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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처럼 희망이
내 믿음으론 지옥에도 천사가 살고 있으리라
나무가 햇빛 쪽으로 기우는 걸 보면
희망 때문에 몸이 아프다
저 어린 희망에게 나는 젖병 한 번 물린 적 없다
담쟁이 잎이 우표처럼 벽에 붙는 걸 보며
오늘은 햇살 빗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는다
한 번만이라도 천국엘, 나의 희망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함께 가자 말하지 않았는데 내 발등에는
일생이 가랑잎처럼 수북이 쌓여있다
저 낱장들에 내가 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너무 자세히 읽으면 일생의 거울이 다 깨진다
누가 어서 피어라 했겠느냐
눈 아래 피는 산꽃 들꽃들
누가 어서 오라 했겠느냐
창에까지 달려온 초저녁 별빛
흙에 묻은 아욱 씨 손톱처럼 돋는 걸 보면
첫 딸의 걸음마처럼 설레는 날도 있다
무엇을 이루고 어디에 닿아야 잘 살았다 하랴
누군들 이 세상 와서 광목 세월 한 끝에
연필로 점 하나 찍고 가는 것이 제 몫의 생이다
자꾸 푸른색 옷을 갈아입는 나무 아래서
오늘은 절망을 접어 책속에 꽂는다
시간
색깔도 무게도 없는 것이
손도 발도 없는 것이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만들고 영원을 만든다
풀잎을 밀어올리고 강물을 흐르게 하고
단풍을 갈아입는다
누가 그 요람에 앉아 시를 쓰고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린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저 힘으로
시인이 걷는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풀밭은 목차가 없어서 어디서 읽어도 목차다
나뭇잎 한 장에 쓰인 먼 소식을 이틀 동안 아껴 읽는다
오늘이 하루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고 긴 끈을 던져 오후를 문고리에 묶는다
풀잎에게 어서 이불을 덮으라고
어둠 아니면 누가 저리 자상히 일러 줄까
이파리들이 밤에도 잎맥을 만든다는 걸 생각하면
풀잎이라는 말이 성서의 구절보다 경건해진다
그런 땐 꽃을 지우고 난 나무는 무얼 기다릴까가 궁금하다
내 서정은 흰 종이처럼 여려
벌레를 덮어주지도 못하는 헝겊에 말의 수놓으며
오늘도 발에 밟힌 이름들을 생각하다 잠든다
시인이 걸어간 이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맑은 날,
맑은 날 베옷 빨아 너는 이는
내 어머니다.
햇살 좋은 날 장독을 씻어 댓돌에 엎어놓는 이는
내 어머니다.
쨍쨍한 날 무채를 썰어 덕석에 너는 이는
내 어머니다.
햇빛 부신 날 배추잎에 손 닦고
지붕에 널린 고추를 내려 바구니에 담는 이는
내 어머니다.
뉘엿뉘엿 해질 때 이마에 손차양을 하고
자꾸 들녘 끝을 바라보는 이는
내 어머니다.
내 어머니는 서른다섯 해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내 이웃에는 옛날의 그 어머니가
서른 아니면 마흔 분, 여릿여릿 사신다.
새벽별
네 허락 없이 네 이름을 불러도 되겠니?
색연필로 네 얼굴을 그려도 되겠니?
흙 위에 누옥을 짓고 맨드라미와 함께 사는 내가
너를 보고 싶다, 그립다 말해도 되겠니?
내 가진 말이 부족해
너를 메밀꽃이라 불러도 되겠니?
단추꽃이라 불러도 되겠니?
네가 한밤 내 가르쳐준 것을
내 시에 옮겨 써도 되겠니?
나비에게도 못 간 내 발이 몇 천만 걸음 걸으면
너에게 닿을 수 있겠니?
새 날개를 빌려 타고 가면
일흔 먹은 지구 아이 하나 멀리서 왔다고
문 열어놓겠니?
내 사는 곳은 아직도 전쟁의 공포가 있는 분단 나라야.
입국심사에도 통과 못한 나를 그래도 받아주겠니?
너에게 줄 게 없어, 한 꾸러미 여섯 개
갓 낳은 달걀을 들고 찾아가는 나를.
꽃이 지니 잎이 피네
꽃 지고 잎 피는 방향으로 생을 옮겼다.
그때 나는 나무에게도 생활이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저녁엔 꽃을 보내면서도 울지 않는 나무를 안아본다.
나무를 안으면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지상의 아름다운 한 때를 오래 기억하려고
꽃자리 아랫단에 편 겹겹 잎자리
나쁜 이파리는 없다고 쓴 적이 있다.
혈관을 터뜨리며 떠나는 저 붉음
떨어진 꽃잎을 주워 잎에 붙인다.
