 사화(士禍)로 인해 거제도로 유폐된 유헌(游軒) 선생을 방문한다. 1545년 이른바 을사사화와 함께 출범한 명종 때,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한 것은 외척(外戚),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신료들이었다. 그래서 두 분은 참혹한 세상의 사화(士禍)를 논하지 말고 경(敬)과 의(義)로써 학문에만 전력하자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유헌 선생이 척신정치의 시폐(時弊)를 척결해야 한다는 상소를 보여주니 남명 선생이 “귀양살이하는 신세로 이러한 상소문을 올리면 목숨을 보전키 어렵다”며 극구 만류하여 중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던 정황(丁熿)은 거제도 배소(配所) 계룡산 아래 해산(亥山)의 집까지 찾아온 조식(曺植)과 더불어 예(禮)를 논했다. 이보다 앞서, 유헌 선생이 예전에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천 리 먼 경상도 남명 선생과 서로 서신(書信)을 통해, 사귄 지가 12년이나 지난, 1553년 가을 이날 저녁에야 두 분이 상봉할 수 있었다. 당시 남명 선생 나이가 11살이나 더 많아, 유헌 선생이 예를 갖추어 어른인 ‘장로(丈老)’로 호칭하였다.
한편 거제도의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은 1545년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 '선왕의 신하 죽이기'로 파직당하여 잠시 고향에 살다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 발생, 1547년 경상도 곤양으로 처음 유배 갔다가, 1548년부터 거제도고현동으로 이배(移配)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 [거제도에서 상봉] 1553년 가을, 남명(南冥) 선생은 합천에서, 부인이 거주하는 경남 김해를 방문하였다가 배를 타고 거제도 영등포 나루에 도착하여, 영등포 만호 신경숙(愼敬叔)의 안내로 거제시 고현동 現공설운동장 인근, 정황(丁熿) 선생의 배소를 찾게 된다. 당시 서울에서 내려오는 편지나 물품 등의 우편물은 1500년에 새로이 축성∙정비한 오양역을 거쳐 읍치인 고현성에 도착하여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또한 가족과 함께 거제도로 내려온 서울 파견 관리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거제향교가 있는 읍치 고현동에 거주하면서, 각 임지(任地) 즉, 수군진영이나 목장점마소 등을 몇 주 간격으로 다녀오곤 했다. 거제도 장목면 율포 권관 노대유(盧大猷)나 영등포 만호 신경숙(愼敬叔), 만호 이지형(李之亨, 養仲), 구천동 점마소 유지숙(兪評事九川點馬所)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던 관리였다. 이들은 고현동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거제향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정황 선생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후에 임기가 끝나 서울로 상경한 후에도 서로 간에 안부∙서신을 교환하였다. 이때 방문한 남명 선생은 거제현령 권이평(權以平, 父 權彬)의 안내로 거제향교와 읍성 고현성 등을 둘러보고 며칠을 보낸 후에 거제 오양역‧견내량을 거쳐, 고성‧진주를 경유해 합천으로 돌아갔다.
○ 지금까지 남명(南冥)과 유헌(游軒) 선생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신흠(申欽 1566~1628)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②권상하(權尙夏)가 1761년 쓴 <한수재집(寒水齋集)>, ③<유헌선생년보(游軒先生年譜)> 계축년(癸丑年) 1553년 선생 나이 42세(先生四十二歲) 때 기록, ④남명(南冥) 조식(曺植)과의 문답(問答) <유헌선생 속집 권지5>, ⑤<유두류록[遊頭流錄]>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58년 지리산 유람기가 있다.
