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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發(발) 금융大亂(대란)이 全(전) 세계로 번져나가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倒産(도산)한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들이 해외에 판매한 惡性(악성)채권과 부실파생상품을 떠맡은 세계 각국의 금융기관들은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다.
월스트리트가 운영한 대형 도박장이 문을 닫자 뒷수습은 미국 정부로 넘어갔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인 이자율 인하 등의 방법을 동원하는 한편, 파산 금융사들의 통·폐합 등 뒤처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베어스턴즈, 리먼브러더스, AIG 등의 망한 투자사나 보험사, 그 회사들을 인수하는 대형 금융기업, 그리고 이번 사태 수습을 맡은 FRB 모두 유대인이 설립했거나 운영하고 있다. 즉, 미국의 금융, 아니 국제금융은 유대인의 專有物(전유물)이라고 할 만큼 이들의 영향력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일부 反(반)유대주의자들은 금번 금융위기는 유대인이 만든 새로운 음모가 아닌가 하는 시각으로 사태를 보고 있다. 이들 음모론자들은 1929년 세계대공황을 국제 유대인 금융세력이 조작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 대공황이 정치·군사·경제면에서 미국의 국제지도국 위상을 가져다 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된 유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이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것을 모르는 현대인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90년대 이후 유대인에 대한 서적이 간간이 나오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서 나온 책을 번역한 것이 많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대체로 유대인에 대해 無知(무지)하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다. 미국의 금융위기, 원유값 폭등, 곡물 품귀, 中東(중동)분쟁 등 국제현안들을 들여다보면 그 배후에는 분명히 유대인이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언론도 책임이 있다. 우리 언론의 外信(외신)보도는 대부분 미국이나 서방의 유대 계열 유력언론사(AP, 로이터 등 통신사)가 제공하는 기사를 그대로 게재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의 외신란은 국내정치나 남북한 관계 기사에 밀려 비중이 낮다. 흡사 한반도를 우주의 중심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새다.
일본은 과거 1980년대 美·日(미·일) 통상마찰 때 미국 유대인에게 데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미국 유대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최근에는 중국도 미국 유대인 단체와 많은 교류를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中·東歐圈(중·동구권) 국가들도 미국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서는 먼저 미국 유대인 사회와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지 않은 숫자의 中南美(중남미), 동구국가들은 아예 駐美(주미)대사관 정무과에 미국 유대인과의 접촉을 담당하는 외교관을 파견하고 있다.
임마누엘, 이스라엘 의용군으로 참전한 유대인
우리는 미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신임 대통령의 측근 실력자를 파악하기 위해 허둥지둥한다. 이번에도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측근을 파악하느라 정치권과 언론이 법석이다.
미국 유대인은 대체로 민주당 성향이 많다. 때문에 민주당 주변에는 항상 많은 유대 인사들이 있다. 이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래의 전통이다. 그렇다고 미국 유대인이 공화당과 소원한 것은 아니다. 부시 행정부에서도 각료급 인사 숫자만 적었을 뿐, 실제로는 아프간·이라크戰(전)을 주도한 세력은 폴 울포위츠를 위시한 유대인 네오콘 세력이었다.
그러나 미국 유대인은 각종 선거에서 공화당보다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민주당 후보를 집중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유일한 예외는 지미 카터다. 카터는 유대인이 싫어하는 중동평화회담 성과에 집착해 이스라엘의 양보를 유도하려고 노력했고, 독실한 남부침례교 신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을 가장 먼저 승인한 트루먼이나 케네디를 승계한 존슨, 그리고 클린턴 시절에는 유대인의 國政(국정)참여가 두드러졌다.
새로 출범하는 오바마 행정부에도 유대인이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비서실장 내정자인 램 이매뉴얼은 1992년 걸프전 때 이스라엘 의용군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는 미국 민주당 내의 대표적인 유대계 인사이다. 오바마의 선거策士(책사)인 유대인 데이비드 악셀로드도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내각에도 적지 않은 유대계 인사의 참여가 예상된다. 우리도 韓美(한미)관계를 공고하게 유지하려면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접촉에 더하여, 미국의 주요 유대계 인사와 인연을 맺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시케나지와 세파르디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왼쪽)와 배우 폴 뉴먼(오른쪽)은 아버지가 유대인인 ‘절반의 유대인’이다. |
유대인 연구를 할 때 항상 벽에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유대인의 正體性(정체성)이다. 즉, 누구를 유대인으로 정의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미국 유대사회 내에서도 가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반적인 원칙은 있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유대교를 신봉하여 정기적으로 시나고그(유대교 교회)에 나간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유대인이다.
