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집트령에 속하는 수에즈 운하는
사실상 이스라엘이 통제한다.
유로 경제연합이 미측에 협력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을 시켜 태클을 걸어
물먹이기도 한다.
반대로 이집트의 반 유럽파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려 하면
이스라엘은 전투기를 출격시켜 폭격으로 맞서서
친 유럽 국가들의 수출로를 확보해준다.
얼마전 미중협상과 정상회담에 앞서,
EU에서 중국제품에대해 반덤핑 제소를 걸게 만들어,
중국이 북한은행 송금 결제은행을 폐쇄시키도록 협력하게 만들었다.
유럽 경제연합은 독일이 주도하고,
프랑스가 협력하여 끌어가는 구조이고,
겉으로는 미국에 협력하지만,
내면으로는 경제사안에 대해서 미국에 견제구를 펼치고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의 FTA협상도
도청을 문제삼아 진통이 예상된다.
이집트의 군부는 미국에 협력하긴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군부에 의해 반미 성향의 무르시를 내세웠다.
그러나 너무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를 내세운 것이 문제가 되어 국민 저항을 받자,
이집트의 군부정권을 쥐고 있는 국방장관 앨시시는
어쩔 수 없이 국민편에 서서, 헌법재판소장인 아들리 만수르를
임시 대통령으로 다시 내세웠다.
수에즈 운하 통제권은 미국이 나서지 않고,
이스라엘이 나선다.
과거 10여년 전에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 통제권을 강화하여,
친 유럽 국가들의 운하 통과를 문제삼아 통제하자,
이스라엘기가 출격하여 폭격을 가해 이스라엘이 의도한대로 통제한 적도 있었다.
5~6년 전에도 이집트가 친 유럽 국가들의 수에즈 운하 통제를 강화하자,
이스라엘이 의도한 대로 통제하기 위하여
한차례 전투기 폭격을 가한 적도 있었다.
(1967년 중동 제3차 6일 전쟁. 이스라엘 미라주 전투기의 이집트 미그기 공군기지 폭격 장면)
1967년 중동 제3차 전쟁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여
직접 통제한 적도 있었다.
8년간 수에즈 운하 사이를 두고 국경선으로 삼아 포격전이 벌어졌다.
이집트와 사우디가 예멘 내전에 개입하여 서로 자국 영향력 하에 놓으려고 아랍 정세가 어수선한 데다가,
시리아에서는 1966년에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요르단으로 피신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원들이
요르단 국왕의 허가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유격전을 벌였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아랍 개입의 여력이 사라지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유격전 만을 벌이던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이라크를 선제 공격하였다.
이라크, 요르단 공군기지와 지대공 사단기지를 전투기로 출격하여 폭격하고
시리아 공군기지에 이어 이집트 공군기지를 차례로 폭격하였다.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이집트는 300여 대가 밀집되어 있는 미그기 공군기지가
야간 저공 기습 선제 폭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이집트 공군력의 75% 파괴)
이 공격으로 이스라엘군은 지상군을 투입하여
팔레스타인령 예루살렘 구시가지, 이집트령 시나이반도, 시리아령 골란고원,
요르단령 요르단강(요단강) 서안지구를 차지하게 된다.
(중동지역 지도 이집트 시나이 반도 홍해 수에즈 운하)
시나이반도 수에즈 운하까지 진격한 이스라엘 지상군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포격전을 벌이자 8년간이나 점령하여 이곳이 국경이 되고 말았다.
사나이 반도는 아주 드넒은 지역이며
이집트는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서 연전연승 한다면서,
언론을 통해 거짓 방송으로 이스라엘 군이 패주를 거듭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시리아 군은 이스라엘 영토로 무리하게 진격해 들어갔다가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다급해진 시리아는 소련군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군이 시리아 영토 내로 깊숙히 공격해 들어와서
멸망할 위기라고 거짓 방송을 송출한다.
이 때문에 전의를 상실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지키던 요르단군이 전황을 오판하여
수도 암만을 지키기 위해 철수해버린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은 요르단 서안지구를 손쉽게 얻을 수가 있었다.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는 동맹국이나 다름없었는데,
전혀 군사 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스스로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단 6일만에 이 지역을 모두 차지하여
중동 제3차 전쟁을 "6일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집트는 중동 3차 전쟁 당시 시나이 반도를 빼앗기고,
8년 간을 수에즈 운하 사이를 두고 포격전으로 맞섰으나,
드넓은 시나이 반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지대공 사단기지와 공군기지를 시나이 반도 일대에 건설하였다.
이대로 가면 수에즈 운하가 국경이 될고 말 처지에 있었다.
이집트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수에즈 운하 안에 14척의 배가 8년동안 고립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이스라엘 군에 아랍 동맹군이 주눅이 들어 거병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3년 10월 중동 제4차 전쟁(욤-키푸르 전쟁)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의 시나이 반도 수에즈 운하 대치 상황)
(1973년 10월 이집트 군의 수에즈 운하 기습 도강작전)
1973년 이집트의 군부정권 인와르-사다트는 북한군에 도움을 요청한다.
북한군은 베트남 전에도 파견되어 전투기 조종사 200여 명과 육군 전술 교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에서 활동하던 북한 공군 조종사 교관 1개 대대와 특수 훈련 교관 분대병력이
군사고문단과함께 이집트로 특파된다.
