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된 비밀, 맨눈
문신
1
시가 '발견된 비밀'이라는 사실은 새로울 게 없다. 시는 세계를 발견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일에 오랫동안 수완을 발휘해왔다. 게다가 시는 발견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에도 재주가 있다. 그래서 괜찮은 시를 읽는 동안 내 안에서 조금 더 나은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 뿌듯함은 자주 다니는 등산로에서 이제 막 싹을 틔운 식물을 발견할 때와 다르지 않다. 그럴때마다 나는 욕심을 부려 작은 발견의 기쁨을 오롯이 혼자 즐기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눈'이다. 이렇게 말했더니 누군가 '안목'이라고 고쳐 말하려 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안목이 아니라 맨눈에 관해 말하고 싶다. 안목이야 다들 살아온 만큼, 배운 만큼, 고민한 만큼, 뱃속에 간직한 욕망만큼 여러 꼴과 색으로 갖추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안목 말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맨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맨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맨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말이다. 그런 맨눈을 나는 오리지널리티라고 말하고 싶다. 발견된 세계는 나의 오리지널리티, 나의 독창성 혹은 정체성을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는 그런 독창성을 과녁 삼아 겨누는 언어의 화살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자기의 오리지널리티를 향해 당겨지는 언어의 시위를 상상해보라, 그 순간의 긴장과 떨림만으로도 시는 이미 제 몫을 다한 셈이다. 그런데 그 저편에 나의 맨눈이, 나의 오리지널리티가 시의 명중을 기다리면서 부릅뜨고 있다면, 시도 거칠어진 호흡을 한번쯤 가다듬고 싶지 않을까? 어떤 경험이나 이념에 물들지 않은 맨눈의 그 부릅뜬 안광 앞이라면 제아무리 담력 있는 언어라도 주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이 섬찟과 두려움으로 시를 쓴다. 내 앞에 맨눈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맨눈의 주목을 견디면서.
그러니까 나는 시를 쓰는 동안 나의 오리지널리티와 마주하는 셈이다. 이건 중요한 구도다. 시를 쓰는 동안 나는 나의 오리지널이 아니게 되는 셈이니까. 시를 쓸 때 내 눈은 일상과 타자와 이데올로그와 욕망과 충동 같은 것에 오염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일상은 숱하게 덧칠된 순간들의 집적이고, 그 위에 또다시 세태를 덧칠하는 과정이다. 어제의 삶 위에 오늘의 삶을 덧칠하고, 나의 삶 위에 타인의 삶이 덧칠된다. 이렇게 사는 일은 내 삶과 타인의 삶을 구분하지 않게 하고, 무분별한 색채에 갇혀 있는 자기의 오리지널리티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찔하여, 불안하여.고독하여, 주위를 둘러보면 나는 없다. 내 자리가 없다. 나의 그림자가 없고, 내 존재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나에게서 멀어지
거나 나를 잃어간다. 그것이 이제껏 이 현실을 시처럼 살아본 소감이라면 다소 과장일까?
2
잃어버린 혹은 멀어져 버린 나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시를 쓴다. 시를 쓰는 동안 나는 나의 맨눈을 생각하고, 맨눈에 비친 세상을 상상한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표정이 나의 감정에 덧칠되지 않고, 세상의 이목에 물들지 않았을 원시의 혹은 시원의 표정을 상상하는 동안 나는 맨눈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맨눈은 세계의 창이자 나의 창이다. 진실을 향한 혹은 본질을 향한 그러므로 맨눈에 고착된 덧칠을 벗겨내는 일은 고통스럽다. 살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혁명이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맨눈은 혁명의 혁명쯤 되지 않을까? 벗겨낸 것에서 한 꺼풀 더 벗겨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간신히 맨눈에 닿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내 최초의 맨눈을 상상해본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본 지점은 내가 태어난 집 천장이었다. 까맣게 그을린 서까래와 시간의 파편처럼쩍쩍 금 간 진흙. 그 아래 노랗게 매달린 알전구도 있었을 것이다. 맨눈으로부터 이 미터쯤 떨어진 천장은 겨울밤 올려다본 밤하늘처럼 까마득하고 막막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혹 다가온 그 어둠과 어둠의 갈피들은 맨눈의 존재에게는 두려움의 색채였는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두려움 같은 정동을 느낄 새도 없이. 벌써 천장의 이미지가 암울하게 한 꺼풀 맨눈에 씌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심코 울었는지도 모른다. 맨눈을 숨 막히게 하는 천장의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해 인생 최초의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 천장을 뒤로 물리고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 얼굴에서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았고, 그 눈동자에서 나는 얼핏 나 자신을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번쩍 들어 올려져 누군가의 살과 숨결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걸 나는 안다. 중요한 건 이렇게 안다는 사실도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그때 너 그랬어. 이런 말을 두 번쯤 듣게 되면 그 사태는 이미 내가 경험한 일이 된다. 타인은 이렇게 자기 기억으
로 나의 맨눈에 베일을 씌운다. 그런가? 하고 궁금하다가 이내 그렇지,하고 수긍하게 된다. 맨눈 되기의 곤혹함이 이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사실은 무수한 '너들'의 부산물이라는 것. 너들이 나를 물들였다는 것.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다. 세상에 나는 없고 온통 너뿐이라는 거. 그러니까 나는 너들이고, 너들도 다른 너들이다. 이렇게 너들의 삶이 있고, 너들의 시가 있다. 내가 쓰는 시는 너들의 시다. 이 불가해한 역전
의 구도에서 나는 오래 헤맸다. 내 시를 쓴다는 믿음이 모래언덕처럼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무너진 모래더미가 내 발목을 덮고 무릎을 덮고 가슴을 조여 오는 것을 견디면서, 나는 여전히 나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그건 내가 막막한 천장 아래 누워 있을 때부터 줄곧 내 눈을 사로잡았던 환영이었다.
