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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페스트』
출처-<민음사>
유럽인들에게 페스트란?
13, 14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 대초원 지대의 기마 전사들 몽골족이 유라시아 대륙에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실패한 러시아까지 정복했었고 이 드넓은 제국을 원나라와 네 개의 칸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중 카스피해와 흑해 일대를 포함한 동서 교역의 중심로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 바로 킵차크 칸국이다.
14세기 중반,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흑해 크림반도에 자리한 작은 항구도시,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 ‘카파(페오도시야)’의 공략에 애를 먹고 있었다. 카파는 끈질기게 저항했고 몽골군은 점점 초조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진중에는 전염병마저 돌고 있었다. 분노에 찬 몽골군은 전염병으로 죽은, 또는 죽어가는 병사들을 투석기에 실어 성내로 날려 보내고 철수했다. 인류 최초의 생화학전이었다. 이와 별도로 이미 흑해 연안에는 전염병이 퍼지고 있었다.
카파 공성전 당시 투석기로 시체를 던지는 장면 기록화
자신이 치명적 질병의 보균자가 된 것도 모른 채 카파의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이스탄불)로 도망쳤고, 이곳에서 다시 제노바로 베네치아로 피렌체로 흩어졌다. 곧 이 질병은 전 유럽으로 확산된다. 쥐를 매개체로 하는 이 질병이 바로 까맣게 타들어 가며 죽는다고 해서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라고도 불리는 페스트(Pest)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낮은 인구밀도를 가진 초원지대에서는 자연스럽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루어졌으므로 중앙아시아의 풍토병인 페스트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높은 인구밀도의 유럽에는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유럽인들은 이 무시무시한 전염성 질병 앞에서 성당에 모여 기도하며 울부짖었고 페스트는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중세 유럽이 달리 ‘암흑시대’가 아니다. 오직 무지와 기독교(카톨릭)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당시 7,500만명가량으로 추정되는 전체 유럽 인구 중 1/3인 2500만명이 페스트로 사망했다.
1348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는 거리마다 흑사병이 만연하여 시체가 산을 이루고 도시는 악취로 뒤덮인 지옥 같은 시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데카메론’ 중에서
페스트 전파도
유럽인들에게 페스트란 ‘신의 재앙’이자 ‘신의 분노’였다. 중세 유럽인들은 기도하고 회개하고 고행하였으나 돌아온 답변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페스트가 만들어낸 세계, 그것은 다름 아닌 지옥이었고, 중세 유럽을 끝장냈다.
이 페스트가 2차 대전 직후 부활하여 ‘오랑’시를 덮쳤다.
페스트, 오랑시를 덮치다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이 섬찟하고 불길한 사건을 의사 리유가 목격하는 것으로 그의 하루가 시작된다. 이후 곳곳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있는 쥐들의 사체가 발견된다. 본분에 충실한 강직한 의사 리유는 불안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변두리 지역부터 회진을 돈다. 그러나 회진을 도는 중에도 곳곳에서 죽어 있는 쥐들이 발견된다. 불안감은 증폭된다.
외면한다고 해서 재앙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재앙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다. 리유의 병원 건물 수위의 죽음은 불안감을 사실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정오가 되자 열은 대번에 사십 도로 올라갔고 환자는 끊임없이 헛소리를 해 댔고 다시 구토가 시작되었다. 목의 멍울은 건드리기만 해도 아파서 수위는 될 수 있는 대로 목을 몸에서 멀리 두고 싶어 하는 듯했다.」
「수위는 자리 속 깊이 몸을 쪼그리고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려 숨 막혀 하는 것 같았다. 마누라가 울고 있었다.
“이제 그럼 가망이 없는 건가요, 선생님?”
“죽었습니다.”하고 리유가 말했다.」
194X년, 지중해를 바라보는 작은 항구 도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시를 페스트가 덮친 것이었다.
알제리 오랑시
페스트에 대응하는 각자의 방식
어떤 사건에 대응하는 인간의 행동 양식은 결코 즉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세계관과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경험한 사회적 경험의 총체적 산물인 것이다. 페스트라는 최악의 재앙 앞에서 오랑시의 각 구성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한 대응 방식을 보여 준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이나 본질을 외면하고 선정성으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언론은 있었다. 언론은 죽은 쥐의 숫자를 카운트다운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몇 마리, 오늘은 또 몇 마리... 마치 우주선 발사의 카운트다운을 생중계하듯이 이것으로 시선을 끌고 재앙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렸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안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신문은 거리에만 관심이 있었다.
