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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박힌 남십자성
이 홍사
단골이용소는 대로변이 아니라 초등학교부근 뒷골목에 있다.
행복이용소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있지만 이곳에 이발소가 있다는 건 단골손님들만 알고 찾는 곳이다. 나도 이 이발소라면 단골이다. 단골이발소. 행복이용소라는 명칭을 두고 나는 단골이발소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깎아야지만 마음이 푸근하다. 마음이 푸근해서 그런지 이발의자에 앉아 아저씨께 말을 걸지 않으면 잠이 온다. 무슨 체질이기에 이발의자에만 앉으면 웸 잠이 그렇게 쏟아지는지. 다른 미용실이나 다른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면 몸이 움찔움찔 거리면서 도무지 불안해 잠이 올 겨를이 없다. 그러나 이 단골이발소에서 하면 잠이 쏟아진다. 이발소아저씨를 믿기 때문이다. 이발실력이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내 얼굴형에 맞는 스타일의 머리모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가 빨리 자라는 편이라서 두 달에 세 번 정도 이발을 한다. 가격이 다른 곳에서 한 번하는 이발비보다 여기서 두 번 깎는 게 더 저렴하다. 뒤통수에 면도조차도 해주지 않는 싸구려 미용실의 커트보다 저렴한 곳이다. 거기다가 65세 이상 노인이나 국가유공자는 40%나 할인을 해주는 착한 가게다. 물론 나는 할인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아저씨는 정직하게 벌어서 먹고 산다.
목욕을 가면 목욕탕에 따린 이발소가 있지만 나는 거기서 머리를 깎지 않는다. 금세 목욕을 가더라도 나는 이 단골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머리를 감고 목욕탕엘 가고 목욕을 하고 나오더라도 이곳으로 와서 이발을 하고 다시 머리를 감는다.
목욕탕 이발소는 무슨 연유로 그리 비싼가?
머리도 감겨주지 않으면서 그렇게 비쌀 이유가 없는데 단골이발소보다 비싸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발의자 하나에 거울 하나만 달랑 붙여놓은 목욕탕의 이발소는 시설비와 임차료가 그리 많이 들 것 같지 않은데 이발요금은 단골이발소의 거의 곱절에 가깝다. 결코 합리적인 가격이 아니다. 여러 소리 할 필요가 없이 비싸면 안 가면 되는 것이고 제 마음이 편하고 만만한 곳에서 하는 게 이발이다.
헤어스타일에 관한한 나는 좀 예민한 편이다.
반백이 된 지금도 이발소 의자에 앉으면 항상 생각나는 게 있다.
군 시절의 이발이었다. 신참시절 자대에 배속되니 대대이발병이 병장 계급장을 단 선임이었다. 그는 이발기계로 깎는 것이 아니라 거의 쥐어뜯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선임이 전역하는 날까지 어지간히 불편했다. 당시에는 군에 전동으로 된 헤어카트기가 보급되지 않았고 손으로 놀리는 이발기계를 가지고 깎았는데 기계가 잘 들지 않아서 머리카락이 반쯤 뽑아내는 성의라고는 전혀 없었다.
너 이 새끼! 군기가 빠져가지고 머리카락이 좆나게 빨리 자라네. 대가리 박아.
그 말년 병장은 내 머리를 가지고 흠을 잡았다. 오로지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는 이유로 이발의자 밑에, 잘려 나온 머리카락이 수북한 곳에 대가리박아를 오 분이나 하고 머리를 깎은 적이 있었고 이발소 청소를 혼자서 다 한 후에 검사를 받고 머리를 깎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얼마나 약이 오르고 불편했던지 제 머리를 제가 깎을 수 없을까 궁리하던 시절이었다. 머리가 자라면 이발을 또 어떻게 하나하고 파견을 신청하곤 했다. 주특기인 비상용 발전기 점검수리 명목으로 파견을 나가는 연대본부에는 시설도 훌륭할 뿐만 아니라 이발병이 이등병 계급장을 단 후임이었다. 하여 잘못 깎으면 성질을 부릴 수가 있었고 머리를 쥐어뜯으면 잠시 대가리박아를 시켜 얼차려를 주고 이렇게 깎아 달라, 저렇게 깎아 달라 주문을 하고 콧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다. 그 이발병 병장이 전역을 하고부터는 절대로 파견을 나가지 않았고 파견은 후임들을 보내고 대대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며 졸거나 콧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다.
