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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충절사(忠節祠)제작연도2007-10-30 해제엄흥도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으로 산양면 위만리(渭滿里)에 있는 상의재 건너편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00년 의산서원(義山書院) 자리에 상의재를 건립하면서 또한 별묘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충절사이다. 평면은 전면의 반 칸은 툇간으로 개방하고 내부는 통 칸으로 철하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전면에만 원주를 세웠는데 기둥의 상부는 이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상의재와 더불어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만리(渭滿里)의 영월엄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제목농청정(弄淸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이 정자는 1739년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세우고 이름을 존도서와(尊道書窩)라 하였다. 그러나 1808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존도서와라는 편액만 화재를 면하였다. 그 후 1863년에 다시 세우니 지금의 농청정이다. 권상일(1679~1760)은 자가 태중(台仲)이며, 호는 청대이다. 1710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이곳은 특히 채헌(蔡?)이 경영하던 석문구곡(石門九曲) 원림(園林)의 제1곡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 의미가 자못 심장한 곳이다. 정자는 금천(錦川) 수면 위로 곧바로 솟아오른 석벽 옆의 높직한 암반 위에 다시 얇게 석축을 쌓아 고른 평지 위에 올라 앉아 금천의 물줄기를 조망하고 있다.
제목변동식가옥(卞東軾家屋)제작연도2007-10-30 해제문경 변동식 가옥은 산양면 진정1리 118번지에 위치하며, 1934년 변봉규(卞鳳奎)와 그의 아들 변종태(卞鐘泰)와 함께 건립한 전통 한옥 건물이다. 일제강점 말기에 건축된 이 가옥은 전체적으로는 전통 목조 수법에 따르면서 일부에 유리 창문과 좁은 통로, 볼트ㆍ너트 접합 등과 같은 근대건축의 세부 양식을 접목하고 있다. 이 지역의 토착 주거 문화에 근대 양식의 일부를 수용한 주택으로 지역의 역사ㆍ문화 변동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사례로 평가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주변으로 현대식 주택에 둘러싸여 있어 마을 전체가 토속적인 정취를 거의 잃고 있는 점이 아쉽다.
제목월봉정(月峰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영강(潁江)을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영순면(永順面) 김용리(金龍里)에 위치한 정자이다. 월봉(月峯) 고인계(高仁繼)가 인조(仁祖)가 개옥(開獄)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이후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71년 주손인 택룡(宅龍)이 중건한 것이다. 정자 주위에는 방형 흙과 돌로 쌓은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전면에 두 칸 규모의 대문채와 왼쪽에 협문을 설치하였다. 경사진 곳에 위치하므로 전면 주의 하부에는 하층 주를 세워 전면의 툇간을 누마루로 이루게 하였다.
제목무림정사(茂林精舍)제작연도2007-10-30 해제영순면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사근리(沙斤里) 무림동(茂林洞)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도로가 나온다. 이 정사는 1590년경 북헌(北軒) 신섬(申暹)이 세웠으나 임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 하지만 1939년 후손들이 무림동의 남산 산허리에 다시 세우고 무림정사라 편액하였다. 경사진 대지 위에 건립하여 앞면의 원주 하부에 팔각형의 하층 기둥을 세워 전면의 툇간을 누마루로 이루게 하였다. 평면은 어간의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한 칸씩을 준 형태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으며, 툇간 주위에는 계자각을 둘렀다.
제목청산재(靑山齋)제작연도2007-10-30 해제청산재는 영순면 의곡리(蟻谷里)에 위치하며, 문화재 자료 제483호(2005년 6월 20일 지정)로 지정되었다.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의 재사(齋舍)인 이곳은 조선 전기 외손봉사(外孫奉祀)의 좋은 예로써 문화적 의미가 있다. 청산(靑山)이라 이름 한 것은 선생 자신이 지은 만사(輓詞) 중에 있는 청산재상(靑山在上)을 사용하였으며,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400여 년 전에 외손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창건하였다. 그 평면 구성은 재사와 재(齋)ㆍ정(亭)ㆍ당(堂)ㆍ정사(精舍)의 유형 중에서 가장 앞선 형태에 속하며, 기능상으로 정자 역할을 겸한 재사이다. 건축 연대를 18세기 이전으로 올려볼 수 있는 평면 형식과 고식의 창호 중간에 기둥을 세워 창문이 두 개처럼 보이게 한 영쌍창(楹雙窓) 등의 건축 수법이 남아 있다. 따라서 지방 사림과 사대부 건축의 유형과 양식 편년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제목홍귀달신도비(洪貴達神道碑)제작연도2007-10-30 해제문경시 영순면 율곡리 산5에 위치하고, 영순면에서 풍양면으로 가는 길가에 있으며, 시?도 유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연산군 때 문신인 홍귀달(1438∼1504)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는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홍귀달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왕에게 잘못된 정치를 고치도록 간언하다 낮은 벼슬로 좌천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경원 지역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단천 지역에서 교살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그의 명예가 회복되어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숙종 때 ‘문광’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서 읽기 힘든 상태이나, 다행히도『부림홍씨 세덕록』에 그 원문이 실려 있다. 1535년(중종 30)에 세운 비로, 대제학을 지낸 남곤이 글을 짓고, 아들인 홍언국이 글씨를 썼다.
