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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 육성, 정선전씨 필구公 문중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강릉김윤기가옥[노암동] [江陵金潤起家屋-魯巖洞-]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홍국영 [ 洪國榮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세도정치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 정조(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정조의 신임으로 도승지에 오르고 누이동생을 빈으로 들여보내 승승장구하였으나 누이동생이 급사하는 바람에 세도정권을 이루려는 시도가 실패하여 실각하였다.
출생-사망본관자국적활동분야시대
1748 ~ 1781 |
풍산(豊山) |
덕로(德老) |
조선 |
정치 |
조선시대 |
본관 풍산(豊山). 자 덕로(德老). 1748년 홍낙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71년(영조 47) 정시로 문과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思悼)세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僻派)들이 세손(世孫:正祖)까지 해하려고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사서(司書)에 승진,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몰아내고 1776년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이어 홍상간(洪相簡) ·홍인한 ·윤양로(尹養老) 등의 모역(謀逆)을 적발 처단하였고,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그 대장을 겸임, 정조의 신변보호에 힘쓰고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권력이 홍국영에게 집중되었고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렸다.
1778년 왕비에게 소생이 없자 겨우 13세된 자신의 누이동생을 빈(嬪)으로 들여보내 세도정권을 굳게 다졌으며, 이듬해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후궁으로 원빈(元嬪)이 1년 만에 병사하여 왕의 외척(外戚)으로서 집권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왕이 새로 빈을 맞아들이지 못하도록 극력 반대하고 왕제(王弟)인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아들 담(湛)을 죽은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이라 하였다. 홍국영이 정계에서 물러난 후 완풍군은 상계군(常溪君)으로 개봉하였으며, 1786년(정조 10)에 죽었다. 홍국영은 완풍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780년 왕비 김씨가 앞서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어 가산을 적몰(籍沒)당하고 방축(放逐)되어 이듬해 강릉에서 죽었으며, 5년 후 상계군이 음독 자살하였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 ·이조참의 ·대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국영 [洪國榮]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