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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立齋集) 정종로(鄭宗魯)생년1738년(영조 14)몰년1816년(순조 16)자사앙(士仰)호입재(立齋), 무적옹(無適翁)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 최흥원(崔興遠)의 문인. 남한조(南漢朝)와 교유. 영남 남인의 석학
立齋先生文集卷之四十四 / 行狀 / 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金公行狀
金煕普 | 1714 | 1753 | 義城 | 濟仲 |
公諱煕普字濟仲姓金氏。其貫義城。自新羅敬順王子錫受封始。高麗時太子詹事龍庇。有功德於民。邑人尙祠之。十一世有諱希參。歷三司號七峯。以學行享川谷傍祠。子諱宇宏官至副提學號開巖。享涑水院。是生諱得可昌寧縣監。以淸白名。贈司僕寺正。是生諱瑮進士副護軍贈左承旨。是生諱秋任 禧陵參奉。遊吾先祖愚伏先生門。子諱聲直。孫諱汝璜。曾孫諱景濂。玄孫諱國采生員。是爲公考。妣載寧康氏有楷之女。南溪先生之孫。以肅廟甲午六月五日生公。公生卽有孝心。方飮乳。見母夫人病。卽以手扶額而有憂色。不吮乳。雖飢不啼。人勸之吮則掉頭而不從。病已乃吮之。及髫齡父母或笞之則泣已必笑。人問其故。對曰吾痛故泣。然痛則懲。不亦幸乎。是以笑。歲戊申叔父處士公將赴倡義陣。公時年十五。請替行。處士公不許。將潛行。會亂定不果行。父老咸嘖嘖曰昔木蘭以子替父。此子尤賢矣。母夫人嘗病左眼失明。公夙夜煎泣。至誠藥治。得復瞭然。其以風咳在牀褥者積歲。而侍護之節。靡所不曲盡。夏則扇枕使凉。將袵必先臥。引蚤蝎盡出。而後方易席請寢。冬則躳爨堗以適其溫煖。洞洞屬屬。一心惟在於親。先公嘗患毒痢症甚篤。甘旨皆不適口。惟思雉肉。公方泣求之而不能得。忽有一雉登庭樹而鳴。驚喜投石。雉應手墜。遂以供。人以孝感稱之。己未丁內艱。公哀毁踰制。勺水不入口者四日。旣小祥猶不食菜果。墓在七里外。而日往哭。雖祁寒盛暑不避也。辛未丁外憂。哀毁亦如之。越三年五月初七日。以毒癘不勝喪。享年四十。葬于開口巖下向辛原。公天性篤厚。其孝親旣如此。替事叔父如父。叔父貧無衾。公以己衾進之。未幾見燒。又製而進之。公則無衾以終身而不自恤。季氏嘗發疽幾死。公晝夜扶護。治藥多穢惡物。無所不先嘗。至爲之口吮膿汁。方其危谻。中夜齋沐禱神天。竟得全活。及其丁外憂。伯氏又病革。公竭誠療救而竟不救。則哀痛愈極。其卒也不但虐癘爲也。天之不相孝子。乃至此哉。公德器涵弘。風儀莊重。兒時與同學築壇樹下而隷業焉。公立約曰不孝不友者出之。凌長侮類而廢課者用上罰。在醜而爭及讒朋造言者用中罰。言或鄙悖。行或狂奔者用下罰。約旣定率而行之。同學皆敬憚之不敢忽。及長嗜學。行有餘力。未嘗不對卷。而兀兀竆年也。於易尤所玩味。而旁通諸家術。盖將觀變玩占而盡物理。以致其用者如此。顧歿於中年。志業不克遂。惜哉。至如治家之嚴而有法。友兄弟處宗黨而曲盡其道。與夫臨財廉與友信。人無不悅服者。則在公特常事。可略之也。配興陽李氏生員麟至之女。月澗先生之玄孫。生二男一女。男達天,達義。女姜世濟。達天嗣子鍊剛。達義四男長卽鍊剛,次鍊健,鍊純,鍊粹。二女金永祚,黃夏漢。姜世濟一子肱欽。一女張夔燮。鍊剛一子尙誨。餘幼。日鍊粹持公弟持憲公所撰遺事來示曰。大父至行有若此者。往在正廟己酉。道伯採鄕議以聞。 特贈司憲府持平。願執事爲一言以狀之。俾實蹟有傳焉。余曰諾。天下莫尙者孝也。孰不樂道之。遂撰次如右。
입재집 제44권 / 행장(行狀) / 증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 김공 행장〔贈朝奉大夫司憲府持平金公行狀〕
공의 휘는 희보(煕普), 자는 제중(濟仲)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의성(義城)을 본관으로 하는 것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석(錫)이 봉(封)해진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고려 때 태자첨사(太子詹事) 용비(龍庇)가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자 고을 사람들이 숭상하여 제향하였다. 11세 조상 휘 희삼(希參)은 삼사(三司)를 역임했으며, 호는 칠봉(七峯)이니 학행으로 천곡서원(川谷書院)의 방사(傍祠)에 배향되었다. 휘 우굉(宇宏)은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호는 개암(開巖)이니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분이 휘 득가(得可)를 낳으니 창녕 현감(昌寧縣監)이 되어 청렴결백함으로 이름났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휘 률(瑮)을 낳으니 진사 급제하여 부호군(副護軍)이 되고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휘 추임(秋任)을 낳으니 희릉 참봉(禧陵參奉)이고 나의 선조 우복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 아들은 휘가 성직(聲直)이며, 손자는 휘가 여황(汝璜)이며, 증손은 휘가 경렴(景濂)이며, 현손은 휘가 국채(國采)이니 생원이다. 이분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재령 강씨(載寧康氏) 유해(有楷)의 따님으로, 남계(南溪) 선생의 후손이다. 숙종 갑오년(1714, 숙종40) 6월 5일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효심이 있었다. 바야흐로 젖을 빨 때, 어머니가 아픈 것을 보면 곧 손으로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 보고 근심하는 얼굴빛을 띠며 젖을 빨지 않았고, 비록 배가 고파도 울지 않았다. 사람들이 젖 빨기를 권하면 머리를 저으며 말을 듣지 않았고, 병이 나아야 이에 젖을 빨았다. 다박머리 아이일 때, 어버이가 혹 회초리로 때리자 울고 나서는 반드시 웃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아팠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면 징계가 되니 또한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웃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728, 영조4) 숙부 처사공(處士公)이 장차 창의한 군진(軍陣)으로 가려 하였다. 공은 당시 나이 15세였는데, 숙부를 대신해 가기를 청하였다. 처사공이 허락하지 않자 장차 몰래 가려고 하였으나 마침 난이 평정되어 결국 가지 않았다. 부로들이 모두 칭찬하여 말하기를, “옛날 목란(木蘭)은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였는데, 숙부를 대신하여 가려고 한 이 아이가 목란보다 더 어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일찍이 병이 들어 왼쪽 눈을 실명하였는데, 공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애간장을 태우며 울었고, 지극한 정성으로 약을 구해 치료하여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풍해(風咳) 때문에 침상에 누워 지낸 것이 여러 해였으나 모시며 간호하는 절도가 곡진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여름에는 베개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 드리고, 자리를 바꾸어 누우려 하시면 반드시 먼저 누워 이와 벼룩을 유인하여 다 밖으로 내보낸 뒤라야 비로소 자리를 바꾸어 주무시기를 청했다. 