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버찌와 자화상
황정숙
패널에 유채로 그려진 버찌가 붉다. 쉽게 속내를 고백하지 말 것, 꿈틀거리는 드로잉의 힘을 눈으로만 만져볼 것, 잠시라도 네 안에 있던 나와 완전하게 이별하고 싶다면 단정했던 머리를 손가락으로 부풀려 펑크족 스타일로 에곤 실레의 거울 속으로 들어갈 것, 거울 앞에서 그동안 껴입었던 헐렁하고 조이는 옷들을 벗고 고양이 소리로 울어댈 것, 때로는 오만하고 어쩌면 나르시스적인 그의 눈빛으로 마음 속 사진기를 연속 눌러댈 것, 무료하면 눈을 지그시 감고 과거 여행을 나온 빨강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현실을 찾아 머뭇거리다가, 그의 작업실 쇠창살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와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들 사이로 걸어갈 것, 보헤미안 숲을 흔드는 검은 물줄기와 바람소리가 불러온 문장. 어린 자작나무, 물고기처럼 반짝이던 잎사귀들은 찰랑거리며 행과 행을 나누고 불립문자로 나열된 네 이미지는 무의미 속으로 떨어지고. 그래도 생각나면 곁에 없는 당신을 그림 속에 쳐 넣고 에곤 실레처럼 겨울버찌를 그려 넣을 것, 버찌를 삼킨 벽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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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숙 / 1962년 경기도 강화 출생. 2008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