'나는 어쩌자고 여기에 있는가!"
그때 맨눈으로 세계의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언어로.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세상의 언어로 그런 생각을 한다. 잠을 깨고 눈을 뜨면 저
절로 이 문장이 이마에서 깜박거린다. 나는 이것을 살아 있는 감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중얼거린다. 나는 어쩌자고 여기에 있는가!
이 문장은 '나'와 '여기'와 '있다'가 '어쩌자고'라는 실에 꿰어있는 구조다. '나'라는 주체, '여기'라는 지평, '있다'라는 존재 방식을 하나로 묶는 힘은 '어쩌자고'다.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말은 참으로 난감하다. 세상 모든 일이 '어쩌자고'라는 미늘에 걸려 어쩌지 못한다. 나는 그 표현을 맨눈의 감각으로 표현하기를 즐긴다. '나는 맨눈으로 여기에 있는가!"라고 말을 바꾸고 나면 하나씩 해결해야 할 일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나는 나이테처럼 겹겹 둘러싸고 있는 너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일에 전력한다. 너들을 벗겨내는 방식은 철저하게 너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내 안에 서식하는 너들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나는 너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내 안의 너들을 탐침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러므로 내 시에는 너들이 있다. 이렇게 너들을 언어의 갈고리로 푹 찍어내고 나면 그 자리에 나의 맨눈이 있다. 시의 언어가 맨눈을 겨냥한다는 의미가 이것이다. 나는 맨눈으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너들의 시를 쓰면서 맨눈을 발견한다.
3
시!
다시 생각해도, 내 최초의 시는 낮은 천장의 그을음이었다. 밤하늘 같았던 그을음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을음을 뒤로 물리면서 나타난 까만 눈동자를 기억한다. 그 눈동자는 내 두 번째 시로 남아 있다. 그 후로, 나는 너들에게 발견되었다. 너들의 표정과 말과 손길과 숨결이 나를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너들이었다. 나는 한 마리 고치처럼 너들의 시선에 칭칭 감겼고, 너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다고 믿었다.
그 믿음을 믿었다면 나는 영원히 한 마리 고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맨눈으로 바라본 그 막막했던 천장의 그을음으로 믿음을 밀어냈다. 그래서 너들을 하나씩 벗겨야 했다. 혁명의 혁명처럼.
시는 그러므로, 혁명을 위한 혁명적 도구였다, 나에게는
내 시 쓰기는, 그래서, 너들로부터 나의 맨눈을 마주하는 것, 이를테면 내 오리지널리티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눈 내리는 날의 풍경과 같다. 힘들게, 공들여 눈을 쓸어내는 뒤쪽으로 어느새 또 너들의 눈이 수북하게 쌓인다. 내시 쓰기의 게으름은 너들의 덧칠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버거움이 한편으로는 자책의 힘이 된다. 자책의 힘은 시를 써야 한다는 죄책으로 이어진다. 죄책의 면죄는 맨눈과 마주하는 것. 그래서 나는 여전히 너들을 쓴다. 너들의 이야기와 너들의 탄식을 쓴다, 시로. 촘촘한 언어의 빗자루로 너들을 쓰고 나면,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그 자리에 너들의 숨결이 거침없이 내려앉겠지만, 시를 쓰는 동안만큼은 나의 맨눈을 만날 수 있다. 너들이 아닌 나의 나. 나의 오리지널리티, 나의 정체성. 나의 고유성.
시 쓰기는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나'를 발견하게 한다.
그게 시다. 너들의 시가 아닌, 나의 시, 그러므로 시를 쓰면서 발견한 비밀은 나의 맨눈이다. 맨눈에 세계의 비밀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문신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시),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동시),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동시집 '바람이 눈을 빛내고 있었어, 장편동화 롱브릿지 숲의 비밀』 등을 냈으며,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출처: 월간모덴포엠 2023.4월호(통권 2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