겨울에는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 온도를 적당하게 하였다. 공경하고 조심하여 한결같은 마음이 오직 어버이에게 있었다. 선공(先公 돌아가신 아버지)이 일찍이 지독한 설사를 앓아 증세가 매우 위독하니, 달고 맛있는 음식이 모두 입에 맞지 않고 오직 꿩고기만 생각할 뿐이었다. 공이 바야흐로 울면서 구했으나 얻을 수 없었는데,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뜰의 나무에 올라가 울었다. 놀라고 기뻐하며 돌을 던지니 꿩이 손에 정확히 떨어졌다. 드디어 꿩을 아버지께 대접하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기미년(1739, 영조15) 어머니 상을 당하자 공은 슬퍼하여 몸이 상함이 예제(禮制)보다 지나쳤다.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4일이었다. 이미 소상(小祥)이 되었을 때도 오히려 채소와 과실을 먹지 않았다. 묘소가 7리 밖에 있었으나 날마다 가서 곡하였는데, 비록 극심한 추위와 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신미년(1751, 영조27) 아버지 상을 당하자 몸이 상함이 또한 어머니 상 때와 같았다. 3년 뒤 5월 7일 지독한 전염병 때문에 삼년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0세였다. 개구암(開口巖) 아래 향신(向辛 북서 75도 방향) 언덕에 장례 지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독실하고 중후하며 그 어버이에게 효도함이 이와 같았고 아버지 대신 숙부를 아버지처럼 섬겼다. 숙부가 가난하여 이불이 없자 공이 자신의 이불을 드렸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불이 불에 타자 또 만들어서 드렸다. 공은 이불 없이 평생을 살았으나 스스로 근심하지 않았다. 막냇동생이 일찍이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자 공이 밤낮으로 돕고 간호하였다. 치료하고 약을 쓰는 가운데 더러운 물질이 많았으나 먼저 맛보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입으로 고름을 빠는 데까지 이르렀다. 바야흐로 막냇동생의 병이 위중하자 한밤중에 목욕재계하고 신과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마침내 완전히 나을 수 있었다.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큰형님 또한 병이 심하자 공이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으나 끝내 구하지 못하니 슬퍼 통곡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것은 다만 전염병이 그렇게 한 것일 뿐만 아니니, 하늘이 효자를 돕지 않음이 곧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공은 덕성과 기국이 깊고 넓으며 풍모와 거동이 장엄하고 중후하였다. 어린아이 때 함께 공부하던 아이들과 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학업을 익혔는데, 공이 약조(約條)를 세워 말하기를, “효성스럽지 않고 우애롭지 않은 자는 내친다. 어른을 능멸하고 무리를 업신여기며 학업을 폐하는 자는 가장 중한 형벌을 사용한다. 동료들 사이에 다투는 자 및 벗을 참소하여 말을 지어내는 자는 중간 형벌을 사용한다. 말이 혹 비루하거나 어그러지며 행동이 혹 미친 듯이 날뛰는 자는 낮은 형벌을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약조가 이미 정해지자 그에 따라 시행하니, 함께 공부하던 아이들이 모두 공경하고 삼가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
장성함에 이르러 학문을 좋아하여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책을 보며 꼿꼿이 앉아 한 해를 보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역》에 더욱 완미하는 바가 있었으며, 제가(諸家)의 학술에도 두루 통하였으니, 대개 ‘변화를 관찰하고 점복을 완미함[觀變玩占]’을 가지고 사물의 이치를 다하여 그 쓰임을 지극히 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중년에 세상을 떠나서 포부와 학업을 이룰 수 없었으니, 애석하도다. 집안을 다스림이 엄격하여 법도가 있음, 형제간에 우애하고 종당과 화목하게 처신하여 그 도를 곡진히 함, 그리고 재물에 임해 청렴함 및 벗과 더불어 신의가 있음, 남들이 기뻐 감복하지 않음이 없음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공에게 있어서 다만 일상적인 일이기에 생략해도 괜찮을 것이다.
부인은 흥양 이씨(興陽李氏) 생원 인지(麟至)의 따님으로, 월간 선생(月澗先生)의 현손이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들은 달천(達天), 달의(達義)이고, 딸은 강세제(姜世濟)에게 시집갔다. 달천(達天)은 연강(鍊剛)을 양자로 들였다. 달의(達義)는 아들이 넷이니, 장남은 연강(鍊剛)이고 그다음은 연건(鍊健), 연순(鍊純), 연수(鍊粹)이며, 딸이 둘이니, 김영조(金永祚), 황하한(黃夏漢)에게 시집갔다. 강세제는 아들이 하나이니, 굉흠(肱欽)이며, 딸이 하나이니, 장기섭(張夔燮)에게 시집갔다. 연강은 아들이 하나이니, 상회(尙誨)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하루는 연수(鍊粹)가 공의 동생 지헌공(持憲公)이 지은 유사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며 말하기를, “할아버지의 지극한 행실이 이와 같음이 있다는 것을 지난 정조 기유년(1789, 정조13)에 도백(道伯)이 고을의 의논을 모아 임금께 아뢰니, 특별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하였습니다. 원컨대 집사께서 한마디 말로 행장을 지어 주시어 실제 행적이 전해짐이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예, 천하에 가장 숭상할 것은 효이니, 누군들 즐거이 말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 차례대로 기록하기를 위와 같이하였다.