절반만 유대인인 경우도 있다. 즉 父系(부계)가 유대인인 경우이다.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 얼마 전에 타계한 배우 폴 뉴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원칙적으로 부계만 유대인인 경우는 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두 사람 경우와 같이 유대교에 충실하고 유대사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 유대인으로 받아들인다.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판단은 랍비(유대교 목회자)의 몫이다.
全 세계 유대인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가 유럽계인 아시케나지이고, 다른 하나는 스페인, 이슬람권, 북아프리카 지중해계인 세파르디이다. 세파르디가 유대인의 원래 인종인 셈族(족)에 속한다면 미국 유대인의 90 %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케나지는 복잡한 민족 배경을 갖고 있다. 아시케나지는 원래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을 지칭하지만, 오늘날의 아시케나지의 多數(다수)는 우크라이나·러시아·폴란드·헝가리 등 중·동구계다.
아시케나지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이 시인하기 싫어하는 오래된 異說(이설)이 존재한다. 헝가리 출신의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는 <제13支派(지파)>, 역사학자 케빈 부룩은 <카자르>라는 책에서 아시케나지는 인종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시케나지의 대부분은 터키계 백인부족의 하나인 카자르(유랑종족이라는 의미)족이 7세기 중엽 동남부 러시아 지역에 세운 카자르 왕국 離散民(이산민)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남부러시아와 중앙아시아 평원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많은 민족과 피가 섞인 카자르족은 검은 머리에 밤색 눈, 붉은 머리에 갈색 눈, 그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들의 인종 모자이크를 형성했다고 한다.
카자르 왕국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페르시아와 슬라브족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주로 했던 상업국이었다. 카자르 국왕 중 하나인 조셉은 항상 자신의 조상이 성경에 나오는 노아라고 믿었다. 그는 카자르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인 시메온 지파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
카자르 왕국은 685년 주변의 적을 모두 물리치고 국가 기반을 충실하게 다진 후 737년에는 도읍을 아틸에 정하고 8세기 후반에는 남쪽은 코카서스산맥, 서쪽은 볼가강 하류, 북쪽은 카스피해, 동쪽은 드네프르강으로 영토를 넓혔다. 전성기의 카자르 왕국은 카자르족 외에 알라니족, 마자르(헝가리)족, 불가르족은 물론, 크림반도의 그리스계 부족까지 통합한 강대한 국가였다.
유럽계 가짜 유대인의 뿌리는 터키 동부에 살았던
악독한 도갈마의 7번째 아들 카자르족의 후손들이다 !
아시케나지는 유대인이 아니라 터키계 카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아서 쾨슬러. |
740년경 유대교에 심취한 불란 왕은 유대교로 개종했다. 이어 신하와 국민들이 국왕의 뒤를 이어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카자르 왕국은 러시아 평원의 유대교 국가가 됐다. 불란 왕이 유대교로 개종한 것은 주변 이슬람국가와 기독교국가들이 서로 자기네 종교를 선택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불란 왕은 기지를 발휘해서 두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이면서 제3의 종교인 유대교를 선택하여 국가의 독자성을 보존하려 했다. 쾨슬러와 부룩은 이것이 바로 ‘제 13 지파’라고 불리는 아시케나지 유대인의 근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카자르 왕국은 9세기부터 國勢(국세)가 기울어 수차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다가 935년 우크라이나의 스비아토슬라브 왕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그 후 몽고족의 침략으로 13세기 이후부터는 카자르 왕국에 대한 후속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카자르 왕국이 망한 후 이산민들은 가까운 우크라이나·러시아를 비롯해 헝가리·폴란드·보헤미아·모라비아(오늘날의 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 등지로 흩어졌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하며 셈족계 세파르디 유대인보다 더 철저하게 신앙을 지켜왔다.
19세기 초 서유럽 전역에는 약 350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1881년에 일어난 제정러시아의 제1차 유대인 박해 당시 중·동유럽의 아시케나지는 650만명에 육박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직전인 1939년의 유럽 유대인 인구는 약 900만을 헤아렸다.
