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트레킹
►트레킹 일자 : 2022. 01. 13. (목)
►방문지 : 관촉사. 탑정호. 황산벌 전적지
►날씨 : 다소 쌀쌀한 겨울날씨
(정읍.태인→눈보라, 전주.논산→맑은날씨)
▶관촉사
►관촉사는 고려 우왕 때(1386년)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14년에 중수되었고,
다시 현종 15년에 개수되었다.
관촉사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 은진미륵으로
유명하다.
►국보 제323호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미륵불이며 높이가
18.12m 석조불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한다.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글인
「용화회소(龍華會䟽)」와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등에 이 석불입상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하였으며,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의 솜씨를 빌려 탄생한 작품이다.
석불입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 불상의 머리에 얹는 관)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며, 불상의 재료인
압도적인 크기의 화강암에서 느껴지는
육중함은 고려의 권위와 상징을 보여준다.
▶탑정호
►탑정호는 논산 8경중 제2경으로 충남에서
두번째로 넓은 호수로, 대둔산의 물줄기를
담아내는 탑정호는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감상할 수 있고, 각종
수상 레포츠도 즐길 수 있다.
탑정호는
일제 강점기때 인공으로 건설 되었으며
최대 3천만 여 톤의 담수를 저장할 수 있으며
물이 맑고 깨끗하여 잉어, 쏘가리 등
담수어족이 풍부하다.
낚시는 물론 윈드서핑과 수상스키 등
수상 레포츠를 즐기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탑정호 출렁다리는 길이 600m 폭2.2m로
2020년 완공된 동양 최대라고 한다.
완공후 코로나19로 개방을 미루다가
2021년 11월 개통 하였다
탑정호 출렁다리 개방시간은
09시~17:40분이며 매주 수요일은 휴무다
야간에는 2만여 개의 발광다이오드(LED)로
이어진 미디어파사드(건물 외벽을 스크린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영상을 투사하는 것)로
야경이 장관을 이룬다
▶황산벌 전투
660년 음력 7월 9일 ~ 10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황산벌에서 벌어진
백제와 신라 간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나당 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경과와 결과
660년 3월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1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호응하여 신라 무열왕은 그해 5월에
김유신 등의 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머물렀다. 그리고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다.
이때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합세하여 공격할 계획을 정했다.
▻태자가 돌아오자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 흠춘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향하게 했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백제 조정에서는 방비책을
강구하던 중 당군이 백강(지금의 금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지금의 충남 대덕)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흥수의 견해를 묵살했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백강에 상륙한 당군에게
대패했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진수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 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
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