[주-D001] 희삼(希參) : 김희삼(金希參, 1507~1560)으로, 자는 사로(師魯), 호는 칠봉(七峯)ㆍ진재(進齋)이다. 성주에 살았으며, 이황(李滉),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와 도의로 교유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임금이 내린 칠봉산 아래 진재(進齋)라는 집을 지으니, 학자들이 칠봉 선생이라 칭하였다. 성주 천곡서원(川谷書院)의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에 《칠봉유집(七峯遺集)》이 있으며, 《입재집》 권26에 〈칠봉유집서(七峯遺集序)〉가 있다.[주-D002] 우굉(宇宏) : 김우굉(金宇宏, 1524~1590)으로, 자(字)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이다.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형이며, 이황의 문인으로 1542년(중종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 사마시(司馬試)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89년(선조22)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저술로 《서행일기(西行日記)》와 《개암집》이 있다.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1562년(명종17) 11월, 상주 개암(開巖) 곁에 개암정을 지었는데, 《입재집》 권29에 〈개암정중건기(開巖亭重建記)〉가 있다.[주-D003] 득가(得可) : 김득가(金得可, 1547~1591)로, 자는 대중(大中), 호는 주봉(柱峯)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19) 진사에 합격하였다. 창녕 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펴 선정비가 세워졌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주-D004] 률(瑮) : 김률(金瑮, 1568~?)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천유옹(天有翁)이다. 상주(尙州)에 거주하였고, 조목(趙穆)의 문인이며, 1627년(인조5) 진사에 합격하였다.[주-D005] 추임(秋任) : 김추임(金秋任, 1592~1654)으로, 자는 만열(萬說), 호는 외서암(畏棲庵)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며, 1616년(광해군8) 생원에 합격하였다.[주-D006] 희릉 참봉(禧陵參奉) : 희릉은 중종(中宗)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능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주-D007] 국채(國采) : 김국채(金國采, 1688~1751)로, 자는 익장(翊章), 호는 호수(湖叟)이다. 1735년(영조11) 생원에 합격하였다.[주-D008] 남계(南溪) 선생 : 강응철(康應哲, 1562~1635)로,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명보(明甫), 호는 남계이다. 1590년(선조23) 진사에 입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기룡(鄭起龍) 장군과 합세하여 왜병을 무찔렀다. 벼슬은 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에 이르렀으나 향리에서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상주의 연악서원(淵岳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남계유고(南溪遺稿)》가 있다. 《입재집》 권27에 〈재령 강씨 세덕사 실기서(載寧康氏世德祠實紀序)〉가 있다. 거기에 따르면 강응철은 정경세(鄭經世)의 자형(姊兄)이다.[주-D009] 무신년 …… 하였다 : 무신년은 노론 정권에 불만을 품은 소론 과격파와 남인들이 연합하여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기병(起兵)하였는데,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戊申亂)이라 하거나,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한다.[주-D010] 목란(木蘭)은 …… 대신하였는데 : 목란은 악부(樂府)의 〈목란시(木蘭詩)〉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으로, 전쟁터에 나가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장(男裝)을 하고 전쟁터에 나가 12년 동안을 종군하면서 전공(戰功)을 세운 여자이다. 이 목란은 북위(北魏) 사람이라고도 하고, 수(隋)나라 사람이나 당(唐)나라 사람이라고도 하여 일정치 않다.[주-D011] 학업을 익혔는데 : 저본에는 ‘예업(隷業)’으로 되어 있으나, ‘이업(肄業)’의 오기로 판단하고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2] 동료들 사이에 다투는 : 원문은 ‘재추이쟁(在醜而爭)’으로, 《효경(孝經)》 〈기효행(紀孝行)〉에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면 망하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난리를 치면 형벌을 당하며, 동료와 다투면 해를 입을 것이니, 이 세 가지를 없애지 않으면 아무리 날마다 세 종류의 희생을 드리며 부모를 봉양하더라도 오히려 불효가 된다.[居上而驕則亡, 爲下而亂則刑, 在醜而爭則兵. 三者不除, 雖日用三牲之養, 猶爲不孝也.]”라고 했다.[주-D013] 인지(麟至) : 이인지(李麟至, 1683~1746)로,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성서(聖瑞), 호는 은와(恩窩)이다. 상주(尙州)에 거주하였고, 행의와 학식으로 칭송이 있었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 부장이 되었다. 1736년 영남 유생들이 송시열, 송준길의 문묘 종향(文廟從享)하는 것을 저지하는 상소 운동 때 소수(疏首)가 되었다. 이로 인해 금산(錦山)으로 유배되었다. 유집이 전한다. 금산 석포서원(石浦書院)에 제향되었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김숭호 (공역) |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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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집(素巖集) 김진동(金鎭東)생년1727년(영조 3)몰년1800년(정조 24)자정지(定之)호소암(素巖)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이수연(李守淵)의 문인. 유장원(柳長源), 김종덕(金宗德), 조술도(趙述道) 등과 교유
素巖先生文集卷之三 / 跋識 / 書族姪故孝子贈持平濟仲行錄後
