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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여행은 금년말이나 24년에 다시 계획 실행하겠습니다.
사계절의 아름다운 도호쿠(동북) 지방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뿌리를 둔 다양한 전통 행사와 음식 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봄에는 산과 마을에 벚꽃이 가득하고 여름은 계곡 사이로 흐르는 계류 풍광이 뛰어나지만 가을은 산전체가 아름다운 단풍을 자랑하는 지역이랍니다. 특히 겨울은 눈이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눈 산림의 모습은 장관 이루고 각종 눈축제가 찾는 방랑자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곳입니다. 바다와 산과 땅이 전해 오는 사계의 축복을 즐길 수 있으며 신선하고 맛깔스러운 현지 요리를 즐기고, 독특한 양조기술로 빚은 술을 시음할 수 있고 양조장 방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 유키미의 노천탕에서 힐링하고, 오랜 전통의 온천탕과 여관에서 일본 고유의 지방 음식도 즐길 수 있으며 겨울에는 특히 설국의 아름다운 산천을 자연의 예술 등을 감상하는 기회를 부여받을 수 계절입니다. 아름다운 겨울 자연을 체험하고, 시라카미 산지의 풍부한 생태계에 감동받으며 산리쿠 해안과 마쓰시마의 자연 예술을 감상하고, 호수와 습지의 투명한 푸른빛을 바라보는 경험들은 설국의 나라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2023년 2월 눈축제 깃점으로 다녀오려고 합니다. 함께하실 도반을 초대하겠습니다.
동북지방 일부 지역인 미야기현(宮城)에 가톨릭 성지가 존재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성지이지만 우리 천주교 역사와 견주어 눈여겨볼 일본 내 성지입니다. 일본 센다이 지역 영주 다테 마사무네는 과감한 개방정책을 밀어붙입니다.
유럽을 향한 게이초 사절단은 센다이 영토에서 기독교의 전파를 허용하는 대가로 노비 스파니아( 현재, 멕시코)와 직접 무역하는 대가로 센다이 번의 영주인 다테 마사무네가 히스 파니아 왕(스페인)과 로마 교황에게 보낸 외교 사절단이었습니다.
사절로 선발된 마사무네의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大田西)는 선교사 루이스 소텔로와 함께 센다이 번 내에 건조된 서양식 범선 '산후안 바우티스타'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그는 멕시코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서 필립 3 세와 면담 후 로마로 가서 교황 바오로 5 세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막부의 기독교 탄압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7 년 후인 1620 년에 센다이로 돌아왔습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가 사절로 선정된 이유는? 조선 파견 기간 동안 해외에서 시간을 보낸 경험과 총기 그룹과 아시가루 그룹의 수장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가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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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한때 범죄를 저질렀고 츠네나가도 센다이 번에서 추방된 적이 있었지만 능력을 아끼지 않은 마사무네는 그에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게이 초 사절의 대사의 중요한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센다이 번을 강타한 게이초 대쓰나미 2011 년 센다이 번을 강타한 게이초 대쓰나미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정확히 400 년 전인 1611 년 12 월,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규모의 게이 초 대쓰나미가 센다이 번을 강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재해 이후 게이 초 대지진과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게이 초 사절의 관계가 주목받게 된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순푸 연대기 기록에는 센다이 영토에서만 지진으로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센다이 번의 공식 역사로 여겨지는 "사다야 마 고지 가문"에 따르면 1,783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절 파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바스티안 비즈 카이노 (Sebastián Vizcaino)는 센다이 영토 산리쿠 해안을 탐험하고 바다에서 큰 쓰나미를 만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케이초 대쓰나미가 있은 지 불과 2주 후, 마사무네는 조선과 게이초 사절 파견 계획을 밝혔고, 2년 후 산후안 바우티스타는 월포에서 유럽으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게이초 특사 파견의 의의를 검토해 보면 이 계획은 큰 재해로부터 손실된 것들을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사무네와 츠네나가가 목표로 한 해외와의 무역은 상품의 유통으로 끝나지 않고 문화, 기술, 정보, 사람의 교류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쓰나미로 발생한 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재건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유럽으로 사절을 피견한 다테 마사무네는 지진으로 심각하게 피해를 본 센다이 번을 더욱더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위 사진의 주인공은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입니다. 주군으로 모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에 의하여 유럽 사절단으로 임명된 자입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사람으로 1571년 출생합니다.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돈 필리포 프란치스코입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常長)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부터(安土桃山時代)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까지 살았던 무장(武将)입니다. 칸무 천황(桓武天皇)을 선조로 하는 혈통이면서도 다테 씨(伊達氏)의 가신(家臣)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케이 쵸 견 구사 절단(慶長遣欧使節団)'을(慶長遣欧使節団) 이끌고 유럽까지 도항하여, 아시아인으로서는 유일무이하게 로마 귀족 및 프란치스 코파 가톨릭교도가 되었습니다. 아명은 요이치(與市), 초명(初名)은 로쿠우에몬 나가츠네(六右衛門長経), 세례명은 돈 필리포 프란시스코입니다.