제목백석정(白石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영순면 이목리 백포동에 위치하며, 백석 강제(白石姜霽, 1549~1606)가 관직에서 물러난 1600년경 영강과 내성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곳에 정자를 세우고 후생을 양성하다, 그의 사위인 종사랑 능성 구선윤(具善胤)에게 전하였다. 그 뒤로 세월이 흘러 정자가 퇴락하니 외현손인 원지재(遠志齋) 구세영(具世英)이 다시 세웠다. 정자의 주위로는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왼쪽 담장 사이에 좁은 문을 설치하여 출입하게 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전후좌우 사방으로 각기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둘러 온돌방을 둘러싸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제목이강년생가(李康秊生家)제작연도2007-10-30 해제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22인 중 한 명인 의병장(義兵長) 이강년(1858~1908)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일제가 방화 전소한 것을 1995년 ㄱ자형 초가 목조로 복원하였다. 가은읍(加恩邑)에서 괴산군(槐山郡)을 연결하는 922번 지방도를 가다보면 가은읍에 자리한 석탄박물관을 지나 둔덕산(屯德山)을 마주하여 선유동(仙遊洞)계곡으로 이어지는 완장리에 이르면 복원된 이강년생가가 보인다. 이 곳 완장리는 경관이 수려하고 전국의 선유동계곡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다. 또한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학천정(鶴泉亭)과 칠우정(七愚亭)이 있으며, 가는 길에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岩寺)가 있다.
제목학천정(鶴泉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학천정은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용추동(龍湫洞)에 둔산정사(屯山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1906년 도암의 유풍을 기려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정자를 세운 후 오른쪽에 도암의 영정을 봉안한 도암영각(陶菴影閣)을 세웠다. 문경시 가은읍을 거쳐 불한령(弗寒嶺)을 넘어 충북 괴산군 화양동(華陽洞)으로 연결되는 922번 지방도를 따라 선유구곡 중 구곡인 옥석대(玉?臺)에 위치한다. 가은읍(加恩邑)에서 학천정으로 가는 도중에 석탄박물관과 드라마 <연개소문> 촬영지, 이강년기념관과 생가터,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岩寺) 등의 명소가 있다.
제목옥봉서당(玉峰書堂)제작연도2007-10-30 해제가은읍에서 901번 지방도를 따라 농암면 쪽으로 가는 초입에서 오른쪽으로 옥천사의 표지판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오르면 옥녀봉의 경사진 산허리에 남향으로 자리한 옥봉서당이 눈에 들어온다.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웠으며, 주위는 네모난 토석 담장으로 둘렀다. 한말 의병장인 이강년이 어릴 적에 수학하던 곳이며, 후에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본 서당은 중건 당시 작천ㆍ갈전ㆍ왕릉에 사는 서인 계통의 선비들이 모여 후학 양성하기 위하여 서당을 열어 극산(?山) 김만진(金萬鎭), 석하(石下) 김상보(金商輔) 등의 석학을 배출하였다.
제목상강정(上江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가은읍 전곡리(前谷里) 마을 오른쪽 산자락에 위치하며, 소양서원이 있는 마을의 끝자락에서 산의 돌로 된 계단을 오르면 평산인(平山人) 신숙빈(申淑彬)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가 보인다. 1890년에 중수하였으나, 1996년에는 도로 확장 공사를 하여 현 위치로 옮겨서 지었다. 정자는 전면에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도로변의 높은 단애(斷崖)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정자의 입구에 신숙빈의 업을 기려 세운 비가 있다. 정자의 오른쪽 전면에는 최씨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전곡리의 소양마을은 신숙빈이 무오사화(戊午士禍) 후에 이거하면서 형성된 곳이다. 근처에는 소양서원과 영류정(映流亭) 등의 문화 유적이 있다.
제목영류정(映流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가은읍 전곡리 마을 중간쯤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뒷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위치한다.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으나 파방되자, 물러나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만 정진한 인백당(忍百堂) 김낙춘(金樂春)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이다. 오른쪽 뒤편에는 존승재(尊承齋)가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 좌우에 관리사를 두었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2층 누각식 건물이다. 존승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소양서원과 담 하나를 두고 이웃하며, 마을을 벗어난 산자락에 상강정이 있다.