上之十三年己酉冬。特贈故孝子金煕普司憲府持平。甚盛典也。孝子自幼以孝友聞。試以其著穪者。參之古人。扇枕溫被。黃香,王延似之。飛雉集庭。王祥之雙鯉黃雀似之。受笞笑泣。與古人之泣笞者異而同。代叔父從軍。視古人之代父從軍者。反有賢焉。其他如母病不飮乳。爲弟吮癰等事。不知古人亦嘗行之否乎。其在童穉。又能好學不倦。其築壇條約中不孝不友之目。殆若嚴師之爲。而非嬰兒口氣也。稍長慨然以門戶自任。定省之暇。不敢自逸。兀兀竆年。期於有得。使假之以年。其進豈可量哉。卒不幸短命悲夫。煕普字濟仲。吾宗兄上舍諱國采之第二子。吾先祖開巖先生之八代孫。先生自星誅茅于尙之開湖。孝子之家於尙世也。尙之人士以孝子之狀。申本州者再。方伯者再。迺者我聖上採訪國內孝烈。道臣乃以濟仲聞。持憲之贈盖以此也。擧族咸頌聖恩之罔極。而商之人士之揚人之善亦勤矣。孝子長我十三歲而早歿。余又僻在二白之間。猶未詳其至行。一日孝子之姪子仁載。以小冊來曰此吾叔父之狀而吾父之錄也。余讀之未半。不覺懣然心服。斂袵起敬也。嗚呼。不肖事親無狀。罪悔如山。今於孝子之狀。固愧痛之不暇。而竊有所感歎而不已者。乃於卷末。道其區區如此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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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집(定齋集) 유치명(柳致明)생년1777년(정조 1)몰년1861년(철종 12)자성백(誠伯)호정재(定齋)본관전주(全州)특기사항남한조(南漢朝)의 문인
定齋先生文集卷之二十五 / 碑 / 葛川金公神道碑
金煕周 | 1760 | 1830 | 義城 | 聖思, 公穆 | 葛川 |
公諱煕周。字公穆。姓金氏。葛川。其號也。羅王子錫。受封義城。麗太子詹事龍庇。又襲封。因以爲貫。中世有諱希參。以經術。歷敭淸顯。號七峯。生諱宇宏副提學。號開巖。與弟東岡文貞公。德位幷峙。於公爲八世。曾祖諱汝鐸。贈吏曹參議。祖諱景㶅。贈吏曹參判。考諱始東。同中樞贈吏曹參判。妣潘南朴氏。孝述女。贈貞夫人。英廟庚辰。公生于安東乃城縣之望道里第。幼完厚沈默。九歲就外傅于十數里。備受刻苦。十六始還家。參判公愈勸督之不已。公亟體而勤厲者十數年。辛丑。贄見于大山李先生。己酉陞上庠。時有節製。星州人金俊儉者。表辭不倫。大臣請懲討。公以同座幷逮。事且不測。公處之晏如。遂得解壬子泮製。賜第。旋遭內艱。乙卯。唱第。差奎章閣講製文臣。每親試。輒居前列。上眷甚隆。賜賚頻繁。丁巳。拜兵郞。旋除北評事。戊午。復命。秋選瀛錄。卽拜修撰。移校理。入直。詠白鶴有萬里。豈無遐擧翼。主人恩重暫翺翔之句。歷持平,掌令,獻納,司諫。間 除殷栗縣監。不赴。又歷司成。庚申六月。以校理赴 召。遭正考喪。因兼實錄編修官。又除接倭官。不赴。辛酉。出補寧海府使。乙丑。以司諫遞。因陞通政。自是。屢拜承旨。丙寅。除安岳郡守。丁卯。辭遞。戊辰。三 除承旨。不赴。就才山縣葛川上。構小亭。己巳。四 除承旨。最後以祭享當遞。上曰。金某明於文義。善因事陳戒。其勿許遞。旣赴。賜臘藥扇香以寵之。庚午。除安州牧使。數月呈辭遞。辛未。丁憂。年過不毁。而守制愈謹。乙亥。陞拜漢城左右尹刑曹參判。丁丑。 除經筵特進官。不赴。己卯。除司諫院大司諫。尋移兵曹參判。出爲永興府使。庚辰。和歸去來辭。遊楓嶽一月而歸。辛巳。除同春秋,左右承旨,大司諫,同中樞。乙酉以後。連有召命。幷不赴。以葛川稍間。復就所居南德峯下。築精舍。肩輿往來。庚寅。寢疾。遺命勿用緞漆。翼日終。享年七十一。葬奉化古界里。尋改窆于榮川郡東魚游谷卯向原。上遣官吊祭如例。配安東權氏。思及女。江左諱萬孫。忠定公冲齋先生之後。二男在恭進士,在翼。一女李勉淳。餘男在順。在恭嗣男邁銖進士。四女鄭允愚,李敦禹正字,權秉淵,李晩祚。在翼三男。長卽邁銖,達銖,遠銖。四女權鎭夏,柳肯鎬,姜來永,鄭東錫。在順一男退銖。公質性謹重。意象圓渾。居之若愚。發之若疑。深厚而不露。含蓄而不伐。其事親也順適以安之。其祭祀也盡誠以將之。其御家寬而有制。常令儉節。新婦等。不冠帶不見也。其收族也。軫其飢寒。再從弟竆無資。割峽庄以優之。族弟死無以斂。助其入而存其田。使守墓。收育其女。具糚奩以嫁之。其立朝。被正考恩遇特異。猶以虛名誤恩。常自戒愼。直玉堂。每夜明燭看書。寂若無人。 上覸知之曰。此其爲金某也。及冲聖嗣位。以校理入侍。進言曰。天下事未有不自期而成者。自期者當以盡者爲準。而其成就之方。只在殿下著意用工之如何。其在外也。勸民孝悌。修擧學政。而除民疾苦。緩刑完逋。嘗帶職在鄕。聞將臣論掖隷不法事得罪。上疏切諫曰。掖隷輩。何嘗有畏服其心者乎。掄選之法。亡於親誼之厚薄。貨賄之多寡。斷獄之法。壞於力勢之輕重。干囑之緊歇。官師有相規之法。而諂諛是事。科目爲取人之法。而廉隅都喪。掖隷之無嚴。葢亦習見使然。又論安東邸吏偸竊稅納之罪曰。邸吏蟣蝨之微。安敢自犯極罪。必有潛形匿影盜竊公貨。而執法之官。莫敢誰何。因尾陳正心講學之道。辛巳。入京。將還曰。吾今老矣。將歸卧故山。不可不一言效涓埃。乃陳躬聖學。立紀綱。廣人才。恤民隱。正士趨。崇道術六條。凡萬餘言。以先師道學之盛。合有褒異之典。因及陳請。旣還。几案簟席。蕭然若寒士。日取朱退書。玩索不已。坐鎭浮俗。力折羣言。屹然爲儒門保障者。數十年矣。葢公不撓於衆。不激於辭。取舍明而執守確。是以進而當聖考嚮用之日。而睢盱者無忌克。退而處儒論潰裂之會。而猜疑者有所憚。其醇德厚行。眞可謂完名人矣。致明以故人穉子。荷公不言之惠。晩更托以葭莩。則所以知德者益深矣。是於顯刻之托。有不敢辭焉。銘曰。
深而厚。惟公之局。和而平。惟公之德。積學功成。如囊取物。寵遇之隆。上聖則哲。歸視其家。滿園芋栗。進退由由。宦海平陸。仕優而學。潛心經籍。飭躳御家。惟禮是帥。晩更超然。砥柱有屹。刻示後人。庸昭無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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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齋先生文集卷之十二 / 書 / 答金公穆 煕周
嚮者特蒙左顧。使鄙人得遂識荊之願。今又遠惠珍墨。意寄去益深厚。不知無似何以獲此。感荷之心。迨切于中。顧坐沒便尙稽修復。恨歎可喩。卽玆孟春。令侍履起居何似。仰遡區區。宗魯老昏日甚。無足煩者。七情亦有理發之說。愚豈敢創立新說哉。盖我退陶老先生於心統性情中圖。已爲之明白揭示。其書本然性下。直與四端合而書之。又爲著說。以明其爲理發者。不啻如日星之昭然。顧世之學者。何故置此中圖而不深考。每就下圖兼氣質言者。以七情專作氣發看。而反有疑於理發之說。今座下亦不免如是矣。或者又有謂中圖七情。是下圖七情之善一邊。然下圖七情。旣是氣發。則雖其善矣。依舊是氣發。何得與中圖七情之發於本然性者。比幷而論之耶。是故中與下之七情。其名雖無異同。然中七情之爲情也。直與四端幷行。其善可以達之天下。而下七情之爲情也。不過爲形氣之私。雖其善者。只可屬之一己而已。朱夫子不云乎。人莫不有是形。故雖上智不能無人心。觀此一形字。是非下七情之所由生而何。夫旣是形氣之所生。則於凡聲色臭味安逸上。其喜怒哀樂愛惡欲。元自不外於是。但上智之人。氣質淸粹。故此等七情。亦皆發而中節。未嘗有不善者。然若求其苗脈則終是形氣之發。若此者謂之氣發固也。乃若原於性命之七情。仁義禮智各具此七情。試言之。如見孺子入井而有怵惕惻隱之心者。此固是仁之端也。而當此時己能救之而得其生則喜。人能救之而不救則怒。己與人俱不及救而死則哀。及救而生。見其宛轉活動於前則樂。彼其不救者。以其無人心。不特怒之。而又惡之。其救之者以其有人心。不特喜之。而又愛之。元來孺子雖是他人之子。仁人之心。固欲其生而不欲其死。故由其所欲之本如是。而喜怒哀樂與愛惡。亦皆隨之。有不期然而然者。此七情是仁之所兼也。見人之爲不善而有憎惡之心者。此固是義之端也。而當此時。彼能聽己之言而改之。則不特喜之。而又愛之矣。不聽己之言而終爲不義之事。則不特怒之。而又惡之矣。是何也。吾於其人。本欲其爲義。而不欲其爲不義故也。由其所欲之本如是。而喜怒愛惡。亦皆隨之。而有不期然而然者。此七情是義之所兼也。辭讓是非之心。其發也所兼亦然。豈有仁義禮智之所兼。而乃爲氣發之理乎。執事不信。試就聖人七情之發於理者觀之。堯舜之以不得舜禹爲憂。及以人之逸居無敎而近於禽獸爲憂。舜之以不得於父母爲憂。象憂亦憂。象喜亦喜。與夫誅四匈之怒。予欲左右有民等之欲。俾予從欲以治之欲。成湯慄慄危懼之懼。文王之聞王季安乃喜之喜。及其有疾而色憂之憂。與夫討密人之怒。孔子哭顔淵之慟。見四子列侍而樂。聞絃歌莞爾而喜。見漆雕開自謂吾斯之未能信而悅。與夫不悅於魯衛。子思之不悅於穆公之言。憂道學之失其傳之憂。懼夫愈久而愈失眞之懼。孟子之以樂正子爲政而喜。以天未欲平治天下而不豫。與夫吾爲此懼之懼。此等七情。何莫非粹然天理之發乎。且凡仁義禮智信五性。於五倫各有所領屬。仁則父子有親屬焉。義則君臣有義屬焉。禮則長幼有序屬焉。智則夫婦有別屬焉。信則朋友有信屬焉。然仔細觀之則每一性。又各兼五倫。每一倫又各兼五性。故發於五性之七情。及其中節則爲天下之達道。見於萬事之五倫。原其本體則亦爲天下之達道。第觀中庸首章所言及二十章所言。可知其如此矣。盖七情之中於節之節。卽五倫上當然之理故也。不然則何以均謂之天下之達道耶。且若七情是氣發而非理發。則朱子之釋中庸。必不曰其未發則性也。夫所謂性。非天命之性乎。旣是天命之性。發而爲七情則此七情。便是道心。故序亦曰天命率性道心之謂。而今以喜怒哀樂。必專作氣發看。未知何見而然耶。或者以爲喜怒哀樂。必皆中節。然後方可謂是性之發。然旣說發字在上。以明其爲性之發。則設令發而後或不免爲氣所揜。而有不能中節之患。是乃發而後事也。豈可以是而幷發處謂非是性之發乎。且也發而後爲氣所揜而不能中節。四端亦然。先儒之如此說。不啻明白。何獨於七情而謂其不然乎。今若曰四端發而皆中節。則必無所疑。而惟其以七情常專作氣發看。便成鐵定見解。故雖退陶之中圖如彼。朱子之章句又如此。而一切不反而求之。良可歎也。又執事以爲喜怒哀樂。若是理發。則是聖人全無氣發之可言。未論盛見之得失。信如執事之言。子思所謂喜怒哀樂。若專是氣發。則是聖人全無理發之可言云爾耶。四端之說。至孟子始有之。前此則無之。故大學亦只言喜怒憂懼。樂記亦只言喜怒哀懼愛惡欲。此等若全是氣發。子思曾子何爲於理發上全然闕却。而爲若無仁義禮智之發耶。不惟此也。程子好學論。旣言五性於上。而不言四端於下。但以七情繼之者。誠見理發。有此等情。故就上面論之。使知夫道體之見於用。亦有此七情。而下夫致和之工夫。所謂和與中。雖有發未發之異。而中之發。卽是和則是天命之發。卽是七情也。尤見其必然矣。但於發焉之後。氣易用事而人欲將萌。故君子之體夫道者。旣已戒懼於未發之時。以存天理之本然。而下得致中之工。又必於發處而尤加謹焉。不使人欲少有萌於其間。盖恐形氣之或用事而害夫本然之理。有此致和之工者也。抑以序所謂天命率性道心之謂及必使道心常爲之主而人心每聽命者觀之。則夫人心之生於形氣者。雖曰是形氣之發。若其聲色臭味安逸上本來當然之理。是亦原於天命之性者也。以理言之。理乘之理。何嘗有異於理發之理乎。特其所乘之氣。不過是聲色臭味等而已。故見乘之理。亦隨而無多。不如理發之理。可以放之而彌六合云爾。由此觀之。子思所謂喜怒哀樂。雖專以發於性者言之。而旣使道心常爲之主矣。彼其發於氣而爲人心者。常常聽命於道心之下。自當與此箇喜怒哀樂脗然同歸。而無待於別言矣。第觀序文。始雖以人心道心幷言於上。而及其言天命率性則只說道心之謂四字。亦可見其如此。今執事反有疑於聖人之無氣發。其無乃未之思耶。但聖人純是道心。故洽似無人心一般。其實雖上智不能無人心。何得謂無人心哉。繼此而所欲言者甚多。方苦精力之短乏。艱得草此。又未知盛見果以爲如何。