아시케나지 유대인의 뿌리로 알려진 카자르족의 병사. |
이렇게 보면, “아시케나지는 15세기 중엽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된 세파르디가 독일과 동유럽으로 이동한 유대인”이라는 기존의 정설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1492년 스페인서 추방된 유대인은 불과 30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오늘날의 알제리·모로코·튀니지·리비아 등 북아프리카로 옮겨서 정착했다. 네덜란드·독일·프랑스·폴란드로 이주한 세파르디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의 규모는 10만명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유대인의 전통적인 低出産(저출산) 성향을 감안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아시케나지 인구가 1000만명에 육박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쾨슬러와 부룩은 아시케나지가 원래 유대인인 셈족의 후손이 아니고, 종교만 유대교를 선택한 터키계 백인 카자르족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대답하기를 피한다. 만약 자신들이 카자르족의 후손임을 인정한다면 셈족과 가나안에 근거를 둔 유대인의 정통 정체성과 시온주의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대인 문제 거론은 금기
일반적으로 셈족 유대인은 아랍민족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검고 눈이 밤색이다. 코카서스계 인종에서 볼 수 있는 금발이나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이나 프랑스·영국·러시아 등지에 살고 있는 아시케나지 유대인은 외관상 일반 백인과 거의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유대인은 유대인의 정통성을 인종적인 면보다는 종교적인 면에 비중을 두고 있다. 즉, 아버지가 유대인이지만 유대교를 믿지 않으면 유대인이 아니지만, 異邦人(이방인)이라도 유대교로 개종하면 유대인으로 인정한다.
유대인 영화제작자 마이클 토드와 결혼할 때 유대교로 개종한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유대인 극작가인 아서 밀러와 결혼할 때 유대교로 개종한 배우 마릴린 먼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하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영국의 세계적인 첼리스트 자크린 뒤프레, 그리고 최근 미국 백악관 비서실장에 내정된 이매뉴얼 민주당 하원의원과 결혼 직전 유대교로 개종한 에이미 룰 여사 등도 미국 유대인 사회에서는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유대인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서유럽 국가(프랑스, 영국 등)나 미국에서 유대인 문제를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특히 미국은 多(다)민족 국가이므로 少數(소수) 인종이나 소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非(비)지성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그 중에도 특히 유대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유대인에 대해 좋은 이야기, 예를 들면 “유대인은 영리하다”, “유대인은 자선사업에 많이 참여한다” 등 유대인을 칭찬하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유대인은 오랜 박해로 인한 피해의식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남이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유대인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도 ‘무슨 불순한 저의가 있는 것 아닌가’하는 경계심부터 앞세운다.
유대인이 미국을 장악하게 된 과정
미국에서 발간되는 유대인 관련 서적이나 자료들은 대부분 유대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非유대인이 쓴 책은 거의 없다. 反(반)유대주의자들의 책은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트라이앵글, 바이킹 프레스, 하퍼 콜린즈, 사이먼 앤 슈스터, 랜덤 하우스 등 미국 내 주요 출판사나 대형 서점망은 대부분 유대인 소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학자들이 다른 민족이나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미국에서는 비유대인이 유대인 문제를 거론하면 ‘非지성’, 나아가 ‘反유대주의’가 되지만, 유대인 학자가 他(타)민족에 대해 말하면 ‘학문’ 대접을 받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때문에 미국에서 유대인 문제는 公論(공론)에 부쳐지는 적이 없다. 미국이나 서유럽에서는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반유대주의의 古典(고전) <시온장로의정서>(유대인의 세계 정복 음모를 기록한 내용. 유대인들은 이 내용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편집자 주)를 찾아볼 수 없다. 이란 등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 영문판으로 제작된 것이 야시장에 돌아다닐 뿐이다.
미국의 권력구조를 평면도로 보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부, 上院(상원)과 下院(하원)으로 구성된 의회, 연방대법원, CIA 와 FBI 등 정보기관, 언론 그리고 광범위� 경제계와 금융계를 들 수 있다.
650만명에 불과한 유대인이 미국의 정치·경제·금융·교육·문화를 쥐고 흔든다는 견해는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 즉 미국에는 평면 권력 외에 ‘유대 권력’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유대 권력’은 유대인이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직접 참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 각 분야의 권력체계를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여 유대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게 활용하는 데서 나온다. 유대 권력은 공동체의 빈틈없는 결속력·조직력을 극대화하여 얻은 영향력을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특성이 있다.
