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언제나 내게로 온다
마경덕
서울역에서 밤차를 타고 밤새 달렸다.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전주 임실, 남원, 곡성, 구례, 수없이 마을을 스치고 간이역을 지나 들을 건너면 여수가 있었다. 전라선은 늘 북적거렸다. 통로까지 빽빽이 들어찬 승객들, 좁은 통로를 오가던 손수레는 도시락, 호두과자 삶은 계란, 오징어를 팔았다. 기차가 간이역에 닿을 때마다 투박한 사투리와 짐 보따리, 고무 다라이가 줄줄이 따라 올라왔다. 가난한 전라도 사람들은 밤낮 없이 열심히 살고 있었다.
덜컹덜컹 기분 좋은 흔들림,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몇 번을 깨어 둘러보면 아직 고향은 멀리 있었다. 지치고 지쳐 잠에 빠지다보면 기차는 어느새 구례, 순천을 지나고 있었다. 깜박 잠이 든 사이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기차는 하나 둘, 짐을 부리듯 역마다 사람들을 내려놓고 붐비던 객실은 썰렁하였다. 듬성듬성 빈자리가 생기고 시끄럽던 기운도 고요히 가라앉았다. 선잠을 깬 승객들이 하품을 하며 선반에 얹어둔 짐을 챙기면 부옇게 창이 밝아오고 비릿한 갯내가 물처럼 스며들었다. 드디어 바다가 보였다.
방금 잠을 깬 여수의 아침바다는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했다. 여수의 초입, 만성리를 거쳐 천릿길을 달려 와 기차는 멎었다. 숨차게 달려온 기차는 부르튼 발을 식히려 푸른 바다에 뛰어들 만도 했으나, 한번도 선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남도의 끝, 여수에 늙은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비린내를 깊이 들이마시면 알 수 없는 희열에 쿵쿵 가슴이 뛰었다. 내 그리움의 근원은 물비린내 나는 어머니였다.
麗水의 투명한 햇살은 잔잔한 바다에 유리알처럼 부서진다. 여수는 사철 푸른 동백처럼 젊다. 여수역에서 몇 분 걸어 닿는 오동도, 자르르 윤이 흐르는 검푸른 동백은 기름을 발라 쪽을 진 여인네처럼 곱다.
오동도 다리를 따라 걸으면 물이 빠진 갯바위에는 따개비와 거북손 홍합과 파래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방파제로 갯강구가 기어다녔다. 해거름 굴쪼개를 든 아낙은 손길이 바빴다.
부산한 여수는 늘 깨어 출렁거린다. 출항을 서두르는 배와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고깃배가 항구로 돌아온다. 새벽 다섯 시 국동 어항단지 수협 공판장에서 경매가 시작된다. 경매인들의 손끝에서 암호같은 숫자들이 튀어나오고 싱싱한 바다가 거래된다. 여름 어시장에는 인근 청정해역에서만 잡히는 갯장어가 쏟아진다. 금풍쉥이 서대, 은빛전어 노래미(놀래미) 먹갈치 감성돔도 모두 물 맑은 여수에 산다.
내 기억의 절반은 바다이다. 나를 열면 별 모양의 불가사리와 하얗게 바랜 성게와 노란 새조개껍데기가 먼저 튀어나온다. 가시가 사라진 구멍 뚫린 성게들, 파도에 지워지는 빈 고둥들, 조약돌, 갯벌에 엎드린 아낙, 외다리 황새, 그물을 깁는 어부의 손, 바닷바람에 지친 노인의 흐린 눈빛.
사는 게 쓸쓸해지면 따뜻한 그 기억에 손을 담근다. 가만가만 발을 뻗으면 파도에 발등이 젖고 여덟 살 단발머리 계집아이가 맨발로 달려오고 땡볕에 푹푹 달궈진 모래밭을 벌거숭이 꼬맹이들이 절뚝이며 뛰어간다.
모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불, 모래에 젖은 몸을 묻으면 차디찬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내 오래된 기억도 그 모래이불처럼 따습다. 물이 마르면 온몸에 희끗희끗 소금꽃을 피우는 바다, 내 기억의 창고에는 소금이 쌓여있다. 모래밭에 던져두었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아이들은 해 지는 바다를 걸어나오고 따라오던 파도가 모래밭의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지금도 그 바다에 빠져 잠을 설치곤 한다. 사창가가 즐비했던 교동엔 연등천이 흘렀고, 비에 불어난 개천엔 낙태된 태아가 떠올랐다. 바닷가 마을엔 아이들이 우글거렸고 바다로 간 남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가 드나드는 길목엔 작부들의 노랫소리, 뱃사람의 젓가락 장단이 떠다녔다. 한 폭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뒷산엔 돌로 쌓은 애장터가 모여있었고 그 자리엔 유난히 칡넝쿨이 무성했다. 가끔 허물어진 돌무덤엔 빈 단지가 보이기도 했다. 고개를 넘어 학교에 다녔던 아이들이 무서워했던 건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대는 뱀이 아니라 보리밭에 숨어있다는 문둥이였다. 뻐꾸기가 울고 진달래가 흐드러지면 보리가 피기 시작하고 눈썹이 없는 문둥이가 애를 잡아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슬프고 아름다운 봄이 지면 소쩍새가 울고 펄펄 끓는 여름이 오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여수는 뭍에서 한쪽 발을 거두어 푸른 바다로 철벅철벅 걸어 들어갔다.
쉬임없이 울리는 징소리에 베개가 젖는다. 밤새 무당이 치던 그 징소리, 죽은 혼을 달랜다는 그 징소리의 떨림으로 며칠 밤을 목이 쉬도록 바다가 울었다. 배를 가른 통돼지도 제물로 바쳐졌다. 돼지는 네 발이 묶여 사고가 난 지점에 던져지고 파도는 쉬임없이 몰려오고 무녀가 바다에 띄운 바가지는 촛불을 켜고 출렁출렁 어둠 속으로 떠밀려갔다. 어느 날, 배를 타러 나간 삼촌도 수영을 하던 친구도 몰래 애를 밴 처녀도 모두 커다란 바다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깊고 캄캄한 물속에서 무엇을 할까. 나 역시 파도에 빠져 두 번이나 허우적거렸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건져내지 못했다면…, 나를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바다가 두렵고 또 그립다.
해마다 봄은 왔고 삘기와 찔피와 참꽃으로 허기를 달래던 고향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나는 눈빛이 흐려졌고 몸은 자꾸 무거워지는데 수십 년 묵은 바다는 그대로 있다. 기억은 얼마나 질긴 것인가? 내 서럽던 고향은 아직 젊고 푸르다. 멀리서 바라본 바다는 미동도 없이 고요하지만 다가가면 살아서 꿈틀거린다. 내 피의 절반은 바닷물이고 내 피는 소금처럼 짜다. 많은 걸 삼키고도 침묵하는 바다, 여수는 언제나 내게로 온다.
문학사계 (2007년 여름호)
마경덕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신발論』『글러브 중독자』『사물의 입』
2012년 계간 <다층>이 뽑은 좋은 시집『글러브 중독자』선정
시인이 뽑은 2013 올해의 좋은 시 BEST 10에「놀란흙」선정
2017년 시집『사물의 입』세종나눔도서 선정
현재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AK아카데미, 강남문화원 시 창작 강사
첫댓글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애틋한 추억이 어린 곳이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