입재집 제12권 / 서(書) / 김공목 희주 에게 답함〔答金公穆 煕周〕
입재(立齋) 혹은 무적옹(無適翁) 정종로(鄭宗魯, 1738~1816) |
지난번 특별히 저를 돌아봐 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저로 하여금 형주(荊州)를 알고자 하는 바람을 이룰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또 멀리서 보배로운 편지를 보내시어 뜻을 부친 것이 갈수록 더욱 깊고 두터우니 보잘것없는 제가 어떻게 이런 은혜를 입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절실합니다만 오히려 인편이 없는 까닭에 아직까지 답장을 보내지 못했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비유하겠습니까.
요즘 초봄에 영감께서 어버이를 모시며 지내시는 생활이 어떠신지요. 우러러 향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는 늙고 혼미함이 날로 심하니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칠정(七情)에도 이발(理發)이 있다.’는 설은 어리석은 제가 감히 새로운 설을 만들었겠습니까. 대개 우리 퇴계 선생께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의 중도(中圖)에서 이미 명백하게 제시하였습니다. 그 글이 본연의 성(性) 아래에 바로 칠정을 사단과 합하여 썼고, 또 해설을 지어서 이가 발한 것이 됨을 밝힌 것이 해와 별이 밝게 빛남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의 학자들은 무슨 까닭으로 이 중도를 내버려 둔 채 고찰하지 않고 항상 하도(下圖)에서 기질(氣質)을 겸하여 말한 것에 나아가 칠정이 오로지 기가 발한 것으로 간주하고 도리어 이가 발한다는 설에 의심을 두고 있습니까. 지금 그대 또한 이 같음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또 중도의 칠정은 하도의 칠정 가운데 선한 쪽의 한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도의 칠정이 이미 기가 발한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선하더라도 여전히 기가 발한 것이니, 어찌 본연의 성에서 발한 중도의 칠정과 나란히 아울러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중도와 하도의 칠정이 그 명칭은 비록 다름이 없으나, 중도 칠정의 정은 다만 사단과 아울러 행하여 그 선함이 천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도 칠정의 정은 형기의 사사로움이 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비록 그 선한 것이라도 다만 하나의 몸〔一己〕에 속할 뿐입니다.
주부자가 “사람은 이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는 까닭에 비록 상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형(形)’이라는 한 글자를 보면, 이것이 하도의 칠정이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저 이미 형기에 의해 생겨난 바라면 모든 소리와 빛, 냄새와 맛, 안일함에 있어서도 그 희(喜), 로(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이 원래 저절로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상지(上智)의 사람은 기질이 맑고 순수한 까닭에 이런 칠정 또한 모두 발현하여 절도에 맞아 선하지 않은 것을 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실마리를 찾는다면 결국 형기가 발한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기가 발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이에 만약 성명(性命)의 칠정을 탐구해 보면, 인의예지가 각각 이 칠정을 갖추고 있습니다. 시험 삼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 이것은 진실로 인의 단서입니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자기가 그 아이를 구원할 수 있어 그 아이가 산다면 기쁘지만, 다른 사람이 구원할 수 있는데도 구원하지 않는다면 성낼 것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이 모두 구원함에 이르지 못하여 그 아이가 죽으면 슬플 것이며, 구원하여 살아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는 데 이르면 즐거울 것입니다. 그가 구원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인심(人心)이 없기 때문이니 다만 성낼 뿐만 아니라 또 미워하게 되며, 구원하는 것은 그에게 인심이 있기 때문이니 다만 기뻐할 뿐만 아니라 또 사랑하게 됩니다. 원래 어린아이가 비록 다른 사람의 아이지만 어진 사람의 마음은 진실로 살리고자 하고 죽이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그 하고자 하는 바가 본래 이와 같음으로 말미암아 희로애락과 애(愛), 오(惡) 또한 모두 그것을 따라 그렇게 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칠정이 인(仁)을 겸한 바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불선을 하는 것을 보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은 진실로 의(義)의 단서입니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그가 나의 말을 듣고 고칠 수 있다면 다만 기뻐할 뿐만 아니라 또 사랑하게 되며,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불의(不義)한 일을 한다면 다만 성낼 뿐만 아니라 또 미워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내가 그 사람에게 본래 의를 행하기를 원하고, 불의를 행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바가 본래 이와 같음으로 말미암아 희(喜), 로(怒)와 애(愛), 오(惡) 또한 모두 그것을 따라 그렇게 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칠정이 의(義)를 겸한 바이기 때문입니다.
