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어느 모임에 갔더니 각자 새해 결심을 말하라는 거다. 순간 막막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수없이 되풀이 된 진부한 주제임에도 이번에는 생소한 이물질처럼
목에 걸렸고, 예상 밖의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둔 수험생처럼 안절부절 하다 내 차례가 되어
얼떨결에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자신 없이 말했다.
새해 결심이란 게 대개 나쁜 습관을 버리거나, 좋은 습관을 새로 갖거나 꾸준히
유지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담배는 오래 전에 끊었고, 과음 할 기회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화투와 포커와도 담을 쌓은 지 오래이니 이미 남아 있는 나쁜 습관이란 게 별로 없고,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체질적으로 둔한 운동감각에 가끔 야트막한 동산이나 오르고 운동장 주위를 쳇바퀴 돌 듯 도는 주제에 건강에 좋은 습관을 새삼스럽게 시작한다고 거창하게 결심 운운하며 말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새해 결심뿐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얼마나 신기루 같은 결심,
뜬구름 잡는 결심, 조변석개의 결심, 작심삼일의 결심 등 수많은 포말 같은 결심으로
명멸된 나의 인생길이었나?
신입사원 시절 나는 회사 독신자 숙소 침대 머리맡에 “너는 누구냐?” 란 글을
크게 써 붙이고 산 적이 있다. 그 때 나이 스물여덟, 대학 졸업 후 1년간 공부하던
사법고시를 중단하고 회사에 잠시 취직하였는데 매일 눈앞의 유혹, 특히 술과 고스톱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고 끈질기고 치명적이었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오면 꿈을 잃어가는 데 대한 좌절감과 공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과연 내가 누구인지 근본적인 의문과 회의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서 나를 뒤돌아보고 결심을 새롭게 하는 방안으로 고안한 게 “너는 누구냐” 란 부적(?)이었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오늘 어때?”란 친구들의 한마디 유혹에 하염없이 무너져서 나는 항상 개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술친구, 고스톱
친구란 공동체 속의 우리로서 쉽게 탈바꿈하여 존재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내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살아 왔다.
그 시절 만난 아내와 결혼하여 35년 이상을 살면서 평범한 지아비요,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자리매김했다. 직장에서는 몇 년마다 올라가는 직급에 따라 변하는 호칭으로만 존재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인데 나 아닌 남에게 평가된 결과가, 그것도 표피적, 정량적으로 평가된 결과가 나의 삶을 재단해 왔다.
독신자 숙소 시절 이후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60여년의 세월을 뭉뚱그려
집적해서 내가 누구인지 자문해 본다. 과연 나는 누구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나란 인간을 관통하는 속성을 집약해 본다.
우선 나는 불효자이다.
나는 누나만 넷을 둔 첫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은 물론이고 조부모님, 누님들로부터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다들 책보를 갖고 다니던 그 어렵던 시절 반에서 유일하게 가죽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부터 객지로 유학하여 기대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원하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은 대학교 입학이 마지막인 것 같다. 받은 사랑과 은혜에 티끌만큼도 보답하지 못하고 실망만 많이 안겨드린 채 25년 전에 부모님이 한 해 걸러 돌아 가셨을 때 너무 무력했던 내가 부끄럽다.
아버님은 할머니가 등창으로 고생하셨을 때 입으로 직접 고름을 뽑기까지 하신 군(郡)에서
소문 난 효자였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모순덩어리이다.
명색이 천주교 신자인 나에게 사랑보다도 미움이 더 많다. 머리로는 사랑을 이해하는데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 나를 배신한 사람이 좀처럼 용서가 안 된다. 복수는 감히 할 생각을 못하지만 철저한 무시로 대신 한다. 올바른 길, 정도 대신
샛길로 가며,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고집쟁이이다.
신혼 초부터 대학원 진학을 권했던 아내의 권유에 아직까지 오불관언이고, 담배는 35년을
쉼 없이 피워대다 끊었고, 술은 45년 넘게 계속 마시고 있다.
한 신문만을 40년 넘게 줄기차게 구독하고 있으며, 끈질기게 서울의 아파트 대신 고향의
문전옥답에 대한 사랑을 고집하여 마이너스 재테크의 달인이 되었다.
나는 촌놈이다.
나는 가평이란 산촌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졸업 후 수원에서 잠시 중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한 후 반세기를 주구장창 싫증도 안내고 서울에서 코를 박고 살았다. 그럼에도 도시의
세련됨, 서울물과는 거리가 먼 아직도 촌티가 역연한 태생적 촌놈이다.
나의 촌스러움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대충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와인을 남 따라 점잖게 먹긴 하지만 복잡한 종류나 빈티지는 아는 게 없고,
양주 역시 비싸고 귀한 맛에 덩달아 먹지만 그에 상응하는 맛을 감별할 능력이 없다.
나는 그저 봄비 내리는 날, 바람 부는 가을날, 호텔 레스토랑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는 시끌벅적한 시장통 술집에서 설운도, 나훈아, 주현미의 트로트를
들으며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을 씹으며 소주를 마시는 게 훨씬 편하고 좋다.
나는 겁쟁이다.
