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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19일(연중 제16주일) 쉬고 나면 보이리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을 볼모로 사람들을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사와 제물 봉헌을 담당하는 직업적 사제들이 생기면서 시작된 탈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인과응보라는 우리 삶의 질서를 적용하여,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물 봉헌에는 다다익선이라는 우리 욕심의 질서를 적용하여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이 좋아 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도, 봉헌을 못해도, 하느님은 사랑한다네 예수님이 열어 놓은 시야에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만 보이는 시야를 벗어나 예수님이 열어 놓은 시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쉬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수고하며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11,28) 예수님의 가르침은 욕망과 성취욕에서 우리를 벗어나 쉬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우리를 눈뜨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알면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나 한 사람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웃을 위해 주며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할 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서(8,31-32)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가끔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믿는 우리들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제인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무작정 가졌던 첫 마음부터 시작하여 신학생 시절을 거치고 사제가 되어 지금까지 살면서 내 자신과 신자들에게 자주 물어보곤 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고민은 질문이며 동시에 신앙인의 신원을 밝혀 주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파견과 귀환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런 의미로 들립니다. 믿음은 삶으로 살아낼 때 본연의 가치를 지닙니다. 야고보 서간에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하며 주님께 대한 믿음이 온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임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믿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증거 할 때, 그 믿음은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실천이 믿음을 보여 주는 것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죽은 믿음은 더 이상 참다운 믿음이나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해 내가 지금 믿고 따르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고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같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이유는 자신이 믿는 분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은 신앙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삶의 원천이 무엇이냐 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외치는 것을 인본주의라 하고, 공동선을 찾는 것은 정의사회 실현이라 하며, 상호 보완을 해 나가는 것을 상생의 질서라 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함께 나아가는 것을 연대라고 합니다. 존엄성, 정의, 공동선, 보조성의 원리, 연대 등은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항상 정치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들입니다. 즉, 믿음을 가진 이들만 직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일상적 삶입니다. 이 시대, 이 세상, 좁게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는 생활입니다.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삶의 문제에서 믿는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신앙인의 신원이 결정되고, 내가 믿는 이가 누구인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가?.... 예수님과 친교 때문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원천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과의 친교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모든 일상과 외침과 증거는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투신하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신앙을 가지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창조질서를 되찾기 위한 신앙적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름을 통해 초대교회는 세상에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밝혔고, 복음화의 보편 가치들을 실현해 나갔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그 다름의 원리를 몇 가지로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인간의 존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 일치, 평등에서 모든 인간과 전 인간의 선을 그 으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는 이는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보조성의 원리는 모든 상위 질서가 하위 질서의 사회에 대하여 지원과 증진과 발전의 자세를 갖추어 인간 존엄성의 신장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사회 원리이며 도덕적 덕목인 연대성은 상호 의존과 유대를 확고하게 하여 전적인 무상성, 용서, 화해와 같은 그리스도교 적인 차원을 지닌다.’(간추린 사회교리 참조) 사회교리는 근원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신앙인의 삶이 하느님의 친교에서 비롯되고 하느님과의 친교로 귀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삶과 사회의 쇄신과 변화를 위한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고공에서, 거리에서, 재개발 현장에서, 농촌에서, 광화문광장 등 전국 곳곳에서 시대의 고통에 하느님의 손길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와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그 현장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가끔씩 미사와 기도에 동참할 때면 내 자신에게 매번 질문을 합니다. 거리로 나서 욕을 먹으며 미사를 봉헌하고, 아슬아슬한 굴뚝과 광고판 위의 고공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고,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재개발 현장과 이질감을 가지고 지나치는 무리가 가득한 광화문광장에서 서로 손을 잡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미사에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재와 불의로 인한 아픔과 고통의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믿지 않는 이들과 나는 무엇이 다른지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다릅니까? [생활 속의 복음] 하느님의 목자인 농민 7, 8월이 되면 성당 근처 마을에 있는 우리밀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 종종 점심을 먹습니다. 우리밀 라면과 부추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자연스럽게 농민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은 저와 20년 이상 친구,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 어쩌나] 302. 산에서 살고 싶다는 남편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31> 다양한 모습을 지닌 백성
교육은 관계다
군대 입대하기 전 많은 선배님들이 다 같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군 생활 잘 하려면 정말 군인이 되어라!” 저는 그래서 정말 군인이 되기 위한 마음으로 훈련소에 입소하였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사제 옷을 소포에 쌓아서 넣으라고 하는데, 그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제 잠바가 소포에 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소리 지르는 조교들 앞에서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급기야 한 조교가 저를 불러내더니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한 대 맞으니까 안 들어가던 잠바가 박스에 다 들어갔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논산 훈련소 소대에 배치를 받으니 무섭기로 소문난 조교가 우리 소대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나이도 많고 밖에서 선생님을 하다가 들어온 베테랑이었습니다. 매 취침 전마다 침상에서 머리 박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머리를 박고 잠을 잘 수도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습니다.
이렇게 무섭게 하니 모든 면에서 우리 소대가 단연 돋보였습니다. 저는 그래도 우리를 군인이 되게 하기 위해 고생한다고 믿고 그 조교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한 번은 훈련 중 야삽을 허리띠에 차야 했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허리춤에 찔러 넣었습니다. 이런 것을 놓칠리 없는 조교가 뛰어와 제 야삽을 빼어서 머리에 쓰고 있는 철모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철모는 제 머리 위에서 뺑그르르 한 바퀴 돌았고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소리에 귀가 멍멍해 졌습니다.
본래 훈련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글로 남겨서는 안 되는데 저는 수첩에 이렇게 썼습니다.
