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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소시집
테마 : 왜, 삐딱하게 보이는지(TV로 읽는 세상이야기)
공염불(空念佛)외 9편
이재부
■ e-mail : leejbbu7418@hanmail.net
2. 작품
공염불(空念佛)
칭찬하는 말이 듣고 싶다
특권에 매달린 설중(雪中) 홍신(紅枾)가
언론이 쪼아대는 까치밥인가
깍-깍깍 허공에 날리는 공염불 소리
「후원금 주머니에 출판할 원고
호통 치는 반말 사전
철면피 거울에 비치는 권리 목록
혈세 퍼가는 깨진 항아리
교언영색의 득표 전략서
상정된 법을 메고만 다니는 긴- 고무질빵
막말싸움판 전투 어록
시위 천막의 선동 피켓
대통령 흔들어 돌리는 어처구니
시위현장에 야전 방석
놀고도 돈 타는 국國해(害) 통장
권세의 무기 금빛 휘장……」
TV를 보면서 연상되는
의원님들의 상비품이다.
원성의 소리
성토의 내용이 경전인데도
입법 법당의 금빛 불상
염불소리엔 관심이 없다
국민의 원성이 공염불이면
공약의 큰소리도 공염불인데.
말言 춤舞
말 말 말, 말이 세상을 흔든다
일침(一針), 추측(推測), 왜곡(歪曲), 침소봉대(針小棒大)
언론사마다 야단법석이다.
몇 번을 씹어야 삼킬 수 있는지
이 방송 저 방송 찾는 논객
귀가 얼얼하도록 씹어 댄다.
흔들다 흔들리는 말 많은 세상
그 사람, 그 말이, 그 말인데도
방송사마다 경말장(競言場)이다.
두드리고 패는 말 몽둥이가
광고료를 잡으려하는지
사이사이 되풀이 언어
여론몰이 말言 춤舞만 춘다.
그물질
그물질이 다양해졌다
고기그물, 새그물, 토끼그물, 뱀그물…….
그뿐인가
기업인의 돈 그물
정치인의 표 그물
연예인의 인기 그물 등 등 등
서로 그물질 하며 사는 세상
최후의 그물질이 돈이라고
공존의 법칙을 지킨다고
그물코 조정이 알맞다고
과한 욕심의 싹쓸이 그물질
돈보다 중한 것도 놓친다고
새우부터 고래까지 다
잡는 힘 있는 그물질
서민의 몫도 쓸려 간다고
불만의 원성을 듣게 된다고
얌체의 낙인을 받게 된다고
자기만 생각하는 돈 그물질
돈으로 돈그물 치는 세상
선행의 그물도 있기는 하다고
돈에 끌리는 세상사가
돈 그물에 뒤엉켰다고
둥둥 떠가는 돈 구름이
소나기 한 줄금 쏟아 부면
홍익(弘益)의 무지개 걸쳐질까
그물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생
가져갈 것은 하나뿐인데.
동절기(冬節期)
겨울 벌에 서 있는 나목
할미 잃은 할아비 같다
떨어진 낙엽의 자리엔
눈 내려 쌓이는데
별빛도 달빛도 헤아리며
그 누구를 기다리나
푸르고 푸르던 장대한 고목
일월성신의 정자나무를
동절기인데 왜, 아직도
“자르지 않느냐”는
청맹질타에 용맹 대답
신음하던 동절기에 웃음치료사
노인 폄하 발언이 아니라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시조창으로 들어주실까
백발노인들 하얀 언어
꼬이고 꼬인 굽은 웃음이
정치판을 벌리고 있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
춘추전국을 꿈꾸는지
물고 늘어지는 반란의 언어
막말 혀끝에 칼을 달고
국운의 심장을 찔러댄다
국민을 담보로 핑계 대며
당쟁 전국(戰局)을 펼쳐놓고
젊었다가 늙는 임기 내내
결과 없는 쌈판인데
우국지사 논객들은
왁자한 TV속에서
난중일기만 쓰고 있네.