겐키(元亀) 2년 (1571년), 칸무 천황(桓武天皇)을 선조로 하는 야마구치 츠네시 게(山口常成)의 아들로서 우슈(羽州) 오키타 마군(置賜郡) 나가이 노쇼(長井荘) 타테이시 무라(立石邑) (현재의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타테이시[山形県米沢市立石]의 요네자와 시립 세키소학교 [米沢市立関小学校] 주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 큰아버지인 하세쿠라 토키마사(支倉時正)의 양자가 되어, 7살부터 무츠 국(陸奥国) 시바타 군(柴田郡) 하세쿠라무라(支倉村) (현재의 미야기현 시바타군 가와사키 마치 하세쿠라 지구[宮城県柴田郡川崎町支倉地区])에 있는 카미 다테 성(上楯城)에서 긴 청년기를 보냈니다. 그 후, 토키마사(時正)에게 친자식인 히사나 리(久成)가 태어났기 때문에, 주군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명령으로 가록(家禄) (한 집안이 세습적으로 물려받는 녹봉) 1200석이 양분되어, 600석을 받게 됩니다.
분로쿠 · 케이 쵸의 역(文禄 ・ 慶長の役) (임진왜란 · 정유재란)에 종군(従軍)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아시가루(足軽) (경무장 보병) 텟뽀구미가시라(鉄砲組頭) (조총부대의 우두머리) 로서 활약하였습니다. 또한 '카사이 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奥州] 지역 처벌에 따라 신분이 격하되고 재산을 몰수당한 카사이 씨[葛西氏] · 오오사키 씨[大崎氏] 등의 옛 가신들이 새로운 영주인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 · 키무라 키요히사[木村清久] 부자에 대해 일으킨 반란이다)의 진압을 맡았던 무장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케이 쵸(慶長) 14년 (1609년), 전 필리핀 총독인 돈 로드리고의 일행 (산 프란시스코호) 이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副王領)' (현재의 멕시코)으로 돌아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카즈사국(上総国) 이와와다무라(岩和田村) (현재의 '치바현 온쥬쿠마치[千葉県御宿町]') 해안에서 좌초 · 난파되었습니다. 지역 사람들에게 구조된 일행에게,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윌리엄 애덤스가 건조한 갈레온선인 '산 부에나 벤투라'를 주어 그들을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副王領)' (현재의 멕시코) 으로 송환시켰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과 에스파냐 (스페인) 와의 교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에스파냐와의 교류가 시작됨에 따라, 츠네나가(常長)의 주군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유럽에 견 구사 절(遣欧使節)을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견 구사 절은 에스파냐인 프란시스코회 선교사인 루이스 소텔로(Luis Sotelo)를 부사(副使), 츠네나가를 정사(正使)로 하여, 180명으로 조직되었고, 에스파냐를 경유하여 로마를 향해 가기로 하였습니다. 견구(遣欧) (유럽 파견)의 목적은 통상교섭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에스파냐와 군사동맹을 맺어 다테 마사무네가 도막(倒幕) (막부 타도)을 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케이 쵸(慶長) 17년 (1612년), 츠네나가(常長)는 제1회 사절로서 '산 세바스찬호'를 타고 소텔로와 함께 우라가(浦賀)에서 출항하였지만, 폭풍을 만나 좌초하여 조난을 당하였습니다. 다시 센다이(仙台)로 돌아가, 현재의 이시노마키시(石巻市)오가츠쵸(雄勝町) 지역에서 건조한 갈레온 선인 '산 후안 바우 티스 타호'를 타고 케이 쵸 18년 9월 15일 (1613년 10월 28일)츠키 노우라(月ノ浦) (현재의 이시노마키시[石巻市]) 에서 출항하였습니다. 또한, 단기간에 서양식 선박을 건조한 상황을 두고, 이전에 좌초한 '산 세바스찬호'를 양도받아 수리하여, '산 후안 바우 티스 타호'로서 출항하게 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습니다.