이젠 인권을 생각하는 군이라고, 군대가 좋아져서 그런 게 있나 모르겠지만 나는 단골 이용소에 앉아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저씨 나이가 있으니 군 시절처럼 콧노래는 부르지 못한다.
이발소 아저씨는 왼쪽 다리가 고무, 아니 플라스틱이다.
잘려나간 종아리와 발목은 월남에 묻어두고 왔단다.
내가 알기로는 월남전에 두 번이나 갔다 온 양반이다. 한번은 파병이 되어 백마부대에 갔다가 오고 한번을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뒷돈을 써가며 신청을 해서 십자성부대에 갔다가 왔다고 했다. 백마부대는 전투부대이고 십자성부대는 군수 지원부대이다. 이것도 아저씨에게 들어서 아는 상식이다. 백마부대에서는 통신병을 했고 십자성부대에서는 탄약관리를 했다고 했다. 헌데 전투를 치열하게 하던 백마부대에서는 무탈하게 살아남았는데 군수지원인 십자성부대에서 발목이 잘려나갔다고 했다.
이 이발소의 이발 의자에 앉으면 월남의 대한 얘기를 많이 듣는다. 아니, 이발을 하면서 내가 먼저 말을 걸고 말머리를 월남으로 끌고 간다. 그러면 과묵한 아저씨의 입에서 월남전의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게 되어 있다. 오늘도 그랬다. 일주일 후에 베트남 하노이에 간다고 말을 꺼냈다. 아저씨는 하노이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곳은 17도선 이북이라 월맹군의 주둔지였고 아저씨는 나짱에서 근무했고 두 번째 갔을 적에는 호찌민, 지금은 호찌민으로 시의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사이공 부근에서 근무를 했다고 했다.
월남의 역사는 우리와 상이한 점이 없지 않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세계의 대륙을 노리고 진군하던 일본군이 1945년 히로시마와 군수품 생산업체가 있던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고 백기를 들었다. 그렇게 패망한 일본군의 철수로 해방이 된 나라가 베트남과 한국이다. 이념의 혼란기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뉘는데 베트남은 위도 17도에서 잘리고 우리나라는 위도 38도에서 잘려 삼팔선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성질이 급해서 통일을 이루고자 바로 한국전이 발발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휴전선이 생겼지만 베트남은 성질이 느긋해서 한참 있다가 월남전이 터졌다. 그 민족의 성질에 대해 얘기한 것도 아저씨였다. 당시 베트남의 위도 17도는 나트랑이라고 불리는 나짱의 바로 위였다. 백마부대가 처음 배에서 내린 곳도 나짱이었다고 했다.
한국 지도를 보고 흔히들 토끼모양이라고 한다. 헌데 베트남 지도를 보면 배에 발로 차여 비명을 지르는 고양이 형상이다. 이것도 이발소 아저씨에게 들었는데 그렇게 보니 흡사했다. 발로 차여 쪼그라든 배의 폭은 겨우 38Km정도 되는 협소한 나라다. 나라의 폭은 협소하지만 남북으로 엄청 길어서 남과 북의 문화의 차이가 굉장히 심하고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에는 같은 나라지만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억양이 달랐다고 한다.