미국의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유독 미국 유대인이 오늘날과 같은 대성공을 거둔데 대해 많은 사람들은 경탄과 함께 적지 않은 의문을 갖고 있다. 3000만명이 넘는 흑인이나 1700만명의 히스패닉, 그리고 1000만명에 육박하는 아시아계와 비교할 때, 유대인들의 괄목할 만한 성공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유대인은 오랜 기간 유럽 각국에서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는 종교적인 요인과 민족주의적 요인 두 가지로 나뉜다. 때문에 머리 좋고 부지런한 유대인이지만, 유럽에서는 기독교 사회 밑바닥의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마지막 생존수단으로 미국에 건너왔다. 미국은 舊(구)대륙을 등진 신교도들이 건설한 나라로, 건국 이후에는 백인이건 유대인이건 민족적 뿌리와 종교는 일단 접어두고 모두 힘을 합쳐 부강한 나라를 건설했다.
미국은 유대인들이 입고 있는 ‘맞춤 양복’
유대인이 미국의 건국과 발전에 主流(주류)로 끼지는 못했지만, 유럽에 있을 때와는 달리 미국의 발전에 끼친 공헌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는 받을 수 있었다. 미국 유대인은 미국에서마저 자리 잡지 못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이러한 背水陣的(배수진적) 노력이 우수한 잠재력과 합쳐져 큰 힘을 발휘했고, 결과적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 유대인보다 월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미국은 다민족·다문화 국가로 구성원 각자의 민족이나 종교를 부각시키는 것을 금기시하는 나라이다. 미국은 국가주의는 비교적 중시되는 반면, 민족주의는 舊(구)시대의 천박한 가치관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유럽 각국에서 항상 민족주의와 종교적 편견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은 정신적 부담을 덜고 살 수 있었다.
특히 중·동구 유대인 260만명이 미국으로 건너간 20세기 초는 세계가 産業化(산업화)로 옮겨가는 단계였다. 산업사회에 필요한 과학기술·자본·금융 등은 유대인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기에 적합한 분야였다. 20세기 말부터 시작된 정보화도 유대인의 적성과 부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바뀔 때마다 미국 유대인은 순발력 있게 적응하면서, 변화의 선도적 주체로 변신했다. 어찌 보면 ‘미국사회의 발전과정 하나하나가 유대인의 적성에 맞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요인들에 힘입어 미국 유대인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독자적인 ‘유대 권력’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유럽과 같이 오랜 역사적 전통이 없는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명예가 아니라 법과 돈이었다. 돈에 밝고 논리적인 유대인들은 미국 내 금융과 법률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 자연히 유대인은 숫자에 비해 사회적 비중이 높아지고, 작지 않은 영향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은 흡사 유대인을 위한 ‘맞춤 양복’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유대인의 미국 정복
유대인의 미국 집단이민 역사는 대체로 다음 4기로 나눌 수 있다. 1654년 9월 뉴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에 정착한 브라질 출신 마라노(Marano: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23명이 미국에 정착한 최초의 유대인이다.
그 다음이 1840년부터 1885년 사이에 있은 독일 ‘시골 유대인’의 이민이다. 이들 독일 유대인 중에는 바르부르그, 쉬프, 셀리그만, 쿤 뢰브, 골드만 삭스 등 오늘날 미국 금융기업의 先祖(선조)들이 있었다. 독일계 유대인들이 비록 촌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 산업화 단계에 접어든 유럽사회를 목격하고 미국으로 왔기 때문에 경제·금융·상업 분야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미국의 개척 후기와 맞물려 이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미국은 1860년대부터 세계 제1차 대전 직전까지 약 50년간 이민의 문을 크게 열어놓았다. 건국 초기~19세기 중엽 미국 이민이 대체로 개신교도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19세기 중엽 이후의 이민자들의 출신 민족과 종교는 다양했다. 유대인의 제3기 이민이 이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러시아, 중부유럽, 동유럽의 유대인 260만명이 미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폴란드·루마니아 등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포그럼)를 피해서 미국으로 탈출한 사람들로, 이들의 후예가 오늘날 미국 유대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1983년에 나온 영화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보면 이들의 미국 정착 초기의 생활양상이 잘 그려져 있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10여 년간 15만명의 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이것이 유대인의 제4기 미국 이민이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독일·헝가리·이탈리아·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 지식층 유대인들은 미국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학문·과학·기술·문화·예술은 그다지 뿌리가 깊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지식인 유대인은 미국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당시 이주한 유대 지식인들의 직종을 보면 변호사가 900명, 의사가 2000명, 음악가가 1500명, 작가가 1700명, 기타 학자와 교수가 3000명이었다. 그중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1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戰後(전후) 미국은 과학·기술·문화·예술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핵무기 개발사업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원자무기를 완성시킨 두뇌는 거의 전부가 유대인이었다.
