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11. 뜻 때문에 문학생활 옆으로 비켜놔
1 부지런한 사람의 경우, 10년이면 못해도 다섯 권씩은 내는 시집(詩集)을 나는 겨우 매 10년에 한 권씩의 시집을 냈을 뿐이다. 그리고 종군 시절 기념 시(記念詩) 쓰는 일에 질려, 내 군에서 풀리면 다시는 기념 시 안 쓰리라 맹세했건만, 통일교회 들어오는 바람에 오히려 순수 작품 내놓고 전문적으로 기념 시만 썼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념 시를 많이 써왔다.
2 게다가 소임이 문화부장이요, 편사실장이요 출판사 사장이다 보니 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집이나 전도용 서적은 안 내고 자기 책만 낸다는 가책이 앞서 아예 내 책 발간할 생각은 멀찌감치 비켜놓고 말았다.
3 입교 3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 상여를 뒤따르던 중 정든 마을을 지나면서 나 혼자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높여 울었다. 만일 이렇게 부모에게 불효를 하고 이제 하늘에 마저 불효하는 날이면 나는 어느 천지에 용납될까 해서였다.
4 아버지는 무섭고 점잖은 분이었다. 나 하나 탓으로 온 가정이 풍비박산이 될 뻔했고, 아버지께서는 노후를 산사(山寺)에 의탁할 셈을 대시다가 살기 괴로운 내가 유서(遺書) 편지를 보냈더니 ‘뜻이 좋다기에 외아들을, 정성껏 키워 송두리째 바쳤더니 이제 와서 날라온 것이 기껏 유서냐’고 협회장께 외교문서같이 점잖게 논리도 정연히 글을 써 보내오신 엄친이셨다.
5 이 편지를 우리 선생님께서 보시고 ‘광렬이 아버지가 광렬이보다 나으시다. 이 다음에 언제 〈아버지 상〉을 주게 되면 광렬이 아버지에게 다 주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6 그러나 나는 1974년의 미국 뉴욕에서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집회, 1976년 미국 워싱턴에서의 워싱턴 머뉴먼트 대집회, 1982년 미국 뉴욕에서의 2075쌍 결혼식, 역시 뉴욕에서의 선생님의 제1차 언도 공판 등 뜻깊은 현장들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임께 깊은 감사를 느낀다.
7 한 15년 전엔 청파동 1가 교회 예배당 2층에서 무슨 말인가 선생님과 주고받다가 격한 감정에 ‘이다음에 나로서 무어 한 가지라도 해드린 것은 없겠다’고 매사 은혜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를 통곡으로 표한 일이 있었다.
8 어떤 음식점에서 ‘사람이 지옥에 가더라도 저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해보고 가면 한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철부지에게 ‘광렬이가 지옥이 어떤 곳인줄 알면 그런 말 못할 걸’이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 참으로 광렬이 성격 못돼서 속도 무던히 썩으셨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