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49. [역경의 열매]
송길원 (1-15) “위기의 가정, 회복 지켜볼 때 가장 뿌듯”
우리 부부도 처음엔 많은 문제 봉착…
1992년 기독교가정사역硏 개설, 낯설었던 가정사역 어느덧 28년째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가 지난
17일 경기도 양평 서종면 가정사역종합센터 ‘W 스토리’에서 “가정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바로미터”라고 말하고 있다. 양평=송지수 인턴기자
생각지 못한 광야 생활, 모든 것이 막막했던
그때 오히려 주님과 가깝게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고신대 의대 교목으로 지내다 1991년 학교의 입시 부정사태로 소용돌이쳤다. 해직 교수들과 함께
학교에서 나왔다. 오라는 데는 없었고 진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가깝게 지내던 최홍준(당시 부산
호산나교회 담임) 목사님이 미국 방문길에 동행을 제안했다. 미국교회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교회는 부흥회와 여름수련회 등의 사역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교회는 세대별 프로그램, 심지어 이혼자를 위한 프로그램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미개척 분야인 가정사역을 해보자.’
가정사역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로 우리
부부의 문제도 있었다. 장인어른은 목회자이자 대학교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었다. 아내인 하이패밀리 공동대표 김향숙 원장과 나는
반듯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허니문 시기가 끝나기도 전에 너무나 다른 성격 때문에 다투는 날이 잦았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다. 3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으면 행복한 가정생활에 대한 나름의 기술이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고
독립하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나의 괴로움을 누군가는 또 되풀이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가정을 살리는 가정사역을 하기로 했다. 92년 9월 18일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하이패밀리 전신)를 열었다. 당시 교계 단체 중에는
선교단체가 대부분이었다. 연구소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도 거의 없었다. 가정사역이라는 용어부터가 ‘블루오션’이었던 것이다.
벌써 가정사역을 해온 지 28년째가 된다.
그동안 부부세미나, 결혼예비학교, 대화학교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가정의 회복을 위한 사역에 집중해왔다. 그 프로그램들이 더 발전해 ‘이모션코칭’ ‘해피엔딩스쿨’ 등 생애 발달 단계에 맞게 기획되고 운영되고 있다. 2017년
4월 가정사역단체 하이패밀리는 경기도 양평 서종면에 가정사역 종합센터 ‘W 스토리’를 건축했다. 지혜(Wisdom) 워십(Worship)
희망(Wish) 등 각자의 ‘W’를 찾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자는 뜻이다. 그동안 여러 교회를 다니며
진행한 워크숍, 세미나 등 다양한 가정사역 프로그램을 맑고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가정을 만났는데 자폐아 아들을
둔 A집사님 부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자 집사님이 자녀양육에 집중하던 사이 부부의 의사소통은 소원해졌다. 서로 서운한 것이 쌓였고 상처도
깊어졌다. 부부세미나에 참여한 이들은 대화하면서 서로 붙잡고 엉엉 울었다. 위기의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지켜볼 때 가장 뿌듯하다.
가정은 모든 삶의 첫 출발지이다. 가정이야말로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바로미터다. 한국사회가 겪는 동성애 비혼 이혼 고독사 성폭력 저출산 등의 문제는 모두 가정과 연관돼 있다. 가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더욱 요청되는 때이다.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 [역경의 열매] 송길원 (1)
"위기의 가정, 회복 지켜볼 때 가장 뿌듯"
* [역경의 열매] 송길원 (2) 빠듯한
살림에 여섯 형제들 헤어져 '학업 난민'
* [역경의 열매] 송길원 (3) 고등학교
때 나를 잡아준 것은 성경시간
*
약력=1957년 전남 고흥 출생, 부산
브니엘고, 고신대, 고신대학신학대학원, 고려대 교육대학원, 미국 리폼드신학교 졸업, 안양대·숭실대 겸임교수 역임, 현 하이패밀리 대표, 청란교회
담임목사
***[역경의 열매] 송길원 (2) 빠듯한
살림에 여섯 형제들 헤어져 ‘학업 난민’
초등교사 아버지의 적은 월급에 매 끼니
밥상에 죽 올라 와, 결국 외삼촌네로 보내져 생이별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뒷줄 왼쪽)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찍은 가족 사진.
아버지는 성격이 괄괄했다. 분노를 못 참았다.
요즘 말로 하면 분노조절 장애였다. 버럭 성질이었다. 하루는 이모가 집에 찾아오셨다. 닭을 잡으려 하는데 잡히지 않자 아버지는 작대기로 쳐서 쓰러뜨렸다.
이모는 형부가 무섭다며 얼른 숨었다. 그렇게 해서 끓인 백숙의 목울대를 넘겨주며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이걸 먹어야 목소리가 좋아지는 거야! 너는 웅변을 하니까.”
어쩌다 친인척이 찾아올라치면 닭죽이었지만
팥죽 밀가루죽 감자죽 풀죽 등 수없이 죽을 먹었다. 죽은 이튿날 아침 밥상에도 어김없이 올라왔다. 죽을 지경이었다. 학교에선 급식으로 강냉이죽을
퍼줬다. 나는 소원했다. ‘어머니가 죽만 쑤지 않게 해 달라고.’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달리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참 엄했다. 우리 집 두 녀석이 다 클 때까지도 아버지를 찾아뵈면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편히 앉아라’고 말씀하시면 그제야 다리를 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궂은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소사’라 불리는 관리인이 있었다. 측백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고 있는데 그가
다가와 말했다.
