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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40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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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주 앉아있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휴식, 행복이요 구원인 존재>
혹시 여러분의 인생 여정에 이런 사람 한 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칠고 높은 세상의 파도에 시달리고 넘어질 때 마다, 즉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 찾아갈 때마다 언제든지 두 팔 활짝 벌리고 환대해 주는 사람.
‘억울하다! 괴롭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 털어놓을 때마다, 함께 힘겨워하며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람. 그 어떤 말을 해도, 그 어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도, 그러려니 받아주는 사람.
그의 존재로 인해 그나마 이 세상이 살만하고, 쉼쉴만하고,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존재 자체로 기쁨이요 희망, 위로요 구원인 존재! 그와 마주 앉아있는 그 자체가 기쁨이요 휴식, 행복이요 구원인 존재!
‘에이! 요즘처럼 각박한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있겠냐?’며 손사래치실지 모르겠지만, 잘 한번 주변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인생길을 천천히 한번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 존재는 그 누군가 다른 인간 존재로 인해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우리 삶이 좀 더 가치있고 풍요로워지기 위해서 그런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지난 삶을 아무리 샅샅히 훑어봐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슬퍼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 복음 11장 28절)
예수님께서는 그릇되고 왜곡된 율법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수도 없이 가지에 가지를 치고, 새끼가 새끼를 낳은 잡다한 율법 조항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거짓 목자와 지도자들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삶은 당시 백성들에게 그 자체로 큰 상처요 고통이었습니다.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례 규정이며, 성전 봉헌 규정이며, 극도로 비인간화된 율법을 준수해야지, 세금도 꼬박꼬박 바쳐야지, 거짓 목자들 생계도 책임져야지, 백성들의 허리는 휘청휘청 휠 정도였습니다. 결국 거짓 목자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제정된 율법을 세부화시킴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짐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은 율법학자들이 제시한 세세한 율법 규정을 잘 준수하지 못함으로 인해 언제나 큰 죄책감 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율법학자들 스스로도 율법은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부당한 현실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셀수도 없이 세부화된 율법조항들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고 단순화시키셨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신 새로운 계명인 ‘사랑’ 안으로 쏙 들어온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율법은 짐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9~30절)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절대로 무거운 짐이나 힘겨운 멍에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봉사 활동이나 단체 활동 역시 무거운 부담으로 여겨지면 곤란합니다. 뭘 하든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얼굴로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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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손오공을 만드는 것은 여의봉이 아니라 금고아다>
영화 <곤지암>(2016)은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소름 끼치는 장소인 대한민국 공포체험의 성지라고 불리는 곤지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공포영화입니다. 유튜브 조회수를 높여 순간적으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젊은 청년들이 곤지암에 있는 폐정신병원에 잠입하여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입니다.
처음엔 그들이 유튜브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상으로 무서운 사건들을 연출하여 조회수를 올려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실제로 예전에 생체실험을 당해 죽은 유령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청년들이 하나둘씩 죽어가지만 그것이 조회수를 급격하게 올려 수억 원의 돈을 벌 수 있게 되자 담당자들은 그들을 그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귀신이 있는 것이 확실한 줄 알면서도 돈에 눈이 멀어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이 진짜 공포로 다가옵니다. 영화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결국 그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한 이들도 귀신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사람은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힘과 권력, 혹은 명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그것의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다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합니다.
