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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이(宣居怡) 장군 약력(略歷)
1545년 7월 25일(음) : 보성 용문에서 출생(선조(宣祖) 12년(157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난중일기
1550년 8월 20일 : 보성 용문에서 출생(五忠祠誌)
1569년 : 선전관(五忠祠誌)
1570년 : 무과 급제(五忠祠誌)
1579년 : 무과 급제(무과방목), 전직 : 겸사복(兼司僕)
1586년 : 북병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이됨(五忠祠誌, 白沙集, 李忠武公 遺事)
1587년 : 조산만호로 있던 이순신 패전 누명을쓰고 군법시행시 우인으로 위로.1)(白沙集)
1588년 :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작전 참여 이순신장군등(정3품 : 龍驤都將 折衝將軍 行副護軍. 2)
1588년 : 거제현령, 성주목사(五忠祠誌)
1589년 5월15일 : 광릉 헌관 선거이 영공(정3품 이상 호칭) 光陵獻宣居怡令公 , 이정회(李庭檜), 송간일기 2권(松澗日記 卷二) / 선조 22년(1589, 기축) 5월 14일 ~ 15일)
1591년 3월 10일 : 진도군수 부임. 3)(珍島郡邑誌)
1592년 3월 17일 : 전라도 병마절도사(종 2품) (敎旨, 독립기념관보관)
1592년 5월23일(음력 4월13일) : 임진왜란 발발
1592년 8월14일 : 진도군수로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참여. 4)(亂中雜錄外)
1592년 : 김천일 인천으로 이동 중 본도 관찰사 이광에게 구원요청 진도군수 선거이 참여. 5) (亂中雜錄 壬辰年 上, 朝鮮王朝 修正實錄)
1592년12월 : 병마절도사 제수 6) , 7), (朝鮮王朝 修正實錄), (亂中雜錄 壬辰年 下)
1593년 1월 : 전라도 병사로 독산산성 본도 관찰사 권율과 승첩.(朝鮮王朝實錄)
1593년 2월 :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 행주대첩(朝鮮王朝實錄, 簡易集제1권, 孤臺日錄人名錄 8)
1593년 5월 : 도원수 김명원과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영남지방에서 활약.(朝鮮王朝實錄)
1593년 6월 : 진주성 2차 전투, 우세한 왜군의 병력에 농성(籠城)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계남과 운봉으로 나가 진을 침, 진주성 함락.(朝鮮王朝實錄)
1593년 윤 11월 : 의령 울산 경주 사이 혈전에 참여(朝鮮王朝實錄, 西厓集)
1594년 : 윤두수의 명령으로 김덕령, 곽재우등의 부대와 장문포 공격. 수군과 합동작전이었으나 왜군의 대항이 미비하여 적선 2척만 불태우고 철수함. (朝鮮王朝實錄, 李舜臣의 亂中日記)
1594년 9월 : 충청도 병마절도사제수 (朝鮮王朝實錄)
1594년 11월 29일 : 충청수사 제수 9). (朝鮮王朝實錄)
1595년 7월 21일 : 이순신이 환도를 선물하다(난중일기)
1595년 10월 : 황해도 병마 절도사 제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함(朝鮮王朝實錄)이순신, 선거이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贈別宣水使居怡”라는 시 수록(亂中日記)
1596년 : 황해병사 선거이 병으로 부임할 기약이 없으니~ (朝鮮王朝實錄)
1597년 : 정유재란, 남해 와 상주등지에 활약. (五忠祠誌)
1598년 : 울산성에 진을 치고 읊은 시가 있다 10), 울산성 전투에서 명장 양호를 도와 싸우 다 전사(五忠祠誌, 高臺日錄)
1605년 : 선무원종공신 일등 추봉(宣武原從功臣錄)
1801년 : 충신으로서의 공훈이 인정되어 정려를 세우다.(純祖實錄) ,예조관문(禮曹關文) 13,14),
1825년 : 시평 이상중 순조임금께 오충신행적 상신(承政院日記)
1830년 : 순조로부터 오충사액, 보성의 오충사 제향(純祖實錄)
1862년 : 병조판서 추증(純祖實錄)
2009년9월28일 : 행주서원 기공사 제향
2016년6월1일 : 고양시 주둔 보병부대 『선거이 연대』로 명명.