이발소 아저씨는 파병되는 백마부대의 소속 전투병으로 나짱에 내렸는데 그 풍광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그 말에는 수긍이 갔다. 나짱에는 나도 가본 적이 있고 풍광을 보고 놀랐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나? 십오 리가 넘는 고운 백사장의 해안에 잔잔한 물결, 휴양지로 그만이라 프랑스지배를 받을 적에 휴양도시로 개발했다는 곳이다. 나짱에 가본 게 벌써 십오 년 전이다. 당시에 호찌민에 진출해 있던 섬유공장에 파견되어 본부장을 맡고 있던 고등학교의 절친한 동기가 있어서 베트남에 일찌감치 유람삼아 다녀왔다. 열흘정도의 여정이었는데 친구들 넷이 가서 공항에 마중을 나온 그 친구와 베트남 남부지방을 싸돌아다녔는데 호찌민을 둘러보고 관광지가 되어버린 전적지 구찌땅굴과 더 올라가서 달락과 나짱에서 해수욕을 하고 다시 호찌민으로 돌아와 메콩강 하류 델타메콩을 둘러보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여행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짱의 그 타원형 해변이었다. 그곳은 사진으로 보아도 실감이 나지 않고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가서 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이발소 아저씨의 말로는 당시의 군사를 수송하던 배는 지금처럼 빠르지 않아 보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그 보름은 전투보다 더 힘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뱃멀미에 부대원 거의가 녹초가 되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그런 파병에서는 공군 수송기가 동원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전부 배로 수송을 했다고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그 수평선, 자고나도 수평선 그 아득함. 뱃멀미에 녹초가 되어 밥을 먹으면 바로 토해냈다고 했으면 심한 사람은 그 보름을 항해하는 동안 체중이 거의 15Kg이 빠졌으니 하루에 1Kg이 빠진 셈이라고 했다. 뱃멀미가 심했던 병사는 반쪽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요번에는 이발을 좀 빨리 하네요. 지난주에 이발을 했잖아요? 아직 이발할 때가 안 된 듯한데?
전동 카트기로 뒤통수를 밀던 아저씨가 묻는다.
-내일 모레, 일요일에 딸 결혼식이 있어서요.
-아, 그래요, 축하드려요. 사위가 될 양반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회사에 다니고 있답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라나요.
-요즘처럼 취직이 힘 드는데 좋은 회사에 빨리 자리를 잘 잡았구만, 하노이 간다고 했지요? 결혼식을 마치고 하노이 놀러가시나요?
-아니, 놀러 가는 것이 아니고 미얀마 나가는 길에 이틀간 스톱오브를 해서 하롱베이를 보고 가려고요. 하롱베이를 한 번도 못 가봐서 일정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베트남항공인데 직항보다 더 싸게 표를 끊었어요.
-베트남 항공을 타면 아오자이를 입은 여승무원들의 허리, 하얀 속살을 보너스로 볼 수가 있지. 요즘 아이들 배꼽을 내놓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눈이 즐겁죠. 베트남 항공의 최상의 서비스가 바로 그거라우.
-듣고 보니 그러네요. 많이 보여주는 것보다 살짝 보여주니 더 매력이 있죠. 이번에 나가면 미얀마 공사가 마무리 되려나? 아이구! 늦어터진 나라, 엄청 걸리네요. 한 달 있다가 들어올 적에는 호찌민을 경유해서 들어오는데 또 이틀 스톱오브를 해서 델타메콩을 한 번 보고 들어올 예정입니다. 사장님은 메콩강을 많이 보셨죠?
이렇게 유도해서 이야기가 나오게 해야 한다는 걸 영악하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물음에 잠시 전동 헤어카트기가 멈추었다.
-내가 다친 곳이 바로 메콩강이었어요. 그 강가에서 발목이 날아간 거지.
-그래요?
-메콩강 중간에 있는 섬에 탄약을 보급하고 돌아오는 길에 곡사포가 날아왔어요. 완전히 정글전이라 피아구분에 지역이 따로 없었지.
오늘도 성공이다. 아저씨의 입에서 월남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발을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일박이일로 탄약을 보급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항구에 거의 다다라 곡사포를 맞아서 다행이지 강 중간에서 곡사포를 맞았다면 물귀신이 될 뻔 했다고 했다. 메콩강은 우리나라의 낙동강이나 금강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강폭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강에서 배를 띄웠는데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4개국을 흘러서 나오는, 강 중간에서 보면 양쪽이 양양하게 보이는 강이라 했다. 나도 그 점은 알고 있지만 아저씨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
강 건너 섬에서 쏜 곡사포가 아니고 강 이쪽 정글에서 날아온 곡사포라고 했다. 뱃머리에 서서 닻을 내리려고 밧줄을 쥐고 있던 아저씨의 왼쪽 발목을 곡사포 파편이 관통을 했다고 했다. 배에는 경계병 세 명을 포함해서 일곱 명이 타고 있었는데 보급부대 미군병사 하나와 경계근무를 하던 한국군 하나는 갑판에서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닺을 내리지 못한, 구멍이 난 배에 실려 그대로 하류로 떠내려가고 나머지는 물속으로 뛰어 내렸다고 했다. 다행히 물이 얕아서 육지로 기어 올라왔는데 피신을 해서 군화를 벗어보니 왼쪽 발목뼈가 산산조각이 났고 야전병원으로 후송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산산조각이 난 발목으로 어떻게 그 물에서 기어 올라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그 때는 워낙 다급해서 아픈 것도 몰랐다니까요. 올라와서 군화를 벗어보니까 발목이 당나귀 좆처럼 덜렁거리는데 아프진 않고 기분만 참 고약하데요.