노예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것들의 종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듯이 인간들은 각자의 욕구에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엔 자신의 삶을 공포영화로 만들어버립니다. 자신들이 가졌다고 착각하는 작은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욕구의 종살이를 하며 자기 삶을 공포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주시려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그 안식이라는 것이 결국 또 목에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는 주인이 소를 부리기 위해 목에 짊어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멍에를 두른다는 것은 그분의 노예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이 자아의 욕구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무언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노예생활을 하거나 하느님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멍에를 메야합니다. 멍에는 자아의 돈에 대한 욕심, 육체를 만족시키려는 욕심, 더 높아지려는 마음을 묶어놓는 오랏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에 자신의 욕구를 통제시킬 때 비로소 ‘자아숭배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원숭이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세고 난폭해서 금방 원숭이의 왕이 됩니다. 돌원숭이에 불과했던 손오공은 자신이 타고 날아다니는 근두운과 무적의 무기인 여의봉을 가지게 되어 점점 더 무서운 것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결국 석가여래에게도 반항을 하게 되는데 석가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석가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벌을 받아 500년 동안 오행산에 갇히게 됩니다. 그에게 그런 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바로 삼장법사를 도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하도 천방지축이라 그를 통제하기 위해 머리에 ‘금고아’를 씌웁니다. 손오공이 육체의 본성대로 나가려고 할 때 삼장법사가 기도로 그 금고아를 줄입니다. 그러면 손오공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게 되고 비로소 정신을 차려 본래의 소명으로 돌아와 요괴를 무찌릅니다. 그렇게 서유기는 손오공이 악의 존재인 돌원숭이로 태어났지만 자기 본성을 죽이고 신의 소명을 따를 때 참으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는 자’란 뜻의 ‘제천대성’이 된 이유는 구름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를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힘은 끊임없이 산 밑으로 자신을 가둬 인생이 공포영화가 되게 만듭니다. 원숭이가 손오공이 되게 만든 것은 삼장법사가 그의 머리에 씌워준 머리띠인 ‘금고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어주시는 멍에, 즉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원숭이인 인간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를 메고 하느님의 소명을 따라야만 하지만 그것이 원숭이로 날뛰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욕구를 죽이는 멍에인 십자가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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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는 데, 힘이 들고, 허덕인다는 것은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모습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인데 그분 때문에 불편해진다든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을 벗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이는 율법에 매여 그 참 뜻을 알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기적을 일으키거나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높이 올라가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건물이 높으면 높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한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기초를 닦기 위해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그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시 동안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지금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그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세상의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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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위대함과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자만은 눈을 멀게 하여 인간의 나약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언자는 각자의 삶과 온 세상에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작품을 보도록 우리의 눈을 들어 올리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선은 스스로 안전과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여기는 자기 숭배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우리 자신의 첫 ‘우상’은 곧 ‘나’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여기고는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은 도움과 위로, 지지와 힘을 받습니다. 젊은이나 어른 모두 오로지 하느님만을 신뢰하라고 권고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보루이시고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삶의 수고 안에서 절망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 현존에 맞게 걸어가는 새로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그분의 권능과 능력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제시되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표현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함께 나누기를 바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친밀감으로 들어 높이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무한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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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여기서 ‘고생’과 ‘무거운 짐’을 유대교의 율법들로 해석할 때가 많은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런 해석은 별로 의미가 없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인생살이의 고달픔’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에서 ‘모두’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자격 제한도 없습니다. 민족, 인종, 직업, 신분, 남녀, 학력, ...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믿음’입니다.)
여기서 ‘안식’은 ‘편안한 휴식’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모든 억압과 압박에서 해방된 상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상태, 영원하고 참된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곧 ‘구원’입니다. 이 ‘안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주겠다.”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말씀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주는 안식을 받으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참된 안식을 얻는 방법’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은, “내 계명은 너희의 멍에를 벗겨서 너희에게 편안함을 주는 ‘해방’이고, 내 가르침은 너희의 짐을 없애서 너희를 가볍게 해 주는 ‘자유’다.”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내 멍에’, ‘내 짐’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표현은 ‘반어법’을 사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은 결코 멍에나 짐이 아닙니다.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덜 괴로운 멍에, 덜 무거운 짐’으로 해석하면서 “정말로 괴롭고 무거운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무리 가볍고, 쉽고, 편안하더라도 멍에는 멍에고, 짐은 짐입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멍에와 짐을 가벼운 멍에와 짐으로 바꿔주시는 분이 아니라, 멍에와 짐 자체를 없애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은, ‘힘들고 싫어도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뻐하면서 실천하는 ‘기쁜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예로 들어서 생각하면, 이 계명은 증오심, 원한, 복수심, 또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 죄의식 같은 멍에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또 다른 멍에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가르침은, ‘교만’이라는 멍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낮춤’을, 또는 ‘겸손’을 멍에나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이니까 어쩔 수 없이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낮춤’과 ‘겸손’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만’이라는 멍에 위에 ‘위선’이라는 멍에를 더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주일을 지키는 일을 멍에와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주일을 지킨다면, 주일은 그냥 괴로운 날로 변질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날이라면 주일을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날이고, ‘기쁜 날’입니다. (‘노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또 만일에 ‘기도’를 멍에와 짐으로 생각한다면, 미사 시간과 기도 시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하기 싫은 기도를 억지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강제 노동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만나는 일이고, 기도 시간은 우리를 억압하는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는 시간이고, 안식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만일에 고해성사를 멍에와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억지로 고해성사를 본다면, 그 고해성사는 ‘회개’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서 억지로 보는 고해성사는 참으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고해성사는 우리를 짓누르는 죄에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고해성사를 본다면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늘나라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기도 하고, 지상에서부터 미리 참된 안식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는 기쁨과 평화는, 하늘나라에서 얻게 될 참된 안식을 미리 체험하게 해 주는 은총이기도 하고, 그 안식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강제 노동이 아닙니다. 