미국 4 대 일간지 경영진과 주관하는 필자의 35%가 유대인들이다
미국 유대인은 약 650만명으로 미국 전체인구의 2.2%에 해당된다. 미국 유대인은 뉴욕·뉴저지·플로리다·일리노이·캘리포니아 등 몇개 州(주)에 밀집되어 있다.
미국 유대인은 아시아계 인구 980만보다도 적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인구와는 전혀 무관하다. 미국 유대인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지 않고 백인인구에 포함된다.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한 나라에서 강력한 권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 소수이지만 정예인력인 미국 유대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대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두뇌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간단한 통계를 살펴보자. 노벨상 수상자 중 87명이 미국 유대인이다. 이들은 특히 의학과 물리학 부문에서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다. 1969년에 신설된 노벨경제학상의 경우, 수상자의 3분의 2가 미국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평균적으로 10명 선의 연방 상원의원과 30명 선의 연방 하원의원을 배출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 8년 동안 12명의 유대인이 각료 또는 각료급 공직에 임명됐다. 연방대법관 9명 중 2명이 유대인이다.
미국의 大富豪(대부호) 100명 중 22명이 유대인인데, 이들 대부분은 상위권에 포진하고 있다. 미국 대기업의 CEO 중 17.5 %가 유대인이다.
미국의 4대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전 세계 학생들이 동경하는 아이비리그의 총장 및 교수진의 40%가 유대인이다. 미국 50대 영화사의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캐스팅 담당, 감독 중 60% 가 유대인이다. 뉴욕·워싱턴·시카고·로스앤젤레스 등 대도시에 밀집된 법무법인(로펌)에 종사하는 변호사의 50 % 이상이 유대인이다. 미국인의 15%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데 비해, 유대인의 전문직 종사비율은 40% 수준이다.
스타벅스, 배스킨 라빈스, 던킨 도나츠, 구글, 페이스북까지도 유대인 소유
과거 미국에서 근무할 때 많은 유대인을 만났었다. 이들 대부분은 변호사·대학교수·의사· 기자·회계사·펀드매니저 등의 주로 두뇌를 쓰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들의 대답은 이랬다.
“유대인은 과거 유럽에서 십수 세기에 걸쳐 박해와 추방에 시달렸다. 그러다 보니 한 나라에 정착하면서 오랜 기반을 갖고 할 수 있는 농업 또는 대단위 생산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급 時(시) 몸에 지니고 다른 나라로 이동하여 살아가려면 역시 머리에 넣고 갈 수 있는 전문지식밖에 없었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듯한 답변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유대인을 관찰해보면 이 대답은 정답이 아니다. 유대인은 원래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에 강한 특성을 갖고 있다. 즉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중심이다. 특히 유대인 교육과정의 핵심은 두뇌개발과 실용적인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지혜이다. 반면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대인 운동선수는 극소수이다.
이들은 농촌보다는 도시를 좋아한다. 이들이 종사하는 직종 대부분이 전문직이나 서비스 업종이기 때문이다. 뉴욕시와 인근에 210만명, 로스앤젤레스에 66만명, 마이애미에 33만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 반면에 사우스다코다州(주)에는 35명, 와이오밍州에는 400명, 몬태나州에는 8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다.
자동차·철강 등 대형 산업체에는 유대 자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이들 거대 산업체에 대해 영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유대인은 두 가지의 妙方(묘방)을 갖고 있다.
하나는 勞組(노조)다. 미국 유대인은 노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전국노동연맹(AFL) 은 시가 제조업자 출신인 새뮤얼 곰퍼스라는 영국계 유대인이 창설했다. 두 번째는 유통망이다. 유대인은 곡물 메이저 중 2개社(사), 原油(원유)기업 중 4개사, 식품 메이저 중 3개사를 소유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주요 백화점과 대형 할인매장 체인을 소유하고 있다. 메이시스, 블루밍데일, 니먼 마커스, 파일네스, 엠포리움, 아이 매그닌 등 유명한 미국 백화점이 유대 자본이다. 대형할인매장인 프라이스클럽, 홈 디포 등도 유대인이 설립했다.