제목소양서원(瀟陽書院)제작연도2007-10-30 해제소양서원은 가은읍 전곡리 마을 중간쯤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뒷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위치하며, 강학과 제향 공간이 각기 별도의 곽을 이루며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 당시 사당만 철거되고 강당과 동재(東齋)는 보존되었으며 강당은 당시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1712년에 창건하였다가 1745년에 훼철된 후 1801년에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1871년 훼철된 것을 1990년에 복원한 것이다, 강당의 오른쪽 뒤편에는 동재(東齋)를 세웠고 마당의 뒤쪽에는 내삼문과 사당으로 이루어진 묘의 영역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제목선유구곡(仙遊九曲)제작연도2007-10-30 해제선유구곡(仙遊九曲) 원림(園林)은 둔덕산(屯德山, 969m)에서 발원하여 흘러 내려오는 맑은 시내를 따라서 약 1.8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선유구곡의 원림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신선이 노닐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원림이다. 굽이마다 아름드리 노송과 함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고 비경이 숨어 있어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선유동(仙遊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예부터 시인 묵객의 발길이 잦은 곳으로 특히 고운 최치원, 우복 정경세, 도암 이재, 손재 남한조, 병옹 신필정 등이 즐겨 찾아 자취를 남겼다. 선유구곡 원림을 경영한 유학자들은 아홉 굽이를 오르내리며 각 굽이의 특징에 따라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제1곡은 옥하대(玉霞臺), 제2곡은 영사석(靈?石), 제3곡은 활청담(活淸潭), 제4곡은 세심대(洗心臺), 제5곡은 관란담(觀爛潭), 제6곡은 탁청대(濯淸臺), 제7곡은 영귀암(詠歸岩), 제8곡은 난생뢰(鸞笙瀨), 제9곡은 옥석대(玉?臺)이다.
제목병천정사(甁泉精舍)제작연도2007-10-30 해제쌍룡구곡(雙龍九曲) 원림의 제6곡이 안도석(安道石)이다. 주변은 경치가 매우 좋아 지금은 유원지가 되었는데, 지난날 쌍룡구곡을 경영한 민우식도 이 굽이에 이르러 편안하게 쉬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펼쳐진 넓은 못은 절경을 이뤄서 많은 사람이 주말이면 찾아와 휴식하는 장소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쌍룡구곡 제6곡인 안도석을 지나 2km 정도 올라가면 병천정사를 만날 수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손자인 송명흠이 강론하던 정자로 일본인에 의해 훼손된 것을 100 여년 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제목봉생정(鳳笙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점촌(店村)에서 문경 방향으로 진남휴게소를 지나면, 영강(潁江)을 따라 가은읍으로 가는 길에 황담요가 있는 봉생 마을의 산꼭대기에 봉생정이 위치하고 있다. 높은 곳에 자리하여 영강의 굽이치는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처음 건립 당시에는 앞에 용소(龍沼)가 있어 뱃놀이를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서애 류성룡이 쉬어가던 곳에 류성룡의 문인인 정경세가 세운 정자로, 1844년에 그 덕을 추모하여 향내 6문 중(풍산류씨(豊山柳氏), 진성이씨(眞城李氏), 평산신씨(平山申氏), 순천김씨(順天金氏), 경주정씨(慶州鄭氏), 인천채씨(仁川蔡氏))이 수계하여 복원하였다. 주변의 명소로는 고모산성(姑母山城)과 수려한 경관으로 영남 제일경(嶺南第一景)이라 불리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이 있다.
제목영고서재,만산재(潁皐書齋,晩山齋)제작연도2007-10-30 해제존양문(存養門)이라 편액한 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영고사(潁皐祠)와 영고서재(潁皐書齋)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醴泉)·풍기(豊基) 군수를 역임하고, 광해(光海)의 정란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며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한 곳이다. 영고서재는 태촌 고상안이 만년에 은거하던 곳에 건립한 서재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1845년에 중건되었다. 영고사는 고상안과 그의 손자인 낭옹(浪翁) 고세장(高世章)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한 묘실로 1868년에 훼철된 것을 1992년에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제목죽림정(竹林亭)제작연도2007-10-30 해제죽림정은 행정구역상 문경시 호계면 우로2리에 위치해 있다. 문경읍으로 가는 옛길로 영강 둑길을 달리게 되는 국도 34번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5여 분을 달리다 둑길이 끝날 즈음에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 호계이며, 호계를 바로 지나면서 나타나는 마을이 곧 우로리이다. 이곳은 또 특별히 주진(舟津) 또는 뱃나들이라 하는 곳으로 그 이름처럼 조그마한 강나루를 형성한 곳이었다. 강물에 연접하여 아담한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며 앉아 있고, 그 아래 배가 드나들던 나루 역할을 하던 곳이며, 바로 옆으로 죽림정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현재 현지에 살고 있는 청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곳으로 세상의 분화를 피하여 이곳에 우거한 죽림재(竹林齋) 정방시(鄭邦時) 선생을 추모하려고 세운 정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