나중에 얻을 안식을 생각하면서 지금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해서 하는 생활이고, 내가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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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어린 시절, 저는 어머니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교육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힘든 일이 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종종 기도를 드리곤 했는데 정말 하느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심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점차 성장할 수록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힘들 때 어떠한 일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지만 하느님께서 즉각 즉각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정말 계신가 의구심이 들고 이렇게까지 나의 기도를 모르는 척 하시나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저의 모습이 참으로 미성숙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여러 가지 조건들, 예를 들면 항구함, 성실함,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자하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데 이러한 것들 없이 그저 간절함만을 가지고 내 방식대로 부탁을 들어달라고 청하기만 했으니 설사 다른 방식으로 기도를 들어주셨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을, 마치 동전을 넣고 구미에 맞춰 음료를 뽑아먹는 자판기처럼 생각했던 셈입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유다인들 역시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번번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결코 순수한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인지, 정말 위대한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들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청에는 한 가지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의심’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는 이들은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믿을 뿐이었습니다.
한편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으므로 기적을 청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그들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메시아와 초라한 예수님의 모습이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로마의 압박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고 다른 민족을 다스리게 하는, 그야말로 지상 왕국의 영광을 이루게 해줄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천상 왕국의 영광을 이룰 메시아였습니다.
그분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죄로 멀어졌던 인류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천상 왕국의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지상의 영광과 천상의 영광이 그 성질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영광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부족할 것이 없는 영광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인간에게 가져다주실 영광의 특성은 오늘 복음에 잘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이 천상 왕국의 메시아는 무거운 짐을 단번에 없앰으로써 풍요로운 삶을 이루도록 도와주기보다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지시는 분이십니다. 멍에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짊어진 채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를 잘 따르는 이들에게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고 있었습니까?,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되려 하느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힘들고 지칠수록 하느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분을 외면하지는 않았습니까?
가끔은, 당시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세속의 메시아를 원하며 그와 관계된 청원만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따르는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며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방식이 아닌 당신의 방식대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실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께, 우리의 멍에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힘든 우리들을 보살펴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주님께서는 오늘도 따뜻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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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고통을 통하여 영광으로>
공짜는 쉽게 사라지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들어가기는 쉽지만 얻을 것이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귀한 것을 얻고 오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수도자의 길이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보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알고 남을 안다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각자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지 십자가를 벗어던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지 않으셨으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나에게로 오너라”. 황금도 단련을 받아야 더 빛이 납니다.
일이 많아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의 문 앞에 와 있는 사람이고 할 일 없는 사람은 행복을 쫓아내는 사람입니다.
오늘 아침 상담자가 밀려 8시 30분부터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행복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서 8장 18절 “사실 장차 우리에게 드러날 영광에 비해서 지금 이 시대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고난 겪는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면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영광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 편하고 가볍다." 하시는데 모든 사람에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볍지만, 부자에게는 솜털 같은 멍에도 무거워 벗어 던지려고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이며 기도 생활을 통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내놓고 자기 전 존재가 하느님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자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온유함이란? 하느님의 자비 체험을 통하여 자기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살아감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순한 것은 자기 몸을 보존하는 장본이며, 억세고 날카로움은 화를 부르고 죽음을 부르는 장본이다.”
오늘 수고하고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 구원의 길로 나가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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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관리국장/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외면이나 내면의 짐을 지게 됩니다. 외면의 짐은 질병과 가난,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부담 등 외적인 결핍으로 생기지만 우리가 노력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짐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격의 차이, 마음의 황폐함과 강박감, 우울증 등 내적인 결핍으로 평생을 달고 다녀야 하는 어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 인간의 멍에를 가볍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짐의 강도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재산을 재벌과 같은 수준으로 놓고, 백세의 무병장수를 찾는다면 대다수의 사람은 매우 불행합니다.