커피점 스타벅스와 아이스크림 배스킨 라빈스도 유대인 기업이다. 많은 IT 기업(AT & T, Dell, Oracle, Unisys 등)을 유대인이 설립했다. 대단위 생산시설이 필요치 않으나 가득률이 매우 높은 헬레나 루빈슈타인, 레블론, 에스테 로더, 비달 사순 등 화장품 업체와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렐, GAP 등 패션분야에서도 유대 자본의 참여는 두드러진다.
로스차일드 家門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
유대인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미국 유대인은 돈과 언론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돈과 유대인’하면 연상되는 집안이 있다. 바로 최초로 ‘국제금융자본’이라는 것을 만든 유럽의 로스차일드 家門(가문)이다.
中世(중세) 유럽의 기독교사회에서는 돈을 뀌어주고 이자를 받는 일, 즉 오늘날의 금융에 해당하는 사업을 대단히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떠한 국가나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만들려면 누군가는 돈을 만지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마련이다.
이런 역할을 유대인이 맡게 되었다. 유대인은 원래부터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시키는 理財(이재) 감각이 다른 민족들보다 유난히 뛰어났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세계경제가 본격적인 산업화와 금융자본주의로 재편되자, 돈을 다루는 유대인의 천부적인 재능이 한층 더 빛을 보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始祖(시조)인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 출신이다. 원래 동전과 귀금속 거래를 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아들들을 런던·파리·나폴리·빈 등지로 파견해 주요 유럽국가의 금융계에 뿌리를 내리게 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富(부)를 축적했다. 로스차일드은행은 유럽에서 전쟁이 있을 때마다 交戰(교전) 당사국 양측에 戰費(전비)를 대여해주고 이익을 취했다. 이후 산업혁명 말기,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각국의 철도 부설, 석유·광산개발에 투자해 부를 더욱 늘렸다. 프랑스에 진출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 외에 보르도 포도주 생산에도 투자하여 오늘날 보르도 와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일조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수에즈운하 사업에도 참여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로스차일드의 금융제국은 미국의 무한한 잠재력과 발전가능성을 예측하고 19세기 중엽부터 미국진출을 시도했다. 미국 금융계의 始祖(시조) 격인 바르부르그, 쉬프, 쿤, 뢰브 등 독일계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로스차일드가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파견한 尖兵(첨병)들이었다.
사실 미국을 건국한 청교도들도 돈 문제에 관한 한 유럽인들과 같이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미국의 재정· 금융체계의 확립과 운용은 결국 유대인의 몫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역대 FRB 의장의 절반이 유대인
미국은 임법, 사법, 행정 3권이 다 유대인들의 수하에 있다.
로스차일드 등 유대系 국제금융자본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유대인을 비방하는 만화. |
미국에서는 건국 이래 화폐발행과 중앙은행 문제로 늘 골치를 앓았다. 미국 화폐를 최초로 만든 벤저민 프랭클린, 제3대 토머스 제퍼슨, 제4대 제임스 매디슨, 제7대 앤드루 잭슨, 제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등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집요하게 미국 금융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로스차일드 중심의 거대 유럽 국제금융세력과 싸웠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은 1791년과 1816년 등 두 차례에 걸쳐 합중국은행(Bank of United States)을 설립했다. 이 중앙은행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강력한 중앙은행의 필요성은 계속 제기됐다. 그 후 한동안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다. 1863년에 가서야 재무부 산하에 금융감독청(OCC)이 만들어져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후 19세기 말엽 공황의 기미가 보이자 1907년 이르러 국가금융위원회가 설립됐다. 이 위원회가 후일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 발전하게 됐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인 1913년 12월 미국의회는 ‘연방준비법’을 통과시켰다. 이법에 의거해서 FRB가 창설되었다. 초대 FRB 이사회 의장은 찰스 햄린이었지만, FRB 태동 時(시)부터 幕後(막후)의 實權(실권)은 이사인 폴 바르부르그라는 유대인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발족 이래 現(현) 벤 버냉키 의장까지 모두 14명의 FRB 의장 중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역대 이사진에도 유대인이 다수 포함됐다.
