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눈물』(지명길 작사, 유성민작곡)은 1969년 발표된
「리타 김」의 곡입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큰 활약을
펼친 「리타 김」에 대한 정보는 많이 부족합니다.
1965년 발매된 앨범에서도 「리타 김」의 노래를 찾을 수 있는데,
정확한 가요계 데뷔는 찾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말 「리타 김」이 가요계의 안정적인 인기 가수로
대부분의 언론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데뷔한 것은 그 훨씬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노래만큼은 여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추억 속에
남아있어 즐겨 찾고 있는 듯 합니다. 육감적인 보이스와 창법으로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여낸 「리타 김」은 초기에는 주로 외국 곡을
번안 하여 소개하곤 했었는데,
이후 국내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발표한 곡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집계됩니다.
『여인의 눈물』이 큰 인기를 얻고 있을 무렵인 1969년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6월 가수 남 진 매니저와의 스캔들에 이은 1966년
1년 계약으로 일하던 홍콩 에서 만난 유부남 박모씨와의 스캔들로
인해, 11월엔 부인으로부터 대낮 난투극을 당하면서 인기는
하락세로 돌아섰고....
「리타 김」은 1970년에는 월남과 일본 순회 공연을 하고 1971년
귀국하여 재기 음반을 내는 등 활동을 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미국 이민을 떠납니다.
1969년 가요계는 '다사다난' 했던 시기였습니다. 활약한 신인 가수
중에는 '펄씨스터즈', '배성', '임희숙', '나훈아', '조영남', '이영숙',
'최영희', '김하정', '정은숙', '트윈폴리오', '화니씨스터즈' 등이
가요계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기성가수들은 일본 진출 러시로 소위 한류의 기초를 닦았는데,
'이미자', '패티 김', '남정희', '남일해'가 일본 레코드사와 제휴하여
음반 취입과 공연을 하였는데, 패티 김의 "사랑하는 마리아"가
일본전역을 강타 하기도 했습니다.
장르 면에서는 여전히 트로트와 Blues가 강세를 보이면서 R &B
(임희숙),소울(펄), 사이키델릭사운드(신중현, 김추자) 등이 선풍을
일으키며 영역을 넓히는 시발점이기도 하였습니다.
1969년 가요계는 오명(汚名)을 얻기도 하였는데 가수들의 스캔들은
양적으로 타 연예부문에 비해 월등히 우세하여 "Moral 의식의 결여"
라고 까지 비판을 받기도 했죠.
'이미자의 이혼 및 교통사고', '김세레나의 밴드 마스터와의 약혼',
'펄 시스터즈의 올림포스 호텔 사장과의 염문', '한명숙의 이혼',
'위키리의 이혼과 재혼', '송민도의 강제 귀국조치', '정은숙', '임선아',
'조영남', '정훈희', 「리타 김」 등도 스캔들에 휘말렸고, 아직 10대
였던 '문주란'의 모 방송국 PD와의 실연 끝에 벌인 자살 소동까지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던 해였던 것 같습니다.
1982년 보도에 의하면 「리타 김」은 미국 이민으로 한국에서 활동할
수 없었고, 같은 처지의 여러 가수들과 함께 '한국 가수 분과위' 의
제적처분 사건에 휘말리는데 이후 활동이 적어 세간에서 잊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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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는 나리고 그 님은 가셨는데
하염없이 헤매이는 쓸쓸한 여인이여
한 목숨 다 바쳐 불태웠던
그 사랑을 어이해 보내고
외로움에 혼자섰나
구슬 같은 눈물에 그 님은 희미한데
스며드는 외로움을 삼키는 여인이여
목메여 불러도 자취 없는
그 사랑을 차라리 고독을
달래려고 혼자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