◉ 남명 선생은 경상도 각지를 유람하시며 문사를 만나고 학문을 연찬∙강론 하시니 유헌 선생께서 그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에 감탄하였다. 조선중기 우리나라 평균 사망 나이가 약 40세인 점을 감안한다면, 두 분의 상봉 時 남명 53세, 유헌 42세였으니 두 분 다 노인들이었다. 이후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1558년(명종13년) 그의 나이 57세 때 두류산(頭流山) 즉 지리산 전체를 유람한 적도 있었다. 특히 남명 선생은 문무(文武)를 두루 갖추고 의리(義理)와 의기(義氣)의 실천을 강조해 사회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또한 직설적이며 단순명쾌한 화법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헌(游軒) 선생은 조광조(趙光祖)의 제자로서, 유교의 이념은 예의 실천을 통해 실현되므로 예학(禮學)을 중시하였으며, 예의 근거를 인간의 본질에 두었다. 이에 예의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예의 정신은 불변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 정통 유학자였다. 이러한 두 분의 우정으로 유헌 선생이 사망한 1560년 그의 제자들이 대부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문하생이 되었다.
○ 두 분 선생이 거제도에서 시국에 관해 전반적인 대화를 나누었던 1553년에는, 20살이 된 명종이 친정(親政)에 나섰던 해(年)이다. 유헌 선생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의한 척신정치의 폐단과 관리들의 부정축재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문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작성했는데, 당시 거제도에서 이를 읽어 본 남명 선생이, 내용이 너무 격렬하다 염려하면서 말하길, “수렴청정만 거두었지 실제 권력은 변함이 없다.”고 강변하면서 유배자의 처지를 고려해 상소를 거두도록 설득하였고 결국 유헌 선생은 이를 따랐다. 이 상소문은 유헌 선생 사망 후 그의 아들과 문인, 제자들이 수거해 갔다가 <유헌선생집>을 정리∙발간하면서 후환(後患)이 두려워 싣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상소문(上疏文)과 남명 선생과의 시국에 관한 대화가 알려지면, 집안과 문하생 모두가 또 다른 큰 화(禍)를 당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거제도에서 만난 두 분은 밤새도록 시국과 학문에 관해 회포를 나누었는데, 아마 생선 안주에 술을 드시며 더불어 거나하게 취했을 것이다. 1558년 남명(南冥)이 쓴 ‘유두류록(遊頭流錄)‘편 내용에 의하면, 거제도 정황 선생이 하인을 시켜 지리산을 유람하는 조식 선생께 술과 생선 안주를 보낸 사실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 다음 ‘庚’ 운의 칠언고시(七言古詩) 「남명과 유헌이 거제도에서 상봉하다(南冥游軒相逢巨濟)」는 거제시 고전학자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의 2015년 作 한시다. 이 글은 총 16구(句)의 칠언고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4구(句)씩 4단락으로 구성했고, 1553년 가을, 거제시 고현동에서 남명(南冥) 선생과 유헌(游軒) 선생의 상봉(相逢)을 다루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첫단락에선, 뛰어난 형승을 자랑하는 거제도에, 남명 선생이 젊은 시절부터 서로 서신을 주고받던 거제유배객 유헌을 방문했다. 둘째 단락에선, 혹여 그물 구덩이에 걸려들까 두려우니 참혹한 세상의 사화(士禍)를 논하지 말고 선비로서 학문에만 전력하자. 셋째 단락에선, 좋은 술과 생선 안주를 놓고 서로 마음을 터놓는다. 경(敬)과 의(義)로써 안과 밖을 살피고 예법에 따라 행동하자고 약속한다. 넷째 단락에선, 을사사화로 피해가 막심하니 척신정치를 척결해야 한다면서, 시대의 폐단(時弊)을 적은 상소를 보여주니 남명 선생이 힘써 말렸다는 줄거리다.
*「남명과 유헌이 거제도에서 상봉하다(南冥游軒相逢巨濟)」* 1553년 가을 거제시 고현동 /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嶺南形勝優岐城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형승을 자랑하는 거제도에,
丈老情意來訪程 어르신이 방문한 정과 뜻을 헤아린다.
盛年官吏往來書 젊은 관리 시절부터 서신을 주고받았다지만
相逢一醉豈容輕 서로 만나 한 번 취함을 어찌 가벼이 했으랴.