다 닳은 봄을 주워 바늘로 깁는다.
꽃이 지니 잎이 핀다.
지는 꽃을 잎에 붙이는 것은
생과 사의 국경에 한참을 머무는 것
꽃이 마르는 동안의 기쁨을 사나흘만 간직하는 것
잃어버린 기타를 찾은 영화 속 소년처럼
마흔 살
힘껏 오그리고 살았으니 힘껏 펴기라도 해봐야지
맘껏 쪼그라지기도 했으니 맘껏 다림질이라도 해봐야지
씨름꾼처럼 넘어졌다가 유도선수처럼 벌떡 뒤집어라도 봐야지
했던 마흔 살
그래도 뒤돌아보면 버드나무는 휘어지고
진달래는 붉게 타고 찔레꽃은 하얗게 웃고
뚜깔나무 이파리 따 휘파람도 불며
숨차게 언덕을 넘던 마흔 살
초승이 반달로 가고 반달이 온달이 되어도 기다리는 소식은 감감했던
뒷골목 바람 찬데 손잡아 줄 이 아무도 없이
누구도 부럽지 않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바람처럼 달리고만 싶었던 마흔 살
조금만 아프고 싶었던, 한 번만 죽어 볼까도 싶었던
그러나 봄풀같이 돋을 수밖에 없었던 마흔 살
돌멩이 같이 뭉치던, 낫같이 벼리던, 면도날 같이 반짝이던
지금은 저 혼자 가고 없는
웬수 같던, 사랑 같던 마흔 살
삶이 그렇게는 무섭지 않다는 것을
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
겨울을 넘겨본 나무들은
알락할미새를 앉혀본 나무들은
너구리를 숨겨줘 본 나무들은
소낙비를 맞아본 나무들은
흰 눈을 맞아본 나무들은
봄을 기다려 본 나무들은
부러진 가지를 떼어
새 가지를 돋우어 본 나무들은
바람 불 때 휘파람을 불어본 나무들은
안다
견딤이 그렇게는 어렵지 않다는 것을
삶이 그렇게는 무섭지 않다는 것을
*울라브 하우게「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에서
흰 꽃 만지는 시간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하얗게 씻은 얼굴로 꽃이 왔는데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창고에서 새어 나오며 공기들은 가까스로 맑아지고
유쾌해진 기체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꽃밭을 산책한다
햇살의 재촉에 바빠진 화신은 좋아하는 사람께로 백리에 닿는다
눈빛 맑은 사람 만나면 그것만으로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흰 꽃 만지는 시간은 영혼을 햇볕에 너는 시간
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대야에 담는 사람의 흰 손이 저랬다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은하강에서 울었어요
꿈이 범람하는 밤에는 은하강에 나와 울었어요
우는 밤의 행복을 알겠나요
우는 생의 힘을 알겠나요
말갈기 같은 바람 불고 억수비 쏟아졌지요
강은 범람이었고 눈은 폭설이었지만
우는 밤의 행복을 알겠나요
우는 밤의 행복은 생의 힘이었음을 알겠나요
이유 없이 미칠 수 있다는 것, 열광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한 재산인 때 있었어요
별똥별은 떨어져도 은하강은 범람하지 않았어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넘치지 않는 강이 있다는 거
그게 열광 아닌가요
사랑이란 말 태고 적부터 썼으니까
무어 다른 말이 없겠나요
다시금 괴다는 어때요? 믜다는 어때요?