틈새 말
이쪽인지 저쪽인지 확실하게 말하라
틈새에 낀 음식물
이도 잇몸도 상하게 한다
욱신욱신 쑤셔대는 통증
저 삐딱한 언어의 쐐기질
그 부스러기
씹고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이념논쟁 틈새 말들
한 마음 될까 총질을 하나
설화(舌禍) 전쟁 틈새 언어
몽중 잠꼬대 혼자 말이면
잠 깨우면 될 터인데
쾌도난마 칼이 무디니
분단 70년 고희를 맞도록
틈새의 말을 자르지 못하네.
물 비탈
나
너
함께 사는 우리나라
한
마음 된
생각의 수평선
남
북
통일이 대박인데
왜?
자꾸
기우리려하는가
통일
항로
마음의 바다엔
물
비탈이
풍파가 된다
마음의 바다 한마음 수평선 통일의 태양은 거기서 뜨는데.
억새야
벌초도 하지 않은 묵은 무덤에
환생한 듯 번성한 무리 진 억새
사랑하다 버려진
슬픈 전생을
원망하며 사느냐
속 터는 비명
무정한 겨울바람 부여잡고서
몽두난발 흩날리는 굽은 흐느낌
꿈꾸다 돌아가는
짧은 한세상
흔들고 흔들리며
가는 바람길
혈연의 인연 끊고 막가는 후손
버려진 무덤에서 우는 억새야.
뻔뻔한 놈
그렇게 좋아서
입 맞추고 빨아대더니
숨이 멎은 듯
깊이깊이 집어넣더니
세상을 혼자서 다 가진 듯
무아의 사랑에 취해있더니
다 끝냈다고 동댕이쳐!
네사랑 네 혈흔을
무참하게 마구 버릴 일 아니다
발가벗은 뻔뻔한 양심
애연의 화신, 네 사랑을
값 올렸다 불평하면서
행인 대로에 팽개치니
꽁초 하나도 제대로
버리지 못 하는
이 뻔뻔한 놈아!
세상이 다 쓰레기통이냐.
계산대와 영수증
양심의 입구에
염치의 계산대 놓고
행동의 영수증 받아야하는데
난장판 세상이라고 떠들어 댄다
더하기를 하지 않는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빼기를 하지 않는 호수는
넘치거나 썩는다고
더하며 빼고, 빼고 더하며
나누고 곱하는 세상의 순리
행동의 영수증, 인륜의 탑을
쌓고 있는가, 헐고 있나
인생길 결산을 증빙하는 계산대가
마음에 있는 것을 모르고 사나
“관피아” “정피아” “법피아”라는 새 낱말
비행의 고리는 누가 끊는지
교도소 도끼질 형벌일까
양심의 계산대와 선악의 영수증
이름의 탑신에 각인된 비명(碑銘)
대대로 회자되는 업보인 것을
죄악의 백비 신을 신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3.■ 시작노트
왜, 삐딱하게 보이는지
(TV로 읽는 세상이야기)
1. 노트를 열면서
내 마음에 무엇을 채우며 살았는지, 자문자답에 후회가 반이다. 마음 밭을 깊이갈이하며 서정(抒情)의 꽃을 피우려했던가. 양심과 욕심 사이사이에 시심을 채우며 아름답게 살려했는가. 흘러간 시간 자책의 골에 시심의 새싹이 돋아날까. 울퉁불퉁 묵정밭에 무심한 들꽃이 시혼(詩魂)이 될까. 석양의 혼잣말을 무심결에 중얼거린다.
경쟁하며 살던 인생의 끝자락에 꽃을 심어 가꾸려하지만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가. 시를 공부하며 시작(詩作)의 정심(正心)을 먹으려 해도 심정의 필봉이 말을 듣지 않는다. 왜, 세상이 삐딱하게 보이는지. 흐린 안목에 때 묻은 마음, 세심(洗心)의 심정으로 시정(詩情)을 찾는데, 시의 본향(本鄕)은 먼 강 건너 마을이다. 도강(渡江)을 꿈꾸며 선정(禪定)에 들지만 기우는 해는 벌써 일몰을 알리는 노을이 곱다.
