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생각했다
박혜경
파란시선 0162∣2025년 8월 2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80쪽
ISBN 979-11-94799-08-5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모두를 닮았으나 누구와도 닮지 않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했다]는 박혜경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너의 생일」 「감은 네 눈동자 속으로」 「선향의 모자」 등 50편이 실려 있다.
박혜경은 2015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 비평집 [상처와 응시]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인문학에세이집 [당신의 차이를 즐겨라] 등을 썼다.
박혜경은 첫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에서 도착(倒錯)을 기본 형식으로 갖는 썩 희귀한 시 세계를 조성하고 있다. 박혜경의 도착은 생성적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실로 에라스무스에게 도착이 풍자의 한 방식이라면 박혜경에게는 생존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박혜경에게 이 도착은 필사적이다. 그리고 시인 박혜경의 사회적 자세는 매우 강한 ‘여성주의’의 그것이라는 점이 놀랍다. 평론가 박혜경과 오랫동안 함께해 온 기억 속의 박혜경은 오로지 미적 취향에 몰입해 온 사람이었다. 물론 평론가 박혜경과의 공동 작업을 중단한 지 20년가량 흘렀기도 하다. 20년이라! 옛날에도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이다. 현대로 올수록 변화의 속도는 가속화되어 왔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젠더 상황이 거듭 악화되었거나 혹은 부각되어 온 정황이 시인 박혜경의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 점에서 박혜경의 시는 그 정황에 대응하는 썩 의미심장한 하나의 방법을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정과리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박혜경 시에는 특이한 리얼리티가 있다. 현실을 반영하는데, 몽환적이다. 그는 이미지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디서 이렇게 끊임없이 이미지가, 그리고 이야기가 솟아 나오는 걸까.
“검은 액체가 항해하는 내 몸의 항로가/지도 위에 남은 흐릿한 흔적처럼 선명해요”(「항로를 그리던 시간」).
“흐릿한”데 그토록 “선명”해서 그 “흔적”, 이미지가 샘솟는 걸 멈출 수 없네. 선병질적으로 집요한, 그것은 도망일까 추격일까. 환상일까 현상일까.
그의 시들은 내게 ‘평행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흐르는 강물이 수많은 물결로 이루어져 있듯, 땋아지고 풀어헤쳐지는 겹겹의 존재, 겹겹의 삶. 마치 흩어진 존재의 파편들이 완전체를 지향하여 나아가듯 거침없는 박혜경 시의 언술을 보면, 내 시와 사고가 얼마나 진부한가, 얼마나 낡았나, 절감하게 된다.
시집 속의 어떤 문장은 일렁거리고 어떤 문장은 출렁거린다. 그렇게 견결하고 선명한 시퀀스가 하나둘 태어난다. 박혜경의 상상력, 즉 영혼의 세계는 풍요롭고 섬세하고 신비하다. 그런데, 그 시를 읽으면 가슴이 저릿하고 쓸쓸해진다. 왜지?
―황인숙 시인
•― 시인의 말
입안에 쓴 물이 고이듯
언제든 내게 꺼내 보여 줄
변명을 준비하지 않고는
살아 내기 힘든 시간들이 있었다고
당신은 내게 말했었다.
거울 속에
내가 있다.
거울 속에는
거울만 있다.