당나귀 좆? 비유가 워낙 고상해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요즘 의술 같으면 안 잘라도 되는데 당시 야전병원의 의술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노라고 했다. 사이공에 있는 사령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지 못하고 대대 야전병원인 천막에서 발목에 각목을 대고 붕대를 감고 보름을 있으니 발목에서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했다. 핏줄마저 다 끊어져 썩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군용침상에 누워 있으니 웬 놈의 비는 그렇게 오는지....... 육로로 길이 막혔으니 헬기가 와야 되는데, 그 놈의 헬기를 기다리다 발목이 썩어버린 거지.
거울에 비친 아저씨의 얼굴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갑판에 쓰러진 미국 병사와 한국군 한 명은 어떻게 되었나요?
-모르지. 물살이 상당히 심했는데 배는 떠내려가다가 침몰을 했을 터이고 정신없이 육지로 기어 나와서 헤아려보니 두 명은 없고 다섯 명 뿐이데? 전쟁이란 원래 그런 거라 덤덤해야지.
그 때의 상황이 짐작 가능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적에 훼방꾼이 이발소 문을 밀고 들어왔다.
-장기 한판 하려고 왔더니 손님이 계시는구만.
단골이발소 아저씨와 연배가 비슷한 대머리의 아저씨였다. 정수리를 넘어서 뒤통수까지 벗겨진 대머리라 저런 아저씨는 이발소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이 손님 뿐이오. 잠시 앉아서 기다려요.
-그럼, 내 후딱 가서 담배 한 갑 사가지고 올게.
대머리 아저씨가 들어선 문을 다시 밀고 나갔다.
-머리가 저런 양반은 이발소에 도움이 안 되겠네요.
-어허!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요. 저 양반 헤어스타일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저 양반 이발 한번 하는데 두 시간 이상이 걸려요.
-깎을 게 뭐가 있다고 두 시간이나 걸리나요. 이삼 분이면 족하겠는데? 저에게 맡겨도 저런 양반은 이발을 하겠습니다.
-그게 힘들 걸요. 만만치 않아요. 비위 맞추기가.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금세 깎으면 성의가 없다고 이발요금을 못 받는단다, 전동 카트기는 쓸 일이 없지만 빗으로 뒷머리를 빗으면서 자꾸 가위소리를 내야한단다. 단번에 뭉텅뭉텅 자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르고 빗으로 빗어보고 또 조금 자르고 머리숱이 많은 사람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대머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인가요?
-그런 셈으로 쳐야 되겠지.
-대대 야전병원에 계시다가 후송은 언제 되셨나요?
-대략 삼 주가 넘어서 보급품을 싣고 온 수송헬기를 타고 나왔지요. 그땐 이미 발목이 다 썩었어요. 시커먼 게 내가 맡아도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사령부 야전병원에 도착해서 내 입으로 빨리 잘라달라고 했을 정도니까. 아까 온 양반 있죠.
-누구? 대머리아저씨 말씀인가요?
-그래요. 저 양반도 월남을 두 번이나 갔다가 왔어요. 나는 사병으로 갔다가 왔고 저 양반은 나보다 두 살이 더한데 하사관으로 갔다가 상사를 달고 제대를 했는데 고엽제 후유증으로 저렇게 대머리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때는 무지해서 헬기에서 고엽제를 살포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시원하다고 그걸 맞고 있었으니, 원 참.
-고엽제를 맞으면 대머리가 되나요?