명창정궤(明窓淨几)의 깨끗한 마음이 글 속에 깃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마음을 다스릴 오늘과 연결되는 내일이 있다는 꿈속에서 기원하는 소망을 늘어놓는다. 내 기도를 내가 들어주는 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세월에 굳어버린 고집을 꺾고, 바르게 보는 혜안을 주소서. 선악을 판단하여 정의 편에 서도록 용기를 주소서. 나이를 핑계로 편향되지 않도록 경계해 주시고, 선하게 사는 방편이 되는 시를 쓰도록 시심을 열어주소서. 깊이 생각하고 핵심을 찾아 작게 말하는 길을 찾아주소서. 긴 말, 화려함에 유혹되지 않는 의지를 주시고, 짜증이 나더라도 끝까지 듣고 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인내를 주소서. 노욕에 시달려 고정된 관념을 허물 수 있는 결의에 찬 청명의 길을 주소서…….」
기도의 주문은 평원을 달리고, 욕망은 비탈길에서 힘들어하니 균형이 무너져 세상이 삐딱하게 보이나보다. 길게 늘어선 어제의 경험이 반사하는 오늘의 영상(映像)들이 환하게 보이지 않는다. 많이도 기울었는가. 오늘의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따로 노는 노안(老眼)의 고독을 어찌하리. 뒤쳐서 바라보는 원시(遠視)의 세상이여.
2. TV앞에서
세상 이야기를 TV에서 읽는다. 기도하던 마음은 잠시 잠깐이고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이유가 또 있나보다. 부지런히 자아를 단속하며 살아도 희수(喜壽)의 나이가 되면 광맥이 끊긴 폐광촌 기분을 억제 할 수가 없다. 방향을 잃은 바람 소리에 지조 없이 쓸리는가. 폐광촌에 폐석같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안거의 유혹에 안식을 찾나. 환생을 꿈꾸지도 못하면서, 4령을 지낸 누에처럼 스스로를 가두는 고치를 지으며 내 방향을 잃었나보다. 방향을 모르고 만든 고치가 실로 풀려나와 비단의 직조로 거듭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늙을수록 생활 범위가 축소지향으로 좁아진다. 나이를 잊고 건강을 과시하며 활발한 활동을 한다면 자랑이 될까. 옥조이는 세월의 힘을 벗어나는 예외는 없다고 한다. 생명의 유한을 누가 책하리오. TV, 컴퓨터,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가 벗이 되고, 은연중에 대인(對人) 관계의 벽을 쌓는 사회현상은 나만의 편견은 아닌 것 같다. 세상은 과학에 의존해 조급해지고 또 다른 곳에서 정좌하니 일상 소식, 변하는 세상정보를 TV를 보며 얻게 된다. 세상소식과 인생의 담론을 화면에서 읽어내니 사유(思惟)의 심정(審廷)도 거기에 있으리.
방송 채널이 늘어나고, 밤낮이 없이 방영하는 덕분에 편협할지는 모르지만 세상구경이 수월하다. 희비애락의 감성의 시발도 시청 소감에 종속된다. 방송이 다양해지고 기술이 고도화되어 선택의 범위도 넓어졌다. 책 같이 반복하기는 어렵지만 재방송도 다시보고, 그 방송이 그 방송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 다시 읽기는 어렵지 않다. 채널을 돌리며 정독하고 감상문 쓰기도 재미있다. 세상에 대한 관심, 시청취향에 따라 마음 밭에서 돌을 캐내며 시정의 씨를 심는 중이다. 향기 내며, 예쁜 시의 꽃으로 가꿀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마르는 잎 시드는 꽃대에 개화가 될까 근심중이다.
시대상(時代相)을 방영하는 방송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색안경으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교언영색의 아첨을 떨 필요는 없으리라. 방송을 시청하면서 내 마음이 반사하는 생각을 테마로 묶어서 발표하는 졸문이 시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함을 고백하면서 염려의 마음으로 사족을 단다.
3. 시작노트
성실해야 나를 키우고, 정직해야 부끄럽지 않으며, 정의 편에 서야 자기이름에 때를 묻히지 않는 다는 가르침을 수 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만사를 꼭 그렇게 실행하지 못하였다. 시를 짓는 마음도 그러하다. 세상과 접하는 시적 감정이 정곡의 핵심을 들어내지 못했다. 아름다운 언어를 찾아야하는데 내용도 없는 감정의 표상을 늘어놓았다. 흔들리는 마음이 평온을 찾지 못하고 감정의 요철(凹凸)이 시라는 이름으로 허상이 만들어진다. 경험 부족이요, 나태함에 소치이리라.