“초등학교 선생님 월급이 얼마인지 아나?” 답을 알 리 없었다. 친절하게 2만원이라고 가르쳐 줬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그러면 “중학교 선생님은요?” 그러자 “4만원”이라 말하는 게 아닌가. 다시 물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은 더 받겠네요.” “그렇고말고. 6만원이야.” 그러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뻐기는 게 아닌가. 기막혔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다니….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도 전 소사가 말했다. “대학교수는 10만원을 받는다. 대단하지
않냐?” 나는 그 말이 내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때 결심했다. “대학교수가 되어야 한다.” 꿈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이 든 시각 부모님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길원이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놀랐다. 이미 누나는 집을 떠나 있었다. 논산 훈련소에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큰 외삼촌 댁에 맡겨졌다.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질에 아이 여섯 명이
뭐냐’고 투덜거리던 외삼촌의 제안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부산의 작은 외삼촌 댁으로 보내졌다. 하나둘 우리 형제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막내만 부모님과 함께했다. 일종의 ‘학업 난민’이었다. 외할머니는 누나와 막내를 빼고 우리 넷을 키웠다. 어머니는 그때 수도 없이 편지를 썼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편지다.
“밤낮 파도 소리만 요란한 섬, 생각만 해도
아득한 섬 생활을 또 시작해서 두 달을 보내고 있다. 하루도 너희들이 잊히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보고 싶구나. 그러나 육 남매 앞날을 기다리고
바라보면서 거기다 희망을 건단다. 파도만 넘실거리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래가며 지낸다. 펜을 들고 보니 무슨 말을 쓸 수가 없도록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유년의 궁핍과 생이별이 가져다준 것은 오로지
‘가족’이었다. 역설이었다. 가정사역의 겨자씨는 그렇게 뿌려졌다. 나는 틈만 나면 우리 동네 죽집을 찾는다. 거기에
내 엄마가 있어서다. 나는 안다. ‘죽(粥)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것을.
***[역경의 열매] 송길원 (3) 고등학교
때 나를 잡아준 것은 성경시간
수업시간 분위기는 안 좋았지만 “뻥이데이” 하면서 성경에 빠져… 이규현 목사 등과 종교부원 돼
송길원 목사(가운데)가 1973년 고등학교
친구들과 교련복을 입고 외출한 모습. 학창시절 그의 별명은 ‘찐빵’이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
격문에 가까운 이 내용은 내 모교인 브니엘고등학교의
교훈이다. ‘성실 근면 미래’ 이러면 될 것을 왜 이리도 길게 뽑아야 했는지. 학창시절 당시 부산의
명문고는 경남고와 부산고였다. 사람들이 나더러 “어느 학교에 다니냐”고 물으면 ‘브고’에 다닌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았다. 부산고의 ‘부고’가 아니라 브니엘의 ‘브고’라고 말한 건데, 사람들은 ‘부고’로 들었다.
모교의 학습 환경은 열악했고 노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학교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폭력서클 ‘노터치’도 있었다.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틈만 나면 학교를 벗어날 핑계를
찾았다. 집이 가깝다고 이 학교를 선택한 내 잘못이었다. 재수해서라도 학교를 옮기고 싶었다. 수업이 재미있을 리 있겠는가. 방황은 계속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당시 ‘우드스탁’이라 하는 고고클럽을 자주 들락거렸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음악과
막걸리가 잠시 위안이었다.
그때 학교에서 ‘중생회’라는 집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땡볕의 운동장에 모였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말씀을 전하는 강사의
쉰 목소리는 마치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로 들렸다. 무작정 울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보고 싶었다. 울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운동장에 나부끼는 플래카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유 본 어게인(Are you
born again)?” 강사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일어서라고 했다. 엉겁결에 일어섰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시작된
것 같다.
학교에서 제일 재밌는 시간은 ‘성경 수업’이었다. 성경 교사인 이정삼 목사님은 교과서도 없이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속으로는 ‘저거 뻥이데이’ 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고전을 이야기했다가 동화를 끄집어내는
등 종횡무진이었다. 결론은 항상 심금을 울렸다. “느그 이래 살믄 안된데이.” 그 시간만큼은 ‘노터치’ 아이들도 숨을 죽여 들었다. 은혜를 받아 눈물 흘리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나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3일을 금식했다.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이 아니라 금식으로 노랗게 된 내 얼굴만 보였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의 지목으로 종교부원이 됐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이
지금의 이규현(수영로교회) 김형준(동안교회) 조정대(평화교회) 목사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선교사인 이순복 목사다. 이규현 목사는 지금도 친구의
일이라면 열심히 도와준다.
그 인연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된다.
이정삼 목사님은 나에게 종종 연락을 주신다. 내가 힘들 때면 어김없이 편지를 쓰셔서 마음을 위로해주신다. 한결같이 ‘송 목사님’이라 부른다. 호칭이 가슴을 찌른다. 나도 모르게 벌거숭이가 되어 운다. 이번에는 내가 그분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목사님~ 오래오래 사셔야 됩니더.”
길고 긴 브니엘의 교훈은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