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후
조국은 황폐 그 자체였다
(우크라이나와 하와이 마우이 산불 참상과 같음)
유엔과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여러 기독교 국가에서
국민들이 보내온 구호물자(의류, 침구 담요 등)
구호식량(강냉이, 밀가루, 우유가루 등)
잉여 농산물로 하루 1-2끼로 생존하였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북에서 혈혈단신 피난 온 사람들과 고아들은
구걸하거나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담배 꽁초와 이쑤시개를 걸러 내고```
큰 드럼통에 끓여서 파는 것을 먹기도 하였다.
(돼지들이 먹는 것이라 하여 일명' 꿀꿀이죽'이라 함)
오히려 여러 가지 영양 있는 음식물들이 섞여 있어서
배고픈 국민들에게는 별미였다.
또는 빨간 진흙``` 숯 검둥이```
사료보다 조금 나은 거친 밀가루와
나무뿌리 여러 가지 풀들을 삶아서 먹기도 하였다
(흰쌀밥은 명절에만 먹을 수 있었다)
구호 옷은 신장이 큰 서양 사람들이 입던 옷이라
작고 바싹 마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너무 커서 대충 줄여 입거나...
동절기에는 담요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어린아이들은 영양실조와 기생충, 회충으로
바싹 마르고 배가 볼록 나오고
코를 질질 흘려 초등학교 입학 때 가슴에 수건을 달았다.
머리에 몸에 이가 많아 저녁이면 호롱 불에
화롯불에 이 잡는 것이 일과였다.
벼룩과 쥐와 파리 모기 등에
온갖 피부병 전염병에 시달렸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무속/무당을 찾아 궂을 많이 하였다)
주거지가 없는 사람들은
산과 들에 움막을 짖거나 땅굴을 파서
지내기도 하였는데...
동절기에 동상이 걸려 불구가 되거나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육 시설이 파괴되어
한 반에 100명씩 오전 오후 반으로 나뉘었으며
방과 후에는 신작로 도로포장을 위하여
돌과 흙을 할당된 구간에 채워야 했다...
(가가호호 구간을 정해졌다)
수도시설이 복구되기 전에는
공동 우물물을 사용하였는데
물 쟁탈전으로 늘 치열했다..
늘 도난 사고가 빈번하여
넉넉한 사람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방범에 예민하였다.
(우리집도 쌀 10가마니 도둑맞음)
(친정 부모님은 전쟁 전부터 1953년
친정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큰 가마솥 두 개를 걸어 놓고
밥과 국을 끓여서 나누셨다)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앞마당에 줄을 섰다)
내 조국은 절망과
빛이 없는 암흑 그 자체였으므로
기반이 전혀 없는 사람들 중에는
도박과 술로 방탕하며 막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