시제 “공염불(空念佛)”은 이 방송, 저 방송을 시청하면서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생각의 표상이다. 칭찬의 말을 듣지 못한 안타까움이다. 애국의 길을 소원하는 기도의 내부다. 국태민안을 바라는 국민의 구호요, 내 마음의 기원문이다. 방송인이 표출하는 언어의 색깔을 졸문으로 스케치한 복사분이지만 시정의 칼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제는 과거로 지나가고 오늘은 많이 달라졌으리라. 애국일심의 국회가 되기를 기원하는 시혼이다.
“말言 춤舞”은 경쟁하는 언론, 앞서려는 보도, 일침을 가하는 추측, 반복되는 허실, 법석대는 상황기록의 일부이다. 말 춤을 함께 추는 춤꾼들의 희비애락의 표정을 다 담지 못하는 무딘 표현력을 자책한다. 과하고 부족함은 세상만사에 깃들이어 있으니 언론만 탓 할 일은 아니지만 요란함은 사실이다. 춤추는 비판의 내면에서 억울한 토혈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시제 “그물질”은 인생살이를 그물질로 보는 것은 좁은 생각의 소치이지만 자유경쟁의 논리 앞에 패자의 아우성이 크게 들림도 사실이다. 삶의 영역 싸움은 항상 강자의 차지로 돌아감을 비웃음으로 귀결시켰다. 그늘진 곳의 소묘(素描)이며 아름다운 세상의 도래를 바라는 기원문도 시(詩)가 되는지 뭇고 싶었다.
“동절기”는 방송을 타며 폄하의 여론으로 밀려간 섭섭함의 고백이다. 무심히 던지는 돌에 다치는 미물을 없을까. 인생의 동절기 혹한의 시련은 예외 없이 다가올 텐데. 방송을 타는 정치발언이 굽은 웃음판을 벌린다는 쓸쓸한 내용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틈새 말”은 염려스러운 정치 현실이요, 사회 현실을 우국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찍은 모퉁이 사진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우리나라 국민이다. 나라꽃 무궁화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벌이요 나비형국이다. 우리는 모두 태극기를 휘날리는 바람이다. 애국가를 함께 부르는 합창단이다. 모양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나라를 사랑해야할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이다. 왜 이탈을 꿈꾸는가.
“물 비탈”은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의 전시장이라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지켜야한다. 국론통일이 선결되어야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다. 신념의 편편 조각을 통일에 바다 한마음수평선에 형상화 하고 싶었다. 한 마음이 큰 힘을 내는 통일 염원의 전제가 아닐는지요.
“억새야”는 설 연휴에 공항이 만원이라는 방송을 듣고 성묘 가서 보고 온 감상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을 방문하며 부모님과 집안 어른을 찾아뵙고, 조상을 찾아 새해인사를 들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생각도 늘어간다는 방송이다. 돌보지 않는 조상의 묘에서 억새를 재조명한 노인의 소회(所懷)이다. 급변하는 사회에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높이 쓴 봉분에서 바람 타는 억새는 쓸쓸하게 보였다.
“뻔뻔한 놈”은 내 불만의 표시다. 집 앞 도로에 차를 세운다고 시비를 걸어 본 일은 없다. 차를 끌고 간 후에 보면 불도 끄지 않은 꽁초도 있다. 묵묵히 끄고 쓸면 되지만 “놈”자의 거친 말이 저절로 나온다.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는 불만이다.
마지막 시제“계산대와 영수증”은 9편의 방송 시청 종합 소감이다. 새로 생기는 범죄 낱말을 생각하면서 양심의 가치를 들어내고 싶었다. 리모컨 켰다 끄는 한 살이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없을까. 구름길로 왔다가 소나기로 살다간 무지개 전기가 아름답지 않던가. 강으로 흐르는가, 호수에 고였다가 기화(氣化) 승천(昇天)하는가. 마음 길 방향지시 화살표는 바라본 그 마음에 있지 않을까. 상처 난 낱말들을 곱게 제자리를 찾아 정돈하지 못 한 졸문이라 내 놓기를 망설였다. TV영상에 흔들렸던 마음의 잔영이 세상을 바로 보는 내일로 연장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