사양하는 마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도 그 발현함에 겸하는 바가 또한 그러하니 어찌 인의예지를 겸한 바가 있다고 이에 기가 발한 이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께서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 삼아 성인의 칠정이 이(理)에서 발한 것에 나아가 살펴보십시오.
요(堯)가 순(舜)을 얻지 못하고 순(舜)이 우(禹)를 얻지 못함을 근심으로 삼은 것과 사람이 편안히 지내기만 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짐 근심으로 삼은 것, 순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못함을 근심으로 삼은 것, 상(象)이 근심하면 또한 근심하고, 상이 기뻐하면 또한 기뻐함과 사흉(四凶)을 주벌한 노여움, 내가 우리 백성들을 도우려 한다는 것 등의 하려 함〔欲〕, 나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정치를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의 원하는 대로 함〔欲〕, 성탕이 두려워함의 두려움, 문왕(文王)이 왕계(王季)가 편안하시다는 것을 듣고서 이에 기뻐함의 기쁨 및 왕계에게 병이 있으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함의 근심과 밀(密)나라를 토벌한 노여움, 공자(孔子)가 안연(顔淵)의 죽음에 곡한 것의 애통함, 네 제자가 나란히 모시고 있을 때를 보고 즐거워함, 현가(絃歌) 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으시며 기뻐함, 칠조개(漆雕開)가 스스로 나는 이 일에 대해 잘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 것을 보고 기뻐함, 노(魯)와 위(衛)에서 기뻐하지 않음, 자사(子思)가 목공(穆公)의 말에 기뻐하지 않음, 도학이 전해짐을 잃을까 걱정하신 걱정, 오래되면 될수록 더욱 참됨을 잃을까 두려워한 두려움, 맹자(孟子)가 악정자(樂正子)가 정사를 하게 된 것 때문에 기뻐함,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기뻐하지 아니함과 내가 이것 때문에 두려워함의 두려움 같은 이러한 칠정(七情)이 어찌 순수하게 천리가 발현한 것이 아님이 없겠습니까.
또 무릇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과 같은 오성(五性)도 오륜에 각각 영속(領屬)된 바가 있으니, 인(仁)은 부자유친(父子有親)에 속하고, 의(義)는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속하고, 예(禮)는 장유유서(長幼有序)에 속하고, 지(智)는 부부유별(夫婦有別)에 속하고, 신(信)은 붕우유신(朋友有信)에 속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하나의 성(性)마다 또 각각 오륜을 겸하고 있으며, 하나의 윤리마다 또 각각 오성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오성에서 발현한 칠정이 절도에 맞는 데 이르게 되면 천하에 공통된 도〔達道〕가 되며, 만사(萬事)에서 나타나는 오륜도 그 본체를 탐구해 보면 또한 천하에 공통된 도가 됩니다. 다만 《중용》 수장(首章)에서 언급한 것과 20장에서 말한 것을 관찰하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칠정이 절도에 맞는 절도가 곧 오륜에서 마땅히 그러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균일하게 ‘천하의 달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 칠정이 기(氣)가 발한 것이지 이(理)가 발한 것이 아니라면, 주자(朱子)가 《중용》을 해석하면서 결코 “그것이 발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저 이른바 ‘성(性)’이란 것은 하늘이 명한 성이 아닙니까. 이미 하늘이 명한 성이 발현해서 칠정이 된 것이라면 이 칠정이 바로 도심(道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서문(序文)에서 또 “하늘이 명함〔天命〕과 성을 따름〔率性〕은 도심을 말한다.”라 하였는데, 지금 희로애락을 오로지 기가 발현한 것으로 간주하니 무엇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로애락이 반드시 모두 절도에 맞은 뒤라야 바야흐로 이 성(性)이 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발(發)’ 자를 말하여 성(性)이 발한 것이 됨을 밝혔으니, 설령 발한 뒤에 혹 기에 의해 가려져 절도에 맞지 않는 근심이 있음을 면치 못하더라도 이것은 곧 발한 뒤의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것 때문에 발한 곳을 아울러서 성이 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발한 뒤에 기에 의해 가려지게 되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사단 또한 그렇습니다. 선유들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명백할 뿐만 아닌데, 어찌 유독 칠정에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지금 만약 “사단이 발해서 모두 절도에 맞다.”고 한다면 결코 의심할 바가 없지만, 오직 칠정을 항상 오로지 기가 발한 것으로 본다면 곧 고집불통의 견해가 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퇴도(退陶) 선생의 중도(中圖)는 저와 같고, 주자(朱子)의 장구는 또 이와 같은데도 전혀 돌이켜서 구하지 않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합니다. 또 그대가 희로애락을 만약 이가 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인에게는 기가 발한 것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대 견해의 옳고 그름을 논할 것 없이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이 자사(子思)가 이른바 ‘희로애락’이 만약 오로지 기가 발한 것이라면, 성인에게는 이가 발한 것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겠지요.
사단에 대한 논설은 맹자에 이르러 비로소 있게 되었고,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대학》에서도 다만 희로우구(喜怒憂懼)만 말했고, 《예기》 〈악기(樂記)〉에서도 희(喜), 로(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만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만약 전부 기가 발한 것이라면, 자사(子思)와 증자(曾子)는 어째서 이가 발한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빼 버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함이 없는 것처럼 하였겠습니까. 오직 이뿐만 아니라,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學論)〉에서도 이미 위에서 오성(五性)을 말했으나, 아래에서 사단을 말하지 않고 다만 칠정으로 이어 놓은 것은 진실로 이가 발함에 이런 정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윗면의 오성(五性)에 나아가 논하여 저 도체(道體)가 용에 드러나서 또한 이 칠정이 있음을 알게 하며, 저 화를 이루는〔致和〕 공부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화(和)와 중(中)은 비록 발함과 아직 발하지 않음의 차이가 있으나 중(中)이 발함이 곧 화(和)가 된다면, 이는 천명이 발한 것이 곧 칠정이 되니, 그 반드시 그러함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발한 뒤에 기는 쉽게 마음대로 움직여 인욕이 장차 싹트게 되는 까닭에 저 도를 체득한 군자는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 이미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천리의 본연(本然)을 보존함으로써 중을 다하는〔致中〕 공부를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발현한 곳에서 더욱 삼가서 인욕이 조금도 그 사이에서 싹트지 못하게 합니다.