□ 참고 문헌
1) 백사집 제4권
유사(遺事)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友人宣居怡懼不免。執手流涕。勸酒壓驚。公正色曰。死生有命。飮酒何爲。及對勘。公不服曰
~ 중략 거이(宣居怡)가 공이 죄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니,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2)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蘘公征討時錢部胡圖)
이일(李鎰)이 함경북도 병사로 부임하는 시기가 1586년이고 이때에 선거이장군이 계청군관으로 참여 하신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1588년 정월에 있었던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에 대한 기록으로 당시의 토벌군을 이끌던 이일의 손자에 의하여 당시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현재 육군박물관에 보관. 백사집은 우인으로 기타 문집은 군관으로 기록.
(하단에 이일, 선거이, 황진, 원균, 이순신등의 지휘자 명단이 있으며 후일 임진왜란때도 주축이 된다.)
3) 진도군읍지 :
1591년3월10일 진도군수 부임 ~ 1593년1월3일 전라도병마절도사 승진
4)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조경남(趙慶男)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5) 난중잡록 1 상(亂中雜錄一 上) 조경남(趙慶男) , 조선왕조 선조 수정실록
난중잡록 :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선조수정실록 :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7월1일 기사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6) 독립기념관 보관 선거이전라도병마절도사 교지
선거이전라도병마절도사 교지의 임명일은 만력 이십년 삼월 십칠일(음력 1592년 3월17일)로 임진왜란(음력 4월13일) 일어나기 1개월전으로 선거이장군은 이 교지를 전달받지 못하고 진도군수로서 임진왜란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7) 난중잡록 2 하(亂中雜錄二 下), (朝鮮王朝實錄)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12월
최원(崔遠)은 노쇠하였으므로 면직되고,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로 전라 병사를 삼다. 곽준(郭峻)의 관직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조방장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방어사를 삼다. 거이는 이때에 수원(水源)에 있었는데, 최원이 강화(江華)로부터 나와서 인부(印符)와 군사를 인계하다.
8) 고대일록(孤臺日錄) 부록 인명록(人名錄)
선거이(宣居怡) : 1550~1598.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 병사로서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때에 크게 부상당하였다. 이어 다음 해인 1593년 2월에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 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거만(巨萬)의 군곡(軍穀)을 비축하여 공을 세운 바도 있고,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 수사가 되고 다음 해 황해 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ㆍ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하여 명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9) 충청수사 관련.
선거이장군을 수사로 임명하고자 하는 논의는 선조가 직접 언급하는 등 여러번 시도가 있었다. 정유재란전 원균과 선거이를 서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전장의 부상 후유증으로 관직에 물러나 있을 때도 선조는 적임자로 선거이의 근황을 묻는다.
선조 25년 임진(1592,만력 20) 10월4일 (경인)
상이 이르기를,
“경상 수사(慶尙水使)를 선거이(宣居怡)로 제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선조 27년 갑오(1594,만력 22) 12월1일 (갑진)
권율 등의 처벌과 원균의 체직 등에 대해 논의하다 (~중략)
김응남이 아뢰기를,
“두 장수가 화목치 못하니 형세상 서로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원균을 부득이 체직시켜야 하겠는데 대신할 사람을 아직 얻지 못하였으니, 선거이(宣居怡)와 서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후략) 【 여기서 두장수는 이순신과 원균이다 , 선거이 장군이 충청 병마절도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충청 수사로 재 발령한 연유이다.】
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4일 정미 3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비변사가 김응서의 병세·병수사의 교체 등의 일을 아뢰다
(~ 중략)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장차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려 함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일은 합당치 않고 선거이(宣居怡)가 타당한 것 같으니, 의논해서 처리하라." (~ 후략)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7일 기해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과 함께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중략) "예로부터 육장(陸將)은 수전을 잘 못하고 수전하는 자는 육전을 잘 못했습니다. 원균이 제 몸을 잊고 용감히 싸우는 것은 그의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써야 하겠습니다."