-모르지. 저 양반 논리로는 자기 집안에는 선천적으로 대머리가 없는데 월남을 다녀오고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나? 분명히 고엽제의 후유증일 거라고 우기는 거지. 저 양반 월남 참전전우회 시 지부장을 맡고 있는데 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갑붑니다. 원래 이 동네 토박이인데 월남에서 벌어온 돈으로 당시에 전답을 엄청 사들였던 모양이어요. 하사관들은 월급도 많이 받았거든. 아마도 우리 사병들의 두세 배는 되었을 걸.
뒷얘기는 듣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했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신시가지로 발전했지만 그 당시라면 볼품없는 이 골짜기 땅값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때 일 것이다. 당시에 귀한 현금을 들고 골짜기의 천수답과 밭을 사들여서 지니고 있었다면 대박이 터졌음은 당연하다.
-월남에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아니란다. 그 양반은 맹호부대 소속이었고 이 동네에 와서 이발소를 차리고 이야기 퍼즐을 짜맞추다보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이발소아저씨의 고향은 구미가 아니라 상주 어디라고 들었다. 그 양반이 지난 번 조합장에 출마해서 좀 털어먹기는 했다고 했지만 내 짐작으로 그건 푼돈에 불과할 것이다.
-사장님도 월남 갔다 와서 조금 벌었겠네요.
목발을 짚고 돌아왔는데 벌긴 뭘 벌어. 동생들 공부시키는 데 다 들어가고....... 그렇게 시작한 아저씨의 말은 병신이 되어 여태 먹고 산 게 고작이란다. 사병들이 받은 건 얼마 되지도 않고 국가에서는 그렇게 번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다 썼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당시에는 부상을 당하고 돌아와도 정부에서는 남은 생을 책임질 보상이 없었단다. 관심이나 조명을 받지 못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가서 죽거나 다치면 자기만 손해라고 했다. 심한 사람은 돌아와서 막노동도 못하고 동냥을 얻으러 다니던 시대였다고 했다.
정말 보상이나 위로금을 한 푼도 못 받았느냐고 되묻자 아저씨는 말을 고쳐서 받았단다. 십칠만 원! 그 돈은 아저씨가 받은 것이고 전사자는 삼십만 원이라고 했다. 당시에 송아지 한 마리가 거의 삼만 원 했으니 큰돈은 아니라고 비교하며 회상했다. 미국에서 나오는 월급의 팔 할은 정부가 걷어가고 겨우 이 할 정도만 참전용사에게 지급을 했는데 그 보상금을 받아쓰고는 빈손이 된 상이용사들은 남의 집 머슴으로도 못 가고 동냥을 다닐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난다. 내가 어릴 적에는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계급장이 버젓이 달린 군복을 입고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이 동냥을 얻으러 자주 왔었는데 엄청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한국전에서 다친 사람인지 월남에서 다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이용사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동냥을 얻으러 오곤 했다.
아저씨의 얘기에 의하면 지금에 와서야 정부에서 나오는 참전용사의 연금 몇 푼이 고작이란다. 그것도 참전용사들이 모여서 지회를 결성하고 서울에 가서 시위를 하는 바람에 역사를 거슬러 사회적 조명과 관심을 받게 되고 우격다짐으로 연금을 정부로부터 받아낸 거라면서 시대가 다르니 비교하면 안 되지만 배타고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되어 죽은 아이들이 받은 보상금에 비하면 완전히 개죽음라고 했다. 그런 비교는 안하려고 했지만 죽음도 시대를 잘 만나야 하고 죽음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야하며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렇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몇 푼 안 되는 연금도 살았으니까 받는 거지 죽은 자들은 그것마저도 없다고 하며 남의 나라 전쟁터에서 죽으면 고작 삼십만 원, 그걸로 끝이라며 개죽음이 따로 없노라고 했다. 전쟁터와 여객선의 침몰, 비교하니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인생을 자동차에 비유했다.
아저씨 말에 의하면 다른 건 몰라도 차가 조향과 제동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수리를 들어가야 한다.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말인즉, 인생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다. 월남에 한 번 갔다 와서 만족하고 결혼생활을 했으면 되었지. 제동이 되지 않아 욕심을 부려서 첫아이를 임신한 신혼 초에 다시 건너가서 이 꼴이 되어 왔다고 했다. 제동도 안 되었고 조향도 잘못 감아 인생이 파탄난 거라고 했다. 그나마 결혼을 했으니 다행이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병신에게 시집을 오겠냐고 나에게 되물었다.
