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곤은 예이츠의 문학적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온건한 투쟁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예이츠는 예술가였고, 곤은 사회 운동가였다. 예이츠는 쉰 살이 넘을 때까지 30년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혼했지만 늘 거절당했다. 또한 이 시기에 예이츠는 『갈대숲의 바람』을 발표하면서 현대문학의 방법을 확립한다.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 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 소령과 결혼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하며 문예 운동을 펼친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 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 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 당시는 논쟁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 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 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 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 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자작시
비가 내리면
어젯밤 부터 내리는 비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내려요 작년에 내가 했던 모진 말들이 돌아와 나를 괴롭혀요 작년에도 비가 내렸겠죠 멈출 생각이 없어보이는 비를 바라보아요 어딜 가든 비가 내려요 우산에 구멍이 생기면 막지 않을려고요 그나마 죄책감을 덜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