재앙들은 대개 나직해요
불행은 정다운 공부지요
은하강에서 울었어요
목말라 울고 기다림 말라 울었어요
우는 낭만을 오해하지 마세요
눈물은 패배를 가꾸는 학습이니까요
읽어보니 루드비히도 울음을 사랑했더군요
그는 달빛 아래서 울었더군요
죄를 알기 전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알았지요
죄가 알록달록하더군요
문둥이를 알기 전에 한하운을 알았지요
문둥병이 아름다웠어요
은하강에서 울었어요
가슴은 치차처럼 달리고
내 발은 멈춰 있었어요
산은 너그러웠지만 쳐다볼 수 없는 거라 믿었어요
산은 풀씨처럼 나를 심어놓았어요
스물의 기차를 타고 은하역까지 가고 싶었어요
꿈은 신발 안에 갇혀 있고
나는 돌멩이처럼 가라앉았어요
귀뚜라미에게 우는 법을 배웠어요
가을이었고 밤이었고 쓸쓸이었어요
버린 신발을 헤어보니 폭우에 떠내려 온 씨앗처럼
나는 떠내려 온 거대요
볼펜의 다정함으로, 시의 가슴으로
나는 새벽 세 시에 이 글을 쓰네요
은하강에서 울었어요
풀잎
초록은 초록만으로 이 세상을 적시고 싶어 한다
작은 것들은 아름다워서
비어 있는 세상 한켠에 등불로 걸린다
아침보다 더 겸허해지려고 낯을 씻는 풀잎
순결에는 아직도 눈물의 체온이 배어 있다
배추 값이 폭등해도 풀들은 제 키를 줄이지 않는다
그것이 풀들의 희망이고 생애이다
들 가운데 사과가 익고 있을 때
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이끌고
어느 불 켜진 집에 도착했을까
하늘에서 별똥별 떨어질 때
땅에서는 풀잎 하나와 초록 숨 쉬는
갓난아기 하나 태어난다
밤새 아픈 꿈 꾸고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지 못하는
내 이웃들
그러나 누가 저 풀잎 앞에서 짐짓
슬픈 내일을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따뜻한 방을 그리워할 때
풀들은 따뜻한 흙을 그리워한다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 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나무, 나의 모국어,1
돌이 따뜻해질 때까지
돌 위에 앉아 시를 쓴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바삐 일손을 다듬는 햇살
바람이 난생 처음 배운 말을 하며 지나가면
나무에도 조금씩 젖니가 돋아
이파리가 음계를 물고 제 몸 위에 떨어지면
개울물은 비로소 청춘을 회복한다
일생을 서 있는 나무들은 발이 부었지만
잎들은 산맥에 넘겨준 햇빛을 두 손으로 되찾아온다
아버지 나무가 작년에 피웠던 꽃을 빼닮은
올해의 꽃을 들고 서 있는 아들 나무들
가장 가난해서 가장 부자인 나무는 나의 모국어
네가 부려놓은 그늘은 늘 내 머리 위에 있다
나무, 나의 모국어 2
나는 나와 함께 이 세상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한 오리 실밥만 한 선물도 보낸 적이 없다
오늘은 시 한 줄 햇빛 보자기에 싸서
발송인 없는 선물을 보내려 한다
작게 작게 생각하면서 익는
열매들의 깨끗한 잇몸 같은
꽃씨가 물고 있는
베낄 수 없는 언어 같은
손바닥에 떨어지는
향기 묻은 새똥 같은
이 말을 읽는 그의 가슴에
금잔화 같은 기쁨 하나 싹 틔울 수 있다면
올해 고령인 돌이 내 무릎 아래서
첫돌배기나 되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 본다
내 손등의 정맥 사이로 날짜와 요일이
소풍 가는 아이마냥 지나간다
이향(離鄕)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 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樵夫)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 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켠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을 물처럼 흘러갔고
놀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무섭게 나를 위협했을 때
나는 눈에 익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들 불러 모으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누운 할아버지의 산소를 한 번 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지금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가을이라는 물질
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나라로 들어간다
잎들에는 광물 냄새가 난다
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
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
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
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 쓴다
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
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
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
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
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
아름답게 사는 길
그 작은 향내를 맡고
무밭까지 날아온 가난한 나비처럼
보리밭 뒤에 피어난
철 이른 패랭이꽃처럼
여름밤 화톳불 가에서 듣던
별형제 이야기처럼
개나리꽃에도 눈부셔
마을 앞길을 쫓아가는 병아리처럼
월동엽서
순이, 손을 몇 번 불어서 그 겨울은 지나갔나
미나리 잎새 얼어서 얼음 밑에 묻혀 있던 그 겨울
장작개비 책보에 얹고 가던 등굣길
소백산맥 끝 웅크린 골짜기