-아, 두 번째 들어가실 적에는 결혼을 하시고 들어가신 거네요.
결혼을 했다니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나는 하지 않았다. 발목을 자르고 바로 나왔느냐고 묻는 말에는 아니란다. 돌아오는 배가 없어서 사령부 야전병원 생활을 칠 개월을 더 했단다. 고국의 아내는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라고 들었지만 편지에 다쳤다는 말은 못 전하고 있었다고 했다. 야전병원에 있어도 월급은 한국에서 집으로 송금이 되어 나오니 집에서는 다친 것도 모르고 답답할 것은 없었노라고 하면서 고국에 돌아가면 이 몸으로 무얼 할까 궁리를 끊임없이 했노라고 하면서 그때만큼 실의에 빠져 마음고생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칠 개월을 있다가 전세가 기울어지고 만기 전역하는 병사들이 퇴각하는 배를 함께 탔다고 했다. 아저씨의 표현에 의하면 그 배에는 팔이 날아간 놈, 두 다리가 잘린 놈, 두 눈이 빠져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놈, 갖가지 부상병들이 함께 타고 돌아왔는데 목발을 짚고 있었지만 제 발로 가서 밥 먹고 똥오줌을 가리니 다른 부상자에 비해 양호한 편이라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나의 불행에 가장 위로가 되는 건 나보다 더 큰 타인의 불행이라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닌 모양이라면서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어디가 이상한 사람을 보면, 저 자식 월남 갔다가 왔나? 왜 저래? 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많이들 다쳤다고 했다.
-야전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를 지켜준 게 뭔지 아시우?
전동 카트기를 걸어놓고 가위질을 하면서 한참 설명을 하다가 아저씨는 물었다.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안다. 거울에 비친 아저씨와 눈을 맞추고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허! 가위질하는데 머리를 움직이면 안 되지. 나를 지켜준 게 남십자성이었다오.
-그건 부대 이름이 아니라 별자리 이름 아닙니까?
-그래요. 별이죠.
사령부 야전병원은 미군들과 함께 썼는데 아저씨 병상에 누우면 창밖으로 바로 남십자성이 보이는 위치였다고 했다. 그 남십자성을 보면서 참 많이 빌었고 다짐도 많이 했다고 했다. 죽은 놈 보다는 낫다. 살길을 찾자고 남십자성을 보고 다짐했는데 나중에는 살려줘서 고맙다, 너를 믿는다는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발전을 했다는 것이다. 자꾸 보다보니 그냥 별자리가 아니라 약속과 믿음의 대상이 되었으며 낮에는 자고 밤새 그 십자성을 보는 날도 있었으며 그 별자리와 약속도 하고 나중엔 밀어를 속삭일 정도로 친해졌다고 했다.
별자리와 밀어를 속삭인다?
좀 괴상한 논리지만 나는 말을 자르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마음 줄 데가 없는 부상병의 심정과 투정을 그 별자리는 말없이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거의 두 달 간 별자리를 보고 빌었고 밀어를 속삭이곤 했다는 것이다. 먹고 자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부상병에게 남십자성은 위안을 주었던 모양이다. 별을 보고 길을 물어 인생의 항로를 찾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십자성을 볼 수가 없죠?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남십자성은 북위 30도 이남에서만 볼 수 있는 별자리라고 했다. 별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는 그 별자리를 본 적이 없다.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으로 길을 찾고 남반구에서는 남십자성을 보고 방향을 묻는다는 말인즉, 미얀마에 오래 계셨으면 그 남십자성을 보았을 터인데?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옛날 랭군이라고 불리던 양곤이라는 도시에 있어서 별자리를 볼 수가 없었노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한국의 하늘에도 북극성이 어디 있는지, 북두칠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무당집에서 북두칠성을 그려놓고 비는 민간신앙에 존재하는 별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아, 불이 밝은 데서는 별을 볼 수가 없지.