•― 저자 소개
박혜경
2015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 비평집 [상처와 응시]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인문학에세이집 [당신의 차이를 즐겨라] 등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여자는 상점의 어두운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전 – 11
항로를 그리던 시간 – 14
감은 네 눈동자 속으로 – 19
너의 생일―모든 존재는 탄생의 시간을 지나간다 – 22
x – 26
정희의 모자 – 31
혜선의 모자 – 34
두 개의 시퀀스 – 39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 42
행복 – 45
진흙으로 만든 배 한 척 – 48
폭설 – 51
마술사 – 54
제2부 모두와 닮았으나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도시의 카툰 – 59
개그맨 – 62
눈오리 – 64
선향의 모자 – 67
미선의 모자 – 72
자연사박물관 – 75
오래된 항구 – 78
고생대의 바다와 현생인류 – 80
그녀의 방 – 82
눈물 – 84
La Vie En Rose―어떤 짐작에 관한 가설 – 86
당신의 디자인 – 88
손잡이 – 90
제3부 장면 속에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 95
팔월의 비 – 98
흰 담비들은 수풀 속으로 사라져 – 101
손가락 지도 – 104
다섯 사람의 행인 – 106
목각인형 – 108
챙 넓은 모자 – 111
핫초코와 아이스크림 – 114
의자의 용도 – 116
슬리퍼 – 118
거울의 얼굴 – 120
제4부 최면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한 사람 – 125
카운트다운 – 126
렌즈와 파동 – 128
부두 – 131
투명한 촉각 – 132
옥상의 날들 – 134
올가미 – 137
SOLD OUT – 140
조용한 상자 – 142
벚나무의 시간 – 145
당신의 모자 – 148
우리 – 150
모이라 – 152
해설 정과리 여성성의 한 측면: 소외 속의 도착이 노리는 것 – 154
•― 시집 속의 시 세 편
너의 생일
―모든 존재는 탄생의 시간을 지나간다
그릇에 담기면 그릇의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빛은 물의 속성을 닮았다
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우리는 둥근 술잔을 들어 올렸다
각자의 사막을 걸어 여기에 도착하는 동안
누구는 사막여우의 길고 뾰족한 귀를 보았고
누구는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전갈을 보았고
누구는 낙타들의 대상을 따라 오래
밤과 낮이 바뀐 사구의 길을 걸었다
잔에 담긴 술이 부드럽게 뺨을 달구며
목 안으로 흘러드는 동안
떠들썩한 우리의 머리 위에는
미래를 비추는 고요한 전등처럼
노란 창문이 열려 있었다
먼 훗날 창 안의 빛은
유리잔에 담긴 물처럼 반짝일 것이다
그릇을 떠나는 순간 그릇의 형태를 잊는다는 점에서
빛과 물은 불의 속성을 닮았다
마른 풀에 불을 지피듯
말들이 타오른다
찰랑이며 부딪히는 잔들 사이로
말이 물처럼 흘러다녔다
어떤 말은 밝고
어떤 말은 어둡다
어떤 물은 차갑고
어떤 물은 뜨겁다
그날 탄생의 축제 한가운데 서 있던 검은 그림자는
미래에서 온 것일까
과거에서 온 것일까
모든 빛은 과거에서 오는 것
어둠 속에 더욱 빛나는 창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알게 되지
얼마나 자주 우리는
어제의 창을 열고 먼 훗날의 불빛을 바라보는가
기억으로 만든 빛은
기억의 형상을 재현할 뿐
건물로부터 흘러나온 불빛이
창의 형상을 재현하듯
창들이 허공에서 부서지네
물이 불 속에서 타오르네
어떤 잔으로도 담을 수 없는
넘치는 취기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물과 불과 빛으로 가득한
탄생의 시간들을 지나간다
우리가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나던 탄생의 문을 지나
여기 도착한 지금
이토록 찰랑이는 지금
이토록 넘치는 취기 속에서
지금 후에 남겨질 우리는
상상하지 않기로 해
상상 속에 도착할 추운 일들은
유리잔에 담지 않기로 해
물과 불과 빛이 사라진 긴 공허의 시간을 지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당도할 탄생의 주기를 기억하며
여기 다시 모일 우리
우리가 붉게 달아오른 서로의 눈을 보며
깨끗한 기쁨으로 빛났던 여기
먼 곳에서 바라보는 창들이
잠시 따뜻했던 여기
너의 생일을 축하해! ■
감은 네 눈동자 속으로
예순다섯의 네가
열아홉의 너를 만나는 날
바다는 색을 바꾸었다
푸른빛에서 잿빛으로
잿빛에서 다시 푸른빛으로
너는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있었고
스무 살이 된 너는 지하철 개찰구를 나와
지하상가로 이어지는 긴 통로를 걸어간다
열일곱의 네가 음악 분수대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스물둘의 너는 지하상가에서 산 샌들을 신고
놀이터에서 혼자 모래놀이를 하는