대개 형기가 혹 마음대로 움직여 저 본연의 이(理)를 해칠까 두려우니, 이 치화(致和)의 공부를 두어야 합니다. 또한 〈중용서문〉에서 이른바 ‘하늘이 명함〔天命〕과 성을 따름〔率性〕은 도심을 말한다.’라는 것과 ‘반드시 도심이 항상 주장이 되어 인심이 매번 그 명을 듣게 한다.’라는 것으로 보면 저 인심이 형기에서 생겨나는 것은 비록 “이것은 형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도, 그 성색(聲色), 취미(臭味), 안일(安逸)의 본래 당연한 이치 같은 것, 이것은 하늘이 명한 성에 근원한 것입니다. 이치로 말하자면, 이승(理乘)의 이(理)가 어찌 이발(理發)의 이(理)와 다른 적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것이 탄 바인 기는 성색(聲色)과 취미(臭味) 등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타고 있는 이(理)가 또한 성색, 취미를 따르지만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발의 이가 펼쳐 놓으면 천지 사방에 가득 찰 수 있는 것만 못할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자사(子思)가 이른바 희로애락은 비록 오로지 성에서 발한 것으로 말했으나 이미 도심으로 항상 주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저 기에서 발하여 인심(人心)이 되는 것은 항상 도심의 아래에서 명을 들어서 저절로 이 희로애락과 함께 꼭 맞아 동일한 곳에 귀착하므로 다른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용서문〉을 보면 처음에 비록 인심과 도심을 함께 위에서 말했으나, ‘하늘이 명함〔天命〕’과 ‘성을 따름〔率性〕’을 언급함에 이르러서는 곧 다만 “도심을 말한다.〔道心之謂〕”라는 네 글자만 말하였으니 또한 그것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대는 도리어 성인은 기가 발함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의심을 두었으니 혹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성인은 순수하게 도심인 까닭에 마치 인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듯하지만 실은 상지(上智)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으니, 어찌 인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이어 말하고 싶은 것이 매우 많으나 바야흐로 정력이 심히 딸려 힘들어 여기까지만 대강 적습니다. 이 글을 읽고 그대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주-D001] 김공목(金公穆) : 김희주(金煕周, 1760~1830)로,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갈천(葛川)이며, 공목(公穆)은 그의 자이다. 매헌(梅軒) 권사민(權士敏, 1557~1634)과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95년(정조19)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대사간과 함길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년)에는 교리에 실록 편수관을 겸하여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말년에는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 갈천정(葛川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머물러 있었다. 저서로는 《갈천집(葛川集)》이 있다.[주-D002] 형주(荊州)를 …… 바람 : 형주는 당 현종(唐玄宗) 때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명망이 높았던 한조종(韓朝宗)인데, 평소에 숨은 인재를 발탁하길 좋아하여 최종지(崔宗之), 엄무(嚴武) 등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그의 인정을 받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백(李白)의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 “평생에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은 없고 한 형주를 한번 알기를 원할 뿐이다.” 하였다. 곧 입재가 평소 흠모하던 김희주를 알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주-D003]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여섯 번째 도인 〈심통성정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상도(上圖)와 이황에 의해 개정된 중도(中圖) 및 하도(下圖)로 이루어지고, 여기에 이황의 〈심통성정도설〉이 덧붙어 있다.[주-D004] 사람은 …… 없다〔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 주희의 〈중용장구 서〉에 나온다.[주-D005] 요(堯)가 …… 것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요는 순을 얻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삼았고, 순은 우와 고요를 얻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삼았다.[堯以不得舜爲己憂, 舜以不得禹皐陶爲己憂.]”라는 말이 나온다.[주-D006] 사람이 …… 것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인간에게는 도리가 있다. 그런데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면서 편안히 지내기만 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없으면 금수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人之有道也. 飽食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라는 말이 나온다.[주-D007] 순이 …… 것 : 만장이 말하기를, “순이 밭으로 가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울부짖은 것입니까?”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원망하고 사모해서이다.”라고 하였다. 만장이 말하기를, “어버이가 사랑해 주면 기뻐하여 잊지 않고, 어버이가 미워하면 노력하고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순은 원망하였습니까?”라고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장식이 공명고에게 묻기를, ‘순이 밭으로 간 것은 제가 이미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만 하늘을 향하고 어버이를 향해 울부짖었다는 것은 제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공명고가 말하기를, ‘이것은 네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저 공명고는 생각하기를, ‘효자의 마음은 이와 같이 무관심할 수 없다. 나는 힘을 다해 밭을 갈아 공손히 자식 된 직분을 할 뿐이니 어버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음은 나에게 잘못이 있어서인가.[我竭力耕田, 共爲子職而已矣, 父母之不我愛, 於我何哉?]’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주-D008] 상(象)이 …… 기뻐함 : 만장이 말하기를, “순 임금의 부모가 순 임금으로 하여금 창고를 수리하게 하고, 지붕 위에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를 치우고 순의 아비 고수(瞽瞍)가 불을 질렀고, 우물을 쳐내게 하고는 나오려 할 때 우물을 덮었는데, 그의 아우 상(象)이 순이 죽은 줄만 알고 말하기를, ‘순을 덮어 죽인 꾀는 모두가 내 공적이니, 소와 양은 부모에게, 곡식 창고도 부모에게 주고, 방패와 창은 내 것이요, 거문고도 내 것이요, 활도 내 것이요, 아황(娥皇) 여영(女英) 두 형수는 짐(朕)의 집을 돌보게 하리라.’ 하고, 상이 순의 궁에 들어가 보니 순이 상에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상이 말하기를, ‘형님 생각이 간절하여 왔습니다.’ 하고 부끄러워하니, 순이 말하기를, ‘이 신하들을 나를 대신하여 네가 다스리라.’ 했다 하니, 이때 순은 상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을 몰랐습니까.” 하자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몰랐으리요. 상이 근심하면 순도 근심하며, 상이 기뻐하면 순도 기뻐하였다.[象憂亦憂, 象喜亦喜.]”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주-D009] 사흉(四凶)을 주벌한 : 사흉은 요(堯) 임금 때의 네 명의 악인(惡人), 즉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鯤)을 가리킨다. 이 네 사람은 요(堯) 임금 말년에 나라의 중임을 맡았으나 직임을 잘 수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순(舜) 임금이 정사를 보살피면서 공공을 유주(幽洲)에 유배하고, 환도를 숭산(崇山)에 유치(留置)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 찬축(竄逐)하고, 곤을 우산(羽山)에서 죽였다. 《書經 舜典》[주-D010] 내가 …… 것 : 《서경》 〈익직(益稷)〉에 순 임금이 우(禹)에게 말하기를, “신하들은 바로 내 다리요 팔이며, 귀요 눈이로다. 내가 우리 백성들을 도와주려 하니 그대들은 나를 도와주시오. 