출항 후, 츠네나가(常長) 등의 일행은 에스파냐 (현재 스페인)의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副王領)' (현재의 멕시코)으로서, 북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아카풀코 (멕시코 게레로주)로 향하였습니다. 아카풀코에서 북아메리카 대륙에 상륙을 한 뒤 육로로 대서양 연안에 있는 베라크루스 (멕시코 베라크루스주)로 이동하였고, 베라크루스에서 대서양을 건너,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주 세비야 현)에 도착한 후, 소형 범선으로 갈아타고 과달키비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코리아 델 리오'에 상륙하였습니다. 케이 쵸(慶長) 20년 1월 2일 (1615년 1월 30일) 에는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하였습니다. 그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육로로 로마로 이동하여, 겐나(元和) 원년 9월 12일 (1615년 11월 3일) 에는 로마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였습니다. 또한, 그 이후에도 마드리드로 돌아와서 펠리페 3세와의 교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로마까지 방문한 츠네나가(常長)였지만, 이때 이미 일본 국내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도 원인이 되어 통상교섭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츠네나가는 수년간의 유럽 체류 이후, 겐나(元和) 6년 8월 24일 (1620년 9월 20일)에 귀국하게 됩니다.이렇게 멀리 로마까지 왕복했던 츠네나가(常長)였지만, 교섭을 성공시키지 못하였고, 이에 더해 귀국할 때에는 이미 일본에서 금교령(禁教令)이 내려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2년 후에 실의에 빠져 살다가 사망합니다.
1613년 10월 28일 휘영청 보름달 빛을 받아 쓰키노우라에서 돛을 올린 지 3개월 뒤 산 후안 바우티스타는 태평양을 넘어 아카풀코에 도착합니다. 상투를 틀고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아카풀코에 상륙했습니다. 멕시코와의 교역만을 바라는 도쿠가와막부와 다테 마사무네의 다른 목적, 엇갈리는 소테로와 비스카이노의 말. 당혹스러운 멕시코 부왕(副王: 현지 총독 격)은 일본의 태평양 진출을 문제시해 산 후안 바우티스타의 귀국을 금합니다. 그리고 일본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유혈 소동이 발생합니다. 무사히 끝났지만 사절 일행은 검을 몰수당합니다.
아카풀코 충돌 사건의 보고를 받은 멕시코 부왕은 재빨리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한 자는 처벌한다”는 포고를 내지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사절 일행은 검을 빼앗겼습니다. 대우 개선의 보증과 함께 하세쿠라 등 10명 정도의 상위 인물을 제외하고 귀향 때까지 무기를 맡겨야 했습니다. 일행은 이어 멕시코에서 쿠바의 아바나를 거쳐 스페인에 상륙한다. 세비아에 있는 알카자르 궁전은 사절단이 묵은 최고의 숙소였습니다. 유럽에서 이 사절단은 어디에서나 ‘일본 최초’를 기록했습니다. 스페인에서의 투우 관람, 기상 악화로 잠시 들른 프랑스에서 알몸으로 요에 누워 잔 일도 모두 ‘일본 최초’였습니다.
코를 푸는 데 수건을 사용하는 프랑스인들은 화지(和紙)로 코를 푸는 사절단의 종이를 얻으려고 소동도 일으킵니다. 늘 젓가락을 지참하고 서양요리를 먹었습니다. 젓가락으로 먹은 서양요리의 맛은 어땠을까. 이색적이고 다양한 세상을 봤을 뿐 아니라 유럽에 동양의 매력을 발산하고 다녔던 셈입니다. 사절 일행이 직접 교섭 선인 스페인 국왕이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가다가 세비아에서 환영을 받고 있던 때 일본에서는 막부가 그리스도 교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처벌을 단행했습니다. 신망이 높았던 그리스도교인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포함한 많은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148명을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하고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없애는 사건이었습니다. 1614년 11월의 일이었습니다.
쓰키노우라를 출범한 지 2년이 지나 이들은 드디어 로마의 땅을 밟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교황 바오로 5세로부터 직접 장도의 노고를 치하받고 1615년 10월 29일 로마 입시식을 마치고 5일 후 바티칸 궁전에서 교황을 알현합니다. 많은 추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세쿠라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며 일본어로 사명(使命)을 진술한 후 다테 마사무네의 서장(書狀)을 건넨니다. 고국에서 그리스도교 탄압의 소식은 당도하며 로마 교황청은 겉으로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절단의 의도에는 응하지 않습니다.
