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내 안에 사시는 사랑 안에 거하는 삶
06/30금(金) 요 13:34-35/ 요일 4:7-1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내가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기독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짜 교인, 가짜 목사, 가짜 장로, 가짜 집사입니다. 인간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 남을 잘 돕는 것은 천성적인 복이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의 목표요, 사랑의 기준입니다.
▣나는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원수 관계에 있는 나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 죽게 하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롬 5:9-10). 서로 사랑하되 사랑의 범위가 원수까지의 사랑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가?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4-45).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티나 김 선교사님이 대학에 다닐 때 룸메이트가 날마다 남자친구에게 꽃다발을 받는 것을 보고 그것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남자친구가 생겨 꽃다발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남자친구는 생기지 않고, 룸메이트에게는 부러운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질투가 생기고 하나님께 불평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어보라’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열고 보라는 음성이 또 들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자 주님께서 ‘정원의 가로수와 꽃들이 내가 너에게 주는 꽃다발이란다.’ 인간에게 받는 사랑보다 주님의 사랑이 더 귀합니다. 더 큰 사랑을 체험하니 룸메이트의 꽃다발이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십니다. 외로움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내 안에 와 계신 주님의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내가 원수인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원수를 사랑하라.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를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만들 것이다. ‘새 계명’은 주님이 나를 통해 주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니 나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결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사십니다. 내 이름이 지워지고 주님의 이름만 남아야 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예수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예수 생명으로 그분의 눈, 그분의 생각, 그분의 다리, 그분의 입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면 원수도 주님의 눈으로 보아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무엇을 하든 예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없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의 뜻이므로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바울은 감옥이 열리자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지만, 바울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속에 사십니다.” 그리고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나는 죽고 예수 이름으로 산 사람입니다.
And...
성도는 빛 안에 거함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드러내야 합니다. 어둠을 감추면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며 핑계를 댔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면 사울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불순종을 합리화하니 사울의 운명은 끝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의 지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큰 죄, 작은 죄가 아니라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시편 51편에 글로 남겨 고백합니다. 나 자신은 어떤지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면 서로 고백하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 허물을 공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복의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날마다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국 교회의 내노라하는 목사님들이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뵙고 덕담 한마디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해 주셔서 그곳에 방문한 목사님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참 의미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열심히 봉사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종교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오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에 눈이 떠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니 변하지 않고 길이 열리지 않아 본인이 길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니 인생에 기대가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인격적인 주님과 사귐이 있을 때 길이 열립니다. 내 안에 갇힌 예수는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복음(말씀)으로만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제자가 랍비를 찾아가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랍비는 “고맙네, 그런데 한 가지 묻겠네. 자네는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렇게 묻자 제자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나를 아프게 하는 것도 모르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상대가 무엇을 아파하는가? 도 모르면서 내 방식의 사랑을 합니다. 상대의 아픔을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내 방식의 사랑을 끝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그 사람의 사정을 아십니다. 상대의 필요는 주님만 아십니다. 이제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하는 행동마다 눈에 거슬리는 밉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계신 주님을 보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너무나 미워 그를 포기한 아내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기도하면서 왜 포기했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는 나를 무시하고 있구나, 너와 네 남편 사이에 있는 나는 안 보이느냐?” 그렇습니다. 미워하는 그 사람을 보지 말고, 그 사람 속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을 바라볼 때 그 속에 계신 주님을 보았더니 자신의 행동이 달라지더랍니다. 내가 변하니 남편도 자연스럽게 변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골수 이식기증을 하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마침 기증을 받겠다는 사람과 모든 항목이 일치되어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골수이식을 한 후 기증을 받은 사람은 정상으로 회복이 되었는데 정작 목사님 본인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기증받은 사람이 재발되어 다시 골수이식을 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날 가능성이 1%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하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한 분 장로님이 “만일 그 아이가 목사님의 딸이라면 어찌하겠습니까? 단 1%의 가능성에 매달리지 않을까요?” 이 말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 것입니다. 주님이 하실 것이라 믿고 다시 골수이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의 기적이 일어나 둘 다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증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아이의 아버지는 또 다른 사람에게 골수를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기증받은 자와 그의 가족을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하십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빛 안에 거함으로 강한 자가 됩니다. 주님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 번을 불러도
https://youtu.be/cdl_7eU3H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