이집트 공군에게 미그 14기, 16기, 17기를 교육시킨 북한군은
선봉에 서서 이집트 공군을 이끌고 이스라엘 군이 감행했던 방법을 그대로 역이용하여
저공 비행전술로 야간에 급습하여 이스라엘 공군기지와 지대공 사단기지를 폭격하는데
대성공을 거둔다.
이 승전으로 이집트는 승리의 감격에 환호하며 45만 병력을 출병시킨다.
이집트가 처음으로 승리해 본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전쟁 승리의 자신감을 얻은 이집트의 사다트는 출병을 명령한다.
이것이 중동 제4차 전쟁 (욤-키푸르 전쟁)의 서막이었다.
이스라엘 지상군은 중동1~3차 전쟁에서 아랍 동맹군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하였던 까닭에, 시나이 반도로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사막지대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북한군 특수교관 분대병력(10여 명)은 이집트군과 함께 사막 매복 작전에 들어가,
이스라엘 전차 군단이 오는 길목에 북한제 RPG-(7) 대전차 무기이외에 소련제 AT-3말륫카 등
대전차 미사일을 들여와 사막 모래속에 위장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이스라엘 전차사단에
큰 타격을 가해 이스라엘 군이 후퇴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덕분으로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를 도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의 아랍 동맹군은 이런 죽음을 각오한 사막 매복 전술을 구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막 모래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전차에 타격을 주고 모래속으로 다시 숨고,
이스라엘 지원군이 매복지에 전차 포격을 하게 되면,
모래가 폭발력을 모두 흡수해버려 유효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에 가서 암수술을 받고 돌아가 몇년전에 죽은 조명록 차수가
지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첫 승리의 자신감을 얻은 사다트는 소련제 장거리 미사일을
소련과의 계약조건을 어기고 북한 김일성에게 선물로 보냈고,
북한은 이것을 역분해 하여 현재의 대포동 미사일을 낳게 만들었던 것이다.
광명성 호도 이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나이 반도 공군 폭격으로 중동 제4차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 대부분이 여기에서 전사한다.
2천 600여명 전사, 부상 7천 5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시 미군 3,600여명 전사와 비교].
이후 이집트 군은 시나이 반도를 넘어 45만의 지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시나이반도 절반을 회복하기까지 1만 5천여 명 전사, 3천여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고,
시리아 군은 3천 5백 명 전사 2만 1천 명의 부상자수를 기록하였으며,
이라크는 125명 전사 260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이후 1974년 이스라엘은 미소 유엔 주재 하에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중재하여,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 돌려 주고 시리아의 골란고원 일부를 반환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잃고 요르단은 서안 지구를 돌려받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게 되어, 팔레스타인은 여기에서 장막을 치고 갇히게 된다.
북한군 조종사들과 교관 특수부대의 기습으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이것이 중동 제4차 전쟁 (욤-키푸르전쟁)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현재 유럽과 미국에 양다리를 치고 있다.
이집트도 친 유럽파와 반 유럽파, 친미파와 반미파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중동 문제에 있어서는
반미, 반이스라엘 정서가 아직은 우세하다.
이집트는 1952년 자유 장교단에 의해 파루크 왕조가 무너지고,
나기브가 권력을 잡은 후 부터, 자유 장교단에 의해 권력이 이어졌다.
나기브,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무르시, 아들리 만수르로 이어지는 군부내각이 들어섰다.
2013년 7월 8일 이슬람의 무슬림 형제단 (무르시)을 반대하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세속주의 세력에
무력을 행사하여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헬기사격으로 사망 51여 명)
원래 이슬람 형제단의 무르시 또한 군부에 의해 내세워졌으나,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입법, 사법, 행정권을 대통령 권한 아래 장악하려는 신파라오 정책을 펼치려고 했다가
자유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 10%의 국민들이 궐기하자, 미국 등 국제사회의 외압을 받아
그를 축출하고 헌재소장 만수르를 다시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대통령 국방장관 압델 파타 앨시시.
[군부내각이 삼권을 장악하려고 무르시를 내세웠다가 민주주의 10% 국민들의 궐기로 실패하자,
민간 헌재소장 아들리 만수르를 내세워 입법, 사법, 행정권을 대통령의 권한 아래로 두는 법을 개정하여 장악하고
다음 대통령으로 올라 신파라오 정책으로 삼권을 모두 쥐고 가려고 하는 것임].
>이로인해 국제사회의 외압을 받아 강력한 무역제재가 가해지는 수순은 필연임.
>[경제적 타격으로 군부정권 몰아내기]
>[운하타격 및 통제].
>신파라오 국가 vs 국제 무역제재.^
>대만선적 에버 그린호 운하사고 vs 대만 열차사고(트럭돌진).
예멘의 친 이란 후티 반군을 이용한 수에즈 운하 봉쇄 전략.- 희망봉으로 우회시키기.
[누가 이기나 갈때까지 끝까지 한번 가보자!].
A라는 국가가 있다면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예산을 편성할때 국책사업비가 편성되는데,
그중에서 어떤 국책사업이나 특정 기업투자에 대한 10조가 책정되고 B기업에 입찰권을 주어
수의 낙찰하게 하고 공사에 들어가면서 포샵까지 떠놓고 공사가 중단되는 이유는
예산을 빼돌리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고 국민의 시야에서 멀어질때 착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산만 책정하고 뒤로가서 98%를 빼돌리는 정치세력도 있어 이런 나라가 후진국을
면치 못하는 나라이고, 개발도상국 단계에 오래 머물러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장기 독재의 주요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