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람 임지호
류 남 옥
1 가을이 깊어 진다. 나무는 다음 생을 기약하며 이파리와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2 벌써 몇 해가 흘렀다. 자연 요리 연구가이며 방랑 식객으로 알려진 임지호.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영면하였다. 떠남이 삶의 한 부분임을 알면서도 더러는 마음 한쪽이 저려올 때가 있다. 특별한 친분이 없는데도 방송에서 듣게 된 그의 소식이 그랬다.
3 그의 음식에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사연이 담겨있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어우러 승화시켜 만든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으니. 모두가 그와 함께 가버렸다. 들풀 한 포기 소박한 재료에도 생명의 의미를 불어넣던 손길과, 방송에서의 담담한 목소리를 이제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나에게 애석했다. 한 그릇의 밥이 위로가 되고 삶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그의 시간 들이, 우리 곁에서 너무 이르게 멈추어 버렸다. 그가 남긴 삶의 온기와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게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4 오래전, TV 예능 프로에서 처음 그를 보았다. 외로움과 슬픔이 깃들어 보인 예리하고 영민한 눈빛이었다. 삶을 깊이 통찰한 이에게서만 보이는 고독의 기운이 그에게 느껴졌다. 그의 눈빛 속에 담겨있는 슬픔의 근원이 무언지 무척 궁금했으니. 방송을 통해 알게 된 그에게 왜 이다지 마음이 가는지 나 자신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5 방송에서 알게 된 인연이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희석해 질 무렵 친구들과 여행을 가게 되었다. 우연히 산속에 있는 집이라는 그의 호를 딴 양평의 ‘산당’이라는 식당에 가게 되었고, 벤치에서 쉬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살다 보면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서 오래 알고 지낸 듯한 사람이 있다. 그런 그를 가까이에서 처음 보았다. 세상과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서 있는 듯한 인간의 쓸쓸한 품위가 여전히 그의 눈과 몸짓에 흐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나 어색하게 서 있는 우리 일행에게 뜻밖에도 그가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다. 그에게는 남다르게 보는 눈과 사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던 것이었을까. 각자에게 맞음 직한 이미지로 그림을 그려주었다. 나에게는 나뭇잎으로 표현했다. 더 멋진 비유를 원했던 나의 기대 때문인가. 나와 동일시 한 잎이라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저마다의 역할에서 소중하며,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내 마음을 아는 듯 그가 말했다. 잎은 나무의 풍성한 모습을 만들고, 대지의 빛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포도당과 산소를 생성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며 붉은색을 덧칠하여 이 잎은 이제 조금씩 단풍이 들어간다고. 처음 본 그가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나뭇잎은 마지막 단풍의 모습으로도 우리에게 풍요롭고 아름다움을 남겨주고 떠난다고 했다. 나뭇잎의 역할을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위안을 받게 될 줄이야.
6 그가 그려준 오랜 시간이 지난 그림을 책장에서 찾았다. 튼실한 잎자루에 강렬한 청색과 검정. 초록의 잎. 그리고 붉은색이 조금 칠해진 나뭇잎이다. 잎이 줄기에 붙어있는 부분이 잎자루인데 튼실해야 한단다. 넉넉히 굵게 그려주었다. 건강하게 줄기에 잘 붙어있게 하라는 부탁을 나무에게 하는 것만 같다. 제구실을 잘 해내고 있는 나뭇잎이라고 말했다. 나를 위한 위로였으리라. 물과 영양분의 통로이며, 나뭇잎의 형태를 유지해 주는 입맥의 선이 검은색으로 강하게 그어져 있고, 기공을 수없이 그려 놓았다. 기공은 잎의 표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들이다. 이산화탄소를 들여와 산소를 내보내며 수분을 조절하는 이 작은 통로는 세상과 끊임없이 숨을 나누며 생명을 유지하는 숨구멍이다. 여러 색을 섞어 강렬하게 그린 다른 부분과 달리 기공은 연필로 그렸다. 촘촘하게 정성을 들여 그린 동그라미였다. 대강 그려도 될 일이었다. 그 작은 동그라미는 흑연의 반짝임으로 다른 색상들 속에서 오히려 도드라져 보인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기공을 이렇게 또렷하게 그린 까닭이 새삼 궁금하다.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헤매던 고된 삶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나타낸 그의 숨표였을까. 자연과 소통하려고 스스로 자연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존재임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나에게도 이렇게 많은 숨구멍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7 자연을 사랑했고 사람으로 형상화된 하나의 자연이고자 했던 임지호. 세 살 무렵 떠난 막연했던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천둥벌거숭이 같은 외로움으로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끝도 없이 방황했다 한다. 그에게 그 긴 여행은 수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골길에서 노인을 만나면 이들에게서 낳아준 엄마, 그리고 키워준 엄마를 기리며 배낭을 풀어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인성이 아닌 천성으로 살고, 자연의 순리를 음식에 담고자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사람. 하물며 그늘진 담벼락의 이끼도 그의 손이 닿으면 요리의 재료가 되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절반은 후회할 일을 만드는 일이고, 또 절반은 쓰라림을 맛보는 일인 것 같다고 했던 그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갓 태어난 손자에게 재미난 세상에 놀러 온 걸 할애비가 환영 한다고 했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의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며 갔을까.
8 떨어진 낙엽을 본다. 나뭇잎은 떨어져도 사라지지 않는다. 흙이 되어 다시 나무를 살찌우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떠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사라짐 속에서도 온기는 남는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은 낙엽처럼 조용히 내려앉아 오래도록 우리 마음의 거름이 된다. 그 조용한 이치를 생각하며 한 사람의 삶을 마음속에서 오래 배웅한다. 삶의 치열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지금 나의 시간, 죽음은 그다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나도 주어진 나뭇잎의 역할을 다하다가 나무의 또 다른 봄을 위해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야겠지. 그가 전해 준 나뭇잎의 소박한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첫댓글 임지호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어나 요리전문가로
우연히 만나서 그려준 나뭇잎을 선물받아 보관하여 추억하는 서정이 아름답습니다.
자연을 사랑했고 사람으로 형상화된 하나의 자연이고자 했던 임지호. 세 살 무렵 떠난 막연했던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천둥벌거숭이 같은 외로움으로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끝도 없이 방황했다 한다.
그 분은 어릴 때 생모에 대한 애정의 결핍이 상처가 되어 우수에차고 고독했던 모양이군요.
잎의 엄마인 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그리 세밀하게 그려본 것은 자신의 얼굴을 잎에 새기는 듯한 느낌이 옵니다.
그리고 잎은 언젠가는 가지와 이별해야하니 그런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가는 분께 그 잎을 드린것도 자신을 알리고 싶은 것이겠지요.
"또 다른 봄을 위해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야겠지. 그가 전해 준 나뭇잎의 소박한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위 글을 읽으며 인생무상을 느끼게 됩니다.
'떠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사라짐 속에서도 온기는 남는다.'
유명인, 인기인을 떠나 항상 내 가슴에 둥지를 틀고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진정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