우리 마음의 갈등과 고통을 이상 세계에 올려놓고 보면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거룩한 신성을 감추시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 살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갖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삶의 고통과 십자가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지치지 않는 힘,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는 생명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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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품어야 할 이>
마태오 11,28-30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내가 품어야 할 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세상에는
품고 싶은 이와
품어야 할 이가
있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품어야 할 이보다
품고 싶은 이를
품고 싶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품고 싶은 이보다
품어야 할 이를
품어야 한답니다.
품고 싶은 이는
내가 아니어도
품어 줄 사람이
많지만
품어야 할 이는
내가 아니면
품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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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살만한 세상….>
송명희 시인의 “예수 이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우리 입에는 천국 향기가 넘칩니다.
예수 그 이름을 들으면 우리의 귀는 달콤해집니다.
예수 그 이름을 새기면 우리의 마음엔 행복이 넘칩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들으십니다.
예수 그 이름에 마귀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예수 그 이름에 우리의 모든 죄는 사라집니다.
예수 그 이름에 지옥의 문은 닫히고 천국의 문은 활짝 열렸습니다.”
“저희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오늘 거룩하신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명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요즘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 자신 스스로가 이 모든 것을 이겨내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것들을 왜? 혼자만 들고 힘들게 살아가시려고 합니까? 주님께서는 ‘저희가 힘들겠다.’라고 당신께 말하면 ‘지금도 여전히 함께 그 짐을 함께 져 주시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운님들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희가 모든 고통 그리고 어떤 수고를 겪더라도 그 마지막 끝자락에 주시는 것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지칠 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우리가 정신 차리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은 힘든 세상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고통과 시련, 좌절과 어려움 중에서도 기쁨과 희망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온갖 선하고 긍정적인 생각들이 저절로 나오게끔 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성장통을 거치고 나면 한 뼘 가득한 은총은 자라나 있겠지요.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한순간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주 예수님이 계시고, 주 예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고운님들이 계시니 아직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먼저, 주님 앞에서 내 뜻대로 살았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내려놓음으로 주님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고운님들이 원하던 것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있는 곳도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고운님들이 주님께 새 힘을 얻고, 주님의 말씀으로 지치지 않으며, 주님의 슬기로 헤아릴 수 없는 은총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지금 있는 그곳에 힘들고 어떤 수고가 있더라도 주님과 함께 계심을 믿고 기도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은 회복의 은총을 얻어 지칠 줄 모르고 피곤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축복과 은총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하면서 기다리는 믿음의 기도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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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42)
♧♧ 시편 66편 10절….
"하느님, 당신께서 저희를 시험하시고 은을 단련하듯 저희를 단련하셨습니다."
* 당신께서 저희를 시험하시고...
성경이 말하는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 둘째,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중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은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을 단련하시어 그 신앙을 더욱더 성숙시키기 위해 허락하시는 시련입니다. 예를 들면, 욥기 받은 시험이 바로 이것입니다.(욥기 1,2장. 참조) 이러한 시험을 참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것으로 옳다고 인정하시며 그에게 장차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야고보서 1장 12절. 참조) 그러나 마귀의 유혹은 각 사람이 자신의 욕망에 끌려 유혹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14절. 참조) 따라서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이를 유혹을 엄하게 조심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한’이라는 말은 금의 순도를 ‘측정하다.’라는 의미로 하느님이 주시는 단련의 시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은을 단련하듯 저희를 단련하셨습니다...
불순한 이 물질이 섞여 있는 은이 오랜 제련 과정을 통해서 순수한 은이 되듯이(잠언 17장 3절, 25장 4절. 참조),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여러 모양으로 시험하셔서 당신의 뜻에 합당한 이들로 성숙되게 만드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다윗은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겪은 고난이 실상은 백성들의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해준 단련의 과정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욥기 23장 10절. 참조)
♧♧ 시편 66편 11절….
"저희를 그물에 걸려들게 하시고 무거운 짐을 저희 허리에 지우셨습니다."
앞 10절에 이어 11절과 12절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단련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 그물에 걸려들게 하시고...