하고, 정탁이 아뢰기를,
"수전이 그의 장기이니, 이제 그 단점을 버리고 그 장점을 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거이(宣居怡)는 병이 있는가?"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중풍을 앓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일을 시킬 수 없습니다." ( ~ 후략)
10) 경주(慶州) 울산(蔚山)지역으로 진군 충의산(忠義山)에 진을 치고 지은 시(詩)(五忠祠誌)
眼底三營潤 胷中萬甲容, 丈夫令日事 忠義是高峰,눈앞에는 3군의 병영이 가득차있고, 가슴속에는 수만의 용감한 군인들이 용솟음치노라, 보고 생각하는 것이 싸움뿐인 이때 장부가 당하는 이일은 충의심 뿐인데 내가 서있는 높은 산봉도 그 이름 역시 충의산이고나.
11) 오충사지(五忠祠誌)
1830년 오충사 사액 후 1838년애 간행한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근간으로 한 1970년 번역본으로 부원수공전망사적(副元帥公戰亡事蹟)의 내용이다. 1802년 거이조 정려에 관한 충의 사실 공문으로 예조 관문(關文) 필사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본이 현존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1802년 선거이 장군 정려를 위한 예조 관문 참조. (순조실록에는 1801년으로 정려를 내린 기록되어 있으며, 유학 정원빈의 거이조 충렬에 관한 상소가 일성록에도 있다.)
12) 경기도 부천군사
1592년 5월 19일 부평에 침입한 소서행장의 일본군은 부천의 원미산(遠美山) 장대봉(將垈峯)에서 항거하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을 물리치고 부평읍[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침입하여 계양산성을 수축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부평 부사 남유(南瑜)는 겁에 질려 싸우지도 않고 도망쳐 피신만 하였다. 그리고 계양산성을 근거지로 한 일본군의 일부가 1592년 5월 20일 인천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부평 출신의 김민선(金敏善) 인천 부사가 만반의 방어 태세를 갖추어 안대평(安垈坪)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13) 전라도 광주읍지
人物
宣居怡寶城人判書允祉后武科兵使壬辰以副元帥屢至奏捷殉節慶州錄
宣武一等勳 贈兵曹判書 正宗己未 命旌其閭在古內廂
書院
圓山祠 : 在州西三十里祀兵使宣居怡戊辰撤
선거이 보성인 판서 윤지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때 병마절도사, 부원수로 다수의 승첩(勝捷) 후 경주에서 순절(殉節)하였다.<경주읍지에 기록되다>, 선무일등공신에 훈록(勳錄)되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조 기미년(1799년)에 왕명으로 고내상(지금의 광주 송정동)에 정려(旌閭)를 세웠다. 광주읍지의 서원 항목에 원산사(圓山祠)라는 선거이장군을 배향한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충신각만 남아 있다고 한다.
14) 1802년 선거이 장군 정려를 위한 예조관문
예조로부터 전라도감사에게 공문을 내려보내어 앞서 정조23년(1799년) 8월에 전라남도의 유학 정원빈 등이 고 병사 선거이를 충렬지사로 표창하여 줄 것을 상계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왕께서는 이를 해당 도에 이첩하여 조사,보고하도록 하명이 계시니 이를 자세히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이 공문을 받은 전라도감사는 광주목사에게 그 실적을 상세히 조사,보고하도록 이첩하였다. 이에 의거 광주목사가 조사,보고한 호남절의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도다.
선거이는 선조25년 임진에 전라병사로서 순찰사 권율을 도와 수원 독성에서 적병을 맞아 힘껏 싸우고 수 없이 왜적을 베어 무찌르니 간담히 서늘한 적병은 선병사를 가리켜 나는 장군(비장군)이라 하였다 한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적세가 꺽이어 권율이 행주에서 큰 승리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 때와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입성할 때도 선병사의 찬획(계획을 도움)의 공이 많았었다. 권율이 남원으로부터 영남지역으로 향할 때 선병사는 홍계남과 같이 함안에서 적병을 쳐 부수고 목을 벤 것이 70여수나 되었었다. 다시 경주로 옮겨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순절하였으니 그 무훈이 많았었고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실적을 책자로 적어 올려 보내면서 분의역전하여 끝내 순절한 것은 명백한 일이나 그 순절한 사적이 없어서 은전을 입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병사가 나라에 충성하고 국난을 당하여 몸을 바친 것은 옛적 충렬지사에 비교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이 그 실적이 역력할 뿐더러 이름을 널리 후세에까지 전하는 것이 당연하나 이는 상감(왕)이 그 은전을 베푸는 것이고 예조에서는 왕의 결재만을 바랄 뿐이라고 하셨다.