사절은 고난의 귀로에 들어섰습니다. 1616년 1월 7일 로마를 떠난 사절 일행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도 박해 실태, 선교사 소테로의 신용 실추부터 마드리드에 들리지 않도록 하는 지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바로 세비아로 내쫓깁니다. 소테로와 하세쿠라는 국왕에의 탄원, 스페인 각 부처와의 절충에 분주하지만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의 속에 귀도에 오르게 됩니다.
1616년 9월 30일 산 후안 바우 티스 타호는 아카풀코로 향했습니다. 두 번째 태평양 횡단입니다. 막부로부터 냉대를 받은 답례 대사 산타 가타리나와 사형을 면제받은 선교사 등을 승선시키는 한편 다테 마사무네의 교역선이라고 하는 복잡한 사정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항해는 운 나쁘게 폭풍우를 몇 번이나 만나서 마스트가 부러지고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와 5개월 후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게 됩니다.아카풀코에서 이들은 다시 산 후안 바우 티스 타호로 마닐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으로 마닐라에 2년을 더 머물던 일행은 스페인에 배를 양도하고 나가사키를 통해 센다이로 돌아왔습니다. 때는 1620년 9월 22일이었습니다. 쓰키노우라 출항 후 실로 7년에 이르는 여행이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에 귀국 보고를 한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그 뒤 행적은 사료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탄압을 개시한 마사무네로 인해 하세쿠라가 믿음을 버리라고 권고받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진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2년 후에 병으로 죽었지만 장남인 간사부로 쓰네요리가 동생과 하인 등이 그리스도교 혐의를 받으면서 참 죄에 처해졌고 급기야 멸문(滅門)에 이르게 됩니다. 선교사 소테로는 일본 전도의 열정을 누를 길 없어 1622년 일본에 잠입하지만 곧 체포돼 2년 후인 1624년 호우코 바루(放虎原)에서 화형에 처해져 순교합니다. 센다이에 있는 절의 하세쿠라 츠네나가의 묘 옆에는 소델로의 현창비(顯彰碑)가 서 있습니다. 드넓은 해양을 넘나들던 다른 국적의 두 사람은 죽어서 하나가 됐습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온 선교사. 프란치스코회 소속인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에 와서 단 3 개월 만에 일본어를 배우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마사무네에게 해외 정보를 가져왔고 게이 초 사절의 여행에서 대사 및 통역사로 일했습니다.
약 250년 동안, 게이 초견 구사 절의 존재는 잊혔다가 1873년(메이지 6년)에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에 파견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의 사절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서장을 발견하면서 드디어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어 센다이현 난학자들의 노력으로 견 구사 절단의 면모가 하나씩 밝혀집니다. 묻혔던 진주가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세계를 학습장으로 사용한 250년 후 자손들의 손으로 말입니다. 센다이시 박물관 소장 국보 게이 초견 구사 절 관계 자료 가운데 ‘로마 시공 민증서’, ‘하세쿠라 쓰네 나가상’, ‘로마교황바오로 5세상’ 세 점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엇습니다. 게이초사절 관계 자료는 약 400년 전에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가 유럽에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일행이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것들로 합계 47점에 이릅니다.
그중 위의 세 점이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으로 인정받아 등재가 이뤄졌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당시 사절을 따라 통역으로 마드리드에서 로마까지 수행한 로마의 역사학자 시피오네 아마티가 쓴 이탈리아 판 [다테 마사무네 견 구사 절기]와 이를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책자가 있다. 본문 31장부터 마사무네와 선교사 소테로의 만남부터 사절 파견에 이르는 경위, 스페인 국왕과 로마 교황을 알현한 일의 전말이 적혀 있습니다. 왜? 일본이 우리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은 일본 동북지방 가톨릭 역사를 접하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동북아시아라는 기존 질서에 매몰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은 고작 통신사나 동지사를 보내며 우쭐거릴 때 일본 칼잡이들은 로마와 스페인 멕시코 등으로 거침없이 나갔던 것입니다. 그들에 계획했던 꿈은 사라졌지만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도전으로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400여 년 전에 이미 프란치스칸이 있었던 것입니다.
설국 여정 안에 참례 여지를 꼭 남겨 놓겠습니다 400여년 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텔로) 입국으로. 전교를 받은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프란치스칸으로서 소텔로와 함께 국가에 번영을 위하여 태평양, 대서양을 넘나들며 소임을 다합니다. 이러한 진취성이 결국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초석이 된 것입니다.