‘그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추다’는 감옥을 뜻하기도 하며, 또한 피신처나 산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는 자유가 없는 속박이 상태를 상징한 것으로(애가 1장 17절. 에제키엘서 12장 13절, 17장 20절.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속박을 의미합니다.
* 무거운 짐...
‘그물’에 이어진 말인 ‘무거운 짐’이란 점층법적 표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의 삶을 가중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생활한 것과 연관 지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천대받고 억압받았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노동으로 고난을 당하였음을 가리킵니다(탈출기 1장 8-14절, 5장 6-1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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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많은 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즉, 언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벌었을 때? 높은 지위에 올라갔을 때? 물론 이때도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을 때 행복했습니다. 돈이나 명예 등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집중할 때 불안감을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것을 통해서는 욕심과 이기심이 나와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경제적인 이득은 없어도 기도나 봉사에 집중할 때 분명히 행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억은 꽤 오래 남으며, 집중하면서 오히려 편안함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봉사 단체에서 열정적으로 봉사하다가 자신의 사업이 너무 바빠서 봉사활동을 잠시 멈췄었다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업과 봉사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몸이 너무나 피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쉬게 되었는데, 쉬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도 않고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업에도 문제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시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 안에 진짜 기쁨과 행복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시더군요. 자신이 얻으려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시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주실까요?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시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인정받을 수 있는 지위를 주실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넓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을 찾는 곳이 어디인지를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닌 주님 안에서, 물질적인 것에서가 아닌 영적인 것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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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배>
소인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 씀씀이가 좁고 간사한 사람을 가리키며 쓰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안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없을까요?
이 소인배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1) 대부분 아주 똑똑하다.
2) 다른 사람들(특히 윗사람, 상사)이 자기에게만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3) 자신의 이익이 궁극적 목적이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의 손해는 괜찮다.
4)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는 악당과 달리 친구의 얼굴을 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런 사람이 꽤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소인배들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나 자신 안에 탐욕이나 욕심이 없으면 쉽게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욕심이 가득하면 늘 그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망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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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동글 동네 모돌이’를 읽었습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에 좋은 글을 써 주시는 한영국 선생님의 소설입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글입니다. 제게는 감동이었습니다. 모돌이는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집안의 사정으로 엄마와 누나는 한국에 남고, 아빠와 미국에 이민 왔습니다. 낯선 미국에서 어린아이가 사는 이야기입니다. 엄마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낯선 곳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도 있습니다.
모돌이의 그리움, 외로움, 열등감을 채워주는 장소와 사람이 있습니다. 그곳은 모돌이가 하얀 집이라고 말하는 수도원입니다. 모돌이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는 모세 수사입니다. 할아버지 수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공과 출세를 향해서 무한 질주하는 세상에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원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나누고, 모두가 이해하고, 모두가 사랑하는 세상이 된다면 수도원은 필요 없을지도 몰라.’
책에서 모세 수사님은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이미 젖은 자는 비가 와도 다시 젖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그리움, 외로움, 열등감은 있을 겁니다. 누구나 시기, 질투, 욕심 때문에 괴로워할 겁니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의 발걸음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나그네는 어딘가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 소설 속의 모돌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님 안에 쉴 때까지 내 영혼은 지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영성가도 번민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몸에 큰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는 시편 23장의 내용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나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네. 주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를 깊이 묵상했다고 합니다. 사고 전에 찍었던 사진은 앳되고 아름다운 여대생이었습니다. 40번을 넘게 수술을 한 지금의 얼굴은 많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지선 씨는 절망 중인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홈페이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을 것입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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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엔트로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죽음에 이르듯이, 모든 에너지는 질서에서 무질서에로 향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힘차게 돌아가는 팽이도 시간이 지나면 멈추기 마련입니다. 하늘을 나는 연도 줄이 끊어지면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에너지를 받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받은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바로 태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양을 신으로 여기기도 했고, 태양을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태양이 주는 빛과 열은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50억년이 지나면 태양도 수명을 다 할 것이고, 그러면 지구도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도 죽은 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되는 것은 평온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 이상 움직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자연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면서 늘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생명 활동이 멈추는 그런 평온함이 아니라, 절망에서 희망으로, 원망에서 용서로 변화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에서 겸손으로, 욕망에서 나눔으로 변화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참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적어 놓은 글인데,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성소국의 일, 복음화 학교의 일, 신학교 강의, 책을 읽는 것들은 제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을 좋아 할 수 있다면 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무감으로 하는 일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도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시기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업적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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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건강의 삶>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엊저녁의 오늘 말씀 묵상중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 빠진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존재인지 말입니다. 그 많은 죄와 병에서 헤어날길도 없고 본능적 육의 욕망에서 벗어날 길도 없습니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영적 건강의 삶도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날로 황폐화되고 천박해지기 십중팔구입니다. 요즘은 사람들도 쓰다 버리는 소모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의 이사야서 말씀이 인간과 하느님의 실상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이사40,6-8)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임을 입증합니다. 지난 월요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교황님 강론중 마지막 결론같은 성모님의 삶을 요약한 아름다운 기도 역시 이런 진리를 입증합니다.