너는 전근 가는 아버질 따라 진주ㄴ가 사천인가로
닳은 고무신을 끄을며 떠났지만
얼음이 얼다 녹던 축축한 묏부리에 앉아
마른 잔디만 집어 뜯던 나는 지금
허언을 괴로워하는 삐걱이는 강의실 계단을 오르내린다
스물이 지나 서른이 되어서 너의 그 검정치마도
세상 따라 모양이 달라졌겠지만
진주ㄴ가 사천인가의 언덕 아래 조그만 마을에서
너는 이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들길에 나가 너의 아이들에게
새로 핀 꽃 이름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겨울에 난로 꺼지면 나는 양말을 갈아 신고
저 죽은 풀빛의 들판이나 밟으면서
겨울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야겠다
눈이 내리면 다시 시린 손을 불며
생의 노래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 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회색 돌에 대해 시를 쓰고 싶을 때
지붕과 멀어서 별은 반짝인다
엽록들이 사라진 밤에도 돌들은 신생을 부르고
이른 잠을 청하는 이파리들의 밀어를 듣는 시간에는
돌의 귀가 맑아진다
수 세기의 평화처럼 나무는 잠들고
오늘 새로 핀 꽃들은 이 세상이 처음이어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눈을 뜨고
백 년 뒤의 햇볕을 당겨와 몸속에 저장한다
네 몸에 꽃잎 닿을 때 아프지 않은가, 돌이여
그러나 제 몸에 내려온 꽃잎의 기억으로
돌은 백 년을 견딘다
대낮을 편식하고 절연의 어둠으로 걸어가
더욱 단단해진 육체의 소유자
돌을 쪼개 보면 무수한 한낮이 쏟아진다
돌의 미덕은 도저한 견고함이다
수정을 잉태한 지고한 사랑
견디며 기다린 피그말리온의 생령이다
하얀 병원
나는 소년시절부터
아무도 앓아보지 않은 병 하날 앓아보고 싶었다
포르말린 냄새나는 작은 병실에서 오후의 햇살에 눈부셔하며
혼자 나부끼는 깃발 같은 외로움에
손수건 같은 마음 꺼내 말려보고 싶었다
하얀 벽돌집 창가에 앉아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구름이 짓다만 집을 내가 대신 지어보고 싶었다
에테르 냄새 나는 병이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리면
나는 벤자민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벤치에 나가 앉아
아직 한 번도 이름 불리지 않은 풀밭의 풀들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주고
식물도감에도 없는 가락지꽃 댕기꽃의 이름을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불러보고 싶었다
어쩌다 눈 맑은 소녀가 표지가 예쁜 시집을 들고 오면
그 시집 가운데 가장 슬픈 시를 골라
소녀와 함께 소리 내어 읽고 싶었다
귀 속에 푸른 강을 파고 흘러가는 강물 소릴 듣다보면
때로 앓는 것만이 인생의 진실한 모습임을 깨닫게 되거나
죽음이 삶의 가장 깨끗한 모습이라고 믿게 되리라 생각했다
꽃의 눈물을 손으로 받아 함께 나누어 마시던 소녀가 떠나면
이름 모를 아픔들이 다시 장미처럼 어깨 위로 피어나겠지만
그런 것쯤, 슬픈 영화의 주인공처럼 양복 주머니에 편지인 듯
접어 넣어 두리라 생각했다
몸이 가지 않은 길을 마음을 세수시켜 푸른 들길 나서면
어느덧 내 옷은 이슬에 젖어있고
옷깃의 어디엔가 들새울음이 높은 음표로 묻어있으리라 생각했다
가장 여린 꿈이 가장 더디게 익는다는 말을 믿으며
내 몸 맡겨 마음대로 병과 친해 보는 일
내 마음 맡겨 몸만큼 아픔을 사랑해 보는 일
그런 꿈도 꿈이라면 때로는 아름다운 것이 되지나 않을는지
나뭇잎이 힘껏 껴안았던 햇빛 쪽에서 제 먼저 붉어질 때
나는 이제야 에테르냄새 나는 병의 방문을 받고
벤자민 나무그늘의 벤치에 앉아
추억처럼, 노래처럼 어릴 적 꿈을 다시 꾸나니
그것은 아직도 내 삶이 걸어가 닿을 길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면 내 꿈이 다시
말매미 높이 우는 푸른 숲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겠지
여자를 위하여
너를 이 세상의 것이게 한 사람이 여자다
너의 손가락이 다섯 개임을 처음으로 가르친 사람
너에게 숟가락질과 신발 신는 법을 가르친 사람이 여자다
생애 동안 일만 번은 흰 종이 위에 써야 할
이 세상 오직 하나 뿐인 네 이름을 모음으로 가르친 사람
태어나 최초의 언어로, 어머니, 라고 네 불렀던 사람이 여자다
네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세상에 패배한 뒤
술 취해 쓰러지며 그의 이름 부르거나
기차를 타고 밤 속을 달리며 전화를 걸 사람도 여자다
그를 만나 비로소 너의 육체가 완성에 도달할 사람
그래서 종교와 윤리가
열 번 가르치고 열 번 반성케 한
성욕과 쾌락을 선물로 준 사람도 여자다
그러나 어느 인생에도 황혼은 있어
네 걸어온 발자국 세며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 때
이미 윤기 잃은 네 가슴에 더운 손 얹어 줄 사람도 여자다
너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고
깨끗한 베옷을 마련할 사람
그 겸허하고 숭고한 이름인
여자
이기철 시인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 「오월에 들른 고향」 외 3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청산행><열하를 항하여><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흰 꽃 만지는 시간>등 다수,
김수영문학상. 후광문학상, 아림예술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 <여향예원. 시 가꾸는 마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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