의사 리유의 노력으로 지사를 포함한 도청 보건 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사명감 없는 공무원들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올바른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일단 부정하려 한다. 공무원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페스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 한다고 해서 페스트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 리외는 단호하게 지사와 보건 위원회에 말했다.
「“어떤 세균이.”하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던 리유가 말했다. “사흘 동안에 비장의 용적을 네 곱절로 불어나게 하고 장간막의 임파선이 오렌지 크기만큼 커지고 죽처럼 물컹물컹해지게 만들어 놓는다면 이건 그야말로 일말의 주저도 허락하지 않는 사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페스트라고 부르건 지혜열이라 부르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반수가 목숨을 잃는 것을 저지하는 일입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암흑시대의 사람들처럼, 오랑시의 ‘파늘루 신부’에게는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신의 경고였다. 따라서 신 앞의 회개와 더욱 강한 신앙심만이 이 혼란과 불안을 잠재울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신자들이 대성당을 가득 메웠고 파늘루 신부는 감동적인 설교를 했다.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도시의 사람들 위로 그 연민의 얼굴을 보여 주시던 신께서도, 기다림에 지치고 그 영원의 희망에서 실망하사, 마침내 외면을 하신 것입니다. 신의 광명을 잃고 우리는 바야흐로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신부는 높이 평가를 받은 바 있는 그 교묘한 말솜씨를 발휘하면서 다시 자기의 논조로 돌아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형제 여러분, 바로 여기에 만물에다가 선과 악, 분노와 연민, 페스트와 구원을 마련하신 하느님의 자비가 마침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재앙이 도리어 여러분을 향상하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흑사병 환자와 기도하는 신부
출처-<위키피디아>
재앙은 인간의 바람과 무관하게 들이닥쳤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이성임을 리유는 알고 있었다. 파늘루 신부의 설교가 누군가를 감동시키고 또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었다고 한들 그것이 지금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과는 그 어떤 상관성도 없음을 말이다. 리유는 의사로서 그리고 오랑시의 시민으로서 페스트와 싸울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곧 행동에 옮겼다. 건강한 사람들로 보건대를 만들고 자신의 지식과 체력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고 불결한 환경을 소독했다. 보건대원 중의 하나인 ‘타루’가 리유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믿지 않습니다.”」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헌병대가 오랑시를 봉쇄했다. 오랑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사태 앞에서 ‘랑베르’는 당혹감과 억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랑베르는 오랑시와 그 어떤 관계도 없었다. 그는 파리의 신문사 기자로서 아랍인들의 위생 상태를 취재하기 위해 오랑시에 잠시 들렀을 뿐이었다. 더구나 그는 파리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도시가 봉쇄된 그 순간부터 랑베르는 목표는 오직 ‘탈출’이었다. 랑베르는 리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쨌든.” 랑베르는 말했다. “나는 이 도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선생님께, 제가 그 고약한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증명서를 한 장 써 주실 수 없는지 여쭈어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심정은 이해합니다.”하고 마침내 리유가 말했다. “그러나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그 증명서를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선생이 병에 걸려 있는지 어떤지도 모를뿐더러, 비록 한다고 하더라도 내 진찰실을 나가는 순간부터 도청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전염이 안 된다고 증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랑베르의 선택
랑베르는 죽음의 도시 오랑시를 탈출해 파리에 있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돌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이 도시와 무관한 사람이며 따라서 자신의 경우에는 특별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랑베르는 끝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거금을 들여 밀수업자들과 결탁하여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랑베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었고 랑베르는 탈출의 희망에 들떴다. 리유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그리고 리유 역시 아내가 오랑시에 있지 않고 요양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리유는 신문기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줄곧 그를 바라보면서 리유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하고 랑베르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어떤 것이 내 직분인지를 모르겠어요. 아마 내가 사랑을 택한 것은 정말 잘못일지도 모르겠군요.”
리유는 그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자.”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할 일이 있어서요.” 그가 나갔다.
