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원(洗美苑), 초의(草衣)여 양평에서 삽시다 / 권정식
2014년 7월 11일
아침 8시 개관시간에 맞추다 보니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전철 양수역에 7시 30분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세미원 매표소를 통과했다.
이미 해가 솟아올라 정신을 가다듬어야만 코앞을 스쳐가는 연꽃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세미원은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에서 따 온 말이다.
경기도가 두물머리 일대 한강의 아름다움을 업고, 환경이 새로운 시대의 문화 콘텐츠로 탈바꿈 할 수 있다는 시험으로 세미원을 열고 자연에 도전하고 있는 현장이다.
거기 더하여, 자연 친화적 환경에 여러 문화재를 모방 설치하고, 다산과 추사, 초의를 연결시켜 문화 콘텐츠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먼저 관란대(觀欄臺)에 올라서니 연꽃 물결이 바다를 이루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보인다.
강의 흐름 속에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큰 물줄기를 바라다본다.
흐르는 물은 가는 길에 마른 웅덩이를 만나면 피하지 않고 그곳을 다 채운 후에야 다시 흐른다고.
좀 더 깊이 들어서면 유상곡수(流觴曲水), 포석정의 술잔돌리기를 연상케 하는 작은 개울이 나타난다.
창덕궁의 옥류천(玉流川)을 기본으로 하여 복원해 놓았단다.
그 뒤편의 작은 연못 속에는 청화 백자에서 샘물이 분출하고 있었다.
용병분수(龍甁噴水)는 호암미술관 소장 청화백자운룡문병(보물 제 786호)을 모방하여 만든 분수인데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이 크게 돋보였다.
보물에서 맑은 물이 흘러 나와 일대의 풍광이 눈부시다.
용병분수를 지나면 세한정(歲寒庭)과 마주선다.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국보 제 180호)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세한도가 우리 품에 다시 돌아온 과정을 그림으로 재현해 놓았다.
세미원과 무슨 연관이 있기에 세한도가 여기 걸려있는지 의아했다.
그 마당앞쪽에서 한강을 보라본다.
내 유년시절 놀이터였던 태화강과 겹쳐 보인 한강은 참으로 포근했다.
세한정을 내려오면 다산(茶山)이 설계한 배다리와 마주친다.
그 입구에 다산이 초의(草衣) 선사(禪師)를 양평으로 초청한 서한을 비문처럼 만들어 세워 놓았다.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두 거인은 다산이 24살 연장자이면서도 초의에게 학문을 전수하고 초의로부터 다도(茶道)를 배웠다.
그리고 草衣는 다산의 소개로 동갑내기 추사(秋史)와 교분을 맺으면서 제자 소치(小癡)를 秋史의 문하(門下)로 보내 후일 추사파(秋史派) 남화(南畵)의 대가로 만들었다.
목포 해역사령관 시절, 남농(南農) 허건(許楗) 화백을 몇 번 찾아뵙고 할아버지 소치(小癡)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어 다산의 편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두물머리에 이르렀다.
신라는 156년 하늘 재를 열어 한강을 차지하였고, 고려 성종 때는 그 수로를 이용하여 배편으로 세곡을 실어 날랐다.
그 후로 조운(漕運)이 체계적으로 운용되었는데 조선 태종 3년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바다에서 조난되면서 세곡 만여 석과 천여 명의 인명 손실이 났다.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은 새재를 거쳐 남한강 수로를 이용토록 어명이 떨어졌다.
더하여, 중앙의 귀족들이 지방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한강 수운의 물동량은 엄청났다.
따라서 목계, 여주, 두물머리 나루터는 선원들을 유혹하는 아낙네들의 분 냄새와 교성으로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 중 경창(京倉)에 가까운 두물머리 일대는 팔당댐 건설로 수운이 끊일 때까지 주막이 있었다 한다.
십여 연전 두물머리를 처음 찾았을 때 동네 한 노파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두물머리 선착장에 서서 눈을 감았다.
세곡선도 보이고 뗏목도 보인다.
이미 해가 중천에 올랐다.
더위와 갈증이 심해, 노점에서 딸기 주스 한잔을 주문했다.
얼음 냉기에 가슴에 통증이 올 수 있으니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란다.
찐한 분 냄새가 풍겼다.
얼굴을 쳐다봤더니 대단한 미인이셨다.
배다리를 다시 건너와 모네의 정원에서 모네를 흉내 낸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모네특별전”을 관람할 때 모네는 빛을 그린다고 했다.
수련이 곱게 핀 연못 주위를 빛의 각도를 찾아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가면서 수련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11시가 지나자 더위가 심해 걷기조차 힘들었다.
카메라를 접었다.
카메라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보석 같은 그림 430여장이 차곡차곡 쌓였으니 펼쳐 보이면 대단할 것이다.
그래서 인지 귀가 길은 걸음이 가벼웠다.
초의(草衣)여! 양평에서 삽시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
소설암에서 시내를 따라 몇리쯤 내려오면 녹효수(여주쪽 한강)와 만납니다.
여기서 작은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20여리 내려오면 두 물줄기가 서로 합쳐지는 곳에 이르지요.
이곳이 바로 유산별서(酉山別墅)입니다.
그 사이 물빛과 산빛, 삼각주와 모래톱의 자태는 모두 뼈에 저밀 듯 해맑아 그 깨끗함이 눈길을 빼앗는다오.
매년 3월 복사꽃이 활짝 피면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면서 이 맑고 한가로운 경계에서 노닌다면 이 또한 인간세상의 지극한 즐거움이 아니겠소!
선남자(善男子)여! 뜻이 있으신가?
만약 뜻이 있다면 나를 따라 오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