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조선왕조사
경로대학 역사교실 박 완 종
23. 왕권을 지키려고 권신 척결에 단호했던 중종
중종(中宗)은 성종의 둘째아들이요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7세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9세에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세력에 의하여 임금으로 추대된 11대 왕이다. 부인으로는 대군 때 결혼하여 왕이 되면서 함께 왕비가 되었던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와 그가 7일 만에 폐출 당하고 그 뒤에 왕비가 된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인종의 어머니)가 있고, 장경왕후가 인종을 넣고 산후통으로 죽자 제2계비가 된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명종의 어머니)가 있다.
연산군의 황음무도한 폭정이 계속되자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세력을 규합하여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 신수근(愼守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 신수영(愼守英; 신수근의 동생), 임사홍(任士洪; 연산군의 총신) 등 몇 안 되는 연산군의 측근들을 제거함으로서 별다른 저항 없이 거사는 성공을 했고, 윤대비(정현왕후, 진성대군의 어머니)의 승인을 받아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중종이요 우리나라 최초로 신하가 임금을 바꾼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거사 전에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중종의 장인이기도한 좌의정 신수근의 의중을 떠보았다고 한다. ‘대감은 누이가 소중하오, 딸이 더 소중하오?’하고 물었더니 이에는 직답을 피하면서 ‘나는 세자가 명민하니 장차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소.’ 하더란다. 그래서 반정에 함께할 뜻이 없음을 알고 그 형제를 제거하였고, 다음 왕으로 추대키로 내정한 진성대군 집에 군사를 보내어 그를 보호하려 했다.
거사기미를 까맣게 모른 진성대군은 갑자기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자 포악해진 형 연산이 자기를 죽이려하는 것으로 알고 자결하려 했으나 그의 부인이 밖을 내다보고 ‘대군을 잡으러 왔으면 말머리가 집을 향했을 것인데 말머리가 밖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는 대군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 해서 대군을 진정시켰으며, 뒤미처 왕위 추대를 받고서도 ‘임금이 신하를 택하는 법이지, 신하가 임금을 택하는 법이 어데 있느냐,(擇君不可)’ 고 거부했으나 대비의 분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즉위하자마자 난감한 문제에 부딪친다. 현숙하고 사랑스러운 조강지처요 함께 나란히 왕관을 쓰고 즉위식을 거행한 왕비인데 ‘반역죄인 신수근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으니 폐위(廢位)시켜야 한다.' 는 것이다. 천부당만부당하다고 거부했지만 반정세력에 떠밀려 임금이 된 그에게 왕권이 있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주일 만에 폐위시켜 사가로 내보냈고, 그를 못잊은 중종은 날마다 경회루에 올라 그그의 사가인 북촌의 인왕산을 바라보았으며 이를 짐작한 부인은 경회루에서 잘 보이는 너럭바위에 즐겨 입던 치마를 펼쳐 놓음으로서 그리움 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치마바위’라는 전설을 낳기도 했다. 200여여년이 지난 영조 때 겨우 복위되어 묘가 능(陵)으로 개축되었다.
가련한 단경왕후의 온릉(溫陵; 장흥 일령)
되고 싶어 된 것도 아닌 임금인데 사랑하는 조강지처와 강제이혼까지 당했으니 내키지는 않지만 이왕 임금이 되었으니 형 연산군이 저질러놓은 폐정들을 수습하고 개혁을 해야 했다. 폐정개혁에는 반정세력들도 뜻을 같이했지만 박원종, 홍경주 등 반정공신들이 다투어 자기 딸들을 후궁으로 입궁시켜 후사를 도모하려할 뿐 아니라 모든 국정을 자의적으로 농단하면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누리려 했다. 학정은 끝났으나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계열로 돌아가고 그들의 추대를 받아 잡은 왕권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임금다운 임금이 되려면 자기 뜻을 관철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듯을 관철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왕권을 확립해 놓아야했다. 그러려면 훈구세력을 견제할 친위세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부왕 성종이 그랬던 것처럼 젊고 명망 높은 선비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등용했다. 시 잘 짓고 글 잘하는 선비를 가려 뽑던 과거제도를 바꾸어 유망한 인재를 추천받아 그 중에서 정치현안에 대한 “대책(對策)”을 묻는 논술시험으로 대신했다.
이것이 중종 14년에 조광조의 헌책으로 실시되었던 현량과(賢良科)다. 어질고 양식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였다. 중앙의 성균관과 각도 관찰사로부터 120명을 추천 받아 그중에서 28명을 선발했다. 30세를 전후한 패기 있는 젊은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와 춘추관(春秋館)에 배치되어 언관(言官)과 사관(史官)의 역할을 하게 했다. 이들은 임금도 하나의 선비로서 철인이 되어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를 지향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려 했다.
작게는 연산군의 폐정잔재인 궁중여악(宮中女樂)을 폐지하고, 백성에게 왕실재산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던 내수사장리(內需司長利)를 없앴으며, 궁궐 안에 있던 소격서(昭格署; 도교의 제단)를 혁파하는 등 내정개혁을 펼치면서 크게는 ‘태조의 개국공신도 몇 10명에 불과한데 중종반정에는 100명도 넘는 공신을 두었으니 이는 공훈(功勳)을 남발한 것이라.’하여 위훈삭제(僞勳削除)파동을 일으켰다. 훈구세력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중종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이미 공신으로 책록(策錄)된 105명중 76명을 삭제해 버렸다.