일정표
여행일자 : 2023. 사정에 의하여 일자와 일정를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각 | 주요 일정 | 식사 | ||
제1일 일요일 | 인 천 나리타 다자와 | KE703 전 철 신칸센 | 08:00 09:55 12:20 | 인천공항 집합 탑승수속. 제2터미널 H 카운터. 대한항공편으로 인천 출발 나리타 국제공항 도착 동경역 경유 신칸센 탑승 모리오카 경유 다자와호로 이동 온천료칸 숙박 | 조 | X | |
중 | X | ||||||
석 | 료칸식 | ||||||
숙 박 | 다자와호 카신테이 료칸(2인1실) 예정 | ||||||
제2일 월요일 | 모리오카 | 신칸센 도 보 | 10:14 10:49 | 조식 출발전까지 료칸 휴식 다자와호역 출발 모리오카역 도착 모리오카시내 산책 마리오스 전망대,구이와테은행, 다쿠보쿠테이 자료관, 모리오카성터 등 료칸형 온천호텔 숙박 | 조 | 료칸식 | |
중 | 현지식 | ||||||
석 | 호텔식 | ||||||
숙 박 | 이와테 시온호텔 (2인1실) 예정 | ||||||
제3일 화요일 | 모리오카 센 다 이 시 즈 | 신칸센 고속버스 버 스 | 10:35 11:29 12:15 13:50 | 조식 시즈쿠이시역에서 신칸센 탑승 센다이역 도착 센다이역에서 고속버스 탑승 니시카와 고속버스 정류장 도착 일본 최고의 적설량 시즈온천으로 이동 도착후 온천 휴식 | 조 | 호텔식 | |
중 | 현지식 | ||||||
석 | 료칸식 | ||||||
숙박 | 야마가타 시즈온천 츠타야 료칸(2인1실) 예정 | ||||||
제4일 수요일 | 긴 잔 가미노야마 | 버 스 전 철 | 10:00 11:00 15:00 | 조식 료칸출발 야마가타 시내 산책 야마가타성터,미술관, 향토관, 모가미역사관, 분쇼칸, 나노카마치 고텐제키, 마루고토 향토관 등 야마가타역 출발 가미노야마 도착(15분) 온천료칸 휴식 | 조 | 호텔식 | |
중 | 현지식 | ||||||
석 | 료칸식 | ||||||
숙박 | 야마가타 가미노야마 코요 료칸(2인1실)예정 | ||||||
제5일 목요일 | 야마가타 나 리 타 인 천 | 전 철 KE706 | 17:45 20:45 | 조식 료칸 출발 야마가타역으로 이동 야마데라 산책 신칸센 탑승 동경경유 나리타 대한항공 항공편으로 인천 향발 인천 국제 공항 도착 후 해산 | 조 | 료칸식 | |
중 | 현지식 |
참고사항
#. 사정에 의하여 여행 일자와 일정에 대하여 변경 후 재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일본 동북지방 기후와 옷 준비에 대하여
겨울철에는 쿠류시오 난류가 밀려 내려 오면서 차가운 공기와 충돌하여 많은 적설량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온도가 높지만 지속적으로 눈이 내리고 바다 바람 영향으로 방수,방풍, 보온에 알맞는 옷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방수, 방풍에 걸맞는 옷에 체온 보호에 유리한 폴리스 재질의 아웃도어 옷을 기준삼아 입는 것이 좋습니다. 털모자, 장갑, 머풀러, 등 방한 물품과 눈보호용 썬글라스는 필수입니다. 신발도 방수, 방한용으로서 잘 미끌러지지 않는 신발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2. 짐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짐 준비는 일본 동북지방 특성상 매일 온천 하는 호텔과 료칸에서 숙식을 하지만 이동 시에는 열차와 전철 버스 등을 이용하게 됩니다. 가능한 가볍게 짐을 싸는 것이 좋습니다. 기내용사이즈 케리어를 이용하여 싸시고 배낭을 이용하여 보조짐을 넣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도시관광 중에는 역사에 있는 코인 락커나 짐 보관 케비넷을 이용하게 됨으로 또한 간이역 이용 시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경우도 있어 가능하면 작게 짐을 꾸리셔야 합니다. 이 점은 꼭 지켜야 불편함이 없습니다.
3. 출발확정 후 상세한 일본 기상관련 정보와 짐을 꾸리는 방법에 대하여 다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코로나와 관련된 출입국 시 각 개인에게 필요한 예방과 백신접종 등과 관련된 정보도 함께 공지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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