德業相勸優遊適 유헌 선생이 덕업상권하고 우유자적하며
藏修遊息未歸情 학문에 전력해도 돌아갈 수 없지만
世事莫論士禍後 참혹한 세상의 사화(士禍)를 더 이상 논하질 말자.
却恐危途觸罻坑 험난한 길에서 그물구덩이에 걸려들까 두렵다네.
南冥游軒話所思 남명과 유헌이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데
魚肴佳醑樽滿盈 물고기 안주에 좋은 술이 동이에 가득하네.
敬以直內義方外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바르게 하며
多事禮法實躬行 세상의 여러 일에는 예법이 있어 알맞게 행동하여야 한다.
乙巳喪亂幾家門 을사사화 난리 통에 몇 가문이 남았더냐며
戚臣弊端招說明 척신정치 폐단을 지적하고 설명하면서
示意草疏題時弊 유헌 선생이 시폐(時弊)를 쓴 상소를 보여주니
南溟往見說止征 남명 선생이 보고는 힘써 말려 그만두었다네.
◉◉ 1553년 가을, 두 분이 거제도에서 첫 상봉한 날 저녁에, 예법에 관심이 많았던 유헌 선생이라 그런지 ‘부모상(喪)과 임금의 상(喪)’, 즉 상례(喪禮)에 관해 문답(問答)한 글이 <유헌선생 속집 권지5>에 전해오고 있다.
내용인즉, 부모나 임금이나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일반 백성은 3년 시묘(侍墓)살이를 할 형편이 안 되지만, 사대부 양반은 반드시 행해야만 하고, 시묘살이로 기력이 쇠하고 어려우면 형제나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집안의 종을 시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아니 되며 남녀가 함께 시묘살이를 해서도 안된다. 임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씨가 다른 신하에게 맡겨서도 아니 되며, 종친이나 여러 왕자, 또는 부마가 서로 형편을 고려해서 봉사케 해야 한다는 요지이다. 무엇보다도 궁중의 장례절차와 예법에 정통한 유헌 선생이었지만, 남명 선생의 의견을 복응(服膺)하고 기록한 점은 유헌 선생이 남명 선생을 많이 존경하고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과의 문답(問答)」*** <유헌선생 속집 권지5> 1553년 가을, 정황(丁熿) 42세, 거제도 고현동 배소.
[ 이달 11일 저녁에 건중(健仲, 조식의 字) 조남명(曺南冥) 장로(丈老)께서 영등포 나루를 거쳐 쓸쓸한 나의 해산(亥山) 집에 이르셨다. 서로 마음(書信)으로 천 리에서 사귄지가 12년이 됨에, 이날 저녁 만남은 어떠한 저녁이었더냐. 얼굴을 뵙고 말씀을 나누매, 그렇게 적막한 속에서도 기쁨과 다행함이 어떠하리오. 고루한 처지에 비린(鄙吝)한 인생이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분류로 돌아감이 오래되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시고 큰 공적도 없는 이 사람에게 잡초를 베어 내는 공과 때를 문질러내고 갈아내는 노력이 있다고 생각하셨으니 장로(丈老)의 부지런함이시다. 그 어진 마음이여~ 그 어진 마음이여~
곁에 있던 손님이 장로(丈老)에게 묻기를, “부모의 상을 다함에 조석으로 제물(奠)을 올려 3년이면 마치는 것은 곧 죽은 이를 산 사람같이 섬기고 사망한 이를 생존한 이와 같이 섬겨서 미루어 옮긴 것이다. 사람이 대현(大賢) 이상으로 인정(人情)과 도리(道理)의 바른 길을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구한 사정으로 거의 변하지 않는 도리를 행하지 않게 됩니다.