FRB에 참가하는 민간은행의 리스트는 비공개다. 시티뱅크, 체이스맨해튼은행, 모건 트러스트, 뉴욕 골드만삭스 은행, 뉴욕 쿤 뢰브 은행 등 미국의 대형 은행 외에 베를린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 런던은행 등 유럽 유수의 은행들이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FRB가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처럼 주권국 정부에 속한 公(공)기관 성격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유럽권 은행도 참여하는 민간은행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FRB는 항상 ‘유대인 음모론’의 핵심에 서곤 한다.
FRB 개혁하려 했던 존 F 케네디는 암살 당했다.
FRB 의장이나 이사(14년 임기, 7명)는 형식적으로 상원의 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를 거치지만, 인사문제와 정책 모두 행정부의 지도를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기구다. 정부기관이나 의회로부터 감사를 받지도 않는다. FRB는 미국의 입법·행정·사법부 다음 가는 ‘제4府(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부로부터 완전 독립되어 전 세계 금융과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흔히 FRB가 갖고 있는 독립성과 권한은 민간경제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극도로 자제하는 미국의 오랜 전통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FRB의 막강한 3대 기본권한(통화정책 결정 및 집행, 금융기관의 건전성 확보를 위한 금융기관의 감독, 화폐발행과 정부 여신 등)에다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통한 이자율과 통화량 조정, 지급준비율과 재할인율 결정이라는 수단까지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기구가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1933년 이후에는 FRB의 독립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당시까지 당연직으로 이사를 맡고 있던 재무부장관마저 이사진에서 제외시켜 FRB에 대한 형식적인 정부 참여마저 차단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처럼 고도의 독립성을 보장 받는 FRB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특히 FRB가 정부의 채권을 담보로 달러를 정부에 공급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케네디는 ‘發券(발권)주권’을 FRB로부터 찾아오기 위해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FRB를 폐지하고 재무부 산하에 중앙은행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암살당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는 秘話(비화)가 전해진다.
/박재선 홍익대 초빙교수·前 駐모로코 대사
출처 : 월간조선 2008년 12월호
첫댓글 오늘 날 이스라엘의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인종적으로 셈족 계열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 아니라 야벳의 후손 고멜과 아스그나스(영어 성경; 아슈케나지(Ashkenaz))와 도갈마의 후손(창10:3) 일 가능성이 거의 100%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약을 주셨던 이스라엘은 셈족의 아르박삿 가문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야벳족의 아스그나스(아슈케나지)와 도갈마 가문이어야 할까요?
역사와 말씀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상속받은 자들은 반드시 아브라함의 자손만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할 때, 따라나온 중다한 잡족들(출12:38)까지도 그 땅을 상속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혈통은 다르지만 함께 출애굽함으로 신정국가의 국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윗글에서도 언급했듯히 유대인이 되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즉, 누구든지 할례받고 유대교인이 되면 유대인,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굳이 나누어서 진짜니 가짜니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일본의 宇野正美 씨는 두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것을 전망은 했습니다만...저는 그렇게 보고 싶진 않습니다.
한국인이 유대교를 믿는다고 팔레스타인 땅을 내 땅이라고 우길 수는 없죠! 카자르 후예 아슈케나지가 유대교를 믿는다고 하여 가나안 땅을 자기네 고토라고 우길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시온의정서에 의해 세계정복을 꿈꾸고 세계정부를 만들어, 악마를 숭배하도록 이끄는 현시대의 엘리트는 거의 대부분 아슈케나지 유대인입니다. 아슈케나지의 고토는 가나안(팔레스타인)이 아니라 8C 흑해 연안의 카자르라는 나라의 땅입니다. 프리메이슨을 욕하고 베리칩을 경계하면서 그 일을 주체적으로 추진하는 아슈케나지를 하나님의 사람들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이율배반적이죠! 진짜와 가짜의 분별은 쉽지 않겠지만 꼭 필요한 일이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현대 유대인을 말할 때 그 구별 기준이 말씀에 부합한 것이냐 아니면 사람이 인위적으로 정한 것이냐 하는 것이죠! 말씀에서 말하는 유대인은 남이스라엘의 유다족속을 말한 반면 현시대의 유대인은 아슈케나지가 정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죠! 그것도 8C 후반 정치적 이유로 갑자기 등장한 유대인들이 정한 기준이 현시대 유대인의 기준입니다. 지금도 참 유대인들은 아슈케나지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Go home! Go to Kazar!" 나는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르기 보다는 성경말씀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