시원스럽게 해치운 듯싶었지만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했던 게 문제였다. 명분을 앞세워 현실을 간과하려는 데에는 중종도 싫증이 났고, 백성들로부터 조광조의 인기가 임금을 능가하는 것도 문제였으며, 훈구세력들이 당하고만 있을 것 같지 않은 조짐도 문제였다. 신하들의 반정으로 추대된 경험을 가진 중종에게 이것은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불안의 원인을 제거해 국정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필요에 공감했고 그래서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중종 14년 11월 15일 밤에 전격적으로 일어났으니 현량과를 실시한지 7개월 후요 위훈삭제사건이 있은 지 4일만이었다.
중종은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을 은밀히 불러 밀지를 내렸고,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을 단숨에 모두 하옥시켰다. 그들의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배척했으며(현량과), 서로 연합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위훈삭제)는 것이었다. 그들은 즉각 유배되었고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조광조는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간신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를 모함키 위하여 나뭇잎에 꿀물을 발라서 벌레가 갉아먹게 함으로서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走+肖=趙)’ 네 글자를 만들어 중종에게 보였고 그래서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켰다고 하는 기록들이 왕조실록(선조1년 9월 21일, 현종10년 1월 5일)에 보이지만 이는 후학들이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위한 제언에 나올 뿐, 사화 당시에는 논의된 바 없으니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과학적으로 실험해 본 결과 나뭇잎에 꿀물을 발라놓아도 벌레들이 글자대로 갉아먹지 않더라는 어느 기관의 발표도 있었으니 이는 아마도 조광조를 존경하던 후학들이 항간에 떠돌던 말들을 인용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역사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가 사라진 인물 조광조, 미관말직에 기용된 지 4년 만에 장관지위(大司憲)에 올랐고,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도덕정치를 펼치면서 선비와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광조, 그를 그토록 아끼던 중종은 왜 하루아침에 180도로 바뀌어 사약까지 내렸을까? 당시에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無少憐惜矜惻之心, 與前日眷注寵待, 如出二君焉. 중종14년 12월 16일 중종실록), 중종은 진정 두 얼굴을 가진 임금이었을까? 사약을 받은 조광조는 그 임금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최후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라 昭昭照丹衷
정암 조관조선생의 유허추모비(전남 화순)와 친필유묵
사림파가 물러가니 다시 훈구세력인 남곤, 심정의 무리가 득세하였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종은 척신(戚臣)들을 기용했다. 어머니도 없이 자라는 다섯 살 난 세자(장경왕후는 세자를 낳고 7일 만에 죽음)를 보호하려고 그의 외삼촌 윤임(尹任)을 비롯하여 세자의 하나 밖에 없는 친누이의 시아버지 김안로(金安老)를 중용했다. 당시의 상황은 이랬다. 후궁 경빈박씨 소생인 11세 난 복성군(福城君)이 있어서 세자 출생이전부터 아들 없는 중종의 후계를 노렸고,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들어온 왕비 문정왕후는 자기가 아들을 낳기만 하면 어머니 없는 세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니 윤임은 어떻게든지 자기 생질이 무사히 자라서 보위를 이어가야만 했고, 김안로는 자기 아들의 처남이 임금이 되어서 자기 집안이 영화를 누리야만 했다. 문정왕후가 딸만 내리 넷을 낳고 아직 아들을 못 낳은 것이 이들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세자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복성군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그의 어머니 경빈박씨를 중종이 총애하고 있으니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이른바 ‘작서의 변(灼鼠之變)’이다.
중종 22년 2월 29일에 네 발과 꼬리가 잘리고 입ㆍ귀ㆍ눈이 불로 지져진 쥐 한 마리가 동궁의 뜰 은행나무에 걸렸다. 그날은 세자의 생일이요 세자는 쥐띠였는데 쥐가 걸린 곳도 북쪽의 쥐 방향(子方)이었다. 이는 세자를 저주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고 김안로 등 대신들이 경빈박씨의 소행이라 하여 복성군과 함께 모자가 처형되었다. 그 후 몇 해 동안은 세자의 입지가 탄탄해 보였지만 중종 29년에 문정왕후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고, 전일의 ‘작서의 변’은 김안로가 세자를 보호하려고 정적을 제거키 위하여 조작한 모함이었던 사실이 밝혀져 처형되었으니 윤임과 함께 세자를 지키던 한 축이 무너진 셈이었다.
세자를 밀어내고 자기 아들로 그 자리를 채우려는 문정왕후는 친정 오라비 윤원형(尹元衡)을 끌어드려 세력을 형성했고, 세자의 외삼촌 윤임은 외롭게 세자를 지키려고 다시 세력을 형성하여 피나는 암투를 계속하였으니 세상에서는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고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이라 했다. 이들은 파평윤씨의 가까운 집안이었고, 장경왕후가 세자를 낳고 죽었을 때 세자를 잘 지키기 위해서 윤임이 자기 집안 규수를 계비로 밀었는데 후일 피를 부르는 정적이 되었다고 한다.
소윤, 대윤의 싸움은 중종이 재위 38년 만에 57세로 승하하자 30세의 세자(인종)가 등극함으로서 대윤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지만 병약했던 인종이 즉위한지 겨우 8개월 만에 그만 아들도 없이 승하하고 말았다. 윤임에게는 청천병력이었다. 인고의 세월 30년을 피나게 지켜온 보람이 겨우 8개월로 끝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인종의 독살설(毒殺說)이 난무했지만 보위는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 문정왕후의 아들)으로 이어졌다. 정국은 뒤집혀 소윤의 세상이 되었으며, 어린 왕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함으로서 세상에서 말하는 ‘여인천하(女人天下)’ 가 전개되었다.
** 경로대학의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초순까지 연재를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