3년 전, 효자의 마음이 어찌 성인(聖人)의 제례(制禮)에 범할 수가 있으랴마는 스스로 그 성품이 편벽하게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하다가 사당에 신주를 모심에 이르렀다. 억지로 풀밭 땅 집에 머물면서 정성을 다하여 그 몸을 바쳐 죽는다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어진 마음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익히고 숭상함이 있는 어진 이와 군자에게서도 그릇된 것을 깨달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재계하는 곳인 무덤 아래에서 남녀가 섞여 거처하는 것은 사람의 예의에 불합(不合)할 뿐만 아니라, 신령의 도리에도 더욱 죄송한 것입니다. 주부(主婦)와 버금며느리도 따라가지 아니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늘, 더구나 마땅히 멀리해야할 여종을 어찌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맏상주를 따르는 남자 종은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씻는 외에 당에 올라서 식사를 올리고 빗자루를 잡으니 부인 가까이 자리할 때마다 미안하겠지요. 이전부터 평소 내외의 사이가 엄격하게 지냈는데 이로써 지금 바뀌니, 진실로 우리 어버이가 죽었다는 의심을 하게 되어 번민이 긴박합니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였다.
남명(南冥) 장로(丈老)께서 말씀하시길, ”효자가 부모 상(喪)을 당해 음식 맛을 잃고 기력이 저절로 소모되어 소리 내어 슬피 울며(哭泣) 거상(居喪)을 하니 질병이 따라서 생긴다. 그 사이에 노쇠함이 오게 되면 진실로 스스로 거상(居喪)을 마칠 수 없다. 3년 사이에 남자 종을 대신하는 것은 진실로 손님 말과 같다. 부득이 대신하게 할 적에는 자제(子弟)를 쓰는 것이 옳다. 자제가 없으면 집안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하셨다.
유헌(游軒)이 말하길, ”일반사람이라면 그 가르침을 듣겠습니다만 군신(君臣)의 거상(居喪, 除)도 부자의 상(喪)처럼 한결같이 해야 합니까? 가로되, 제가(齊家)를 하고 치국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치국의 도리가 어찌 제가와 다름이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 능(陵)에 대왕과 왕비가 같은 언덕에 있는 것도 있고 또 왕비 홀로 무덤을 한 것도 있는데 전각 내(殿內)의 평상(平床)이나 침대(寢臺) 등의 여러 기구 및 제사 물건 종류들을 참봉(參奉)이 지키는 종과 더불어 그 일을 집행하고 있으니 이전에 나의 모친이 불안(不安)한 것 같았으니 하물며 임금의 모친인들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로(丈老)께서 말씀하시길, “여러 능(陵)에 일이 있음에 다른 성씨를 가진 신하를 사용하는 것은 과연 강론을 아니 했음이다. 그러나 왕자와 여러 군(君)과 부마(駙馬) 및 종친의 복이 다하지 아니한 자는 이로써 다른 성씨의 신하의 소원(疎遠) 즉, 서먹서먹한 신하를 대신함이 대체로 옳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장로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것은 집안이나 나라에 시행할 수가 있는 것으로, 그 외에 복응(服膺) 즉, 가슴속에 깊이 새겨두어 빠뜨리지 아니하여야하며 만만히 말할 바가 아니다. ]
◉ [척신(戚臣)정치 폐단] 덧붙여 1545년 인종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급서하자 이복동생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명종을 대신하여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정사를 처리하고, 그녀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1553년 20살이 된 명종은 친정(親政)에 나섰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명종이 취했던 방식 또한 다른 외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妃) 심씨 집안의 인척 심통원(沈通源)과 이량(李樑) 등을 중용하여 윤원형을 견제했다. 훗날 이량의 권력이 너무 커지자 이번에는 자신의 처남 심의겸(沈義謙) 등이 나서 이량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이래저래 척신들이 판을 칠 수밖에 없었다. 척신정치 아래서 갖가지 모순들이 터져 나왔다. 척신들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여 조정 안팎의 관직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들을 심었다. 지방 수령이나 변방 방어를 책임지는 병사(兵使), 수사(水使)들은 척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청탁했던 인물들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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