사령부 야전병원은 밤에 불을 켜지 않았다고 했다. 적의 공중전에 노출이 될까봐 등화관제를 철저히 했노라고 하면서 그 덕분에 별을 더 밝게 볼 수가 있었다고 했다. 이발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도 남십자성한테 물어 길을 연 것이라고 했다. 별을 보며 고국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섬광처럼 머리에 스치는 것이 이발사였다고 했다. 농사일은 물 건너갔고 처음에는 도장이나 파는 가게를 차리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건 자신보다 못한 앉은뱅이들이 하는 직업이라 거기에 끼어 밥그릇을 뺏을 수도 없고 무엇을 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었는데 별자리를 보다가 이발사가 떠올랐다고 했다. 이발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부터는 야전병원 생활이 따분하지 않았다고 했다. 가위와 카트기를 구해서 미군과 한국군을 가리지 않고 머리가 긴 부상병을 상대로 이발을 해주며 기술을 익혔노라고 했다. 일종의 실습인데 실습대상은 병원에 늘려있었다고 하면서 나중엔 실력이 늘어 목발을 짚고 다니며 부상병뿐만 아니라 의무병과 의무장교의 이발까지도 해주었노라고 했다.
-어디서 배우신 게 아니고 혼자서 터득하신 거네요?
-한국에 나와서 이발소 직공으로 들어가 다시 배우기는 했지만 가위질을 해보았으니 많이 수월했지. 헌데 그 남십자성이 이젠 하늘에는 없다오. 내가 장담을 하건데, 하노이를 가도 남십자성을 볼 수가 없을 게야.
그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허, 놀래기는....... 그 별은 이제 내 가슴에 들어 있다우. 내가 월남에서 돌아오면서 별을 따다가 내 심장 뒤편에 깊숙이 박아 두었지. 그 별을 보려면 이젠 내 가슴을 열고 들여다봐야 되지 하늘을 보면 안 돼. 나는 가끔 자다가 일어나서 그 별을 꺼내 보거든. 그 별이 무척 그리울 때가 있어. 자다가 깨어나서 허전하고 사라진 발목에 대한 상실감이 덮쳐 우울해지면 그럴 땐 혼자서 살며시 가슴을 열어 꺼내보는 거지.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지. 마누라가 죽고 나서 그 별을 꺼내보는 횟수가 잦아졌어.
남십자성을 심장 뒤에 박아두었다는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가끔 별을 가슴의 별을 꺼내 보는 아저씨의 외로운 밤이 짐작 가능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발소가 있는 이 건물은 아저씨의 소유다. 옛날에 형곡동에서 이발소를 하다가 이곳 구획정리 지구로 옮겨와 작은 건물을 아담하게 지어서 일층은 이발소 이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들딸들은 다 출가를 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혼자 계신 지 오래 되셨잖아요? 파트너로 할머니를 한 분 들이시지.
그런 소리 말란다. 혼자 사는 게 편하단다. 조금 전에 왔던 대머리아저씨가 왜 뻔질나게 이발소를 들락거리느냐 하면 그 양반 고종사촌 여동생이 젊어서 청상이 되어 여태 혼자 살았는데 딸린 자식도 없고 홀가분하다면서 나랑 엮어보려고 들락거린다고 했다. 싫다고 했지만 한번만 만나보라고 계속 들락거리며 조아댄다는 것이다. 젊어서 청상이 되었다는 그 할머니의 나이를 물었더니 올해 아마도 환갑이나 환갑이 갓 넘었거나 그 어디쯤 되지 싶다고 했다.
-할머니가 아니네요. 한번 만나보시지요. 그런 아주머니라면 노후를 즐기시기가 그만일 터인데.......
-나 혼자서도 잘 즐겨요. 돈이 좀 모이면 해외여행을 가고.
-해외여행도 같이 다니시면 좋잖아요.
-에이, 기분 맞추어주기 귀찮지. 홀가분하게 혼자 다니는 게 좋아. 마음 내키는 대로 일정을 변경하고,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지만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어요.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거기까지 자신의 입장을 밝힌 아저씨가 가위를 놓고 면도기를 들었다.
-해외여행은 패키지로 다니시나요?
-패키지? 재미없어요. 혼자서 자유여행으로 다니는 거지. 나는 혼자서 잘 돌아다녀. 요즘 가이드북이 얼마나 잘 나오는데.