“우리의 전 삶이 하느님께 ‘예’가 되게 하소서!(May our whole life be a ”yes“ to God)!”
참으로 아름답고 품위 있는 영적 건강의 삶을 위해 영혼과 하느님 말씀과의 일치는 필수입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본연의 아름답고 품위 있는 영적 건강의 삶입니다.
믿는 이들의 만고불변의 분명한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여 예수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본연의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의 일치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죄와 병은 물론 온갖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 영적 건강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어 닮아갈수록 참 아름답고 품위있고 영적으로 건강한 참 나의 실현인 성인입니다. 하느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영원한 삶에 영원한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뭄에 단비처럼 고맙고 통쾌합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할 줄도 지칠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길이 없다.”(이사40,28-29)
이런 하느님만이 우리 인간의 궁극의 꿈이요 비전이요 희망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단 하나의 답도 이런 하느님뿐입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관계할 때 비로소 샘솟는 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 그들을 뛰어도 지칠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29-31)
얼마나 상쾌, 유쾌, 통쾌한 삼쾌의 하느님이신지요! 활력의 샘이신 하느님입니다, 건강에 대한 근본적 처방도 음식에, 약에, 운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하느님께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실천,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이 평생과정이 되어야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삶에 영적건강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갈 때 예수님처럼 참으로 강한 사람이 됩니다. 누가 참으로 강한 사람입니까? 바위같은 사람이 아니라 맑게 흐르는 물같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바위도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물은 당해내지 못합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마디 기억할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선은 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상선약수 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은 강한 사람이 역설적으로 물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이런 예수님께서 인생살이에 지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바로 덧없고 약하고 무지한 인간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참으로 감로수같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정주처, 피난처는 예수님뿐이요, 참으로 예수 성심의 온유와 겸손의 품안에 머물 때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에 평화와 기쁨이여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강한 사람은 부드럽고 따뜻한, 유연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그리고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한국인의 미美’도 에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구비할 수 있는 미덕이라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예수님과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 은총으로 우리 모두 위로하시고 치유하시어 영적 건강의 사람이 되게 하시며, 당신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사람,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 찬미뿐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가 고결하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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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지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키엘 20,13)을 율법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11,28)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의 심판인 벌을 강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벌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 멍에를 거두어주고 짐을 내려주셨습니다.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1요한5,3)
우리 삶의 여정에는 각자가 지고가야 할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한다고 해서 그 짐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없애주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홍해를 갈라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연민의 눈길로 보아주시고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 함께 해 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살아나듯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에서 나온 그분의 말씀과 눈길은 매섭고 날카로운 바리사이, 율법학자를 넘어 큰 힘이 됩니다. 사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냉철하고 날카로우며 차가운 율법학자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이 가벼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세속의 멍에를 벗고 예수님의 멍에를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고달픈 삶의 여정 안에서도 주님의 멍에를,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짐을 기꺼이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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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한 사고나 선택할 수 없는 관계에서 오는 책무도 있지만, 또 우리가 돌보지 않은 내적 상처와, 우리가 지은 죄에 기인한 짐도 상당합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이사 40,27)
이 푸념이 낯설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견뎌야 할 무게가 너무 벅찰 때, '주님이 나를 잊으신 건 아닌지, 그분이 이제 내게 관심을 끄신 건지, 내 죄 때문에 그분이 내게서 영영 눈을 돌려버리신 건 아닌지, 지금 내가 벌 받고 있는 건지, 지금 내 꼴이 나에 대한 그분의 최선인지...' 약한 우리 마음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밀고 들어오지요.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이사 40,27-28)