타루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나가려는 순간에 막 생각이 난 듯이 신문기자에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리유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사회적 역할이 주어진다. 그것이 ‘직분’이다. 보통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직분이라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던 랑베르는 이튿날 꼭두새벽에 리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이 도시를 떠날 방도를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잠시 저쪽 수화기에서 침묵이 흐르더니 이윽고, “좋아요, 랑베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도시를 덮친 페스트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와 함께 리유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저항도 더욱 처절해졌다. 도시의 물자가 고갈되어 갔다. 휘발유마저 동이 나 페스트와 싸우는 보건대 사람들마저 걸어 다녀야 했다. 랑베르는 몸을 아끼지 않고 쉴 사이도 없이 일을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꼬박 일을 했다. 이 고달픈 노역이 끝나고 오랑시를 탈출하여 사랑하는 연인에게 돌아갈 기회가 드디어 왔다. 그러나 리유, 그리고 보건대와 함께 페스트에 저항한 경험이 오히려 랑베르가 탈출의 기회를 걷어차도록 했다. 랑베르가 변한 것이었다. 랑베르는 리유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단호하게 말했다.
「랑베르가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랑베르는 ‘연대’를 선택했다.
사악한 질병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의지를 비웃듯이 페스트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가장 어린 환자에게 새로운 혈청을 제일 먼저 투입했다. 이 혈청은 리유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이는 이때 처음으로 눈을 뜨고, 앞에 있는 리유를 보았다. 이제는 잿빛의 찰흙처럼 굳어 버리고 만 그 얼굴의 움푹한 곳에서 입이 벌어졌다. 그러더니 곧 한 마디의 비명, 호흡에 따른 억양조차 거의 없이 갑자기 단조로운 불협화음의 항의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마치 모든 인간들에게서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는 것만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리유는 성난 태도로 격렬하게 이 죽음을 지켜보던 파늘루 신부에게 외쳤다.
「“허,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다.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 분노에 찬 리유의 외침은 페스트의 창궐에 대해 ‘신의 구원’이라 말하던 파늘루 신부까지 보건대에 합류하게 했다. 의사의 직분을 다하고자 목숨을 건 리유, 오랑시민이 아니면서 스스로 연대의 길을 택한 랑베르, 그리고 죽음을 감수하며 페스트와 싸운 보건대 사람들. 이들의 저항 의지가 모여 끝내 페스트를 물리쳤다. 오랑시와 시민들은 승리했다.
인간의 조건, 사회적 연대
우리는 살면서 왜 연대의 길을 선택하는가. 또는 왜 연대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위에 소개된 ‘랑베르’의 선택에서 알 수 있듯이 연대가 기본적으로 자기희생이라는 이타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도시에서 탈출하는 것 대신 오랑시의 시민들과 연대하는 것이 이타성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윤리의식, 도덕성 등을 떠올릴 수 있다. 혹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같은 기독교적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윤리의식이든 도덕성이든 종교적 가르침이든 모두 인간은 ‘교화(敎化)’가 가능한 고등 생명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연대 의식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 아니다. ‘무신론적 성자’로 칭송받은 카뮈는 자신의 작품 페스트를 가리켜 가장 반기독교적인 작품이라고 말했고, 무엇보다도 20세기 최고의 생물학자로 평가받으며, 명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가 자신의 책에 이론적 영향을 끼친 학자로 평가한 ‘윌리엄 해밀턴(William Donald "Bill" Hamilton)이 이타성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분업화 조직화된 사회적 삶을 사는 개미 연구를 통해 이타성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 이유를 규명하였다. 일개미와 병정개미는 똘똘 뭉쳐 오직 여왕개미를 보호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이타적 행위가 결국 종족의 번식 성공도를 높인다는 것을 여러 세대를 거쳐 깨달았고 이것이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쳐 유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번식 성공도를 낮추어 상대방의 번식 성공도를 높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본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타인과의 연대가 결국은 자신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해밀턴의 과학적 언어를 문학적 언어로 바꾸어 보자. 그것이 바로 랑베르의 말,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이다.
이것을 다시 혁명가의 언어로 바꾸어 보자.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때때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
인간은 개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생물학적 연대뿐만이 아니고 사회적 연대까지 실천한다. 왜 우리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사회적 연대를 해야 할까? 그것이 ‘우리’뿐만이 아니고 ‘나’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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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반복되듯이 공동체의 위기도 반복된다.
「의사는 결국 타루가 평화를 다시 찾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지 친구의 시체를 묻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페스트는 반복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페스트와 같은 반복되는 공동체의 위기에 맞서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우리의 무기가 바로 연대이다.
세 번째 인생탐구를 마무리한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주저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라. 누군가가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가. 망설이지 말고 그 손을 잡아라. 사회적 연대,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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