나는 사소한 일에는 비교적 용감하지만, 정작 중요하고 위험한 일에는 겁쟁이다.
대학교 시절 데모할 때에는 항상 중간에 서서 어정쩡하게 참여했고, 15년 전 아들과 호기롭게 번지 점프하러 갔으나 아내의 결사적인(?) 만류를 핑계 삼아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으며,
종북, 친북 양아치들에게는 입으로만 구시렁거렸지 몸으로는 한 발짝도 나서지 못했고,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머나먼 길, 가보지 못한 길로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용감했던 경우는 거의 없지만, 아주 오래 전 아내와 함께 영등포 연흥극장엘 갔다가
필름이 자주 끊겨 영화가 끝난 후 내가 주동이 되어 환불을 받은 것이 겨우 생각나고,
또 그보다 더 오래 전 아내와 함께 내장산 단풍놀이를 갔을 때 다른 방에 투숙한 아줌마 일행이 밤새도록 떠들어 잠을 잘 수가 없어 용감하게 몇 번 항의를 했는데 효과는 전혀 없었고,
아침에 “젊은 양반이 잠 잘 시간이 있는 거유?” 란 핀잔과 야유만 들었다.
나는 팔불출이다.
대학 졸업장 외에는 별로 자랑할 게 없고, 그 대학의 평균적인 사회적 성적표나 일반적
기대치에 못 미치게 산 나는 아마 보상 심리로 아들, 딸을 대신 내세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가 자식에 대해 물어 보길 은근히 기대하는 수동적인 팔불출이 되곤 한다.
딸과 아들은 모두 잘 자라 주어서 운 좋게 자식 걱정을 모르고 살았다. 아들은 나의 모교인 대학의 35년 후배가 되었고, 다행히 군대 갔다 와서 철이 든 베짱이 애비를 반면교사 삼아
일찍 사시합격을 했다. 덕분에 나는 몇 년 전 아들이 합격했을 때 “한풀이했다”
“원풀이했다”라는 위로와 축하의 인사를 동시에 받는 남다른 호사를 누렸다.
부모 된 사람들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드는 것이고,
부모 된 사람들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신들의 삶이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는 거라지만
덜떨어진 나에겐 아직 우이독경인 셈이다.
나는 울보이다.
사나이는 죽을 때까지 세 번 운다고 하는 데 나는 요즘 수시로 운다.
영화나 TV나 책이나 신문을 볼 때 슬픈 장면이 나오면 주책없이 눈물이 나온다.
국제시장 영화를 볼 때엔 수돗물을 틀어 놓은 것 같았고, 이른 아침 조간신문에서 장애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이야기나 미담을 읽다가도 질질 짜서 민망하기까지 하다.
어머니란 존재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이어서‘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가슴 찡한 사모곡을 들으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고, 무명 가수가 기가 막히게 애절한 노래를 열창해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 병든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기특한 효심에 울어 버리고, 심지어는 훈련 받는 해병대의 씩씩한 모습을 보아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아내는 사추기(思秋期)네 갱년기네 하며 증세가 심하니 병원을 가보자고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을 안 한다.
내가 생각해 봐도 나는 참 철딱서니 없이 살아 왔다. 먼 길을 이정표도 없이 세 살배기 걸음으로 뒤뚱뒤뚱 잘도 걸어 왔다. 허점투성이, 하자투성이며 사용연한이 거의 다 된 노후 상품인 셈인데 그래도 버리지 않고 계속 버텨 주는 아내가 고맙고, 잔존 가치를 인정해 주는 아이들이 고맙고, 예전의 상품 가치를 기억해 주는 친구와 직장 동료들이 고마울 뿐이다.
아마도 이들은 안에 숨어 있는 허섭스레기 같은 나를 발견 못하고 밖에 보이는 번지르르한 외양의 나를 보고 불효자를 효자로, 모순덩어리를 현실주의자로, 고집쟁이를 원칙주의자로, 촌스러움을 털털함으로, 겁쟁이를 강직함으로, 팔불출을 재수 좋은 행운아로, 울보를 정이
많은 감성주의자로 착각하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속아 넘어 갔으리라.
첫댓글 너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꼭 닮은 나의 이야기일세...
뭔 심경변화가 있길래 참회하시듯 쓴 게요?
암튼 내 비밀을 들여다 본듯 하여 찔끔했네요~~
방황하는 갱년기삶을 교통정리하듯 시원하게 너무 인간적으로 쓴글에 감동안할수없네.2반문짐에 실어야될것 같네.
고맙네 공감할수 있게해주워서.잘 보내시게.
너는 누구냐하고 돌아보는 필자가 오히려 부럽소.
그런것도 인식 못하고, 아무 철학도 없이 하루, 하루를 그저 살아가는 나의 심정은 더욱 공허하게 하는 구랴...
이제부터라도, 아직 늦지 않앗다고 생각하고 희망과 미래를 담아 열심히 삽시다.
유군도 이제 많이 컷구나! 루소의 참회록 흉내도 내고.......
그래도 양재모임의 회장님으로 출세했는데......
언제 광장시장 좌판에서 쇠주한잔 하고 " 오가는 현금속에 웃음짓는 고스톱 " 이나 함 칩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