다섯 살의 너를 지나쳤다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은 날 아침
너는 지하철 충무로역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스물셋의 너를 엇갈려 지나간다
마흔둘의 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갈 때
일곱 살이 된 너는 장난감 가게에 진열된
나무 블록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열아홉과 스물둘의 너를 지나쳐
너는 일흔다섯의 너를 만난다
너의 임종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떨리는 입술을 달싹거리는
너는 오래전 산 낡은 샌들을 신고
낯선 도시의 육교를 오르고 있다
정오의 뜨거운 햇빛이 해고를 통보받은
마흔일곱 살 네 정수리로 쏟아져 내리고
일흔다섯의 네가 입원한 병원 앞을
스물다섯의 네가 친구들의 팔짱을 끼고
웃음을 터뜨리며 지나간다
노란 플라스틱 삽, 빨간 바스켓,
파란 물뿌리개가 흩어진 모래 놀이터를 지나
열두 살의 네가 머리칼을 흩날리며
공원 분수대로 뛰어간다
서른다섯의 너는 모래놀이로 더러워진
다섯 살 딸의 손을 잡고
등 뒤를 비끼는 시월의 햇살 속에
막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분수대를 향해 걸어간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너의 마지막 말이 흘러나오는 시간
쉰여덟의 너는 겨울 해변을 향해 차를 몰고 있다
너는 차가운 해변에 홀로 누워 있다
네가 짧은 잠에서 깨어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감은 네 눈동자 속으로
파도의 무수한 빛과 색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걸로 충분해
해변으로 밀려온 긴 파도가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을 쓸고 갔다 ■
선향의 모자
춤은 한참 뒤에 이르기 전까지 춤처럼 보이지 않는다
선향은 선하고 향기로운 아이입니다
선향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했어요
이름을 부르면 선물을 받은 듯 기뻐지는 마음이어서
선향은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불렀어요
내 이름은 김선향입니다
내 이름은 김선향입니다
사월 화창한 어느 날
선향은 학교 신발장에서
자신의 신발이 없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나란히 놓인 색색의 뒤꿈치들 사이에
유독 한 자리만 검게 구멍이 나 있었어요
선향은 사라진 신발을 신고 집에 돌아옵니다
일주일 후 다음 날
선향은 사물함을 열었어요
늘 선향과 함께 다니는
선향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자의 빈자리가 보이는군요
선향은 비어 있는 모자를 쓰고
사물함들로 이어진 긴 복도를 지나 집에 돌아옵니다
그날은 거리에 아무도 없었어요
모자가 사라지자 선향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일주일 후 다음 날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으며
선향은 뜨거운 운동장에 서 있었어요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누워 있는 그림자들 사이에
선향의 그림자만 비어 있네요
아무도 선향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선향은 오직 선향에게만 보입니다
선향은 한 무리의 아이들로 에워싸인
더러운 화장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선향의 머리통을 누르고 있는 악력이
붉게 달아오른 선향의 귀에
검고 긴 혓바닥을 쑤셔 박고 있군요
병신아! 죽어! 죽어! 죽어!
선향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는 장소에서 깨어납니다
선향은 자신이 왜 그곳에 가려는지 모르는 장소로 걸어갑니다
그곳은 선향만이 알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선향은 다만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일 뿐
선향은 다만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뿐
얼음을 끌어안고 있는 선향을
얼음이 끌어안습니다
얼어붙은 호수 밑의 세계는
투명하고 고요해
선향의 신발과 모자와 그림자가
멈춰 버린 그대로 잠겨 있습니다
모자를 쓰거나 쓰지 않은 사람들이
짧은 환영처럼
호숫가로 몰려왔다 몰려갑니다
호수 옆 벤치에 선향이 앉아 있어요
선향의 머리 위로
흰빛의 오후가 내려앉아요
나무 위에는 바람이 걸어 놓은
선향의 모자가 춤추듯 흔들리고 있어요
선향은 선물을 준 사람처럼 기뻐져서
나무를 향해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내 이름은 김선향입니다
*춤은 한참 뒤에 이르기 전까지 춤처럼 보이지 않는다: 뮤리얼 루카이저, [어둠의 속도], 박선아 역, 봄날의책, 2020, p.1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