“조교가 너무 싫다. 밖에서 만나면... 넌 죽었다.”
이렇게 쓰고 있는데 그 조교가 와서 제 수첩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밤에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매우 우울하고 원망 섞인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너희가 나를 이렇게 나쁘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본인은 상관들이나 다른 조교들에게 인정받는 교육자였습니다. 우리를 눈빛 하나로 통제할 수 있었고 본인도 우리들을 훌륭한 군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자신의 아들이 전국 1등을 하지 못한다고 골프채 등으로 아들을 마구 때려서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여 몇 달 동안 집에 방치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강요로 아들은 서울대에 충분히 들어갈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들 인생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선생님입니다. 꼭 교육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애인 사이에서도 서로 잘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가족에서는 당연하고, 어디에서든 자신이 더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듯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망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상대를 위한다는 가면으로 자신의 만족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만족을 위해 희생되는 피해자들이 되어버립니다. 부모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 분들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 직업까지도 선택해야 하는 아이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EBS 에서 방영되었던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 중 박소형 선생님은 대구의 한 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로서 이 프로에 참가신청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아서 이 프로에 참가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선생님의 수업은 완전히 군대식이었습니다. 전혀 웃지 않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눈동작, 손동작을 하면 아이들이 철저하게 통제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반에 비해서 여러모로 질서 잡히고 조용하고 뛰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선생님께 대한 설문조사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그냥 무서워요, 도깨비 같아요, 호랑이에요. 귀신이에요. 악마에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싫어하는지 몰랐습니다.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비추어지는데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전문가들은 박소형 선생님을 비롯하여 나머지 6명의 선생님들에게 단 한 가지만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육이 곧 관계다.”
좋은 관계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선생님들에게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짐승처럼 훈육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참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춤 잘 추는 곰이나 쇼를 위한 돌고래를 훈련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동물이 먼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은 매우 피곤합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무언가 배우기 위해 사람들은 배를 타고 오는 것보다 먼저 더 빨리 걸어서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앞에 나아온 우리들이 먼저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보인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교육자의 모습이지,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조련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설리번 선생과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헬렌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말하자면 짐승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를 가르치기 위하여 왔던 선생들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그의 상태를 보고서는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러나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집에 처음 도착하던 날, 그 짐승 같은 아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 이후 설리번 선생은 지성을 다한 노력으로 헬렌 켈러에게 수화와 단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 설리번 선생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헬렌은 “선생님이 오시던 날 나를 꼭 안아 주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설리번 선생이 꼭 안아 주던 그 첫날부터 짐승처럼 거칠던 헬렌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길에 침 뱉는 것을 어머니의 단 한 마디에 고쳐졌습니다. 결혼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변하게 하려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스런 사람에게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는 저절로 나에게서 배우게 되고,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행복은 다름이 아닌 제자들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신부님(요셉) 누군가를 따뜻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삽시다.
누군가 이런 하루를 산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새벽 미사에 나왔는데, 신부님이 평소와 달리 1시간 동안 강론을 합니다. 투덜대며 나왔는데, 직장 가는 버스가 오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린 끝에 버스가 오긴 왔지만, 막히는 시간이라 버스는 거북이처럼 더디 이동합니다.
회사에 도착해서 회의를 하려고 회의실로 갔는데, 정해진 시간이 한 참 지나도록 팀장님이 오시지 않아서, 회의는 시작도 못 하고, 직원들은 발만 동동 구릅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 시간이라 동기와 함께, 거리가 먼 맛집을 찾아갔는데, 제때에 회사에 돌아오지 못할까봐, 소화도 제대로 못 시키고 허겁지겁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주문한 물건이 도착할 예정인데, 한참을 기다려도 물건이 오지 않아서, 전화와 인터넷으로 계속 배송상태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칼 퇴근을 하고 친구를 만나려고 했지만, 일의 양을 보니 칼 퇴근은 꿈도 못 꾸게 생겼습니다.
그 누군가가 했을 법한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종일 그 누군가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시계 시간’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누군가는 바쁜 하루를 보내며 끊임없이 시계를 보았을 겁니다. 신부님 강론을 들으면서 계속 시계를 쳐다보았을 거고, 직장에 갈 때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또 어딘 가에 갔다 올 때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시계를 보며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이동하려고 했을 겁니다.
‘시계 시간’은 우리에게 몇 시간 몇 초가 남아 있는 지를 말해 주고,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말하고 듣고 먹고 노래하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잠자고 놀고 머무를 수 있는지를 결정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알게 모르게 ‘시계 시간’에 지배 받고 있습니다. ‘시계 시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서두르란 말이야. 서둘러 결혼하고 직장을 잡고, 빨리 외국 여행을 하고, 어서 책을 읽고 학위를 따란 말이야.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빨리 모든 걸 얻어내야지. ...”】(헨리 나웬의 ’긍휼’ 참조...)
이렇게 시계 시간은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고 연민의 감정이 생길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계 시간에 압박을 받고 지배를 받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못 본 척 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기 보다는 이루어야 할 더 많은 일들을 생각하며 바삐 움직였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도 짧은 시간 동안 복음을 선포하고 많은 사람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으셨을 겁니다. 어떤 날은 밤을 새고 나서, 또 다른 마을로 이동할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군중들을 바라보았을 때, 예수님의 머리에도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할 일들이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선택은 배에서 내리시어 군중을 바라보시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계처럼 바삐 움직이는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더디 가는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이루어야 할 많은 일들에 벅차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따뜻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어떤 유치부 아이가 미사를 마치고 나서, 교리 교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 신부님은 저 많은 돈을 가져가면서, 왜 우리 간식도 안 사줘요?” -김기현 신부님(요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