내가 사방에 힘을 펴려 하거든 그대들이 대신하시오.[臣作朕股肱耳目. 予欲左右有民, 汝翼. 予欲宜力, 四方汝爲.]”라고 하였다.[주-D011] 나로 …… 것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순(舜) 임금이 “나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정치를 할 수 있게 하여, 사방이 풍동하게 한 것은 바로 너의 공로 덕분이다.[俾予從欲以治 四方風動 惟乃之休.]”라고 하였다. 풍동(風動)은 바람이 일듯 고무시킨다는 말로, 백성들이 문교(文敎)에 감동하여 순화(馴化)되는 것을 말한다.[주-D012] 성탕이 두려워함 : 《서경》 〈탕고(湯誥)〉에 탕(湯)이 “내가 상하(上下)에 죄를 짓게 될지 몰라 두려움이 마치 깊은 물로 떨어지는 것 같다.[玆朕未知獲戾于上下, 慄慄危懼, 若將隕于深淵.]”라고 하였다.[주-D013] 문왕(文王)이 …… 기뻐함 :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 하루에 세 번 왕계(王季)의 안부를 물었는데, 아침에는 첫닭이 울기 전에 침문 밖에 가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날의 안부를 묻고는 시중드는 사람이 “편안하시다.[安]”라고 하면 문왕은 그제야 기뻐하였다.[文王乃喜]고 한다. 《禮記 文王世子》[주-D014] 왕계에게 …… 가득함 :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혹시 몸이 편치 못한 일이 있을 때 내시가 문왕에게 고하면 문왕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고 걸을 때 신도 바르게 신지 못하였다.[其有不安節, 則內豎以告文王, 文王色憂, 行不能正履.]”라고 하였다.[주-D015] 밀(密)나라를 토벌한 : 《시경》 〈황의(皇矣)〉에, “밀나라 사람들이 불공하여 감히 대방에 항거하여 완나라를 침공하러 공 땅에 이르거늘 왕께서 혁연히 노하셨다.[密人不恭, 敢拒大邦, 侵阮徂共, 王赫斯怒.]”라고 하였다.[주-D016] 공자(孔子)가 …… 애통함 : 《논어》 〈선진(先進)〉에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곡하며 너무도 애통해하였는데, 따라간 제자가 ‘선생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십니다.’라고 하니, 공자가 ‘이 사람을 위해서 애통해하지 않고 누구에게 애통해하겠는가.’라고 하였다.[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라고 하였다.[주-D017] 네 …… 즐거워함 :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孔子)를 모시고 앉았을 때,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이야기하게 하였다. 제자들의 포부를 듣고 기뻐하였는데, 특히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자(冠者) 5, 6인, 동자(童子) 6, 7인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감탄하며 “나는 점을 허여한다.”라고 한 일이 있다. 《論語 先進》[주-D018] 현가(絃歌) …… 기뻐함 : “弦歌”는 “弦歌”로도 쓴다. 공자께서 자유(子游)가 다스리는 무성(武城)에 가서 현가(弦歌)를 들으시고 빙그레 웃으셨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는 일이 있다. 《論語 陽貨》[주-D019] 칠조개(漆雕開)가 …… 기뻐함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하였는데,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吾斯之未能信]’라고 대답하자, 공자가 기뻐했다.”라고 하였다.[주-D020] 노(魯)와 …… 않음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기뻐하지 않았거늘, 송(宋)나라 대부 환사마(桓司馬)가 길목을 막고 죽이려 하므로 미복(微服)으로 송나라를 지나가니, 이때에 공자는 액(阨)을 당하여 사성(司城)이 된 정자(貞子)의 집을 주인으로 정하고, 진나라 제후인 주(周)의 신하가 되었다.[孔子不悅於魯衛, 遭宋桓司馬將要而殺之, 微服而過宋, 是時孔子當阨, 主司城貞子, 爲陳侯周臣.]”라고 하였다.[주-D021] 자사(子思)가 …… 않음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만장(萬章)이 묻기를, “임금이 먹을 것을 보내 주면 받아야 한다니, 계속해서 받아도 좋은 것입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노 목공(魯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자주 문안드리고, 자주 삶은 고기를 보내 드렸다. 자사는 기뻐하지 아니하고 나중에는 사자(使者)를 대문 밖으로 나가게 하고 임금 계신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면서 받지 않고 말하기를, ‘이제 비로소 임금이 나를 견마(犬馬)와 같이 기르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으니,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사자를 시켜 갖다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 어진 이를 좋아하면서 등용하지 않고 또한 어진 이를 봉양(奉養)도 못 한다면, 어진 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繆公之於子思也, 亟問, 亟餽鼎肉. 子思不悅, 於卒也摽使者出諸大門之外. 北面稽首拜而不受曰 ‘今而後知君之犬馬畜伋.’ 蓋自是臺無餽也. 悅賢不能擧, 又不能養也, 可謂悅賢乎?]”라고 하였다.[주-D022] 도학이 …… 걱정 :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중용》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자사자께서 도학이 전해짐을 잃을까 걱정하여 지으신 것이다.[中庸何爲而作也?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라고 하였다.[주-D023] 오래되면 …… 두려워한 :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자사는 오래될수록 더욱 그 참됨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요와 순 이래로 서로 전해 온 뜻을 미루어 근본하고, 평소 부사에게 들은 말을 질정하여 다시 연역하고 이 책을 지어 후세의 배우는 사람을 가르쳤다.[子思懼夫愈久而愈失其眞也, 於是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 更互演繹, 作爲此書, 以詔後之學者.]”라고 하였다.[주-D024] 맹자(孟子)가 …… 기뻐함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노나라가 악정자(樂正子)로 하여금 정사를 맡게 하고자 하였다.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소문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였다.[魯欲使樂正子爲政. 孟子曰, 吾聞之, 喜而不寐.]”라고 하였다.[주-D025] 하늘이 …… 아니함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저 하늘이 아직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은 것이지, 만약에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지금의 세상에 당면하여 나를 버리고 그 누구를 쓰겠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지 않겠는가.[夫天未欲平治天下也,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其誰也? 吾何爲不豫哉?]”라고 하였다.[주-D026] 내가 …… 두려워함 : 맹자가 이단(異端)의 학문이 횡행하는 것을 우려하여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선성의 도를 보위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으며 바르지 않은 말을 추방하여 삿된 학설이 나오지 못하게 한다.[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주-D027] 20장에서 말한 것 : 애공(哀公)이 정치에 대해 질문한 장인데, 여기에 “천하에 공통된 도가 다섯인데, 이것을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 벗의 사귐의 다섯 가지가 천하에 공통된 도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五者天下之達道也.]”라는 내용이 있다.[주-D028] 그것이 …… 성(性)이다 : 《중용장구》 1장의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의 주자 주에 “그 발현하지 않음이 곧 성이다.[其未發則性也]”라고 하였다.[주-D029] 호학론(好學論) :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18세 때 태학(太學)에 있을 때에 당시 학관(學官)이던 호원(胡瑗)이 “안자가 좋아한 학문이 무슨 학문이었는가?[顔子好學何學論]”라는 글제를 내어 학생들을 시험하였는데, 그때 정이가 지은 글을 〈호학론〉 또는 〈안자호학론〉이라 부른다. 사람의 칠정(七情)에 대해 논한 글이다. 《二程全書 卷62 雜著》[주-D030] 펼쳐 …… 찰 : 정자(程子)가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도(道)에 대하여 이르기를, “펼쳐 놓으면 천지 사방에 가득 차고, 거두어들이면 물러가 은밀한 데에 감추어져서 그 의미가 무궁하니, 이는 다 진실한 학문이다.[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송희준 (공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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