순조2년 1월26일 동부승지 박종순은 이 뜻을 상감(왕)께 보고한 즉 왕은 이를 허락하시며 그 고을에다 정문(旌門)을 세우고 선병사의 공훈을 포창(襃彰)하고 그 자세한 결과를 곧 보고하라고 하명하였다.
순조2년(1802년 임술) 2월.
(1838년 보성선씨오세충의록 예조관문)
(광주시 도산동에 위치한 선거이(宣居怡) 장군 정려)
청액상언(請額上言)
오충사 사액을 청하는 글중에서 (전라도 유생 조형민 등이 선거이 등 선씨오충에 대한 사액을 순조 왕에게 요청하는 글중 선거이 관련사항 발췌)
전라도 유생 신 조형민 등은 삼가 상계를 올리나이다. ~~~~~~~
우리 도내 보성군에 오충사가 있사온데 이는 고 감사 신 선윤지, 평양공 신 선형, 병사공 신 선거이, 증참판 신 선세강, 수사 신 선약해를 봉안한 곳으로~~~~~
병사 거이는 유성군(선형)의 증손으로 선대의 덕을 이어 지략이 뛰어나고 문무의 재주가 비상하였으니 태복내승이란 벼슬에 특명으로 제수되어 임진왜란 때는 전라병사로서 순찰사 신 권율과 더불어 서로 어깨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신하된 자 어찌 나라에 보답하고 종묘사직을 회복할 마음이 없겠는가? 라고 죽기를 맹세한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년전에 전라우수사로서 우수영에 재임시에는 미리 전란에 대비할 준비를 갖추어 병기와 군량을 비축하였으니 임진왜란시에는 이에 군병을 거느리고 경기, 충청, 전라, 경사도지방에 출전하였고 독성, 행주, 금녕, 운봉, 한산, 곤양 등지의 승첩이 가장 큰 것으로서, 그 중에 행주대첩에 대한 배산승비 지금도 우뚝 서 있습니다.
임진왜란시 진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으니 그 시는
壯哉文武士 (장재문무사) 장하다! 문무의 선비들아
此日幾英雄 (차일기영웅) 오늘날의 영웅은 몇이나 되던가?
山動三軍鼓 (산동삼군고) 삼군의 북소리는 산을 움직이고
海翻萬幕風 (해번만막풍) 바다 가득 깃발들은 바람에 나부끼네.
中宵瞻北闕 (중소첨북궐) 깊은 밤 북쪽의 궁궐을 우러르며
涕淚透蒼穹 (체루투창궁) 통한의 눈물을 푸른 하늘에 뿌려보네.
板蕩誠臣在 (판탕성신재) 힘겹고 험란한 이 나라에 참된 신하가 있어
一戎報國衷 (일융보국충) 하나의 무기를 들어 나라에 보답한다는 마음뿐이네.
또한 충무공 신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옛날 송나라 말기에 명사가 많았으나 하나의 ‘화’라는 글자 때문에 천고에 어리석은 일이 전해지고 있다면서 조정내에서 왜병과 화친하고자 하는 자들을 공격하니 그 충의의 기절은 천지간에 버티고, 장렬한 기훈은 해와 별같이 빛났더니, 마치매 경주 싸움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적탄에 맞았어도, 더욱 정력을 내어 적탄에 맞은 자리를 감사고 독전하다가 순절하니 도체찰사 신 이원익이 말하기를 선절도사의 담략은 비록 고대의 명장에 비기더라도 부끄럼움이 없다하고, 문충공 신 유성룡은 선병사가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부터 범장이 다시 때어났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선병사의 순절한 자세한 말은 국조보감 및 유성룡의 일기, 이순신의 전서에 상세히 기재되었고 선무일등공신으로 책훈되었으며 정조23년(1799년)에는 정려(旌閭)를 특명으로 세워 주셨던 일이 있습니다. ~~~~~~~~
순조25년(1825년) 9월 유학 조형민 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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