면도를 하면서 일러주는 아저씨 말에 의하면, 여행을 가면 절대로 현지 가이드를 이용하지 말라. 그 가이드의 기분을 맞추어 주느라고 예민한 사람은 여행을 짜증스럽게 마치기가 십상이다. 언어가 안 된다고 두렵게 생각하지 마라. 눈치로 다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라며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숫기가 없어서 탈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들어보니 지금 경제가 이렇게 어렵고 취직이 안 되는데 부모에게 손을 벌릴 게 아니라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배우긴 많이 배워가지고 다 섞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아저씨의 학력을 물었다.
-나? 상주에서 중학을 나왔지.
당시에 시골 살림으로 고등학교는 대구로 유학을 가야하니 언감생심이었노라 했다. 그게 한이 되어 월남에 가서 번 돈으로 넷이나 되는 동생들 모두 고등학교를 보냈다면서 젊고 몸만 성하다면 세계 어디를 돌아다녀도 먹고 살 수가 있노라고 했다. 돌아다녀보니 할 일은 정말 도처에 늘려 있다는 말인즉슨,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며 요즘 한국아이들이 고공행진을 못해서 근시안적이며 부모들이나 이 놈의 정부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는 나도 공감을 했다. 실업률이 십 몇 년 만에 바닥을 기고 경상수지 적자가 예고되고 있다. 그런 기사는 신문에 가십기사로 조그맣게 나온다.
-시절이 하수상해서 까딱하다간 젊은이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인생 조지는 거지.
그 말을 하면서 자심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은 건강과 신용뿐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건강과 신용은 자신만이 지킬 수가 있는 물건이다. 절대로 남이 지켜주지 못하고 한번 잃으면 인생이 끝장이 나는 품목이라면서 이발소에 있던 텔레비전과 집에 있는 텔레비전을 다 빼서 창고에 처박아두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발소 소파 앞에 있던 텔레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왜 없앴어요?
-지금은 안 보는 게 건강상 좋아. 말만하면 거짓말이야.
꼭 볼 건 세계문화유산기행이라는 프로 밖에는 없단다. 다른 건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뉴스도 그렇고 오락프로그램도 그렇고. 경제도 무너지고 안보도 허물어지고 외교마저 파탄이 났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엉뚱한 소리만 한다고 했다. 내 심장에 박힌 남십자성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 누가 알아주겠느냐고 하면서 엄정한 중립에 서야할 방송이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가 좌파 편향방송을 하고 있다면서 텔레비전을 보면 욕부터 나와서 가로 늦게 성질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텔레비전을 치우고 짬이 날 때마다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본다고 했다.
-자! 머리를 감읍시다.
타월로 내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권했다. 남십자성이 어떤 별일까? 심히 궁금했다. 아저씨의 심장에 박혔다는 남십자성에 취해 있는 사이 이발이 끝났다. 결혼식에 혼주로 서야겠다고 했으니 목덜미와 귓불까지 알뜰히, 깔끔하게 면도를 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다. 머리를 감으려고 자리를 옮기는데 대머리아저씨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요새는 편의점도 믿을 게 못 돼. 툭하면 문을 닫으니 저 위에 아파트단지까지 갔다가 왔네.
-최저임금을 갑작스레 올려 법으로 정했으니 알바를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볼일이 생기면 닫을 닫는 거지.
머리에 샴푸를 칠하며 이발소 아저씨가 되받았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머리를 감겨주며 아저씨 둘은 한참이나 현 정권에 대해서 험담을 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요지는 민생이 어렵다는 거였다. 그 말에는 참견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이발을 마치고 윗도리를 걸치며 이발요금을 내미니 아저씨는 오늘 이발은 딸의 결혼식 부조란다. 결혼식에 이발소 문을 닫고 참석을 해야 마땅하지만 그럴 수는 없고 오늘 이발로 부조를 대신하겠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럴 땐 억지로 돈을 내밀면 그것 또한 실례가 된다.
-이런 부조 처음이네요
고맙다고 하고는 하노이에 가서 남십자성이 어떤 별자리인지 일삼아 찾아보겠노라고 하니 아저씨는 소리쳤다. 허! 거기는 남십자성이 없어. 내가 장담하건데 없다니까. 헛수고 하지 말라니까.
그 말을 들으며 웃어주고는 이발소 문을 나섰다.
아저씨의 심장에 박아둔 남십자성은 어떤 별일까. 그게 몹시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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