우리의 이 실망 어린 한탄은 곧바로 주님 귀를 뚫고 들어가 그분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애간장을 녹입니다. 모든 사랑이 다 헤아려질 수는 없지만, 오해받은 사랑은 꽤 아프기 때문이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어떤 처지인지 잘 아십니다. 겉으로 그럴싸하게 꾸미고 표정 관리도 하면서 살지만 예수님은 속속들이 우리 실존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하시네요. 저마다 다른 형태로 지고 있지만 버겁고 무겁기는 매한가지인 각자의 "짐"에 대한 예수님의 첫째 요구는 거두절미하고, 다 괜찮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당신께 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화답송)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온 우리에게서 죄와 상처에 기인한 짐을 덜어주십니다. 추궁하거나 수치를 주지 않으시고 그저 용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이것으로도 우리 어깨는 한결 편해지고 가뿐해집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9)
그분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아주 밀접히 자리하시면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속속들이 개입하고 싶어하는 분이시지요. 단, 우리가 바라고 허용할 때에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분 사랑의 개입은 우리에게 "안식"을 줍니다. 외적인 편안과 무탈함 이상의 존재적 안식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과 함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이사 40,31)
이 지상의 순례길을 살아가면서 세상 걱정과 무게를 온전히 다 벗어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진정 무엇에 기대고 누구에게 바라느냐에 따라 영혼의 내성과 복원력에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넘어져도 일어날 힘, 무너져도 추스를 힘, 깨져도 회복할 힘... 도전과 공격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무성해진 도전과 공격에도 꿋꿋이 설 수 있는 힘, 다시 싱싱하게 날아오를 힘은 평소 우리 영혼이 그분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서 나옵니다.
이 대림시기에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러, 우리의 안식이 되시러 오시는 그분을 달려나가 맞이합시다.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복음 환호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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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하느님의 거짓말과 제2의 기회-유안진(클라라 시인)
성경의 행간, 상상, 묵상, 이해, 깨달음은 창세기 선악의 사건에서 하느님은 어째서 아담의 선악과 사건에서 거짓말을 했는가?! 동산과일을 다 따먹어도 좋은데,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 16-17; 3,3)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창세3,3)라고 협박, 먹는 날, 그날로 죽는다고 했는데, 죽게 하지시지 않았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을까?
♣절대 사랑, 절대 용서, 절대 자비인 하느님께서는 먹는 그날 죽일 수가 없었다.
우리 삶의 현실, 부모가 되면 안다. 부모에게 말썽부리는 자식에 경고. 협박, 또 다시 잘못 하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 자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또 다시 범죄, 차마 호적에서 파내지 못한다. 또 다시 강력한 경고, 협박한다. 제2의 기회를 주고 한다. 부모의 자비, 사랑, 희망, 애원이고 간청이다. 절대적 사랑으로 아담을 지으신 하느님은 죄를 범했을 때, 절대 아픔, 슬프고 한심과 절망이었을까? -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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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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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간다>
"내 멍에는 펀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언자는 죄인들의 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노여움으로 제 살은 성한 데 없고 저의 죄로 제 뼈는 온전한 데 없습니다.”(시편 38,4)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미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오,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여! 세상 주인들의 짐은 종들의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줍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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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영양 보충>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주님께서는 피곤하고
지친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힘을 받은 이들은 뛰어도
피곤한 줄 모르고 걸어도 지칠줄 모르며
독수리가 날개짓하듯 힘껏 날아 오릅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새벽에 기도하고 일하러 나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버틸 수 있습니다.
마더데레사는 자신을 몽당연필로 비유하며
다 닳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자신을
주님께서 마음껏 쓰시도록
기꺼이 내어 놓으며 피곤하고 지칠수록
주님앞에 머무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습니다.
"영양 보충하러 주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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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너무나 서두르고
너무나 분주한
우리들 일상입니다.
노동과 휴식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휴식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일부분 또한
소중한
휴식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쉬어가는 휴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휴식을 통해
우리는
생기를 다시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삶의 일부분인
아주 중요한
휴식입니다.
휴식을 통해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휴식도
배워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
모든 걸 맡기는
휴식말입니다.
그 휴식으로
고생하며
무거운 일상이
편하고 가벼워집니다.
주님께 참된
휴식이 있고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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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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